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진솔선예백장」명 동인은 현재까지 1점이 알려져 있다. 1966년 김동현(金東賢)과 일본인 학자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에 의해 인장이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신광면(新光面) 마조리(馬助里)에서 마을 주민 권오술(權五述)에 의해 발견된 것임이 확인되었다.註 001 발견 당시 무색의 초자옥(硝子玉) 십여 개가 같이 나왔다고 한다. 1992년에 간행된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에서도 같은 인장이 소개되어 있다.註 002 손잡이는 동물형으로 되어 있으며, 발견 당시 이미 가장자리에 이가 나고 상당히 닳아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보물 5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인장이 3세기 말 중국 서진(西晉) 시기에 제작된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삼국지』 동이전 한 조에 따르면 조위 경초 연간(237~239)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장악하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를, 그 다음의 지배자에게는 읍장(邑長)의 인수를 더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이어서 기록하기를 당시 한의 풍속에 의책(衣幘)을 좋아하였으니 한의 하호(下戶)들이 군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고 알현하면 모두 의책을 주었는데, 스스로 인수와 의책을 만들어 착용한 사람도 1천여 인이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註 003 이로 보아 「진솔선예백장」명 동인도 중국 군현이 예족 집단의 수장에게 내린 인장일 것으로 추측된다.
인장의 인문(印文)으로 보아 이는 서진(西晉)이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예족(濊族) 집단의 수장에게 사여한 것임은 분명하다. 당시 낙랑군(樂浪郡)을 위시로 한 중국의 군현은 한반도 남부 여러 수장층에게 인수・의책을 사여함으로써 통합을 막고 분열을 획책하였다.註 004 「진솔선예백장」명 동인과 함께 잘 알려진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 동인註 005은 모두 당시 중국 군현과 교섭하였던 한(韓)・예(穢) 집단의 소국 수장층이 소지하였던 인장으로 한반도 남부에 대한 중국 군현의 분열・통제 정책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註 006 특히 이 인장이 발견된 지역은 흔히 거론되는 예족 집단의 거주 지역보다 남쪽 지역이라 할 수 있는 경상북도 영일군 일대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즉 이 유물은 예족 세력의 거주 및 활동 범위와 관련하여 다양한 추측을 가능케 한다.
한편, 이 인장이 3세기 말 중국 서진(西晉) 시기에 제작된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삼국지』 동이전 한 조에 따르면 조위 경초 연간(237~239)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장악하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를, 그 다음의 지배자에게는 읍장(邑長)의 인수를 더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이어서 기록하기를 당시 한의 풍속에 의책(衣幘)을 좋아하였으니 한의 하호(下戶)들이 군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고 알현하면 모두 의책을 주었는데, 스스로 인수와 의책을 만들어 착용한 사람도 1천여 인이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註 003 이로 보아 「진솔선예백장」명 동인도 중국 군현이 예족 집단의 수장에게 내린 인장일 것으로 추측된다.
인장의 인문(印文)으로 보아 이는 서진(西晉)이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예족(濊族) 집단의 수장에게 사여한 것임은 분명하다. 당시 낙랑군(樂浪郡)을 위시로 한 중국의 군현은 한반도 남부 여러 수장층에게 인수・의책을 사여함으로써 통합을 막고 분열을 획책하였다.註 004 「진솔선예백장」명 동인과 함께 잘 알려진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 동인註 005은 모두 당시 중국 군현과 교섭하였던 한(韓)・예(穢) 집단의 소국 수장층이 소지하였던 인장으로 한반도 남부에 대한 중국 군현의 분열・통제 정책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註 006 특히 이 인장이 발견된 지역은 흔히 거론되는 예족 집단의 거주 지역보다 남쪽 지역이라 할 수 있는 경상북도 영일군 일대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즉 이 유물은 예족 세력의 거주 및 활동 범위와 관련하여 다양한 추측을 가능케 한다.
註) 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