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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무제의 제사

사기 : 서(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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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후에 효경제(孝景帝)가 즉위했다. 재위 16년에 사관들은 예전처럼 각기 그 해의 때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고, 어떤 새로운 것을 일으키고 낡은 것을 개혁하는 것이 없이 지금의 천자에 이르렀다.

무제의 제사
지금의 천자(한무제)가 즉위 초, 특별히 귀신의 제사를 공경하게 지냈다. 원년에 한나라가 흥기한 지 이미 60여 년이 지나 천하가 안정을 이루자 모든 벼슬아치들은 천자가 봉선의식을 거행하고, 역법, 복색의 도량 등을 바꿀 것을 희망했다.

무제는 유가(儒家)의 학술에 마음을 두고, 현량(賢良, 한 문제 때부터 시작된 과거 제도로, 책문을 통해 직언과 극간(極諫)을 잘하는 사람을 뽑았는데, 현량문학(賢良文學) 혹은 현량방정(賢良方正)이라고도 칭함)을 뽑았는데 조관(趙綰), 왕장(王藏) 등은 문학으로써 공경(公卿)이 되었다. 그들은 고대의 제도처럼 성의 남쪽에 명당을 세워서 제후들이 조회할 것을 건의했다.

황제의 순수(巡狩)와 봉선제도, 역법의 개정, 복색 등의 일에 대해서 초안을 마련했으나, 미처 완성되지 못했다.

이때에 공교롭게도 두태후(竇太后)가 황로(黃老)의 학설에 심취하고 유가의 학술을 싫어했다. 그래서 은밀하게 사람을 시켜 조관 등이 간사하게 이권을 챙긴 일을 엿보게 하여, 관리를 소집하여 조관과 왕장의 사건을 심리했다. 이에 조관과 양장은 자살했고, 그들이 주관하여 시작하려던 일들은 모두 폐기되었다.

이로부터 6년 후에 두태후가 사망했다. 그 다음해 문학하는 선비인 공손홍(公孫弘) 등을 불러 임용하였다.

다음해에 황제는 처음으로 옹주에 가서, 오치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후부터는 3년에 한 번씩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때 황제는 신군(神君)의 우상을 구할 수 있었는데, 이를 상림원(上林園)의 제씨관(蹄氏觀)에 안치했다.

신군이란 원래 장릉현(長陵縣)의 여자로, 아들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다가 죽었는데, 그 신령이 동서인 원약(宛若)에게 나타났다. 이에 원약은 그녀를 자기의 집에서 사당을 짓고 모시자 백성들이 많이 와서 제사를 지냈다.

평원군(平原君)도 일찍이 제사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후 자손들이 존귀해지고 명성이 혁혁해졌다.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자 후한 예로 궁중에 사당을 세우고 공양했는데, 신군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으나, 그 형상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 이소군(李少君) 역시 조신(竈神, 부엌 신)에 대한 제사, 곡도(穀道, 곡식은 먹지 않고 솔잎이나 대추, 밤 따위를 조금씩 날로 먹는 양생술), 각로(却老, 늙는 것을 물리친다는 장생법) 방술로써 무제를 알현했는데, 무제는 그를 존중했다.

이소군은 원래 심택후(深澤侯)의 측근으로 방술을 주관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나이와 성장내력을 숨기고, 항상 스스로 70세이며 능히 귀물(鬼物)을 부릴 수 있으며, 노쇠함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방술로써 제후들을 두루 사귀었다. 그러나 처자식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귀물을 부리고, 불로장생의 비책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선물을 보내주어 항상 금전과 생활이 넉넉했다.

사람들은 그가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생활이 풍족하고, 또한 그가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몰랐기 때문에 더욱 그를 믿게 되었으며, 다투어 그를 섬기었다. 이소군은 천성적으로 방술을 좋아하고, 기교에 능하며 신기하게 잘 알아맞혔다.

그는 일찍이 무안후(武安侯)를 따라 주연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좌중에는 90여 세가 되는 한 노인이 있었다. 이소군은 그 노인과 담화를 나누면서 일찍이 그의 조부와 함께 사냥했던 지방을 말했다.

그 노인은 어렸을 적에 조부와 함께 있어서 그 장소를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러자 좌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탄해마지 않았다.

이소군이 무제를 알현했을 때, 무제는 옛 동기(銅器)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에게 이 동기가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이에 이소군이 말했다. “이 기물은 제환공(齊桓公) 10년에 백침대(柏寢臺)에 진열되었던 것입니다.”

얼마 뒤에 동기에 새겨진 글귀를 고증하니, 과연 제환공 때의 기물이었다. 이에 온 궁중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면서 이소군은 살아있는 신선이며, 그의 나이는 수백 살이나 된 것으로 여겼다.

이소군이 무제에게 상소하여 말했다. “부엌 신에게 제사 지내면 신령한 물건을 얻고, 그 물건으로 단사(丹沙)를 황금을 바꿀 수 있으며, 황금으로 음식을 담는 그릇을 만들면 장수할 수 있습니다.

장수하게 되면 바다에 떠 있는 봉래도(蓬萊山)의 신선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신선에게 봉선의 예를 행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으니, 황제(黃帝)도 그랬습니다.

신이 일찍이 바다에서 노닐다가, 안기생(安期生)을 만났는데, 안기생은 거대한 대추를 먹고 있었는데, 크기가 참외와 같았습니다.

안기생은 선인으로 봉래산(蓬萊山) 속으로 왕래할 수 있었는데, 만약 황제가 그와 의기투합하면 나타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숨어버릴 것입니다.”

그러자 무제는 친히 부엌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방사들을 바다로 파견하여 봉래의 안기생과 같은 선인의 무리를 찾게 하였으며, 단사 등 여러 약물을 제련하여 황금을 만들게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소군이 병으로 죽자 무제는 죽지 않고 신선이 되어 승천한 것으로 여겼다. 무제는 황현(黃縣)과 추현(錘縣)의 관리인 관서(寬舒)로 하여금 이소군의 방술을 전수받게 했다.

봉래의 선인 안기생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이때부터 연(燕)과 제(齊) 등 연해지방 일대의 기괴하고 허황되며 진부한 방사들이 계속하여 신선의 일을 떠벌리게 되었다.

박현(亳縣) 사람 박유기(薄謬忌)가 태일신(太一神)에게 제사를 올리는 방법에 대해 조정에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천신 중 태일은 가장 존귀하고, 태일을 보좌하는 것은 오제(五帝)입니다.

고대에 천자는 매년 봄, 가을에 장안 동남쪽 교외에서 태일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물로 태뢰(太牢, 제물로는 소, 양, 돼지를 갖춤)을 쓰고, 7일 동안 제사지내며, 또한 신단(神壇)을 세워 팔방으로 통하는 귀도(鬼道)를 만듭니다.”

그래서 천자는 태축(太祝)에게 장안의 동남쪽 교외에 사당을 세우고, 항상 박유기의 방법으로 제사를 올리라고 명했다.

그 후 또 어떤 사람이 상서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고대에 천자는 삼 년마다 한 차례 태뢰로 삼일신(三一神)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바로 천일신(天一神), 지일신(地一神), 태일신(太一神)입니다.”

천자는 그의 상소문을 윤허하고, 태축에게 박무기가 상주하여 세운 태일신 제단 위에서 함께 제사 지내고, 그자가 상소한 방법에 따라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후 또 어떤 사람이 상서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고대에 천자는 항상 봄에 재앙을 없애는 제사를 지냈는데, 황제(黃帝)에게 제사 지낼 때에는 효조(梟鳥, 어미를 잡아먹는 올빼미), 파경(破鏡, 파경(破獍)으로도 불리며,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의 이름)을 사용하고, 명양신(冥羊神)에게는 양을, 마행신(馬行神)에게는 푸른색의 수말 한 필을, 태일신과 택산군지장신(澤山君地長神)에게는 소를, 무이군(武夷君, 무이산의 산신)에게는 마른 어물(魚物)을, 음양사자신(陰陽使者神)에게는 소 한 마리를 제물로 삼습니다.”

