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흥 소라리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함경남도 금야군에 있는 화려현의 치소로 추정되는 토성과 집터 · 무덤 등이 포함된 복합유적.
이칭
이칭
영흥소라리토성
유적
건립 시기
초기 철기시대
소재지
함경남도 금야군
내용 요약

영흥소라리유적은 함경남도 금야군에 있는 화려현의 치소로 추정되는 토성과 집터 · 무덤 등이 포함된 복합유적이다. 일제강점기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처음 조사되었으며, 광복 이후 북한에서 몇 차례 조사한 바가 있다. 다수의 낙랑계 청동 제품과 철 제품이 출토되었으며, 유물로는 세형동검의 검파두식과 동촉, 철부, 마구류 등의 철 제품이 확인된다. 영흥소라리유적은 한국식 동검 문화의 기반 위에 철기 문화와 중국 한대 문화의 복합된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정의
함경남도 금야군에 있는 화려현의 치소로 추정되는 토성과 집터 · 무덤 등이 포함된 복합유적.
발굴경위 및 결과

영흥소라리유적(永興所羅里遺蹟)은 지금의 함경남도 금아군 금야읍에서 동남쪽으로 약 6㎞ 떨어진 금야강 하류역 오른편 작은 언덕 위에 조성된 복합유적이다. 광복 후 북한학계가 조사했을 당시의 행정구역명은 영흥군 용강리이고 현재는 금야군 새동리에 해당하지만, 학계에서는 ‘영흥소라리토성’으로도 불린다.

영흥소라리유적이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인데, 현지에서 유물 발견 소식을 접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1922년에 현지 조사를 감행하여 관련 유물을 확인하였다. 당시 유물은 현재 도쿄대학교에 있으며, 유리건판과 측량도 등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영흥소라리유적은 광복 이후에도 몇 차례 조사되었다. 1956년 토성 부근의 언덕 하단부의 관개수로를 굴착하는 과정에서 토기 1점과 철편이 발견되었다. 지하 1.2m 정도 깊이였고 관련된 시설물은 없었다고 알려졌다. 철편으로 알려진 기물은 복원 과정에서 귀가 달린 솥으로 판명되었다. 토기는 전체적으로 회색을 띠며 정선된 점토로 성형되었고 노끈무늬흔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주1의 범주에 속하는 종류임을 알 수 있다.

이후 1963년 토성 안에서 농민들이 밭을 갈다가 다시 두 개의 귀가 달린 청동솥을 발견하였다. 흔히 동복이라고 불리는 형태의 기물이었다. 보고자는 이를 같은 시기 주2이나 주3에서 출토되는 주4와 같은 성격의 기물이라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두 차례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1974년 북한 사회과학출판사를 통해서 그 개략이 보고되었다.

형태와 특징

영흥소라리유적의 토성은 동서 290m, 남북 170m 정도의 부정형이며, 성의 내부에는 다수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흩어져 퍼져 있다. 토성의 동쪽 성벽은 일부 남아 있으며 무수한 한식 기와 조각들이 산재한다.

토성의 서남부에도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남쪽 성벽은 현재 흙이 깎여 남아 있지 않다. 토성 내부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우물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토성에서 가까운 곳에서 발견된 주5에서는 다수의 낙랑계 청동 제품과 철 제품이 출토되었다.

토성 내부의 8호 구덩이에서는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주6은 그 이전에 이루어진 원시 유적층을 뚫고 그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장방형 구덩이의 2m 깊이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교란이 심한 편이어서 층위 관계는 명확하지 않았다.

출토된 유물 중 동촉(銅鏃)이 총 14점인데 대부분 세모촉이고 등대 속이 빈 날개촉도 1점 포함된다. 동촉의 경부는 모두 철제인데 낙랑토성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청동제 경부의 동촉은 없다. 수레 부속으로서 주7)와 ‘乙’ 자형 동기 등이 있다.

철기도 많은 편인데 쇠도끼는 날 부분의 너비가 투겁도끼의 너비보다 좁은 것과 넓은 것이 특징으로 기술되었다. 보고서에서 확인되는 출토 쇠도끼는 총 4점으로 각 2점씩 그 형식이 다르게 분류된다.

먼저 길이가 짧은 소형 주조 쇠도끼는 인부가 주8에 비해 좁은 것이 특징이며, 단면은 장방형의 것이 많으나 제형으로 된 것도 확인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같은 형태의 쇠도끼는 ' 위원용연동유적'이나 ' 영변세죽리유적'의 고대층에서도 확인된 바 있어, 연대가 추정된다.

다른 형태의 쇠도끼는 두부가 파손되어 신부 일부와 인부가 남았는데, 두부 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특징이 확인된다. 부채꼴 모양으로 생긴 것인데, 보고자는 이러한 기형이 ' 대안태성리고분군'의 널무덤이나 목개널무덤, 덧널무덤에서 흔히 확인되는 형식으로 기술하였다.

토성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귀틀무덤 2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만, 무덤의 형태와 출토 유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공개된 자료에 기술된 출토 정황은 영흥소라리유적의 토성 내부에서 확인된 유구는 다양한 시간성을 반영하는 유구가 확인된 만큼, 토성이 기능하던 시기에 대한 대략적인 시기 추론의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영흥소라리유적은 한국식 동검 문화의 기반 위에 철기 문화와 중국의 한대(漢代) 문화가 복합된 양상을 보여 주며, 시기적으로는 서기전 1세기경에 해당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영동7현(嶺東七縣)의 하나인 화려현(華麗縣)의 치소(治所)로 추정되어 주목받았다.

실제로 성의 내부에서 한식(漢式)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에 영흥소라리유적은 화려현의 치소일 가능성이 있으며, 주변의 덧널무덤과 함께 당시 중국의 군현적 지배 방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논문

정인성, 「고고학으로 본 위만조선 왕검성」(『한국고고학보』 106, 한국고고학회, 2018)
정인성, 「일제강점기의 낙랑고고학」(『한국상고사학보』 71, 한국상고사학회, 2011)
『조선유적유물도감』 2(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88)
박진욱, 「함경남도일대의 고대유적조사보고」(『고고학자료집』 4, 사회과학출판사, 1974)
리순진, 「부조예군 무덤에 대하여」(『고고민속』 4, 사회과학원출판사, 1964)
한석정, 「함경남도지역에서 발견된 세형동검유적과 유물」(『문화유산』, 과학원출판사, 1961)
주석
주1

실내 가마에서 민무늬 토기보다 약간 높은 900℃ 정도의 고온으로 구워 기와처럼 회색을 띠는 약간 무른 토기.    우리말샘

주2

구덩이를 파서 널이나 덧널 따위를 쓰지 않고 직접 시체를 묻어 만드는 무덤.    우리말샘

주3

봉토 안에 네모진 긴 나무로 귀틀집을 짓는 방식으로 만든 무덤.    우리말샘

주4

화분처럼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져 턱이 지고 아가리보다 좁은 바닥이 납작하거나 들리게 만든 토기.    우리말샘

주5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직접 넣거나 목관이나 목곽에 시체를 넣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린 무덤.    우리말샘

주6

토기, 석기 따위의 고대 유물을 포함하고 있는 지층.    우리말샘

주7

수레의 좌석에 세우는 양산의 살대 끝에 끼우는 투겁 장식.    우리말샘

주8

도끼의 등에 만들어진 투겁 속에 자루를 끼워 쓰는 도끼.    우리말샘

집필자
정인성(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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