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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가 문자명왕을 책봉하다 ( 492년 03월 )
원년(492) 봄 3월에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벼슬을 주어 사지절(使持節)註 001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郎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髙句麗王)註 002으로 삼고, 의관(衣冠)·복물(服物)·수레 깃발의 장식註 003 등을 주었다. 또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세자를 보내 입조하게 하라.”라고 하였으나, 왕은 〔세자가〕 병이 있다고 하여 사절하고,註 004 종숙(從叔, 堂叔)인 승천(升千)註 005을 보내 사신을 따라 〔북위의〕 대궐에 나아가게 하였다.註 006
註) 001
사지절(使持節) : 사지절의 ‘절(節)’은 황제의 신표(信表)인 부절(符節)을 뜻한다. 지절호(持節號)는 황제로부터 부절을 받아 군사통수권을 위임 받았음을 나타내는 관호인데, 전한 시기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지절 제도를 처음 시행하였다. 조위시기에 도독제군사제(都督諸軍事制)의 시행과 더불어 지절호가 널리 수여되었고, 남북조시기에 들어와 지방장관에게 많이 수여되었다. 사지절, 지절(持節), 가절(假節) 등 3등급으로 나뉘는데, 사지절은 중급(2천석) 이하 관리에 대한 주살권(誅殺權)을 부여받았다. 지절은 관위가 없는 사람에 대한 주살권을 부여받았는데, 전쟁 시에는 사지절과 같은 권한을 행사하였다. 가절은 오직 전쟁 시에 군령을 어긴 자를 주살할 수 있었다(『진서(晉書)』 권24 지14 직관(職官)). 이처럼 남북조시기에 들어와 지방장관에게 지절호를 널리 부여한 것은 후한 말 이래 호족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지방장관의 자율성이 크게 신장되어 군사통수권까지 위임한 것과 연관되는데, 이를 확대하여 주변국 군왕을 책봉할 때도 지절호를 널리 수여하였다.(严耕望,, 87-136쪽; 小尾孟夫; 김종완, 158-162쪽; 김한규, 319-329쪽).
〈참고문헌〉
김종완, 1995, 『中國南北朝史硏究-朝貢·交聘關係를 중심으로』, 一潮閣
김한규, 1997, 『古代東亞細亞幕府體制硏究』, 一潮閣
严耕望, 1963, 『中国地方行政制度史』 上篇(3), 中央研究院 歷史語言研究所
小尾孟夫, 1978 「晉代における將軍號と都督」, 『東洋史硏究』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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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사지절(使持節)·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정동장군(征東將軍)·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郎將)·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고구려왕(髙句麗王) : 사지절(使持節) 이외에는 장수왕 23(435) 6월에 북위가 장수왕에게 수여하였던 책봉호와 동일하다.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장수왕 23년 6월조 참조바로가기
註) 003
의관·복물·수레 깃발의 장식 : 중원왕조가 주변국의 군왕을 책봉할 때 일반적으로 관모(冠帽)와 의복 등을 내려주었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기사이다. 한편 「충주고구려비」에는 고구려가 신라와 복속의례를 거행하며 고구려 대왕이 신라의 왕과 신료에게 의복을 하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고구려가 중국왕조와의 조공·책봉관계를 변용하여 주변국과 차등적 외교관계를 수립했음을 잘 보여준다(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15-121쪽).바로가기
註) 004
또 왕에게 …… 사절하고 : 이때 북위가 고구려에 파견한 사신은 원외상시(員外常侍) 방량(房亮)으로 추정되는데(김진한, 2020,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36-137쪽), 방량전에 따르면(『위서(魏書)』 권72 열전60 방량전) 고구려왕이 병을 핑계로 배례(拜禮)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바로가기
註) 005
승천(升千) : 문자명왕의 종속(從叔)이다. 문자명왕 원년(492)에 세자 대신 북위에 파견되었는데, 그 외의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 태화15년조『북사(北史)』 권94 열전82 사이 상 고구려 태화15년조에는 ‘승우(升于)’,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37 제기3 세조 영명10년(492) 3월조에는 ‘승간(升干)’으로 나온다. 『위서』와 『북사』 에 모두 ‘升于’라 한 것으로 보아, 본래 이름은 ‘승우’이고, 『삼국사기』나 『자치통감』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오기(誤記)가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바로가기
註) 006
〔북〕위의 효문제가 …… 대궐에 나아가게 하였다 : 같은 내용의 기사가 『위서(魏書)』 권7 고조기7 태화16년 3월조, 『위서』 권100 열전88 고구려 태화15년조,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37 제기3 세조 영명10년(492) 3월조에도 나온다. 서술 내용으로 보아 본서 찬자가 『위서』 고구려전을 참조하여 이 기사를 작성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고구려전에는 몇 월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로 보아 『위서』 고조기 등을 참조하여 ‘3월’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전덕재, 308-313쪽). 한편 문자명왕이 종숙을 북위에 보낸 이후에 북위 효문제(고조)가 고구려에 내린 조서(詔書)가 『문관사림(文館詞林』 권664에 수록되어 있는데(後魏孝文帝與高句麗王雲詔一首), 효문제가 문명태후 사망 이후 친정체제를 구축하며 대외강경책을 펴며 고구려를 압박하던 양상이 잘 나타나 있다(주보돈, 168쪽; 노태돈, 315쪽; 박승범, 73-103쪽; 김진한, 128-135쪽).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 사계절
전덕재, 2018, 『삼국사기 본기의 원전과 편찬』 , 주류성
김진한, 2020,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주보돈, 1992, 「『文館詞林』에 보이는 韓國古代史 관련 外交文書」, 『慶北史學』 15
박승범, 2017, 「‘後魏孝文帝與高句麗王雲詔’와 문자왕 즉위 초기 고구려 북위 관계」, 『한국사연구』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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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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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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