그래서 천자는 사관에게 상서를 올린 사람의 방법을 따르되 박유기가 상주하여 세운 태일단 곁에서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후 천자의 상림원(上林苑)에 흰 사슴이 있었는데, 그 가죽으로 화폐로 삼았고, 상서로운 감응에 부합하기 위해서 백금(白金)을 제조했다.

그 다음해에 옹주에서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다가 뿔 하나 달린 들짐승을 잡았는데, 마치 고라니와 같았다.

주관 관리가 말했다. “폐하께서 공경스럽고 정성을 드려 제사를 올리니, 상제께서 보답으로 뿔 하나 달린 이 짐승을 하사해 주셨는데, 이것은 아마도 기린(麒麟)일 것입니다.”

이에 그것을 오치(五畤)에 바치고, 매 치(畤)마다 제물로 소 한 마리씩을 추가하여 불태워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이것은 백금을 조주하여 하늘이 내린 상스러운 조짐이라 하여 제후들에게는 백금을 하사하고, 하늘의 뜻에 부합한 것이라 했다.

이에 제북왕(濟北王)은 천자가 장차 봉선을 행할 것으로 여기고, 바로 상서를 올려서 태산 및 그 주변의 읍을 자진 헌납했다. 그러자 천자는 다른 현으로 보상해 주었다.

상산왕(常山王)이 죄를 짓자 다른 지방으로 옮기고, 그의 동생을 진정(眞定)에 봉해 선왕의 제사를 계속 잇게 하였고, 상산(常山)을 군(郡)으로 삼았다. 그런 후부터 오악(五嶽)은 모두 천자의 군현 안에 속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에 제나라 사람 소옹(少翁)은 귀신을 부리는 방술로 무제를 알현했다. 무제에게는 총애하는 왕부인(王夫人)이 있었는데, 그녀가 죽자 소옹은 밤에 방술로써 왕부인의 혼령과 부엌 신을 불러들여, 무제에게 휘장을 통해서 그 모습을 보게 하였다.

이 공으로 소옹은 문성장군(文成將軍)으로 임명하고, 많은 재물을 상으로 하사받았으며, 빈객으로 예우했다. 문성장군이 무제에게 말했다. “황제께선 신선과 소통하고 싶어 하지만, 궁실의 의복과 용구가 신선의 것과 같은 것이 없어서 신선은 강림하지 않습니다.”

이에 구름무늬의 그린 수레를 제작하고, 더불어 각기 좋은 날을 가려 수레를 타게 하여 악귀를 피하게 만들었다.

또한 감천궁(甘泉宮, 섬서성 순화현(淳化縣)의 감천산(甘泉山)에 있는 궁전)을 건립하여 그 가운데 대실(臺室)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천신, 지신, 태일신 등의 귀신 형상을 그려놓고, 제구(祭具)를 갖추고서 천신을 불러들이고자 했다.

1년여 뒤에, 그의 방술은 갈수록 효력이 떨어져서 신선은 마침내 강림하지 않았다. 이에 소옹은 남몰래 비단에 글을 쓴 다음 그것을 소에게 먹인 후에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며 소의 뱃속에 기이한 것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소의 배를 가르게 하니 과연 비단으로 쓰인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의 내용이 심히 괴기했다. 하지만 무제가 그 필적을 알아보고 소옹을 심문하니, 과연 거짓으로 쓴 글이었다. 그래서 노한 무제는 문성장군을 주살하고, 그 일은 덮어 감추었다.

그 후 무제는 또 백량(柏梁殿), 동주(銅柱, 구리 기둥), 승로선인장(承露仙人掌, 동(銅)으로 선인(仙人)의 손 모양을 만들어 세워서 동반을 떠받치고서 감로를 받게 함) 등을 만들었다.

문성장군이 죽은 그 다음해, 무제는 정호궁(鼎湖宮)에서 심한 병을 얻었는데, 무당과 의원들이 온갖 방법을 다하여 치료했지만 낫지 않았다.

이때에 유수발근(游水發根)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아뢰었다. “상군(上郡)에 무당이 있는데, 병을 앓으면 귀신(鬼神, 신군(神君))과 접신되어 영험하다고 합니다.”

무제는 그 무당을 불러 감천궁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무당이 한 차례 병을 얻자, 무제는 사람을 보내어 무당을 통해서 신군에게 물어보게 했다.

그러자 무당의 신군은 이렇게 말했다. “천자는 병으로 그리 걱정하실 필요가 없소. 병세가 조금 나아지거든 힘을 내서 감천궁으로 와서 나를 만나면 됩니다.” 이 말을 듣고 병세가 호전되더니, 마침내 일어나서 감천궁으로 행차하자 병이 완전히 좋아졌다.

이 때문에 대사면령을 반포하고 수궁(壽宮)에 신군(神君)을 모시었다. 수궁의 신군 중에서 가장 존귀한 신이 태일신이며, 그를 보좌하는 대금(大禁), 사명(司命)과 같은 무리들이 있는데, 모두 태일신을 따랐다.

사람들은 신군들의 모습은 볼 수 없고, 그들의 말소리만 들을 수 있었는데 마치 사람들의 말소리와 같았다. 그들은 수시로 왔다가 가는데, 오면 바람소리가 숙연해진다. 그들은 실내의 장막 속에 머물고, 때론 대낮에 말하기도 하지만 일상적으로 밤에 말을 한다.

천자는 재앙을 쫓고 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수궁에 들어갔다. 수궁은 무당이 주인역할을 하여 신군의 음식을 받았으며, 신군들이 하고자 하는 말 역시 무당을 통해서 전해졌다.

또한 수궁에 북궁(北宮)을 만들고, 깃털로 장식한 깃발을 내걸었으며, 여러 제사용품을 갖추어 예로써 신군을 섬겼다. 신군이 하는 말은 황제가 사람들에게 시켜 받아 적게 했는데, 이를 ‘화법(畵法)’이라고 한다.

신군들의 말은 모두 속인들도 알 수 있는 것으로,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천자는 마음속으로 홀로 즐거워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은밀하게 이루어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3년이 지난 후에 주관 관원들이 기원(紀元)은 마땅히 하늘에서 내린 상서로운 징조로 명명해야지 일원(一元), 이원(二元) 같이 순차적으로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첫 번째 기원은 ‘건원(建元)’, 두 번째 기원은 혜성의 긴 꼬리가 빛을 발했기에 ‘원광(元光)’, 세 번째의 기원은 교사(郊祠) 중에 뿔이 하나 있는 짐승을 포획했기에 마땅히 ‘원수(元狩)’라고 칭하자고 했다.

그 다음해 겨울, 천자가 옹주에서 교사를 지내고 주관 관리들과 논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짐이 친히 상제에게 제사를 올렸으나, 후토(后土)에 대한 제사가 없으니, 예법에 부합하지 않소.”

이에 주관 관원과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司馬談)), 사관인 관서(寬舒) 등이 논의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천지신께 제사 지낼 때 바치는 송아지의 작은 뿔은 누에고치나 밤처럼 작아야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 친히 후토에게 제사 지내시려면 연못 가운데 있는 둥그렇게 솟아있는 언덕에 다섯 개의 제단을 설치하고, 각 제단마다 누런 송아지를 한 마리씩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모두 땅에 묻고, 제사에 지내는 사람들은 황색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에 천자는 마침내 동쪽으로 행차하여 처음으로 분음수(汾陰脽, 분음현에 있는 작은 토산)의 구릉에 후토의 사당을 건립했다. 제사의례는 관서 등이 의논한 대로 집행하였다. 천자는 친히 멀리서 바라보며 절을 올렸는데, 상제에게 지내는 예법과 같았다.

예법이 끝나자 천자는 형양(滎陽)을 거쳐서 돌아왔는데, 낙양(雒陽)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삼대(三代)의 연대가 아득하여 제사가 끊어진 지 오래되어, 그들의 제례의식을 보존되기 어렵게 되었구나! 30리의 땅을 주 나라의 후손에게 주고, 주자남군(周子南君)으로 봉해, 선조의 제사 받들도록 하라.”

이해에 천자는 각 군현을 순행하기 시작해서 점차 태산 가까이까지 이르렀다.

