開泰 원년(A.D.1012; 高麗 顯宗 3)에 詢이
開泰 원년(A.D.1012; 高麗 顯宗 3)에 詢이 蔡忠順을 보내와 옛날처럼 稱臣하겠다고 청하므로 詢에게 詔書를 내려 親朝하도록 하였다.註 048
8월에 田拱之를 보내와 表를 올리고 병을 칭하여 朝會하지 못하겠다고 하니,註 049 詔勅을 내려 다시 [高麗의] 6州를 빼앗도록 하였다.
『遼史』 「聖宗紀」開泰 元年條에 ‘高麗王詢遣田拱之奉表稱病不能朝 詔復取六州地’라 하였다. 또『高麗史』顯宗 3年條에
遣刑部侍郞田拱之如契丹 夏季問候 且告王病不能親朝 丹主怒 詔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等六城
이라 하였다.
이 高麗傳의 8月은 「聖宗紀」에도 8月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高麗史』에는 6月이다. 田拱之의 派遣은 6月이고, 契丹에 가서 詔文을 받아온 것은 8月이어야 한다. 이 記事들은 분리해서 보아야 할 것으로『高麗史』의 잘못이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 「世家」4 顯宗 3年 6月 庚子條.
『遼史』卷15 「聖宗紀」6 開泰 元年 8月 己未條.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遣刑部侍郞田拱之如契丹 夏季問候 且告王病不能親朝 丹主怒 詔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等六城
이라 하였다.
이 高麗傳의 8月은 「聖宗紀」에도 8月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高麗史』에는 6月이다. 田拱之의 派遣은 6月이고, 契丹에 가서 詔文을 받아온 것은 8月이어야 한다. 이 記事들은 분리해서 보아야 할 것으로『高麗史』의 잘못이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 「世家」4 顯宗 3年 6月 庚子條.
『遼史』卷15 「聖宗紀」6 開泰 元年 8月 己未條.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開泰] 2년(A.D.1013; 高麗 顯宗 4)에 耶律資忠이 高麗에 사신으로 가 땅을 요구하다가 얼마 안되어 돌아왔다. [開泰] 3년(A.D.1014; 高麗 顯宗 5)에 資忠이 다시 사신으로 가 전처럼 땅을 요구하였다.註 050
『遼史』 「聖宗紀」開泰 2年條에 ‘遣中丞耶律資忠使高麗 取六州舊地’라고 되어 있고, 同年 8月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얼마 안되어라는 期間은 約 二個月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高麗史』의 記錄은 상당히 다르다. 즉, 『高麗史』顯宗 4年條에 ‘契丹使左監門衛大將軍耶律行平來 責取興化等六城’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에 세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契丹使臣의 이름 문제이다. 같은 해의 記錄에『遼史』에서는 ‘耶律資忠’이라 하였고, 『高麗史』에서는 ‘耶律行平’이라 하였다. 그러나『遼史』列傳에는 耶律資忠만이 立傳되어 있고 耶律行平이라고는 없다. 또『遼史』 「耶律資忠列傳」에는
耶律資忠 字沃衍 小字札剌 系出仲父房 …… 資忠博學 工辭章 年四十未仕 聖宗知其賢 召補宿衛 數問以古今治亂 資忠對無隱 開泰中 授中丞 眷遇日隆 初 高麗內屬 取女直六部地以賜 至是 貢獻不時至 詔資忠往問故 高麗無歸地意 由是權貴數短於上 出爲上京副留守 三年 再使高麗 留弗遣 資忠每懷君親 輒有著述 號西亭集 帝與羣臣宴 時一記憶曰 資忠亦有此樂乎 九年 高麗上表謝罪 始送資忠還 帝郊迎 同載以歸 命大臣宴勞 留禁中數日
이라 하여 資忠의 前後의 사실들 즉, 高麗에 使臣으로 오고, 또 돌아가지 못하고, 高麗에 抑留되었던 事實들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高麗史』의 記錄에는 모두 耶律行平이다. 그렇다면『遼史』의 耶律資忠을 取함이 옳을 것이다.
