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설에 의하면 魏나라 장수 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 일설에 의하면 魏나라 장수 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沃沮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중국·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沃沮註 129·不耐註 130·韓註 131·濊註 132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王은 본래 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沃沮는 동해안에 있는 초기국가로서 臨屯國의 域內에 있다가 衛滿朝鮮代에는 그 세력권내에 있었다.
그후 漢 武帝의 侵入 이후 臨屯郡이 설치되었다가 그것이 폐지되어 玄菟郡에 병합되었으나, 정치적 구심력이 적어 高句麗 太祖王代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沃沮는 고구려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東沃沮라 하였으며, 『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에는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甫與濊貊接’이라 하고 있다. 沃沮의 地形을 ‘東北狹 西南長’이라 한 것은 ‘東西狹 南北長’으로 고쳐야 할 것이다.
즉, 沃沮의 地域은 오늘발의 입장에서 본다면 咸與 一帶를 중심으로 南은 定平에서 東濊와 접경하고, 北은 利原에서 北沃沮와 境界를 나눈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李丙燾, 「沃沮와 東濊」pp.228~229).
沃沮는 5千의 戶가 있으며, 각 邑落에는 渠帥들이 있어 스스로 三老라 하며 下戶를 통치 한다고 되어 있다.
이 나라는 土地는 비옥하지만 ‘國小 迫于大國(高句麗·樂浪)之間(『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이라는 정치적 불리성과 항상 고구려에 착취를 당하여 크게 발전될 수가 없었다. 더구나 先進中國文物을 受容할 수가 없었으며,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어 古代國家로 성장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 나라의 풍속에 특기할 것은 豫婦制(責錢婚)와 洗骨葬이다. 전자는 ‘女年十歲 巳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 (『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라 하여 일종의 責買婚이다.
후자는 ‘新死者皆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라 하여 死者를 일단 假埋葬한 후 다시 장례(매장)를 하는 것으로 특히 家族共同墓制의 일종이다.
<참조>
1.『三國志』東沃沮傳 註 2)
東沃沮
대체로 오늘날의 咸興에서 豆滿江에 이르는 지역에 비정된다. 沃沮란 말의 語源에 대해서『滿洲源流考』에서는 ‘森林’이라는 뜻의 滿洲語 ‘窩集(weji)'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원래 濊의 일부였던 夫租가 성장하여 沃沮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李丙燾, 「臨屯郡考」pp.206~207)
『三國史記』太祖王 4年條에서는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蕯水’라 하여 東沃沮가 A.D. 40年 高句麗에 복속되어 그 支配를 받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5 「高句麗本紀」3 太祖王 4年條.
『滿洲源流考』卷9 「疆域」2 沃沮·濊條.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2.『三國志』東沃沮傳 註 4)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東沃沮의 地形이 東北方으로는 狹小하고, 西南方으로는 길게 뻗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三國志』의 기록에 의거한『後漢書』 및 그 이후의 史書에는 모두 ‘東西狹 南北長’으로 되어 있다.
3.『三國志』東沃沮傳 註 17)
其嫁娶之法 …… 乃復還壻(豫婦制)
민며느리제도라고도 한다. 購買婚的 요소가 짙다. 高麗 및 朝鮮時代를 거쳐 금세기 초까지도 西北地方 일부에는 이러한 풍습이 남아 있었다. 또한 滿洲族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婚姻方式이 今世紀까지 존재하였다.
≪參考文獻≫
金斗憲, 『韓國家族制度硏究』1969.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Manchus』1924.
4.『三國志』東沃沮傳 註 18)
其葬作大木槨 …… 乃取骨置槨中
洗骨葬이라 불리는 것으로 複葬法의 일종이다. 洗骨葬은 예부터 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행해졌다. 석관묘와 옹관묘 같은 墓制에서도 그 내부 구조상으로 보아 일부 洗骨葬이 행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洗骨葬은 오늘날에도 서·남해안 및 도서지방, 일본의 오끼나와 등에 草墳이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예를 들어 전라도 해안 지방에서는 시체를 넣는 임시초옥을 草墳이라 하고, 대개 100일 내지 3년 후에 草墳을 열어 洗骨한다. 이것의 1次葬 형태에는 平地葬·平台葬·樹葬·假埋葬의 네 가지 유형이 있다.
≪參考文獻≫
李杜鉉, 『草墳』1973.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東沃沮條.
李丙燾, 「沃沮와 東濊」『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그후 漢 武帝의 侵入 이후 臨屯郡이 설치되었다가 그것이 폐지되어 玄菟郡에 병합되었으나, 정치적 구심력이 적어 高句麗 太祖王代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沃沮는 고구려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東沃沮라 하였으며, 『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에는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甫與濊貊接’이라 하고 있다. 沃沮의 地形을 ‘東北狹 西南長’이라 한 것은 ‘東西狹 南北長’으로 고쳐야 할 것이다.