그해 봄, 악성후(樂成侯, 정의(丁義))가 상서를 올려 난대(欒大)를 소개했다. 난대는 교동왕(膠東王)의 궁인(宮人)으로 옛날에 일찍이 문성장군과 같은 스승 밑에서 방술을 배웠는데, 뒤에 교동왕의 약을 처방하는 조제사가 되었다.

악성후의 누이는 강왕(康王, 교동왕)의 왕후가 되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강왕이 죽은 후에 다른 후궁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강왕후는 음행을 일삼아 새로운 왕과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법술로 암투를 벌여 위태롭게 했다.

강왕후는 문성장군이 이미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천자에게 아첨하기 위해 바로 난대를 악성후의 추천을 받게 하여 천자에게 알현해서 방술을 말하게 했다.

천자는 원래 문성장군을 죽인 후에 일찍 죽인 것을 후회하고 있었고, 그의 방술이 다 쓰지 못한 것에 대한 애석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차에 난대를 보자 매우 기뻐했다. 난대는 키가 크고 용모가 준수하며, 많은 방책을 발언하며, 또한 과감하게 허풍을 쳐도 상대방이 의심을 가지지 못하게 처신했다.

한번은 난대가 천자에게 이렇게 허풍을 떨면서 말했다. “신은 자주 바다 가운데를 왕래하면서, 안기생(安期生), 선문고(羨門高) 등의 선인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신이 천하다고 생각하고 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강왕은 제후일 뿐이라서 방술을 전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신은 여러 차례 강왕에게 그런 사정을 말씀드렸으나, 강왕도 또한 신을 말을 채용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스승은 황금을 제련할 수 있고, 황하의 터진 둑도 막을 수 있으며, 불사약도 구할 수 있고, 신선도 불러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도 문성장군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면 방사들의 입을 닫아버릴 것이니, 어찌 감히 방술에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황제가 말했다. “문성장군은 말의 간을 먹고 죽었을 따름이오, 당신이 참으로 방술을 잘 닦기만 한다면 내 무엇을 아끼겠는가!”

그러자 난대가 이렇게 아뢰었다. “신의 스승은 남들을 찾아가지 않는데, 남들이 스승을 찾아옵니다. 폐하께서 반드시 신선을 초치하고 싶으면, 신선의 사자를 존귀하게 만들고, 그 친족도 빈객의 예우로써 대해야지 멸시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각종 믿을 만한 인장을 차게 해야만, 비로소 신선과 통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신선이 만나줄 지는 대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신선의 사자를 존중해야만 그제야 신선의 강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에 황제는 그에게 작은 방술이라도 시범으로 보이라고 하자, 그는 바둑판 위에 바둑알을 놓고 저절로 서로 부딪치며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에 천자는 마침 황하의 범람을 걱정하고, 황금을 제조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로 난대를 오리장군(五利將軍)에 임명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난대는 4개의 관인(官印)을 취득해 오리장군인(五利將軍) 외에 천사장군인(天士將軍), 지사장군인(地士將軍), 대통장군인(大通將軍)의 인장을 꿰찼다. 그리고 어사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예전에 우(禹)임금은 구강(九江)을 소통시켰고, 사독(四瀆)을 개통하여 흐르게 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하수가 범람하여 평지까지 잠겼으니 제방축조의 노역을 쉬게 할 수가 없다.

짐이 천하에 28년 동안을 군림하였는데, 하늘이 만약 짐에게 방사를 보내주었나니, 난대는 하늘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역경(易經)』의 「건괘(乾卦)」에서는 ‘나는 용이 하늘에 올랐다.’라고 했고, 「점괘(漸卦)」에서는 ‘기러기가 무리를 지어 점차 나아가(군자가 조정에서 높은 자리로 나아감을 비유) 물가의 높은 언덕으로 서서히 날아간다.’라고 하였는데, 짐의 뜻에 감응하여 난대를 주신 말일 것이다. 그래서 지사장군 난대에게 2천 호의 땅을 봉지를 주고, 악통후(樂通侯)로 삼으라.”

그리고 열후(列侯)에게 주는 저택과 노비 천 명을 하사했다. 황제가 타는 수레와 말, 휘장, 기물 등을 그의 저택에 가득 채워주었다.

또한 위황후(衛皇后)가 낳은 장공주(長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황금 만근을 보내주었으며 아울러 그가 거주하는 읍을 당리공주읍(當利公主邑)으로 개명했다.

천자가 친히 오리장군의 저택을 찾아갔고, 사자에게 안부를 묻고 공급할 물품을 실은 행렬이 길을 따라 끊이지 않았다. 대주(大主, 대장공주로 천자의 고모)와 조정의 장상(將相)으로부터 그 밑의 벼슬아치들까지도 모두 주연을 베풀어 축하하고 예물을 바쳤다.

이어서 천자는 또 옥인(玉印)에 ‘천도장군(天道將軍)’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사자로 하여금 우의(羽衣)를 입고서 밤에 흰 띠풀 위에 서게 하며, 밤에 띠풀 위에서 옥인(玉印)을 받도록 했는데, 이는 오리장군이 천자의 단순한 신하가 아님을 과시하고, ‘천도장군’란 옥인을 꿰찬 자만이 또 천자를 위하여 천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오리장군은 밤마다 자기 집에서 제사를 지내며 신선의 하강하길 빌었는데, 신선은 오지 않고 온갖 귀신만 모여들었다. 그러나 난대는 제법 귀신들을 부릴 수 있었다.

그 후로 난대는 곧 행장을 챙기고 나와, 동해로 들어가 그의 스승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난대는 황제를 접견한지 몇 달 만에 몸에는 6개의 관인을 꿰차고, 그 존귀함을 천하에 떨쳤다.

그리하여 연(燕)과 제(齊)의 연해 일대 방사들은 자기들도 신선을 불러 올 수 있는 방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분해서 손목을 불끈 쥐지 않는 자가 없었다. 더불어 스스로 자신들만의 진귀한 비방이 있어 능히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해 여름 6월에 분음(汾陰)의 무당 금(錦)이 백성들을 위해 위수(魏脽)의 후토(后土) 사당 옆에서 제사를 지낼 때, 땅 아래에 갈고리 같은 기이한 물건을 보고 파보니 정(鼎)이었다.

이 정은 보통 정보다 기이하게 크고, 꽃무늬만 조각되어 있고 문자나 다른 표식은 새겨져 있지 않았다. 무당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 지방 관리에게 말하자, 그 관리는 하동(河東)의 태수 승(勝)에게 알렸고, 승은 또 조정에 보고했다.

천자는 사자를 보내 무당이 정을 얻은 과정을 심문하고 중간 간사하게 속인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바로 예의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고 정을 감천궁으로 맞이하려고 했다.

그리고 황제는 백관들을 거느리고 장차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 올리려고 했다. 중산(中山)에 도착하니 날씨가 따뜻하고 청명했는데, 갑자기 정의 상공에서 황색 구름이 피어올라 마치 수레의 차양 같았다.

때마침 뛰어지나가던 고라니가 있어, 천자가 몸소 활을 쏘아 잡아서 정을 제사를 지낼 때에 희생으로 썼다.

장안에 도착하자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은 모두 의논을 하여 보정(寶鼎)을 존중하여 봉행할 것을 청했다.

이에 천자가 말했다. “근래에 황하가 범람하고, 수년 동안 흉년이 들었소. 그래서 짐이 군현을 순찰하며 후토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백성을 위해 곡식이 풍성해지기를 기원했었소. 그런데 올해의 오곡이 풍성한 것에 대해 아직 신에게 보답도 못 드렸는데, 어찌해서 이 정이 출현했단 말인가?”

유관 관리들이 모두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 태제(泰帝, 태호(太昊) 복희씨)께서 신정(神鼎)을 하나 만드셨는데, 하나(一)란 일통(壹統)이란 뜻으로 천지만물이 모두 보정(神鼎)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황제(黃帝)는 보정(寶鼎) 세 개를 만들었는데, 천, 지, 인을 상징했습니다. 하우(夏禹)는 구주(九州)의 동(銅)을 거두어 구정(九鼎)을 주조했으며, 모두 고기 삶은 것을 담아 상제와 귀신에게 제사지낼 때에 사용했습니다.

