ᐥ먼저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392년과 397년의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고정한다. 각각 '왜가 백제의 왕을 교체했다'는 이야기와 '백제가 왜에 볼모를 보냈다'는 이야기다. 이어서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396년의 사건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 '고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58성을 빼앗아갔다'는 이야기다. 광개토왕릉비의 나머지 기록은 이 사실들에 맞추어 해석한다.ᐥ
광개토왕 9년의 기록부터 살펴보자.
九年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399년에 백제가 왜와 화통하였고 광개토왕이 평양으로 내려가니 신라가 사신을 보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백제와 왜가 화통한 사건은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 공통적으로 397년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720)
0397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왜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백제의 침미다례 및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왜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
삼국사기(1145)
0397 아신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백제가 왜와 화통한 사건은 397년의 일이지만 399년에 광개토왕이 평양으로 행차한 배경으로 끼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개토왕 6년의 기록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였다.
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
396년에 고려가 백제를 침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광개토왕릉비에만 나오는 이야기인데 부정할 근거가 없으므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
광개토왕릉비에는 395년과 396년의 기록 사이에 이 백제 침공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391년에 왜가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어떻게 했다.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는 이야기는 부정할 근거가 삼국사기에 많이 있다. 따라서 이것은 백제 침공의 명분으로 날조된 이야기라고 보아야 한다.
391년에 있었다고 하는 사건도 일치하는 기록이 다른 곳에 없다.
다만 392년에 일어난 아래 사건이 가장 근접한 이야기이므로 이 사건에 대응시켜 볼 수 있다.
日本書紀(720)
0392 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왜의 천황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紀角宿禰·우전시대숙니·석천숙니·도목숙니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에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 紀角宿禰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 紀角宿禰는 백제의 강역을 나누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
三國史記(1145)
0392 辰斯王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阿莘王이 왕위를 이었다.
이 사건은 392년의 일이지만 광개토왕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의 즉위년인 391년의 사건으로 왜곡되어 백제 침공 기록 앞에 끼워넣어졌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