두 번째는 耶律資忠이 江東六州 問題로 高麗에 使臣으로 온 回數問題이다.『遼史』에 의하면 開泰 2年(1013) 6月 辛酉條에 ‘遣中丞耶律資忠使高麗 取六州舊地’라 하여 처음 高麗에 派遣된 것이 나오고, 그해(1013) 8月 己丑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이라 하여 일단 歸國하였다가 그 다음해인 開泰 3年(1014) 2月 甲子條에 ‘遣上京副留守耶律資忠復使高麗取六州舊地’라 하여 다시 高麗에 派遣된다. 그리고 中間 事情은 記錄에 없고, 다만 開泰 9年(1020) 5月 庚午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 王詢表請稱藩納貢 歸所留王人只剌里 只剌里在高麗六年 忠節不屈 以爲林牙’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資忠이라고 하였다가 또 只剌里라 하였다. 여기에 관해서는『遼史紀事本未』에는
畢沅續通鑑元 據聖宗紀只剌里與資忠分爲二人 接當時自資忠外不聞被留者 資忠小字札剌卽只里 使高麗被留元年歸爲林牙者是也 史或書名 或書字 遂若兩人矣
이라 하였다.『遼史』 「耶律資忠列傳」에는 資忠의 小字가 札剌인데, 只剌里는 곧 札剌의 異譯이라 하였다.
그러나『高麗史』의 顯宗 4年(1013) 3月 戊申條에는 ‘契丹使左監門衛大將軍耶律行平來 責取興化等六城’이라 하였고, 또 同年 7月 戊申條에 ‘契丹使耶律行平復來索六城’이라 하였으며, 또 顯宗 6年(1015) 4月 庚申條에 ‘契丹使將軍耶律行平來又索六城 拘留不遣’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가 돌아간 일에 대하여서는 顯宗 11年(1020) 2月條에 ‘遣李作仁奉表如契丹 請稱藩納貢如故 且歸所拘人只剌里 被拘留凡六年’이라 하였고, 또 同年 3月 癸丑條에 ‘歸契丹使耶律行平’이라 하였다. 이렇게 되면 同一人이 耶律資忠·耶律行平·只剌里 세가지 이름으로 나와서 서로 엇갈리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年代도 맞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高麗史』에서 보이는 顯宗 4年 7月條의 ‘復來索六城’은 解釋할 수 없으며, 顯宗 11年(1020) 2月에는 只剌里가 돌아가고, 同年 3月에는 같은 사람인 耶律行平이 돌아갔다고 하는 것도 아마 3月條가 잘못 揷入된 것이 아닌가 한다.
셋째는 月이 맞지 않는다. 高麗에서 가거나 契丹에서 오는 시간이 대략 1個月差면 맞는 것이다. 그러나 開泰 2年(1013) 6月에 契丹에서 使臣을 보냈다는데 高麗에는 顯宗 4年(1013) 3月에 使臣이 到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약 3個月의 差異가 난다. 附言하면『遼史』에는 六州를 索取하러 온 使臣이 耶律資忠 밖에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高麗史』에서는 耶律行平과 李松茂가 있다. 耶律行平에 대하여는 前述하였거니와 李松茂에 대한『高麗史』의 記錄을 보면『高麗史』顯宗 5年 9月 丙申條에 ‘契丹遣將軍李松茂又索六城’이라 하였고, 『高麗史』顯宗 6年 9月 甲寅條에 ‘契丹使監門將軍李松茂來索六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遼史』에는 없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 「世家」4 顯宗 4年·5年·6年·11年條.
『遼史』卷15 「聖宗紀」6 開泰 2年·3年·9年條; 卷88 「耶律資忠列傳」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李有棠, 『遼史紀事本末』1983.
耶律資忠 字沃衍 小字札剌 系出仲父房 …… 資忠博學 工辭章 年四十未仕 聖宗知其賢 召補宿衛 數問以古今治亂 資忠對無隱 開泰中 授中丞 眷遇日隆 初 高麗內屬 取女直六部地以賜 至是 貢獻不時至 詔資忠往問故 高麗無歸地意 由是權貴數短於上 出爲上京副留守 三年 再使高麗 留弗遣 資忠每懷君親 輒有著述 號西亭集 帝與羣臣宴 時一記憶曰 資忠亦有此樂乎 九年 高麗上表謝罪 始送資忠還 帝郊迎 同載以歸 命大臣宴勞 留禁中數日
이라 하여 資忠의 前後의 사실들 즉, 高麗에 使臣으로 오고, 또 돌아가지 못하고, 高麗에 抑留되었던 事實들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高麗史』의 記錄에는 모두 耶律行平이다. 그렇다면『遼史』의 耶律資忠을 取함이 옳을 것이다.
