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삼한시대 연대기 > 391년부터 474년 사이 > 0391 광개토왕릉비(414)
 
 廣開土王陵碑 요약 1
(1)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고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었다. (2) 391년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3) 396년 고려가 백제를 토벌하였다. (4) 399년 백제가 왜와 화통하였다. (5) 399년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6) 400년 왜군이 임나가라를 점령하고 신라성에 침입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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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廣開土王陵碑 요약 2
(7) 400년 고려가 5만의 군대를 보내어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쫓아 임나가라까지 추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8) 400년 이후 신라가 고려에 조공을 바쳤다. (9) 404년 왜가 대방에 침입하였으나 고려가 격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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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43-0371 高麗의 樂浪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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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0까지 三韓의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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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이전 廣開土王陵碑 -- (1)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잔, 신라는 옛부터 고려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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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이전 廣開土王陵碑
백제가 고려의 속민이었을 리는 없다. 백제는 371년에 평양을 침공하여 고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었다. 고대의 기록을 보면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으로 상대가 과거 자기 나라의 땅이었다거나 자기 나라의 속국이었다는 이유를 대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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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廣開土王陵碑 -- (2)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그런데 왜가 391년에 ▨을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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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廣開土王陵碑 -- (2)
①에서 백제는 원래 고려의 속국이었는데 ②의 일이 있은 후에 ③에서 고려가 백제를 토벌하였다고 하므로, ②는 ①과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야 하고 ③이 생기는 원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①은 거짓이니 ①과 ②가 전혀 다른 상황일 필요는 없다. 또 ③의 이유도 고려의 오랜 숙원인 낙랑천도를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②가 치명적 구실이 되지 않아도 된다. ②는 단지 ③을 실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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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廣開土王陵碑 -- (2)
일본서기에는 왜가 한반도 남부의 가라, 안라 등 7국과 4읍을 정벌하고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백제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백제가 남쪽의 전쟁에 몰두해 있는 상황은 북쪽의 고려가 백제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완성되려면 광개토왕릉비에는 破가 아니라 與와 같은 한자가 와야 한다. 來渡海與百殘合攻新羅以爲臣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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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廣開土王陵碑 -- (2)
왜는 신라 및 고려와 모두 전쟁을 벌였지만 백제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은 한중일 3국을 통틀어 전혀 없다. 또 광개토왕릉비의 破百殘을 이어지는 문장과 연결해 보면, 왜에게 격파당한 백제를 고려가 정벌한다거나 백제가 자신을 격파한 왜와 다시 화통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매우 어색하다. 따라서 破百殘은 잘못된 판독이거나 부정확한 기술로 보아야 한다. 來渡海破百殘加羅新羅以爲臣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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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廣開土王陵碑 -- (2)
일본서기에 사건의 왜곡은 있어도 사건의 날조는 없다. 신공황후 49년의 기록과 내용상 가장 근접한 기록은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391년과 그 이후의 기록이다. 두 기록은 모두 倭가 우위에 서서 한국에 진출했고 백제가 이에 협조했다고 하는 점에서 줄거리가 같다. 광개토왕릉비 외에는 신공황후 49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신공황후 49년의 기록은 391년에 있었던 사건을 옮겨 놓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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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廣開土王陵碑 -- (2)
0391-03(<-249) 일본서기(720) 49년 봄 3월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이 두 사람은 그 성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 장군이다)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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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廣開土王陵碑 -- (2)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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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廣開土王陵碑 -- (2)
그래서 백제왕 부자와 황전별·목라근자 등이 의류촌(지금은 주류수기라 한다)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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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 廣開土王陵碑 -- (2)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 년 만 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천웅장언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저 등을 딸려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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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1-0474 倭의 韓國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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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
385년에 침류왕이 죽자 왕자 아신이 어려 숙부인 진사가 왕이 되었는데, 392년에 그 진사왕도 갑자기 죽자 아신이 왕이 된다는 이야기는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일치한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진사왕이 행궁에서 죽었다고만 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는 왜가 사신을 보내 왕을 교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백제는 왜의 신민이 되어있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以爲臣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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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272) 일본서기(720)
백제의 진사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倭)의 천황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 기각숙니(紀角宿禰)·우전시대숙니·석천숙니·도목숙니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에서는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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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353) 일본서기(720)
기각숙니(紀角宿禰)를 백제에 보내어 처음으로 나라의 강역을 나누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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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01 삼국사기(1145)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나물 이사금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 이 해는 영락2년이므로 광개토왕이 즉위하고 나서 신라와의 관계를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왜의 신민 상태가 되어 있었다면 고려에 기대어 볼 계산으로 볼모를 보냈을 것이다. 新羅以爲臣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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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11 삼국사기(1145)
진사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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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2-11 삼국사기(1145)
아신왕(阿莘王, 阿芳이라고도 한다)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침류왕이 사망하였을 때,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진사왕이 재위 8년에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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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 廣開土王陵碑 -- (3)
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軍▨▨」 ... 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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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 廣開土王陵碑 -- (3)
396년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 이에 백잔주가 곤핍해져, 남녀 생구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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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 廣開土王陵碑 -- (3)
0391-07 삼국사기(1145)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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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 廣開土王陵碑 -- (3)
0391-10 삼국사기(1145)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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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 廣開土王陵碑 -- (3)
0394-07 삼국사기(1145) 고구려와 수곡성 밑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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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 廣開土王陵碑 -- (3)
0394-08 삼국사기(1145) 아신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 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니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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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6 廣開土王陵碑 -- (3)
0395-11 삼국사기(1145) 아신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때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 가운데 동사한 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 청목령은 개성에 있는 고개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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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7-03(<-277) 일본서기(720) -- (4)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 및 현남·지침·곡나·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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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7-05 삼국사기(1145) -- (4)
아신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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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99 廣開土王陵碑 -- (4), (5)
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和」 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http://qindex.info/i.php?f=196#1478
 
