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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군
한양군(漢陽郡)註 120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북한산군(北漢山郡)註 121평양(平壤)註 122이라고도 한다.이었는데, 진흥왕(眞興王)註 123이 주로 삼고 군주를 두었다. 경덕왕(景德王)註 124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은 양주(楊州) 옛터註 125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황양현(荒壤縣)註 126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골의노현(骨衣奴縣)註 127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28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풍양현(豐註 129壤縣)註 130이다.
우왕현(遇王縣)註 131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개백현(皆伯縣)註 132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33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행주(幸州)註 134이다.
註) 120
한양군(漢陽郡):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소속의 군(郡)인데, 경덕왕 16년(757)에 종전의 고구려 북한산군(北漢山郡)을 한양군으로 고쳤다고 한다. 황양현(荒壤縣)과 금양현(今壤縣) 등 영현(領縣) 2개를 거느렸다. ‘한양(漢陽)’은 ‘북한산’과 같이 ‘한수(漢水)의 북쪽’이라는 뜻으로 치소가 한강 북쪽에 위치하였음을 시사한다. 종전에는 한양군의 치소(治所)를 지금의 서울 북한산성(창의문 밖 세검동 일대: 이병도, 1977: 2012, 585·608쪽) 또는 종로구 일대(정구복 외, 1997d, 246쪽) 등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듯이 한양군의 치소는 『삼국사기』가 편찬되던 고려 인종 당시 양주(楊州)의 옛터[舊墟]에 해당한다. 고려는 숙종 때에 지금의 서울 종로구 일대인 ‘목멱양(木覓壤)’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1104년에 광진구 일대에 있던 양주를 옮겼다(이기봉, 2011, 96~97쪽). 통일신라 시기 한양군의 치소는 고려 초에 양주가 있었던 광진구 일대로 한강 북쪽의 아차산성으로 비정된다. 실제 아차산성에서는 한양군의 이전 명칭인 ‘북한산군(北漢山郡)’과 관련한 ‘북한(北漢)’·‘한산(漢山)’ 등의 명문이 새겨진 통일신라 기와가 다량 출토되었다(윤성호, 2019). 본서 권32 제사지에는 통일신라 시기 소사(小祀)의 제장(祭場)으로 북한산주(北漢山州)의 부아악(負兒岳)이 나오는데, 북한산군 관내에 위치한 지금의 북한산으로 비정된다. 다만 신라가 처음부터 아차산에 군(郡) 단위 행정구역의 치소를 둔 것은 아니다. 신라는 553년 한강 유역을 장악한 다음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가 557년(진흥왕 18)에 신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신주의 치소를 북한산(北漢山) 곧 아차산 일대로 옮긴 것을 일컫는다. 568년(진흥왕 29)에 다시 신주의 치소를 남천(南川: 南買, 경기도 이천)으로 옮겼다가 604년에 북한산으로 옮겼다. 그 뒤 637년(선덕왕 6)에 신주를 한산주와 우수주로 분리하였는데, 이 무렵 한산주의 치소도 지금의 경기도 하남 이성산성으로 정해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따라 주의 치소가 있던 북한산(北漢山)은 군의 치소로 바뀌고,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편성되었다(강봉룡, 1994; 주본돈, 1998; 전덕재, 2009; 박성현, 2021). 이로 보아 북한산군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가 설치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전덕재, 2009, 107~116쪽; 윤성호, 2019, 306~309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이름을 ‘양주(楊州)’로 고쳤고, 성종(成宗) 14년(995)에 10도(道)를 정하고 12주 절도사(節度使)를 두면서 양주를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부르고 이보(二輔)의 하나로 삼아 관내도(關內道)에 소속시켰고, 현종(顯宗) 3년(1012)에 안무사(安撫使)로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하였고, 문종(文宗) 21년(1067)에 남경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하였고, 숙종(肅宗) 9년(1104)에 목멱양(木覓壤)에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충렬왕(忠烈王) 34년(1308)에 한양부(漢陽府)로 고쳤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 한성부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太祖) 3년(1394)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라 고쳤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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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룡, 1994, 『신라 지방통치체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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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돈, 1998, 『新羅 地方統治體制의 整備過程과 村落』, 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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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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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이기봉, 2011, 「고려시대 양주의 읍치 이동에 관한 연구」, 『문화역사지리』 23-3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윤성호, 2019, 「아차산성 출토 명문기와를 통해 본 신라 하대의 북한산성」, 『한국사학보』 74
박성현, 2021, 「신라의 ‘남·북 한산성’ 축조와 경영」, 『역사문화연구』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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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1