성덕이 흥성한 사람을 만나서 정(鼎)은 하나라와 상나라에 전해졌습니다. 주나라의 덕이 쇠퇴하고 송(宋)나라의 사직이 망하자, 정은 사라져 다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경(詩經)』 「주송(周頌)」에 ‘당(堂)에서부터 대문의 터까지 가면서 제사에 받칠 양을 살펴보고 나서 소를 살펴보며, 큰 가마솥과 옹솥까지 살펴보았네. 큰 소리로 웃고 떠들거나 오만하지 않으니, 장수의 경사를 누리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보정이 감천궁에 도착했는데, 보정에서 광채가 나고 매끄러운 것이 용처럼 변화무쌍하니, 조정에는 반드시 무궁무진한 복록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번에 중산에 도착했을 때에 황백색의 구름이 내려와 덮고 또 고라니 같은 짐승이 나타난 것과 부합합니다.

폐하께서 노상에서 큰 활로 화살을 쏘아 제단 아래에서 고라니를 잡았으니, 이 모든 길조가 천지신명께 보답하는 성대한 제사가 된 것입니다.

오직 하늘의 명을 이어받은 황제만이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하늘의 덕행에 부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정은 마땅히 조상의 묘당에 헌납해야 하며, 제왕의 궁정에 소중히 간직하여 신명(神明)의 상서로운 징조에 부응해야 합니다.”

이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말했다. “허락한다.” 바다에 들어가서 봉래를 찾던 자가 돌아와, 봉래는 멀리 있지 않으나 도달하지 못하는 원인은 아마도 그 봉래산의 기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이에 황제는 하늘의 기운을 잘 살피는 자를 파견해 그들을 도와 구름의 기운을 관찰하게 했다.

이해 가을, 황제는 옹주에 가서 오제(五帝)에게 교사(郊祠)를 지내려고 했다. 이때에 혹자가 이렇게 아뢰었다. “오제는 태일신을 보좌할 뿐인, 마땅히 태일신의 사당을 세워 황제께서 친히 교사를 지내야 합니다.”

이에 황제가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니, 제나라의 공손경(公孫卿)이 이렇게 아뢰었다. “올해 보정을 얻었는데, 겨울 사일(辛巳日)은 11월 초하루로 동지(冬至)인데, 이는 황제(黃帝)께서 보정을 얻을 때와 같습니다.”

공손경이 지닌 목간(木簡)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황제(黃帝)께서 원구(宛朐)에서 보정을 얻으신 후에 귀유구(鬼臾區, 황제 때의 제후로 귀용구(鬼容區)라고도 함)에게 이 일을 물었더니, 귀유구가 대답하길 ‘황제(黃帝)께서 보정과 신책(神策)을 얻으셨을 때가 그해 기유(己酉) 초하룻날 아침 동지로, 이때가 하늘의 벼리에 진입한 것으로 마쳤다가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황제를 맞이한 시간을 추산해 보니, 그 뒤로 20년마다 초하룻날 아침에 동지가 순환되고, 20여 차례를 합산하니 380년 만에 황제(黃帝)께서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공손경은 소충(所忠)을 통해서 이 일을 황상에게 상주하고 싶었으나, 소충은 그 글이 올바르지 못하고 경망스런 것으로 의심하여 사양하면서 말했다. “보정의 일은 이미 끝난 일인데, 다시 어떻게 하겠단 말이오?”

이에 공손경은 다시 황제가 총애하는 사람을 통해서 이 일을 아뢰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공손경을 불러 사정을 물어보았다. 공손경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글은 신공(申功)에게서 받은 것인데, 신공은 이미 죽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신공은 어떤 사람인가?” 공손경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공은 제나라 사람으로, 신선 안기생과 왕래했고, 황제(黃帝)의 가르침을 이어받았는데, 다른 글은 남기지 않고 오직 이와 같은 정(鼎)에 새긴 글만 있습니다.

그 글에 말하길 ‘한나라의 흥성은 황제(黃帝)가 정을 얻은 때가 될 것이다.’라고 했고, 또 ‘한나라의 성스러운 군주는 고조의 손자 혹은 증손자 가운데에 있다. 보정이 출현한다는 것은 신과 통한다는 것이니, 봉선의식을 행해야 한다.

예부터 봉선의식을 행한 제왕은 모두 일흔 두명이나 되지만, 오직 황제(黃帝)만이 태산 위에 올라 봉선의식을 행했다.’라고 말했다. 신공은 ‘한나라의 군주도 역시 마땅히 봉선의식을 행해야 하며, 봉선을 하면 능히 신선이 되어 승천할 수 있다.

황제(黃帝) 때는 제후가 만 명이 있었으며,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후국이 7천여 개나 되었다. 천하에 명산은 8개가 있는데, 3개는 만이(蠻夷) 지역에 있으며, 5개가 중국에 있다.

중국에는 화산(華山), 수산(首山), 태실산(太室山), 태산(泰山), 동래산(東萊山)이 있으며, 이 5개의 산은 황제(黃帝)가 항시 유람하며 신선과 회합했던 곳이다.

황제(黃帝)는 한편으로 전쟁하면서 한편으로는 선도(仙道)를 익혔는데, 백성들이 그의 도를 비난할 것을 걱정하여 귀신을 비방하는 자들을 바로 참살했으며, 이렇게 1백여 년을 수련한 뒤에야 신선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황제는 옹주 교외에서 상제께 제사 지내느라 석 달간 머물렀다. 이 당시에 황제를 섬겼던 귀유구(鬼臾區)란 신하의 호는 대홍(大鴻)인데, 죽은 후 옹주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홍총(鴻冢)이라는 묘가 이 지방에 있게 된 것이다.

이후 황제는 명정(明廷)에서 뭇 신령들을 영접했는데, 명정은 바로 지금의 감천산을 말하며, 황제가 승천한 장소를 한문(寒門)이라고 하는데, 바로 지금의 곡구(谷口)이다.

황제는 수산(首山)에서 동(銅)을 채굴하여 형산(荊山) 아래에서 정을 주조했다. 이윽고 정이 완성되자 구름 속에서 긴 턱수염을 드리운 용이 땅으로 내려와 황제(黃帝)를 영접했으며, 황제가 용의 등에 올라타자 군신, 후궁 등 70여명도 뒤 따랐고, 용은 그들을 태운 채 천상으로 날라가려했다.

그러자 나머지 지위가 낮은 신하들은 올라탈 수 없게 되자 다급하게 모두 용의 수염을 잡았는데, 수염이 뽑히어 떨어졌으며 황제의 활도 떨어졌다. 백성들은 모두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우러러 보면서, 곧 그의 활과 용의 수염을 끌어안고서 통곡했다. 이 때문에 후세에 그곳을 정호(鼎湖)라고 일컫게 되었고, 그 활을 오호(烏號)라고 불렀다.”

이에 천자가 말했다. “아! 내가 참으로 황제처럼 승천할 수 있다면, 나는 처자와 헤어지는 것을 해진 짚신을 버리듯이 했을 것이다.” 곧 공손경을 낭관(郎官)에 임명하고, 그를 동쪽의 태실산으로 보내어 신선을 기다리게 했다.

황상은 드디어 옹주에 가서 교사를 지내고, 농서군(隴西郡)에 도달하자 서쪽으로 공동산(空桐山)에 오른 뒤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사관 관서(寬舒) 등에게 태일신의 제단을 세우되, 제단은 박유기(薄謬忌)의 의견에 따라 태일단을 3층으로 나누게 했다.

제일층은 태일단이고 그 아래에 오제의 제단을 빙 둘러싸듯 배치했는데, 오제가 각기 주관하는 방위에 맞추었는데, 단지 중앙 방위의 있는 황제(黃帝)의 제단은 서남쪽에 두고 여덟 갈래로 귀신과 왕래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태일단에서 지낼 때의 사용하는 것은 옹주의 치(畤)에 올렸던 것과 서로 같게 하였고, 감주, 대추, 말린 고기 등을 추가하고, 또 검정 소 한 마리를 잡아 제물로 바치게 했다.

