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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 권제14
생여진의 아골타가 금을 건국하다
일자
1115년 01월 미상 (음)
이달에 생여진(生女眞)의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황제를 칭하면서 이름을 민(旻)이라 고치고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그 풍속은 흉노(匈奴)와 같아서, 모든 부락에는 성곽이 없고 산과 들에 흩어져 살았다. 문자가 없어서 말[言語]과 노끈으로 매듭을 지은 것[結繩]으로 약속을 하였다. 그 지역에는 돼지·양·소·말 등이 풍부하고 준마(駿馬)가 많은데, 그 중에는 하루에 1,000리를 달리는 말도 있었다. 사람들은 사납고 용맹하여 어려서는 활로 새나 쥐 등을 쏘아 잡다가 커서는 활시위를 당기고 말을 달리면서 싸움을 익혀 강한 병사가 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든 부락이 각자 우두머리라고 생각하는 탓에 〈부족의〉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지역은 서쪽으로는 거란(契丹)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우리 국경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겨 왔다. 내조(來朝)할 때마다 사금[麩金]·담비 가죽·좋은 말 등을 예물로 가져왔고, 우리 조정에서도 역시 은폐(銀幣)를 후하게 주었는데 해마다 항상 이렇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 우리 평주(平州)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女眞)으로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서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금의 선조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평주(平州)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서 여진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이름을 고을태사(古乙太師)라 하였다. 고을태사가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았고,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두었다. 장남이 핵리발(劾里鉢)이고 막내아들은 영가(盈歌)였는데, 영가가 지혜와 용맹이 가장 빼어나 민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남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였고, 오아속이 죽자 그 동생 아골타가 그 자리에 올랐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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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s://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s://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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