북한산군(北漢山郡):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군명(郡名)이라고 한다. 평양(平壤)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한강 북쪽의 아차산 일대로 비정된다. 다만 ‘북한산군’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가 설치한 것으로 파악된다(전덕재, 2009, 107~116쪽; 윤성호, 2019, 306~309쪽). 고구려는 475~551년에 중랑천-아차산 일대에 ‘남평양’을 건설해 한강 유역을 경영하는 거점으로 삼았는데, 신라가 553년에 한강유역을 차지한 다음, 고구려의 남평양이 설치되었던 한강 북쪽의 아차산 일대를 신주(新州)의 치소로 삼았다. 그 뒤 신라는 637년(선덕왕 6)에 신주를 한산주와 우수주로 분리하면서 한산주의 치소를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 일대로 옮기고, 아차산에는 북한산군의 치소를 둔 것으로 파악된다. 위의 ‘한양군’과 아래의 ‘평양’ 항목 참조.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윤성호, 2019, 「아차산성 출토 명문기와를 통해 본 신라 하대의 북한산성」, 『한국사학보』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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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2
평양(平壤): 통일신라 한주 소속 한양군(漢陽郡)의 고구려 시기 명칭이라는 북한산군(北漢山郡)의 다른 이름이다.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조『세종실록』 권148 지리지 경도 한성부에는 ‘남평양성(南平壤城)’으로 나온다. 다만 ‘평양’의 본명이라는 북한산군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가 설치한 군으로 파악된다(전덕재, 2009, 107~116쪽; 윤성호, 2019, 306~309쪽). 이에 이 기사는 백제의 한성 도성을 ‘고구려의 남평양’으로 비정한 본서 권37 지리4의 백제조를 잘못 인용하였다고 보거나(임기환, 2002, 19~20쪽), 고려 건국 초에 한강 이북을 고구려 땅이라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한강유역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설정하는 역사인식이 형성되었다고 이해하는(윤경진, 2017) 등 사실성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본서 권44 거칠부(居柒夫)전에는 551년에 백제는 고구려의 ‘평양(平壤)’, 신라는 ‘죽령(竹嶺)~고현(高峴)’ 일대의 10군(郡)을 각각 분할 점령하였다고 나온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13년조에도 백제가 종전의 도성이 있던 ‘한성의 땅(漢城之地)’과 ‘평양(平壤)’ 등 6군을 공취하였다고 나오는데(노태돈, 2005, 184~185쪽), 이 기사는 660년대에는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여호규, 2021, 35~42쪽). 이 기사의 사실성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최근 고고조사 현황을 종합하면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 도성을 점령한 다음, 구릉성으로 군사적 활용도가 높은 몽촌토성만 재활용하고 평지성인 풍납토성을 폐기하였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풍납토성에 상응하는 평지 거점을 한강 북안에 구축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기사의 ‘평양’은 이를 지칭한다고 추정된다. 이에 아차산 일대에 밀집 분포하는 고구려 보루성을 남평양의 외곽 방어시설로 파악하거나(최장열, 2002, 34~50쪽) 아차산4보루 출토 토기명문의 ‘후부도□형(後阝都□兄)’의 ‘후부’를 한강유역에 설치한 남평양(漢城 別都)의 행정구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최종택, 2008, 154쪽). 최근에는 동대문구 장안동 일대가 본래 중랑천의 하중도(河中島)였다는 사실에 주목해 고구려가 이곳에 남평양을 건설하여 한강유역 경영의 핵심 거점으로 삼았다고 보기도 한다(여호규, 2021, 48~65쪽).
〈참고문헌〉
임기환, 2002, 「고구려·신라의 한강유역 경영과 서울」, 『서울학연구』 18
최장열, 2002, 「한강 북안 고구려보루의 축조시기와 그 성격」, 『한국사론』(서울대 국사학과) 47
노태돈, 2005, 「고구려의 한성 지역 병탄과 그 지배 양태」, 『향토서울』 66
최종택, 2008, 「고고자료를 통해 본 백제 웅진도읍기 한강유역 영유설 재고」, 『백제연구』 47
전덕재, 2009,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향토서울』 73
윤경진, 2017, 「고구려 ‘南平壤’의 실체와 출현 배경」, 『서울과역사』 95
윤성호, 2019, 「아차산성 출토 명문기와를 통해 본 신라 하대의 북한산성」, 『한국사학보』 74
여호규, 2021,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건설과 운영」, 『역사문화연구』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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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3
진흥왕(眞興王): 신라 2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40~576년이다. 본서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즉위년조 참조.바로가기
註) 124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바로가기
註) 125
양주(楊州) 옛터(舊墟): 통일신라 한양군의 치소는 지금의 서울시 광진구 일대로 비정되는데, 『삼국사기』가 편찬되던 고려 인종 당시에는 양주(楊州)의 옛터[舊墟]에 해당한다. 양주의 치소가 고려 초에는 광진구 일대에 있었지만, 1104년(숙종 9)에 ‘목멱양(木覓壤: 종로구 일대)’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이기봉, 2011, 「고려시대 양주의 읍치 이동에 관한 연구」, 『문화역사지리』 23-3). 이에 본서 찬자가 신라 한양군의 치소가 ‘양주 옛터’에 있다고 기술한 것이다. 위의 ‘한양군’ 항목 참조.바로가기
註) 126
황양현(荒壤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한양군(漢陽郡) 소속의 현(縣)으로 경기도(京畿道) 남양주시(南楊州市) 진접읍(榛接邑)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5쪽; 정구복 외, 1997d, 248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골의노현(骨衣奴縣)을 황양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본서에는 이 기사 외에는 ‘황양’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지만,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황양(荒壤)’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吉井秀夫, 2017, 1122쪽; 박성현, 2021, 38~40쪽). 황양현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남양주시 퇴뫼산성이 있다(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1999, 247~255쪽; 박성현, 2010, 261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 풍양현(豊壤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풍양’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에 남경유수관 양주에 소속시켰다가 그 뒤 포주(抱州)로 소속을 바꾸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양주목 풍양현조에 따르면 조선 세종 원년(1418)에 포주에서 양주로 소속을 옮겼는데, 치소는 양주 동쪽 50리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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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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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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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7