그러나 오제를 제사 지낼 때는 통상적인 제물과 감주만을 바치게 했다. 제단 아래 사방의 땅은 오제를 수행하는 뭇 신들과 북두칠성을 신위를 늘어놓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가 끝나면 제사 지내고 남은 고기를 모두 태웠다. 제사에 제물로 바친 소는 흰색이었고, 사슴은 소의 뱃속에, 돼지는 사슴의 뱃속에 넣은 다음에 물에 담가두고 삶았다.

해에게 제사 지낼 때는 소를 사용하고, 달에게 제사 지낼 때는 숫양 혹은 수퇘지 한 마리를 사용했고, 태일신의 축관(祝官)은 자색과 오색의 수를 놓은 옷을 입었으며, 오제의 축관은 각기 오제가 주관하는 방위의 색에 따랐으며, 해에 제사지내는 축관은 적색의 의복을 입었으며, 달에게 제사지내는 축관은 백색 의복을 입었다.

11월 신사(辛巳) 초하루 아침 동짓날, 해가 뜰 무렵 천자가 교외로 가서 태일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에는 태양신을 맞이했고, 저녁에는 달 신을 맞이했는데, 읍례(揖禮)을 행했으며, 태일신을 제사할 때는 옹주에서 교제를 지낼 때의 의례와 같이했다.

그 제사의식을 진행하는 자가 이렇게 아뢰었다. “천신(天神)께서 처음으로 보정과 신책(神策)을 황제에게 내리시고, 초하루가 지나가면 다시 초하루가 찾아오고, 끝났다가 다시 시작하는 것이니, 황제는 공경스럽게 천신에게 절하고 삼가 뵙도록 하시죠.”

예복은 황색을 입었다. 제사 지낼 때에 제단에 횃불을 가득히 밝히고, 제단 곁에는 제물 기구들을 두었다. 이때 한 주관 관리가 말했다. “제단 위에서 광채가 납니다.”

이에 공경대신들은 말했다. “황제께서 처음 운양궁(雲陽宮)에서 태일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 주관 관리들이 큰 옥과 크고 훌륭한 희생을 바치자, 그날 밤 하늘에는 아름다운 광채가 나타나 다음날 낮까지 지속되었고, 황기(黃氣, 황색의 기운으로 천자를 지칭하고, 길조를 뜻함)가 치솟아 하늘까지 이어졌습니다.”

태사공과 축관 관서 등이 아뢰었다. “이것은 신령이 아름다운 명령으로 하늘이 보우하여 복을 내릴 길조이니, 마땅히 이 광채가 나타난 곳에 태일신단을 세워 길조에 호응해야 합니다.

황제께서는 태축에게 명령을 내려 매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제사를 지내고, 3년에 한 차례 천자께서 친히 교외에 가서 제사를 지내셔야 합니다.”

이해 가을, 남월(南越)을 정벌하기 위해, 태일신에게 기도하면서 고했는데, 모형(牡荊, 마편초과에 속한 가시나무의 일종)로 깃대로 삼고 깃발에는 해와 달, 북두칠성과 비룡을 그려놓아 태일삼성(太一三星)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태일봉기(太一鋒旗)로 삼고는 ‘영기(靈旗)’라고 불렀다. 출병하는 기도를 드릴 때는 태사(太史)가 이것을 들고 정벌하는 나라를 가리켰다.

그리고 오리장군은 황제의 사자가 되었지만 감히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고 태산으로 가서 제사를 지냈다. 황상은 사람을 시켜 뒤따라가서 살펴보게 했는데, 실제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오리장군은 그의 스승을 보았다는 망언을 일삼았고, 그의 방술은 이미 다 써서 대부분 영험이 없게 되자 마침내 황상은 그를 주살해 버렸다.

이해 겨울, 공손경은 하남(河南)에서 신선을 맞이하려고 기다렸다가 구지성(緱氏城) 위에서 선인의 발자국을 보았고, 마치 꿩과 같은 신물이 성위를 왕래한 것 같았다고 아뢰었다.

이에 천자가 친히 구지성 위에 가서 그 발자국을 보고, 공손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문성과 오리장군을 모방한 것인가?” 공손경은 대답했다. “신선은 군주를 찾는 것이 아니니, 군주가 신선을 찾아야 합니다.

때문에 시간을 넉넉히 두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지 아니하면 신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선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마치 현실에 맞지 않고 터무니없는 것 같으나 세월이 지나야만 신선을 불러 올 수 있습니다.”

이에 각 군(郡)과 국(國)은 도로를 말끔하게 정비하고 궁실, 도관, 명산의 신들의 사당 등을 보수하여 황제의 왕림을 기다렸다.

그해 봄, 이미 남월을 멸망시킨 후에 황상이 총애하는 신하인 이연년(李延年)은 좋은 음악을 지어 바치기 위해 천자를 알현했다. 황상은 그의 음악이 좋다고 하면서, 공경들에게 의논하라고 명령을 내리며 말했다. “민간의 제사에도 북을 치고 춤추는 음악이 있는데, 지금의 교사를 지낼 때에는 도리어 음악이 없으니, 이 어찌 걸맞겠소?”

공경대신들은 이렇게 아뢰었다. “고대에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 지낼 때 모두 음악이 있어야만 신령이 비로소 제사를 흠향하러 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아뢰었다. “태제(太帝)가 소녀(素女)에게 50현의 거문고를 타게 했는데, 곡조가 너무 슬퍼서 태제가 중단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그 거문고를 갈라서 25현의 거문고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남월을 국경의 요새로 삼고, 태일신과 후토신에게 제사 지낼 때에 악무(樂舞)를 사용하고 노래를 첨가했으며, 더불어 25현의 거문고 외에 공후(箜篌), 금슬(琴瑟) 등이 이때부터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듬해 겨울, 신하들이 상의하여 아뢰었다. “고대에는 먼저 병기를 거둬들이고 군대를 해산시킨 연후에 봉선을 행했습니다.” 이에 황제는 북쪽으로 삭방을 순시하며 10여 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는 길에 교산(橋山)에 있는 황제(黃帝) 무덤에 제사 지내고, 수여(須如)에서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천자가 이렇게 말했다. “황제(黃帝)가 죽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지금 여기에 무덤이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혹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황제가 이미 신선이 되어 승천하자, 군신들이 그의 의관(衣冠)을 묻었던 것입니다.”

천자는 감천궁에 도착하자 태산에 가서 봉선하기 위해 먼저 태일신에게 유사(類祠, 상제에게 유례(類禮)로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

보정을 얻은 후부터, 황상은 공경대부 및 여러 유생들과 봉선을 거행하는 일에 대해서 상의했다. 봉선은 매우 드물게 거행했고, 제사가 끊긴 지 아득하게 멀고 오래되어, 그 예법에 대해서 상세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유생들은 『상서(尙書)』, 『주관(周官)』, 「왕제(王制)」에 기록되어 있는 망사(望祠, 제사 명칭으로 멀리서 산천에 지내는 제사인데, 주로 오악(五嶽), 사진(四鎭), 사독(四瀆)에 지냄)와 사우(射牛, 고대 제왕, 제후가 천지, 종묘에 드리는 제사)의 고사에 의거해서 봉선할 것을 건의했다.

제나라 사람 정공(丁公)은 이미 나이가 90여 세였는데 이렇게 아뢰었다. “봉선이란 것은 죽지 않는다는 이름과 부합합니다. 진시황은 태산에 오르던 도중에 비를 만나서 하늘에 제대로 봉선을 거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반드시 태산에 올라가신다면, 조금 더 올라가서 폭풍우가 없을 때에 곧 바로 산 위에서 봉선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천자는 즉시 유생들에게 사우의 예의를 연습하게 명령하고 봉선 의식에 대한 초고를 작성하게 했다. 몇 년 후, 마침내 봉선을 거행할 때에 이르렀다.

천자는 공손경과 방사들에게서 황제(黃帝) 이전에 봉선을 행할 때, 모두 기이한 신물을 불러와 신과 상통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천자는 황제(黃帝)를 본받고 싶어서 신선, 봉래 방사를 불려와 신선을 맞이하려 했고, 세속을 초월하여 구황(九皇)의 덕에 버금가게 하고자 했다.