두 번째는 耶律資忠이 江東六州 問題로 高麗에 使臣으로 온 回數問題이다.『遼史』에 의하면 開泰 2年(1013) 6月 辛酉條에 ‘遣中丞耶律資忠使高麗 取六州舊地’라 하여 처음 高麗에 派遣된 것이 나오고, 그해(1013) 8月 己丑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이라 하여 일단 歸國하였다가 그 다음해인 開泰 3年(1014) 2月 甲子條에 ‘遣上京副留守耶律資忠復使高麗取六州舊地’라 하여 다시 高麗에 派遣된다. 그리고 中間 事情은 記錄에 없고, 다만 開泰 9年(1020) 5月 庚午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 王詢表請稱藩納貢 歸所留王人只剌里 只剌里在高麗六年 忠節不屈 以爲林牙’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資忠이라고 하였다가 또 只剌里라 하였다. 여기에 관해서는『遼史紀事本未』에는
畢沅續通鑑元 據聖宗紀只剌里與資忠分爲二人 接當時自資忠外不聞被留者 資忠小字札剌卽只里 使高麗被留元年歸爲林牙者是也 史或書名 或書字 遂若兩人矣
이라 하였다.『遼史』 「耶律資忠列傳」에는 資忠의 小字가 札剌인데, 只剌里는 곧 札剌의 異譯이라 하였다.
그러나『高麗史』의 顯宗 4年(1013) 3月 戊申條에는 ‘契丹使左監門衛大將軍耶律行平來 責取興化等六城’이라 하였고, 또 同年 7月 戊申條에 ‘契丹使耶律行平復來索六城’이라 하였으며, 또 顯宗 6年(1015) 4月 庚申條에 ‘契丹使將軍耶律行平來又索六城 拘留不遣’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가 돌아간 일에 대하여서는 顯宗 11年(1020) 2月條에 ‘遣李作仁奉表如契丹 請稱藩納貢如故 且歸所拘人只剌里 被拘留凡六年’이라 하였고, 또 同年 3月 癸丑條에 ‘歸契丹使耶律行平’이라 하였다. 이렇게 되면 同一人이 耶律資忠·耶律行平·只剌里 세가지 이름으로 나와서 서로 엇갈리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年代도 맞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高麗史』에서 보이는 顯宗 4年 7月條의 ‘復來索六城’은 解釋할 수 없으며, 顯宗 11年(1020) 2月에는 只剌里가 돌아가고, 同年 3月에는 같은 사람인 耶律行平이 돌아갔다고 하는 것도 아마 3月條가 잘못 揷入된 것이 아닌가 한다.
셋째는 月이 맞지 않는다. 高麗에서 가거나 契丹에서 오는 시간이 대략 1個月差면 맞는 것이다. 그러나 開泰 2年(1013) 6月에 契丹에서 使臣을 보냈다는데 高麗에는 顯宗 4年(1013) 3月에 使臣이 到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약 3個月의 差異가 난다. 附言하면『遼史』에는 六州를 索取하러 온 使臣이 耶律資忠 밖에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高麗史』에서는 耶律行平과 李松茂가 있다. 耶律行平에 대하여는 前述하였거니와 李松茂에 대한『高麗史』의 記錄을 보면『高麗史』顯宗 5年 9月 丙申條에 ‘契丹遣將軍李松茂又索六城’이라 하였고, 『高麗史』顯宗 6年 9月 甲寅條에 ‘契丹使監門將軍李松茂來索六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遼史』에는 없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 「世家」4 顯宗 4年·5年·6年·11年條.
『遼史』卷15 「聖宗紀」6 開泰 2年·3年·9年條; 卷88 「耶律資忠列傳」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李有棠, 『遼史紀事本末』1983.