즉, 沃沮의 地域은 오늘발의 입장에서 본다면 咸與 一帶를 중심으로 南은 定平에서 東濊와 접경하고, 北은 利原에서 北沃沮와 境界를 나눈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李丙燾, 「沃沮와 東濊」pp.228~229).
沃沮는 5千의 戶가 있으며, 각 邑落에는 渠帥들이 있어 스스로 三老라 하며 下戶를 통치 한다고 되어 있다.
이 나라는 土地는 비옥하지만 ‘國小 迫于大國(高句麗·樂浪)之間(『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이라는 정치적 불리성과 항상 고구려에 착취를 당하여 크게 발전될 수가 없었다. 더구나 先進中國文物을 受容할 수가 없었으며,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어 古代國家로 성장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 나라의 풍속에 특기할 것은 豫婦制(責錢婚)와 洗骨葬이다. 전자는 ‘女年十歲 巳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 (『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라 하여 일종의 責買婚이다.
후자는 ‘新死者皆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라 하여 死者를 일단 假埋葬한 후 다시 장례(매장)를 하는 것으로 특히 家族共同墓制의 일종이다.
<참조>
1.『三國志』東沃沮傳 註 2)
東沃沮
대체로 오늘날의 咸興에서 豆滿江에 이르는 지역에 비정된다. 沃沮란 말의 語源에 대해서『滿洲源流考』에서는 ‘森林’이라는 뜻의 滿洲語 ‘窩集(weji)'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원래 濊의 일부였던 夫租가 성장하여 沃沮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李丙燾, 「臨屯郡考」pp.206~207)
『三國史記』太祖王 4年條에서는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蕯水’라 하여 東沃沮가 A.D. 40年 高句麗에 복속되어 그 支配를 받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5 「高句麗本紀」3 太祖王 4年條.
『滿洲源流考』卷9 「疆域」2 沃沮·濊條.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2.『三國志』東沃沮傳 註 4)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東沃沮의 地形이 東北方으로는 狹小하고, 西南方으로는 길게 뻗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三國志』의 기록에 의거한『後漢書』 및 그 이후의 史書에는 모두 ‘東西狹 南北長’으로 되어 있다.
3.『三國志』東沃沮傳 註 17)
其嫁娶之法 …… 乃復還壻(豫婦制)
민며느리제도라고도 한다. 購買婚的 요소가 짙다. 高麗 및 朝鮮時代를 거쳐 금세기 초까지도 西北地方 일부에는 이러한 풍습이 남아 있었다. 또한 滿洲族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婚姻方式이 今世紀까지 존재하였다.
≪參考文獻≫
金斗憲, 『韓國家族制度硏究』1969.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Manchus』1924.
4.『三國志』東沃沮傳 註 18)
其葬作大木槨 …… 乃取骨置槨中
洗骨葬이라 불리는 것으로 複葬法의 일종이다. 洗骨葬은 예부터 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행해졌다. 석관묘와 옹관묘 같은 墓制에서도 그 내부 구조상으로 보아 일부 洗骨葬이 행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洗骨葬은 오늘날에도 서·남해안 및 도서지방, 일본의 오끼나와 등에 草墳이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예를 들어 전라도 해안 지방에서는 시체를 넣는 임시초옥을 草墳이라 하고, 대개 100일 내지 3년 후에 草墳을 열어 洗骨한다. 이것의 1次葬 형태에는 平地葬·平台葬·樹葬·假埋葬의 네 가지 유형이 있다.
≪參考文獻≫
李杜鉉, 『草墳』1973.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東沃沮條.
李丙燾, 「沃沮와 東濊」『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不耐는 不而縣으로 『漢書』 「地理志」의 樂浪郡 不而縣條에 ‘東部都尉治’라 하고, 『三國志』東沃沮傳에도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이라 한 것으로 보아 不而가 不耐이며 그곳이 곧 東部都尉治所이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光武帝 建武 6년(30)에 漢은 東部都尉를 혁파하고 渠帥로서 縣侯를 삼으니, 不耐는 侯國이 되어 漢에 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국세가 미약하여 高句麗에 복속되었다.
不耐의 위치에 대해서 李丙燾는 比列忽 즉, 安邊·通川 一帶로 비정하였다( 「臨屯郡考」p.201).