그리고 유가의 학술을 채용해 봉선의 글을 짓게 했다. 하지만 유생들은 봉선의식에 대해 분명히 밝히지 못했고, 또한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고문에 얽매여 자신들의 견해를 풀어내지 못했다.

이에 천자는 봉선을 행할 때 사용하는 제기들을 여러 유생들에게 보여주자, 유생들 중 어떤 사람이 아뢰길 “고대의 것과는 다릅니다.”라고 했고, 서언(徐偃)은 또 아뢰길 “태상(太常)의 생원들이 행하는 예의는 노(魯)나라의 것보다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주패(周覇)가 별도로 봉선의 일에 대한 계획을 꾸미자, 천자는 서언과 주패를 파면하고, 유생들을 모조리 등용하지 않았다.

3월, 드디어 천자는 동쪽으로 행차하여 구지현에 도달하여 중악(中嶽) 태실산(太室山, 숭산)에 올라 제사를 지냈다. 이때 천자의 시종하던 관리들은 산 아래에서 “만세”라고 외치는 듯한 소리를 듣고, 산 위에 사람들에게 물으니, 산 위에서 그런 소리를 외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산 아래 사람들에게 물으니 산 아래에서 그런 소리를 외치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천자는 인근의 민가 3백 호(戶)로 하여금 태실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이 지역을 숭고읍(崇高邑)이라고 명명했다.

이어서 동쪽으로 행차하여 태산에 올랐는데, 그 때에 태산 위에는 아직 초목이 나기 전이라 그 틈을 타서 사람들에게 돌을 운반해 태산의 정상에 세우라고 명했다.

중악 숭산(태실산)

천자는 동쪽으로 순행하여 바닷가에 이르러 팔신(八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제나라 사람들이 기괴한 방술로써 상소를 올린 자가 만 명에 이르지만 영험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에 천자는 더욱 많은 배를 내보내고, 바다에 신선이 있다고 말하는 수천 명에게 봉래산의 신인(神人)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공손경은 부절을 지니고서 먼저 가서 명산에서 신선과 천자의 어가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가 동래(東萊)에 도착해 밤에 이상한 거인을 보았는데, 그는 키가 몇 장이 되었고, 다가가니 곧 사라져 버렸다.

단지 그곳에는 매우 큰 발자국이 남아있었는데, 그 형상이 마치 짐승의 족적처럼 매우 컸다. 이때에 여러 신하들이 한 노인이 개를 데리고 “나는 신공(臣公, 천자)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고 했다.

천자가 큰 발자국을 보고도 믿지 못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노인의 일을 말하자, 비로소 그자가 바로 선인임을 깊게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상에 머물면서 신선을 기다리면서 방사들에게 역참에서 수레를 갈아탈 수 있게 해 주고, 그 사이에 수천 명의 사자를 파견하여 신선을 찾도록 하였다.

4월에 바닷가에서 봉고현(奉高縣)으로 돌아왔다. 천자는 뭇 유생들과 방사들이 말하는 봉선에 대한 견해가 각기 다르고, 이치에 맞지 않아 시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천자는 양보산(梁父山)에 돌아와서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을묘일(乙卯日)에 시중과 유생들에게 흰 가죽으로 만든 관을 쓰고 띠를 두른 예복을 입고 홀을 들게 하고, 사우(射牛)의 예식을 행하라고 명했다. 천자는 또 태산 아래의 동쪽 산기슭에 봉토를 쌓고 태일신에게 지내는 의식대로 교사를 지냈다.

봉토의 넓이가 1장 2척이며, 높이는 9척이 되었는데, 그 아래에 옥첩서(玉牒書, 봉선서)를 놓았는데, 글의 내용은 비밀로 하여 사람들이 모르게 했다.

제례가 끝나자, 천자는 홀로 시중봉거(侍中奉車) 곽자후(霍子侯)와 태산에 올랐는데, 태산 정상에서 봉토의 예식을 행했으나, 이 일에 대해선 일절 밖으로 전해지는 것을 금하게 했다.

다음날, 산의 뒤쪽인 북쪽 길로 하산했다. 병진일에 태산 기슭 아래 동북쪽의 숙연산(肅然山)에서 지신에게 제사 지냈는데, 그 제례의식은 후토신에게 제사 지낼 때와 같았다. 천자는 모두 친히 제사 지냈는데, 황색 의복을 입었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또한 강(江), 회(淮) 일대에서 생산되는 세모 띠풀로 신의 멍석을 만들어 사용했다. 봉토는 오색의 흙을 사용해 더욱 단단하게 메웠다. 또 아주 먼 지방에서 조공으로 바친 진귀한 들짐승, 날짐승과 흰 꿩 등을 산림에 풀어놓아, 제례의 신성한 분위기를 더했다.

외뿔소, 야크, 코뿔소, 코끼리 등의 동물들은 산림에 풀어 놓을 수가 없어서 모두 태산으로 가져가서 후토신에게 제사지냈다. 봉선의식을 행하는 곳에는 밤에 광채가 출현했으며, 낮에는 흰 구름이 제단 가운데서 솟아올랐다.

천자가 봉선을 지내고 돌아온 후에 명당(明堂)에 앉자, 군신들은 돌아가면서 천자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이에 천자는 어사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짐은 보잘 것 없는 몸으로 지존의 자리를 계승하여 언제나 소임을 다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했다. 짐은 덕도 부족하고 예악에도 밝지 못하다.

그래서 태일신에게 제사 지낼 때에도 광채가 나는 징조가 출현하면 초조하게 바라보고, 또 은연중에 기이한 신물을 보면 놀라서 중도에 예식을 멈추고 싶었으나 또 신령에게 죄를 지는 것이 두려워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드디어 태산에 올라 봉선의식을 거행했고, 양보산에 이른 후에 숙연산에서 지신에게 제사 지냈다. 이제부터 스스로 새로운 마음으로 사대부들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려 하니, 특별히 백성들에게는 백 가구당 소 한 마리와 술 10석을 내리고, 나이 80세 이상인 노인과 고아와 과부에게는 베와 비단 두 필씩을 하사하라.

또 박(博), 봉고(奉高), 사구(蛇丘), 역성(歷城) 등 네 현(縣)의 금년 조세를 면제하고, 천하에 대사면을 행하는데, 을묘년의 사면 때와 똑같이 하여라. 짐이 행차했던 지방은 노역시키는 형벌을 집행하지 말고, 2년 이전에 범법한 사람에 대해 형을 판결하지 말라.”

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고대의 천자는 매 5년마다 한 차례 순수를 하면서 태산에 올라 천지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제후들도 모두 조현하면서 머물 숙소가 있었다. 지금부터 제후들은 각기 태산 아래에 머물 숙소를 짓도록 하라.”

천자가 이미 태산에서 봉선을 마친 후에도 비와 바람의 재앙이 없었다. 이 때문에 방사들이 봉래산 등의 신선들을 머지않아 상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뢰자, 천자는 기뻐해 어쩌면 신선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알고, 바로 다시 동쪽으로 가서 바닷가에 이르러 관망하면서 봉래산의 신선을 만나기를 고대했다.

봉거 곽자후(霍子侯)가 갑자기 병에 얻어 하루 만에 죽었다. 천자는 그곳을 떠나 바닷가를 따라 북상해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렀고, 요서(遼西)로부터 순찰하여 북부의 변새 지방을 거쳐 구원(九原)에까지 이르렀다.

5월에는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관리들은 보정이 출토되었던 그해 연호를 원정(元鼎)이라고 삼았으니, 올해는 봉선을 거행했기 때문에 마땅히 원봉(元封) 원년으로 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그해 가을, 혜성이 동정성(東井宿) 가운데서 출현했다. 10일 후에는 다시 삼태성(三能星) 부근에서 출현했다. 기상을 관측했던 왕삭(王朔)이 이렇게 아뢰었다. “신이 혼자 하늘의 기상을 관측하고 있었는데, 그 혜성이 출현했을 때의 형상은 박 같더니, 잠시 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주관 관원들이 모두 아뢰었다. “폐하께서 한 왕조 처음으로 봉선의 의식을 거행하시니, 아마도 하늘이 덕성(德星)을 출현시켜 보답하는 것입니다.”