5월에 國舅인 詳穩 蕭敵烈과 東京留守 耶律團石 등에게 詔勅을 내려 鴨淥江에다 浮橋를 설치하고 保州ㆍ宣義州ㆍ定遠州 등지에다 城을 쌓도록 하였다.註 051
馮家昇은『遼史初校』에서 宣義는 保州의 軍名이라 하였고, 이를 뒷받침해 주는『遼史』 「地理志」에는
保州 宣義軍 節度 高麗置州 故縣一 曰來遠 聖宗以高麗王詢擅立 問罪不服 統和末 高麗降 開泰三年取其保·定二州 於此置搉場
이라 하였다. 그러면 保·宣義·定州는 마땅히 保州·定州라야 할 것이다. 保州는 지금의 義州라는『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지금의 安州郡이라는『讀史方輿紀要』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義州가 되어야지 安州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讀史方輿紀要』의 定州城條에
定州城 在平壤西北三百餘里 高麗治定東縣 契丹取之 仍曰定州 亦曰保寧軍 後入於高麗 今仍爲定州 西南與義州接界 義州城在平壤西北四百二十里 志云西南爲龍川郡 皆濱鴨淥江
이라 하였다. 같이 契丹의 수중으로 들어간 保·定州가 만약 定州와 安州라 가정할 때 安州는 平壤서 100餘里, 定州는 300餘里, 義州는 420里로 기록하고, 西南으로 義州와 接界한다고 하고, 또 鴨綠江濱에 있다고 하니 모순되는 일이다. 定州에 대해서는 可考키 어려우나 역시 鴨綠江 東岸地域일 것이다. 鴨綠江도 高麗領에 연한 지역이니 매우 막연한 推定이긴 하지만 平壤에서 鴨綠江까지 가는 길이 막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定州·安州가 되어서는 안된다.
‘開泰六年 蕭合卓軍攻興化鎭不克 師置’, ‘開泰七年 蕭排押與戰于茶 陀二河之間 我軍不利’, ‘開泰三年 資忠復使 如前索地’ 등 매우 많은 問題와 作戰이 江東六州에서 일어났거나 이 땅 때문에 생겨났다. 이런 것으로 보아도 定州 ·安州일 수는 없다. 또 鴨綠江도『高麗史』및『高麗史節要』에는 모두 ‘綠’字이고, 『遼史』에는 어떤 때에는 ‘綠’, 어떤 때에는 ‘淥’字를 썼다. 그러나 中國史料에는 ‘淥’字로 쓴 책이 많은 편이다.
≪參考文獻≫
『新增東國輿地勝覽』卷53 義州牧條.
『遼史』卷38 「地理志」2 東京道 保州 宣義軍條.
顧祖禹, 『讀史方輿紀要』卷38 「山東」9 附考外國 保州條.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馮家昇, 『遼史初校』1977.
保州 宣義軍 節度 高麗置州 故縣一 曰來遠 聖宗以高麗王詢擅立 問罪不服 統和末 高麗降 開泰三年取其保·定二州 於此置搉場
이라 하였다. 그러면 保·宣義·定州는 마땅히 保州·定州라야 할 것이다. 保州는 지금의 義州라는『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지금의 安州郡이라는『讀史方輿紀要』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義州가 되어야지 安州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讀史方輿紀要』의 定州城條에
定州城 在平壤西北三百餘里 高麗治定東縣 契丹取之 仍曰定州 亦曰保寧軍 後入於高麗 今仍爲定州 西南與義州接界 義州城在平壤西北四百二十里 志云西南爲龍川郡 皆濱鴨淥江
이라 하였다. 같이 契丹의 수중으로 들어간 保·定州가 만약 定州와 安州라 가정할 때 安州는 平壤서 100餘里, 定州는 300餘里, 義州는 420里로 기록하고, 西南으로 義州와 接界한다고 하고, 또 鴨綠江濱에 있다고 하니 모순되는 일이다. 定州에 대해서는 可考키 어려우나 역시 鴨綠江 東岸地域일 것이다. 鴨綠江도 高麗領에 연한 지역이니 매우 막연한 推定이긴 하지만 平壤에서 鴨綠江까지 가는 길이 막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定州·安州가 되어서는 안된다.
‘開泰六年 蕭合卓軍攻興化鎭不克 師置’, ‘開泰七年 蕭排押與戰于茶 陀二河之間 我軍不利’, ‘開泰三年 資忠復使 如前索地’ 등 매우 많은 問題와 作戰이 江東六州에서 일어났거나 이 땅 때문에 생겨났다. 이런 것으로 보아도 定州 ·安州일 수는 없다. 또 鴨綠江도『高麗史』및『高麗史節要』에는 모두 ‘綠’字이고, 『遼史』에는 어떤 때에는 ‘綠’, 어떤 때에는 ‘淥’字를 썼다. 그러나 中國史料에는 ‘淥’字로 쓴 책이 많은 편이다.
