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성을 쌓다
(
552년
)
8년(552)에 장안성(長安城)註 001을 쌓았다
장안성(長安城) :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으로, 현재 북한 평양시를 둘러싸고 있는 평양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서에는 552년에 축조를 시작하여 586년에 천도가 이루어졌다고만 나온다. 그런데 ‘42년 만에 공사가 끝났다(“本城四十二年畢役”)’라는 명문 성돌이 출토됨에 따라 593년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평양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되어 있고 외성(外城)을 갖추고 있는 석축 성곽으로 총 둘레는 23km이다. 북쪽으로는 산을 끼고 있고, 동·서·남쪽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싸고 있다. 북성(北城),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성은 궁성이고, 중성에는 중앙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북성은 내성 방어 역할 혹은 별궁(別宮)·이궁(離宮)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성은 주민 거주지역으로, 격자형 도로망에 의한 가로구획, 즉 리방(里防)이 갖추어져 있다. 장안성의 축조와 천도 배경에 대해서 양원왕의 개인적 분위기 쇄신(기경량, 248-249쪽), 양원왕 즉위에 기여했던 추군(麤群)계를 중심으로 한 중앙귀족 재편(김희선, 65-69쪽), 민의 노동력 동원과 귀족·관료 택지 지급을 통한 국왕 지위 확인 및 국정 운영 쇄신(김창석, 180-181쪽), 귀족들의 거주 제한을 통한 왕권의 통제력 강화(이도학, 26-27쪽) 등 대내적인 요인을 제시하기도 하나, 대체로는 북주·돌궐·수 등 서북방이나 백제·신라 등 남방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비(李成市, 292-293쪽; 閔德植, 1992, 34-36쪽; 閔喆熙, 73쪽; 김창석, 182-183쪽; 김희선, 72-81쪽; 장창은, 416쪽; 최일례, 14-15쪽; 기경량, 249-251쪽) 그리고 이와 같은 군사적 위협 속에서 주민의 통제와 치안 확보를 통한 정치적·사회적 안정 추구(임기환, 137쪽) 등 대외적 요인에 더 주목하고 있다.
〈참고문헌〉
東潮·田中俊明, 박천수·이근우 역, 2008,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 동북아역사재단
김희선, 2010, 『동아시아 도성제와 고구려 장안성』, 지식산업사
최희림, 1978, 『고구려 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3, 『조선유적유물도감』 3(고구려편 1), 민족문화
閔德植, 1989, 「高句麗의 後期都城」, 『한국사론』 19
閔德植, 1992, 「高句麗 平壤城의 築城過程에 관한 硏究」, 『國史館論叢』 39
李成市, 1998, 「高句麗と日隋外交」,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国家』, 岩波書店
閔喆熙, 2002, 「高句麗 陽原王·平原王代의 政局變化」, 『史學志』 35
김창석, 2006, 「長安城 축성의 배경과 공간 구성」, 『고고자료에서 찾은 고구려인의 삶과 문화』, 고구려연구재단
이도학, 2006, 「高句麗의 內紛과 內戰」, 『고구려발해연구』 24
임기환, 2007, 「고구려 평양 도성의 정치적 성격」, 『한국사연구』 137
장창은, 2013, 「6세기 후반~7세기 초반 高句麗의 南進과 對新羅 領域向方」, 『민족문화논총』 55
최일례, 2015, 「평원왕대 정국 운영의 특징과 그 함의」, 『高句麗渤海硏究』 53
기경량,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채희국, 1965, 「평양성(장안성)의 축성과정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5-3
정찬영, 1966, 「평양성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6-2
〈참고문헌〉
東潮·田中俊明, 박천수·이근우 역, 2008,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 동북아역사재단
김희선, 2010, 『동아시아 도성제와 고구려 장안성』,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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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德植, 1989, 「高句麗의 後期都城」, 『한국사론』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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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석, 2006, 「長安城 축성의 배경과 공간 구성」, 『고고자료에서 찾은 고구려인의 삶과 문화』, 고구려연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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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량,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채희국, 1965, 「평양성(장안성)의 축성과정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5-3
정찬영, 1966, 「평양성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6-2
註) 001
장안성(長安城) :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으로, 현재 북한 평양시를 둘러싸고 있는 평양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서에는 552년에 축조를 시작하여 586년에 천도가 이루어졌다고만 나온다. 그런데 ‘42년 만에 공사가 끝났다(“本城四十二年畢役”)’라는 명문 성돌이 출토됨에 따라 593년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평양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되어 있고 외성(外城)을 갖추고 있는 석축 성곽으로 총 둘레는 23km이다. 북쪽으로는 산을 끼고 있고, 동·서·남쪽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싸고 있다. 북성(北城),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성은 궁성이고, 중성에는 중앙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북성은 내성 방어 역할 혹은 별궁(別宮)·이궁(離宮)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성은 주민 거주지역으로, 격자형 도로망에 의한 가로구획, 즉 리방(里防)이 갖추어져 있다. 장안성의 축조와 천도 배경에 대해서 양원왕의 개인적 분위기 쇄신(기경량, 248-249쪽), 양원왕 즉위에 기여했던 추군(麤群)계를 중심으로 한 중앙귀족 재편(김희선, 65-69쪽), 민의 노동력 동원과 귀족·관료 택지 지급을 통한 국왕 지위 확인 및 국정 운영 쇄신(김창석, 180-181쪽), 귀족들의 거주 제한을 통한 왕권의 통제력 강화(이도학, 26-27쪽) 등 대내적인 요인을 제시하기도 하나, 대체로는 북주·돌궐·수 등 서북방이나 백제·신라 등 남방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비(李成市, 292-293쪽; 閔德植, 1992, 34-36쪽; 閔喆熙, 73쪽; 김창석, 182-183쪽; 김희선, 72-81쪽; 장창은, 416쪽; 최일례, 14-15쪽; 기경량, 249-251쪽) 그리고 이와 같은 군사적 위협 속에서 주민의 통제와 치안 확보를 통한 정치적·사회적 안정 추구(임기환, 137쪽) 등 대외적 요인에 더 주목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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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영, 1966, 「평양성에 대하여」, 『고고민속』 19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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