골의노현(骨衣奴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황양현(荒壤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다. 본서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골의내(骨衣內)’로 나온다. 골의노의 ‘노(奴)’나 골의내의 ‘내(內)’는 황양의 ‘양(壤)’에 상응하는 고구려의 고유어로 땅[地]을 뜻한다. ‘골의’는 황양의 ‘황(荒)’에 상응하는 고유어인데, 신라의 ‘거칠’부(居柒夫)를 ‘황’종(荒宗)으로 일컬은 사례로 보아 “골의~거질”을 거쳐 중세 국어의 ‘거칠’(거칠뫼=荒山: 『용비어천가』 8)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499·506·514쪽).바로가기
註) 128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바로가기
註) 129
본서 정덕본(正德本)에는 ‘艹+豊’으로 나온다. 본서 주자본(鑄字本)에 근거하여 ‘豐’자로 교감한다(이강래 교감, 1998, 『원본 삼국사기』, 한길사, 379쪽).바로가기
註) 130
풍양현(豐壤縣): 신라 황양현(荒壤縣: 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고려 인종 때 이름. 위의 황양현에 대한 주석 참조.바로가기
註) 131
우왕현(遇王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한양군(漢陽郡) 소속의 현(縣)으로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행주내동(幸州內洞)-행주외동(幸州外洞)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5쪽; 정구복 외, 1997d, 248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개백현(皆伯縣)을 우왕현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개백현이 ‘왕봉현(王逢縣)’으로 나온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지방이어서 왕봉이라 일컫었다”고 하는데, 6세기 전반에 한강 하류의 유력가가 왕실과의 통혼을 통해 중앙세력으로 진출한 사실을 전하는 설화로 이해된다(노태돈, 1999, 462~466쪽). 본서 신라본기7에 따르면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문무왕 13년(673) 9월에 “당군이 말갈·거란의 군사와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였는데, 9번 싸워 신라가 모두 이기고 2천여 명을 참수하였는데,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 죽은 당군의 수가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한강 하류의 행주산성 일대가 나당전쟁의 격전지였음을 전하는데, 신라가 서북한 일대를 석권한 다음 한강과 임진강 유역으로 진격하던 당군을 저지한 것이다. 한편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왕봉(王逢)’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다(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우왕현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고양시 덕양구의 행주산성이 있고(서울대학교 박물관, 1991; 박성현, 2010, 261쪽), 고양 도내동에 신라고분군이 분포한다(김진영, 2021, 321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양주 행주(幸州)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행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에 남경유수관 양주에 내속(來屬)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고양군(高陽郡)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3년(1394)에 고봉현(高峯縣) 감무(監務)를 설치해 행주를 그에 예속시켰다가 태종 13년(1413)에 ‘고양’으로 이름을 고쳐 현감을 두었고, 성종 2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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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김진영, 2021, 『신라 한주지방의 고분과 사회구조』, 서경문화사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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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2
개백현(皆伯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우왕현(遇王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다. 본서 지리4 고구려조에는 ‘왕봉현(王逢縣)’으로 나오는데,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데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한다. 대체로 6세기 전반에 한강 하류의 유력가가 왕실과의 통혼을 통해 중앙세력으로 진출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노태돈, 1999, 462~466쪽). 개백의 ‘개(皆)’는 ‘왕(王)’, ‘백(伯)’은 ‘우(遇)’나 ‘봉(逢)’의 훈에 해당하는 고유어로 중세국어 ‘맞-’의 훈음차에 해당한다고 파악된다(도수희, 2005, 506·513쪽).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하였다는 설화는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의 ‘달을성현(達乙省縣)’에도 나온다.
〈참고문헌〉
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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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33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바로가기
註) 134
행주(幸州): 신라 우왕현(遇王縣: 현 경기도 고양시 행주내동과 행주외동 일대)의 고려 인종 때 이름. 위의 우왕현(遇王縣)에 대한 주석 참조.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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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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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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