≪參考文獻≫
『新增東國輿地勝覽』卷53 義州牧條.
『遼史』卷38 「地理志」2 東京道 保州 宣義軍條.
顧祖禹, 『讀史方輿紀要』卷38 「山東」9 附考外國 保州條.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馮家昇, 『遼史初校』1977.
註) 048
註) 049
『遼史』 「聖宗紀」開泰 元年條에 ‘高麗王詢遣田拱之奉表稱病不能朝 詔復取六州地’라 하였다. 또『高麗史』顯宗 3年條에
遣刑部侍郞田拱之如契丹 夏季問候 且告王病不能親朝 丹主怒 詔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等六城
이라 하였다.
이 高麗傳의 8月은 「聖宗紀」에도 8月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高麗史』에는 6月이다. 田拱之의 派遣은 6月이고, 契丹에 가서 詔文을 받아온 것은 8月이어야 한다. 이 記事들은 분리해서 보아야 할 것으로『高麗史』의 잘못이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 「世家」4 顯宗 3年 6月 庚子條.
『遼史』卷15 「聖宗紀」6 開泰 元年 8月 己未條.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遣刑部侍郞田拱之如契丹 夏季問候 且告王病不能親朝 丹主怒 詔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等六城
이라 하였다.
이 高麗傳의 8月은 「聖宗紀」에도 8月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高麗史』에는 6月이다. 田拱之의 派遣은 6月이고, 契丹에 가서 詔文을 받아온 것은 8月이어야 한다. 이 記事들은 분리해서 보아야 할 것으로『高麗史』의 잘못이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 「世家」4 顯宗 3年 6月 庚子條.
『遼史』卷15 「聖宗紀」6 開泰 元年 8月 己未條.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註) 050
『遼史』 「聖宗紀」開泰 2年條에 ‘遣中丞耶律資忠使高麗 取六州舊地’라고 되어 있고, 同年 8月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얼마 안되어라는 期間은 約 二個月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高麗史』의 記錄은 상당히 다르다. 즉, 『高麗史』顯宗 4年條에 ‘契丹使左監門衛大將軍耶律行平來 責取興化等六城’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에 세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契丹使臣의 이름 문제이다. 같은 해의 記錄에『遼史』에서는 ‘耶律資忠’이라 하였고, 『高麗史』에서는 ‘耶律行平’이라 하였다. 그러나『遼史』列傳에는 耶律資忠만이 立傳되어 있고 耶律行平이라고는 없다. 또『遼史』 「耶律資忠列傳」에는
耶律資忠 字沃衍 小字札剌 系出仲父房 …… 資忠博學 工辭章 年四十未仕 聖宗知其賢 召補宿衛 數問以古今治亂 資忠對無隱 開泰中 授中丞 眷遇日隆 初 高麗內屬 取女直六部地以賜 至是 貢獻不時至 詔資忠往問故 高麗無歸地意 由是權貴數短於上 出爲上京副留守 三年 再使高麗 留弗遣 資忠每懷君親 輒有著述 號西亭集 帝與羣臣宴 時一記憶曰 資忠亦有此樂乎 九年 高麗上表謝罪 始送資忠還 帝郊迎 同載以歸 命大臣宴勞 留禁中數日
이라 하여 資忠의 前後의 사실들 즉, 高麗에 使臣으로 오고, 또 돌아가지 못하고, 高麗에 抑留되었던 事實들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高麗史』의 記錄에는 모두 耶律行平이다. 그렇다면『遼史』의 耶律資忠을 取함이 옳을 것이다.