 0399 廣開土王陵碑 -- (4), (5)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倭)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http://qindex.info/i.php?f=196#1430
 
 0399 廣開土王陵碑 -- (4), (5)
397년에 백제가 왜에 왕자를 볼모로 보낸 사실은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일치하므로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고정한다. 광개토왕릉비에 백제와 왜가 399년에 화통하였다는 부분은 잘못 알고 있던 것이거나 광개토왕이 399년에 평양으로 행차한 배경으로 397년의 사건이 끼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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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0 廣開土王陵碑 -- (6), (7), (8)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戌兵▨新羅城▨城倭寇大潰城▨」                 ▨▨盡▨▨▨安羅人戌兵新▨▨▨▨其▨▨▨▨▨▨▨言」 辭▨▨▨▨▨▨▨▨▨▨▨▨▨潰」 ▨▨▨▨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 ▨▨▨▨朝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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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0 廣開土王陵碑 -- (6), (7), (8)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 ... 신라성 ... 왜구가 크게 무너지고  ... 옛적에는 신라 매금이 몸소 고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을 한 일이 없었는데,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신라 매금이 ... 하여 조공하였다.
http://qindex.info/i.php?f=196#1439
 
 0400 廣開土王陵碑 -- (6), (7), (8)
0393-05 삼국사기(1145)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나물 이사금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http://qindex.info/i.php?f=196#1651
 
 0401-07 삼국사기(1145)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http://qindex.info/i.php?f=196#1788
 
 0402-03 삼국사기(1145)
왜와 우호를 통하고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삼았다. -- 볼모를 보낸다는 것은 강한 결속을 의미한다. 게다가 고려에 갔던 볼모가 돌아온 이듬해에 왜에 볼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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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4 廣開土王陵碑 -- (9)
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 지역에 침입하였다. …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 連船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왜군은 바닷길로 온 듯하다.
http://qindex.info/i.php?f=196#1452
 
 0404 廣開土王陵碑 -- (9)
광개토왕릉비는 396년에 백제를 대파하여 복종을 받아냈다고 하나 백제는 이내 왜와 화통하였다. 광개토왕릉비는 또 400년에 5만의 군대를 보내어 신라와 가라에 들어온 왜군을 무찔렀다고 하나 404년에 왜군은 고려의 대방을 직접 공격하였다. 삼국사기에는 401년에 고려에 가 있던 신라의 볼모가 돌아오고 이듬해에 신라는 왜에 볼모를 보냈다고 되어 있다. 광개토왕의 전공은 과장된 것이 아닐까?
http://qindex.info/i.php?f=196#1790
 
 2019-04-16 최연식의 주장
반파란 국명을 넣어 해석을 시도하였다. 而倭以辛卯年來渡伴破百殘合攻新羅以爲臣民 왜가 신묘년에 반파로 건너오자 백제가 그들과 함께 신라를 침공해 신민으로 삼았다. -- 문제점, (1) 반파(伴跛,叛波)는 513년 이후 기록에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 국명이다. (2) 반파는 가라와 함께 사용된 예가 없다. (3) 渡의 목적어로 국명이 오는 게 자연스런 문장인가? (4) '그들과 함께 침공하다'란 뜻이 두 글자에 담길 수 있나?
http://qindex.info/i.php?f=196#1762
 
 광개토왕릉비(414)와 일본서기(720)
두 기록의 공통점은, (1) 왜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 등을 침공하였고 (2) 백제가 왜에 협력하였으며 (3) 왜가 가라를 점령하였다는 것인데, 삼국사기(1145)에는 대체로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또 삼국사기에는 거의 쓰이지 않고 광개토왕릉비와 일본서기에만 공통적으로 쓰이는 용어가 있다. 任那, 加羅, 安羅, 寐錦. 기록의 시기는 삼국사기보다 광개토왕릉비가 700년 이상 앞서고 일본서기는 400년 이상 앞선다.
http://qindex.info/i.php?f=196#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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