다음해 겨울, 천자는 옹주에서 오제에게 교사를 지내고, 돌아온 후에 태일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축원을 올렸다. 제사를 주관하는 관리가 축송을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덕성이 찬란하게 빛난 것은 길상이옵니다. 또 수성(壽星)도 함께 출현하여 빛을 널리 비추었습니다. 신성(信星, 토성)도 밝게 출현하였으니, 황제는 태축이 차려놓은 제사에서 신령에게 공경하게 절을 올리도록 하옵나이다.”

그해 봄, 공손경은 동래산에서 신선을 보았는데 은밀하게 그에게 “천자를 만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에 천자는 구지성으로 행차해서 공손경을 중대부(中大夫)로 임명했다. 뒤이어 동래산에 가서 며칠 머물렀지만 어떤 것도 보지 못했고, 단지 거인의 발자국만 보았다는 말만 들었다.

그러자 천자는 다시 방사들을 파견해 신선을 찾고, 영지선약 등을 캐오도록 하였는데, 그 수가 일천여 명에 달했다.

이해에 가뭄이 들었기 때문에 천자는 지방을 순행할 명분이 없게 되자, 만리사(萬里沙)에 가서 기우제를 지낸 다음 명분으로 나와서 태산에 들러 제사를 지냈다.

돌아올 때 호자(瓠子)에 도착해 친히 하수의 터진 곳을 들러, 이틀을 머물면서 하신(河神)에게 침제(沉祭, 제품을 강물 속에 빠뜨려 바치는 제사)를 올리고 떠났다.

그리고 두 명의 상경(上卿)에게 장졸들을 통솔해 하수의 터진 곳을 막게 했고, 하수의 두 개의 지류의 자리를 옮겨 우(禹)임금 시대의 옛 자취를 회복시켰다.

이때에 이미 양월(兩越, 남월(南越)과 동월(東越))을 멸망시켰는데, 월나라 사람 용지(勇之)가 이렇게 말했다. “월나라 사람은 귀신을 믿는 풍속이 있어 그 제사를 지낼 때에 모두 귀신을 볼 수 있고, 자주 효험을 봅니다.

옛적에 동구왕(東甌王)은 귀신을 공경하게 섬겼는데, 160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괴신을 섬기는 것이 태만해졌기 때문에 쇠약해진 것입니다.”

이에 천자는 월나라의 무사에게 월축사(越祝祠)를 세우데, 제대(祭臺)는 세우나 제단은 쌓지 말며, 천신(天神), 상제(上帝), 뭇 귀신들에게 제사 지내고, 계복(鷄卜, 닭 뼈로 치는 점)을 사용하여 길흉을 알아보도록 했다. 황제는 이를 믿어 월나라 방식의 제사와 계복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공손경이 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선을 보실 수 있었으나, 천자께서 너무 급하고 분주하게 왕래하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천자에서 도관을 건립하시고, 구지성에서처럼 말린 고기와 대추를 차려놓으시면, 신선은 마땅히 나타날 것이며, 또한 신선들도 누대에 거처하길 좋아할 것입니다.”

이에 황상은 장안에 비렴관(蜚廉觀)과 계관(桂觀)을 세우고 감천궁에 익수관(益壽觀)과 연수관(延壽觀)을 건조하여 공손경에게 천자의 부절을 지니고 제사 도구를 갖추어 놓고 신선을 맞이하게 했다.

또 곧 통천경대(通天莖臺)을 세우고, 그 아래에 제사 도구를 갖추고 신선들을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감천궁에 또 전전(前殿)을 세우고 궁전을 넓히기 시작했다.

여름, 감천궁의 방 중에서 영지(靈芝)가 자랐고, 천자는 이것은 친히 터진 하수를 막고 통천대를 세우자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나타나 이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감천궁의 방 안에 아홉 그루의 영지가 자라났으니, 천하에 대사면을 내리고, 노역을 시키는 형벌을 면제하도록 하라.”

그 다음해, 조선(朝鮮)을 정벌했다. 여름에 가뭄이 들었는데, 공손경이 이렇게 말했다. “황제(黃帝)께서 봉토를 쌓을 때 가뭄이 들었는데, 3년 동안 봉토가 말랐습니다.”

천자는 즉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하늘의 가뭄은 봉토를 마르게 하려는 뜻인가? 이제 천하 사람들은 모두 영성(靈星, 천전성(天田星)으로도 불리는데, 농사를 주관함)에 받들어 제사를 지내게 하라.”

다음해, 천자는 옹주에서 교사를 지내고, 회중(回中)의 도로를 따라 순찰했다. 봄에 명택(嗚澤)에 이르러 서하(西河)로부터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해 겨울, 황상은 남군(南郡)으로 순행하여, 강릉(江陵)에 도착한 후 동쪽으로 행차했다. 심현(灊縣)의 천주산(天柱山)에 올라 제사를 지내고, 그 산을 남악(南嶽)이라고 불렀다.

그런 다음에 배를 타고 장강(長江)을 따라 심양(尋陽)에서 종양(樅陽)으로 가는 도중에 팽려(彭蠡湖)를 경유하다가 연도에서 명산대천에 제사 지냈다.

다시 북쪽으로 낭야(琅邪)에 도착하여 해안을 따라 올라갔다. 4월 중순에 봉고현(奉高縣)에 이르러 태산 위에 봉토를 수리하고 정비했다.

처음에 천자가 태산에서 봉선을 지낼 때, 태산의 동북쪽에는 옛날에 지은 명당의 터가 있었는데, 주변의 지세가 험준하며 또한 좁았다. 황상은 봉고(奉高) 주변에 별도로 명당을 하나 더 짓고 싶었지만 어떤 규정으로 세울지 몰랐다.

제남(濟南) 사람 공옥대(公玉帶)가 황제(黃帝) 시기의 명당의 도면을 바쳤다. 명당의 도면에 따르면 가운데에 하나의 전당(殿堂)이 자리 잡고 있고, 사방에 담장이 없으며 지붕 위에는 띠풀로 덮여 있었다.

물과 통하게 되어 물이 궁의 울타리를 둘러있으며, 또 복도(複道)가 만들어져 있었다. 전당의 위에슨 누각이 있고, 서남쪽의 복도에서 대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이를 그 길을 곤륜도(昆侖道)라고 불렀다. 천자는 이 길을 따라 전당으로 들어가서 상제에게 제사 지내게 되어 있었다.

이에 황상은 봉고 문수(汶水)부근에 명당을 짓도록 명했는데, 공옥대가 지닌 명당도와 같도록 했다. 그 5년 후 이곳에서 다사 봉토를 수리하고 정비할 때에, 명당의 윗자리에서 태일신과 오제에게 제사 지냈고, 고황제(高皇帝)의 신주와 마주보게 하였다. 아랫방에서는 스무 마리의 희생물로 후토신에게 제사 지내도록 했다.

천자는 곤륜도를 통해 들어가서 명당에서 처음으로 제사를 지내는데, 교사를 지내는 예법과 같았다. 제사가 끝나면 당(堂) 아래에서 나뭇더미 위에 옥백과 희생을 올려놓고 이를 태워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황상은 또 태산에 올라 산꼭대기에서 비밀스런 제사를 지냈다. 태산 아래에서는 오제에게 각기 그 해당하는 방위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데, 단지 황제(黃帝)와 적제(赤帝)는 더불어 제사를 지냈고, 그 제사는 주관 관원이 받들어 모시게 하였다. 산 위에서 횃불을 켜서 들면 산 아래에서 서로 호응하여 횃불을 들게 하였다.

이년 후, 11월 갑자(甲子) 초하룻날 아침이 동지였는데, 역법을 추산하는 자가 이 날을 정통으로 삼았다. 그래서 천자는 친히 태산으로 행차해 명당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지냈지만 봉선의 예를 거행하지 않았다.