두 번째는 耶律資忠이 江東六州 問題로 高麗에 使臣으로 온 回數問題이다.『遼史』에 의하면 開泰 2年(1013) 6月 辛酉條에 ‘遣中丞耶律資忠使高麗 取六州舊地’라 하여 처음 高麗에 派遣된 것이 나오고, 그해(1013) 8月 己丑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이라 하여 일단 歸國하였다가 그 다음해인 開泰 3年(1014) 2月 甲子條에 ‘遣上京副留守耶律資忠復使高麗取六州舊地’라 하여 다시 高麗에 派遣된다. 그리고 中間 事情은 記錄에 없고, 다만 開泰 9年(1020) 5月 庚午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 王詢表請稱藩納貢 歸所留王人只剌里 只剌里在高麗六年 忠節不屈 以爲林牙’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資忠이라고 하였다가 또 只剌里라 하였다. 여기에 관해서는『遼史紀事本未』에는
畢沅續通鑑元 據聖宗紀只剌里與資忠分爲二人 接當時自資忠外不聞被留者 資忠小字札剌卽只里 使高麗被留元年歸爲林牙者是也 史或書名 或書字 遂若兩人矣
이라 하였다.『遼史』 「耶律資忠列傳」에는 資忠의 小字가 札剌인데, 只剌里는 곧 札剌의 異譯이라 하였다.
그러나『高麗史』의 顯宗 4年(1013) 3月 戊申條에는 ‘契丹使左監門衛大將軍耶律行平來 責取興化等六城’이라 하였고, 또 同年 7月 戊申條에 ‘契丹使耶律行平復來索六城’이라 하였으며, 또 顯宗 6年(1015) 4月 庚申條에 ‘契丹使將軍耶律行平來又索六城 拘留不遣’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가 돌아간 일에 대하여서는 顯宗 11年(1020) 2月條에 ‘遣李作仁奉表如契丹 請稱藩納貢如故 且歸所拘人只剌里 被拘留凡六年’이라 하였고, 또 同年 3月 癸丑條에 ‘歸契丹使耶律行平’이라 하였다. 이렇게 되면 同一人이 耶律資忠·耶律行平·只剌里 세가지 이름으로 나와서 서로 엇갈리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年代도 맞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高麗史』에서 보이는 顯宗 4年 7月條의 ‘復來索六城’은 解釋할 수 없으며, 顯宗 11年(1020) 2月에는 只剌里가 돌아가고, 同年 3月에는 같은 사람인 耶律行平이 돌아갔다고 하는 것도 아마 3月條가 잘못 揷入된 것이 아닌가 한다.
셋째는 月이 맞지 않는다. 高麗에서 가거나 契丹에서 오는 시간이 대략 1個月差면 맞는 것이다. 그러나 開泰 2年(1013) 6月에 契丹에서 使臣을 보냈다는데 高麗에는 顯宗 4年(1013) 3月에 使臣이 到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약 3個月의 差異가 난다. 附言하면『遼史』에는 六州를 索取하러 온 使臣이 耶律資忠 밖에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高麗史』에서는 耶律行平과 李松茂가 있다. 耶律行平에 대하여는 前述하였거니와 李松茂에 대한『高麗史』의 記錄을 보면『高麗史』顯宗 5年 9月 丙申條에 ‘契丹遣將軍李松茂又索六城’이라 하였고, 『高麗史』顯宗 6年 9月 甲寅條에 ‘契丹使監門將軍李松茂來索六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遼史』에는 없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 「世家」4 顯宗 4年·5年·6年·11年條.
『遼史』卷15 「聖宗紀」6 開泰 2年·3年·9年條; 卷88 「耶律資忠列傳」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李有棠, 『遼史紀事本末』1983.

耶律資忠 字沃衍 小字札剌 系出仲父房 …… 資忠博學 工辭章 年四十未仕 聖宗知其賢 召補宿衛 數問以古今治亂 資忠對無隱 開泰中 授中丞 眷遇日隆 初 高麗內屬 取女直六部地以賜 至是 貢獻不時至 詔資忠往問故 高麗無歸地意 由是權貴數短於上 出爲上京副留守 三年 再使高麗 留弗遣 資忠每懷君親 輒有著述 號西亭集 帝與羣臣宴 時一記憶曰 資忠亦有此樂乎 九年 高麗上表謝罪 始送資忠還 帝郊迎 同載以歸 命大臣宴勞 留禁中數日
이라 하여 資忠의 前後의 사실들 즉, 高麗에 使臣으로 오고, 또 돌아가지 못하고, 高麗에 抑留되었던 事實들이 나열되어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高麗史』의 記錄에는 모두 耶律行平이다. 그렇다면『遼史』의 耶律資忠을 取함이 옳을 것이다.