주관하는 관리가 축원하면서 아뢰었다. “하늘이 황제에게 태초의 역법을 주시어 주기가 다시 시작하는 것이 다함이 없으니, 황제는 태일신에게 경배(敬拜) 드립니다.”

그런 다음에 천자는 동쪽으로 행차하여 바닷가에 가서 신선을 찾으려던 방사들을 살펴보았는데, 어떠한 증거도 얻지 못했지만 더욱 사람을 늘려 신선을 찾으러 보내며, 신선을 만나기를 기대했다.

11월 을유일(乙酉日), 백량대(柏梁臺)에 화재가 발생했다. 12월 갑오(甲午) 초하룻날 천자는 친히 고리(高里) 선제(禪祭)에 가서 후토신에게 제사 지냈다. 이어 발해 연안에 도착해 봉래산의 신들에게 망사(望祠)를 지내고, 신선이 사는 곳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천자는 장안으로 돌아와 감천궁에서 조회를 보면서 백량대에서 화재가 난 까닭을 신하들에게 보고를 받았다. 이에 공손경이 이렇게 아뢰었다.

“황제(黃帝)께서는 청령대(靑靈臺)를 지으신 지 겨우 12일 만에 불타버지자 즉시 다시 명정(明庭)을 지으셨는데, 명정이란 바로 감천궁입니다.”

방사들도 고대의 제왕 가운데 감천에 도읍을 정한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그 후 천자는 감천궁에서 제후들의 알현을 받고, 감천에 제후들의 저택을 지었다. 이때에 용지(勇之)가 이렇게 아뢰었다.

“월(越) 지방의 풍속에 따르면 화재가 발생한 후에 다시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원래의 것보다 더욱 크게 지어, 재앙의 기운을 승복시킵니다.” 이에 건장궁(建章宮)을 지었는데, 그 규모가 천문(千門) 만호(萬戶)에 달했다.

전전(前殿)의 규모는 미앙궁(未央宮)보다 높았다. 그 동쪽에는 봉궐(鳳闕)이 있었는데, 그 높이가 20여 장(丈)이나 되었으며, 그 서쪽에는 당중지(唐中池)이 있었는데, 그 둘레가 십 리가 되는 호권(虎圈) 있었다.

그 북쪽에는 큰 연못을 파 놓고 그 가운데에 높이가 20여 장에 달하는 점대(漸臺)를 세웠다. 그 연못은 태액지(太液池)라고 불렀는데, 그 안에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호량(壺梁) 등의 도서와 바다 속의 신선과 거북, 물고기 등의 형상을 배치해 놓았다.

그 남쪽에는 옥당(玉堂), 벽문(璧門), 대조(大鳥) 등의 조각상을 만들어놓았다. 또한 신명대(神明臺), 정간루(井幹樓)를 세웠는데, 그 높이가 50장에 달했으며 천자의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여름에 한나라는 역법을 개정했는데, 매년 정월을 그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며, 다섯 가지 색 중 황색을 숭상하며 관명의 인장은 다섯 글자로 새기게 하고, 이해의 연호를 태초(太初) 원년으로 하였다.

이해에 서쪽으로 출병하여 대원(大宛)을 정벌했으며, 황충(蝗蟲, 메뚜기)가 크게 일어났다. 정부인(丁夫人)과 낙양 사람 우초(虞初) 등이 방술로써 흉노와 대원을 저주하는 제사를 지냈다.

다음해,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옹주의 오치(五畤)에 익힌 제물이 없고, 제사를 지낼 때에 향기 나는 제물을 갖추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이에 천자는 사관에게 명해 오치에 삶은 송아지는 바치도록 하고, 제물의 색깔은 오행이 상승(相勝)하는 원칙에 따라 배치하고, 제사에 사용하는 망아지는 나무로 만든 말로 대체하게 했다.

단지 5월의 상구제(嘗駒祭)나 천자가 친히 행차한 교사를 지낼 때에는 망아지를 희생을 사용하게 했고, 모든 명산대천의 제사에는 모두 나무 말로 대치했다. 천자가 친히 순행했던 곳의 제사에는 망아지를 썼고, 그 외의 의례는 예전과 똑같았다.

그 다음해, 천자는 동쪽으로 가서 바닷가를 순찰하고, 신선을 찾아 나섰던 방사들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효험을 본 자가 없었다. 어떤 방사가 이렇게 아뢰었다.

“황제(黃帝) 때에 5개의 성읍과 12개의 누대를 건축하고, 집기(執期)에서 신선을 맞이하려고 기다렸는데, 이를 ‘영년(迎年)’이라고 부릅니다.” 천자는 그가 말한 대로 누대를 짓고, 이를 ‘명년(明年)’이라 칭하고, 친히 그곳에 가서 상제에 제사를 지냈다.

공옥대가 이렇게 아뢰었다. “황제(黃帝) 때는 태산에만 봉선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풍후(風后), 봉거(封鉅), 기백(岐伯) 등이 모두 황제에게 동태산(東泰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범산(凡山)에서 지신에게 제사 지낼 것을 권했는데, 이는 하늘에서 제왕에게 내린 징조와 서로 부합하여 불로장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천자는 제사를 준비를 갖추라는 명을 내리고, 동태산에 왔으나 동태산은 너무 왜소하여 그 명성에 걸맞지 않으므로 사관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고, 그곳에서 봉선은 거행하지 않았다.

그 후 공옥대로 하여금 이곳에서 제사 주관하면서 신선을 기다리게 했다. 여름에 천자는 태산으로 돌아와 이전과 마찬가지로 5년에 한 번 봉선을 지냈고, 별도로 석려산(石閭山)에서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석려산은 태산 남쪽 기슭에 있었는데, 방사들이 그곳이 신선이 거주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천자는 그곳에 가서 친히 지신에게 추가로 제사를 지냈다.

5년이 지난 후, 다시 태산에 와서 봉선을 거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항산(恒山)에서 제사를 지냈다.

지금 천자가 시작한 일으킨 제례에는 태일사(泰一祠)와 후토사(后土祠)가 있으며, 매 3년마다 한 차례씩 천자가 친히 교사를 지내고, 한나라에서 시작한 봉선의 제도는 5년에 한 차례 거행했다.

박유기의 제의로 건립된 태일(太一) 및 삼일(三一), 명양(冥羊), 마행(馬行), 적성(赤星) 등의 다섯 사당은 관서(寬舒) 등의 축관이 주관해 매년 때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다.

여섯 제사는 모두 태축이 주관했다. 그밖에 팔신 가운데 여러 신들과 명년(明年), 범산(凡山) 등의 제사는 천자가 행차할 때 제사 지내고 떠나가면 제사 지내지 않는다. 방사들이 건립한 사당은 각자가 주관했고, 그 사람이 죽으면 곧 그만두고 사관은 주재하지 않았다.

기타 제사는 모두 이전의 관습에 따른다. 지금의 황상이 봉선을 시작한 후부터 12년 동안 오악(五嶽), 사독(四瀆)을 두루 일주하며 제사 지냈다. 방사들은 신선에게 제사 지내며 바다에 들어가서 봉래산을 찾아갔던 자들은 결국 아무것도 검증하지 못했다.

공손경과 같이 신선을 기다린 자는 또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신선을 만나 볼 수 있다고 변명했지만 증험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천자는 더욱 방사들의 괴이하고 허황한 말에 권태를 느끼고 싫어했으나, 그들의 농락이 끊이지 않아 진정한 방술을 지닌 신선을 만나기를 고대했던 것이다.

그 후로도 방사들 중에 신선과 제사에 대해 말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나, 그 효험이 어떠할 지는 눈에 보이는 듯하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황제를 따라 순행하면서 천지의 여러 신과 명산대천에 제사 지내고 또 봉선에도 참여했었다. 수궁에 들어가서 제사에 참여하고 신께 올리는 축문의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방사와 사관의 의도를 관찰했고, 물러나서 고대부터 귀신을 섬겼던 역사적인 일을 논술하였으며, 그 안팎의 사정을 모두 밝혀 두었다. 후세의 군자가 살펴보면 그 정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제사 지낼 때 제기, 옥, 폐백 등의 상세한 내용과 헌수의 제례의식에 대해서는 주관 관리들이 잘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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