두 번째는 耶律資忠이 江東六州 問題로 高麗에 使臣으로 온 回數問題이다.『遼史』에 의하면 開泰 2年(1013) 6月 辛酉條에 ‘遣中丞耶律資忠使高麗 取六州舊地’라 하여 처음 高麗에 派遣된 것이 나오고, 그해(1013) 8月 己丑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이라 하여 일단 歸國하였다가 그 다음해인 開泰 3年(1014) 2月 甲子條에 ‘遣上京副留守耶律資忠復使高麗取六州舊地’라 하여 다시 高麗에 派遣된다. 그리고 中間 事情은 記錄에 없고, 다만 開泰 9年(1020) 5月 庚午條에 ‘耶律資忠使高麗還 王詢表請稱藩納貢 歸所留王人只剌里 只剌里在高麗六年 忠節不屈 以爲林牙’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資忠이라고 하였다가 또 只剌里라 하였다. 여기에 관해서는『遼史紀事本未』에는
畢沅續通鑑元 據聖宗紀只剌里與資忠分爲二人 接當時自資忠外不聞被留者 資忠小字札剌卽只里 使高麗被留元年歸爲林牙者是也 史或書名 或書字 遂若兩人矣
이라 하였다.『遼史』 「耶律資忠列傳」에는 資忠의 小字가 札剌인데, 只剌里는 곧 札剌의 異譯이라 하였다.
그러나『高麗史』의 顯宗 4年(1013) 3月 戊申條에는 ‘契丹使左監門衛大將軍耶律行平來 責取興化等六城’이라 하였고, 또 同年 7月 戊申條에 ‘契丹使耶律行平復來索六城’이라 하였으며, 또 顯宗 6年(1015) 4月 庚申條에 ‘契丹使將軍耶律行平來又索六城 拘留不遣’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가 돌아간 일에 대하여서는 顯宗 11年(1020) 2月條에 ‘遣李作仁奉表如契丹 請稱藩納貢如故 且歸所拘人只剌里 被拘留凡六年’이라 하였고, 또 同年 3月 癸丑條에 ‘歸契丹使耶律行平’이라 하였다. 이렇게 되면 同一人이 耶律資忠·耶律行平·只剌里 세가지 이름으로 나와서 서로 엇갈리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年代도 맞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高麗史』에서 보이는 顯宗 4年 7月條의 ‘復來索六城’은 解釋할 수 없으며, 顯宗 11年(1020) 2月에는 只剌里가 돌아가고, 同年 3月에는 같은 사람인 耶律行平이 돌아갔다고 하는 것도 아마 3月條가 잘못 揷入된 것이 아닌가 한다.
셋째는 月이 맞지 않는다. 高麗에서 가거나 契丹에서 오는 시간이 대략 1個月差면 맞는 것이다. 그러나 開泰 2年(1013) 6月에 契丹에서 使臣을 보냈다는데 高麗에는 顯宗 4年(1013) 3月에 使臣이 到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약 3個月의 差異가 난다. 附言하면『遼史』에는 六州를 索取하러 온 使臣이 耶律資忠 밖에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高麗史』에서는 耶律行平과 李松茂가 있다. 耶律行平에 대하여는 前述하였거니와 李松茂에 대한『高麗史』의 記錄을 보면『高麗史』顯宗 5年 9月 丙申條에 ‘契丹遣將軍李松茂又索六城’이라 하였고, 『高麗史』顯宗 6年 9月 甲寅條에 ‘契丹使監門將軍李松茂來索六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遼史』에는 없다.
≪參考文獻≫
『高麗史』卷4 「世家」4 顯宗 4年·5年·6年·11年條.
『遼史』卷15 「聖宗紀」6 開泰 2年·3年·9年條; 卷88 「耶律資忠列傳」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李有棠, 『遼史紀事本末』1983.
註) 051
馮家昇은『遼史初校』에서 宣義는 保州의 軍名이라 하였고, 이를 뒷받침해 주는『遼史』 「地理志」에는
保州 宣義軍 節度 高麗置州 故縣一 曰來遠 聖宗以高麗王詢擅立 問罪不服 統和末 高麗降 開泰三年取其保·定二州 於此置搉場
이라 하였다. 그러면 保·宣義·定州는 마땅히 保州·定州라야 할 것이다. 保州는 지금의 義州라는『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지금의 安州郡이라는『讀史方輿紀要』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義州가 되어야지 安州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讀史方輿紀要』의 定州城條에
定州城 在平壤西北三百餘里 高麗治定東縣 契丹取之 仍曰定州 亦曰保寧軍 後入於高麗 今仍爲定州 西南與義州接界 義州城在平壤西北四百二十里 志云西南爲龍川郡 皆濱鴨淥江
이라 하였다. 같이 契丹의 수중으로 들어간 保·定州가 만약 定州와 安州라 가정할 때 安州는 平壤서 100餘里, 定州는 300餘里, 義州는 420里로 기록하고, 西南으로 義州와 接界한다고 하고, 또 鴨綠江濱에 있다고 하니 모순되는 일이다. 定州에 대해서는 可考키 어려우나 역시 鴨綠江 東岸地域일 것이다. 鴨綠江도 高麗領에 연한 지역이니 매우 막연한 推定이긴 하지만 平壤에서 鴨綠江까지 가는 길이 막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定州·安州가 되어서는 안된다.
‘開泰六年 蕭合卓軍攻興化鎭不克 師置’, ‘開泰七年 蕭排押與戰于茶 陀二河之間 我軍不利’, ‘開泰三年 資忠復使 如前索地’ 등 매우 많은 問題와 作戰이 江東六州에서 일어났거나 이 땅 때문에 생겨났다. 이런 것으로 보아도 定州 ·安州일 수는 없다. 또 鴨綠江도『高麗史』및『高麗史節要』에는 모두 ‘綠’字이고, 『遼史』에는 어떤 때에는 ‘綠’, 어떤 때에는 ‘淥’字를 썼다. 그러나 中國史料에는 ‘淥’字로 쓴 책이 많은 편이다.
≪參考文獻≫
『新增東國輿地勝覽』卷53 義州牧條.
『遼史』卷38 「地理志」2 東京道 保州 宣義軍條.
顧祖禹, 『讀史方輿紀要』卷38 「山東」9 附考外國 保州條.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馮家昇, 『遼史初校』1977.

保州 宣義軍 節度 高麗置州 故縣一 曰來遠 聖宗以高麗王詢擅立 問罪不服 統和末 高麗降 開泰三年取其保·定二州 於此置搉場
이라 하였다. 그러면 保·宣義·定州는 마땅히 保州·定州라야 할 것이다. 保州는 지금의 義州라는『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지금의 安州郡이라는『讀史方輿紀要』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義州가 되어야지 安州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讀史方輿紀要』의 定州城條에
定州城 在平壤西北三百餘里 高麗治定東縣 契丹取之 仍曰定州 亦曰保寧軍 後入於高麗 今仍爲定州 西南與義州接界 義州城在平壤西北四百二十里 志云西南爲龍川郡 皆濱鴨淥江
이라 하였다. 같이 契丹의 수중으로 들어간 保·定州가 만약 定州와 安州라 가정할 때 安州는 平壤서 100餘里, 定州는 300餘里, 義州는 420里로 기록하고, 西南으로 義州와 接界한다고 하고, 또 鴨綠江濱에 있다고 하니 모순되는 일이다. 定州에 대해서는 可考키 어려우나 역시 鴨綠江 東岸地域일 것이다. 鴨綠江도 高麗領에 연한 지역이니 매우 막연한 推定이긴 하지만 平壤에서 鴨綠江까지 가는 길이 막혀 있지 않았기 때문에 定州·安州가 되어서는 안된다.
‘開泰六年 蕭合卓軍攻興化鎭不克 師置’, ‘開泰七年 蕭排押與戰于茶 陀二河之間 我軍不利’, ‘開泰三年 資忠復使 如前索地’ 등 매우 많은 問題와 作戰이 江東六州에서 일어났거나 이 땅 때문에 생겨났다. 이런 것으로 보아도 定州 ·安州일 수는 없다. 또 鴨綠江도『高麗史』및『高麗史節要』에는 모두 ‘綠’字이고, 『遼史』에는 어떤 때에는 ‘綠’, 어떤 때에는 ‘淥’字를 썼다. 그러나 中國史料에는 ‘淥’字로 쓴 책이 많은 편이다.
≪參考文獻≫
『新增東國輿地勝覽』卷53 義州牧條.
『遼史』卷38 「地理志」2 東京道 保州 宣義軍條.
顧祖禹, 『讀史方輿紀要』卷38 「山東」9 附考外國 保州條.
金渭顯, 『遼金史硏究』1985.
馮家昇, 『遼史初校』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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