<참조>
『三國志』東沃沮傳 註 11)
不耐
『漢書』 「地理志」樂浪郡條에는 ‘不而’라 하였고, 『三國志』毌丘儉傳과 濊傳에는 不耐라 하였다. 『三國志』毌丘儉傳에 따르면 魏軍이 高句麗 東川王을 뒤쫓아 不耐에 이르러 紀功碑를 세웠다고 하나, 安邊·元山 일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해선 弗奈·佛訥和 등 不耐와 비슷한 지명을 근거로 毌丘儉傳의 不耐之城을 두만강 유역이나 瑚爾哈河 沿岸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不耐는 華麗와 함께 新羅에 침입하기도 하였고, A.D. 247年에는 그 長이 魏로부터 不耐濊王이라는 칭호도 받지만 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三國史記』에 언급된 濊王印, 경상북도 영일군 북단에서 발견된 ‘晋率善穢佰長’의 銅印은 不耐濊王과 같은 類인 濊의 君長에게 중국측이 내린 印緩 의 實例이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樂浪郡條.
安鼎福, 『東史綱目』附下 「地理考」不耐·華麗考.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梅原未治, 「晋率善穢佰長銅印」『考古美術』第8卷 1號, 1967.
≪參考文獻≫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樂浪郡 不而縣條.
『三國志』卷30 「東夷傳」東沃沮條.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光武帝 建武 6년(30)에 漢은 東部都尉를 혁파하고 渠帥로서 縣侯를 삼으니, 不耐는 侯國이 되어 漢에 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국세가 미약하여 高句麗에 복속되었다.
不耐의 위치에 대해서 李丙燾는 比列忽 즉, 安邊·通川 一帶로 비정하였다( 「臨屯郡考」p.201).
<참조>
『三國志』東沃沮傳 註 11)
不耐
『漢書』 「地理志」樂浪郡條에는 ‘不而’라 하였고, 『三國志』毌丘儉傳과 濊傳에는 不耐라 하였다. 『三國志』毌丘儉傳에 따르면 魏軍이 高句麗 東川王을 뒤쫓아 不耐에 이르러 紀功碑를 세웠다고 하나, 安邊·元山 일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해선 弗奈·佛訥和 등 不耐와 비슷한 지명을 근거로 毌丘儉傳의 不耐之城을 두만강 유역이나 瑚爾哈河 沿岸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不耐는 華麗와 함께 新羅에 침입하기도 하였고, A.D. 247年에는 그 長이 魏로부터 不耐濊王이라는 칭호도 받지만 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三國史記』에 언급된 濊王印, 경상북도 영일군 북단에서 발견된 ‘晋率善穢佰長’의 銅印은 不耐濊王과 같은 類인 濊의 君長에게 중국측이 내린 印緩 의 實例이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樂浪郡條.
安鼎福, 『東史綱目』附下 「地理考」不耐·華麗考.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梅原未治, 「晋率善穢佰長銅印」『考古美術』第8卷 1號, 1967.
≪參考文獻≫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樂浪郡 不而縣條.
『三國志』卷30 「東夷傳」東沃沮條.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이때의 韓은 漢江 以南의 옛 三韓故地를 말하며, 『三國志』韓傳의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을 뜻한다.
三韓 전체를 말하는 것은 統一新羅를 가리키는 바 『隋書』에 나타나는 新羅는 統一前이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辰韓을 뜻한다고 하겠다. 특히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三國志』 「東夷傳」辰韓條)’이기 때문에 이때의 韓이 辰韓을 지칭함은 확실하다. 물론 『舊·新唐書』에서 ‘弁韓之裔’라는 異說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류라 하겠다.
<참조>
1.『三國志』韓傳 註 2)
韓
三韓의 韓은 韓國民族을 中國人들이 지칭하였던 濊·貊·韓에 속하는 槪念이다. 흔히 云謂하는 바와 같이 漢人들은 濊貊과 아울러 남쪽의 우리 民族을 가르켜 韓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어떤 學者는 이 韓이라는 名稱이 箕子朝鮮에 대치된 韓氏朝鮮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pp.249~259) 即 準王이 南奔하면서 韓이라는 社會가 名稱上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남쪽의 住民을 가르켜 韓이라고 한 것이다.
地域的으로 北쪽에 있던 住民들을 濊와 貊으로 指稱한 것처럼 결국 南쪽에 있던 住民들은 韓으로 불리운 것이다. 이 경우에 자칫 韓이라는 社會가 北쪽의 濊·貊과 種族的으로나 文化的으로 크게 區別되는 사실로 파악된다면 이것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지난날 한때 우리나라 南쪽의 社會와 文化를 마치 異質的인 文化로 취급한 바 있지만 이는 韓國史를 연구하던 近代 초기에 日本學者를 비롯한 外國人들이 잘못 영향을 끼친 때문이었다.
≪參考文獻≫
李瀷, 『星湖僿說』卷1下 「三韓金馬」
韓百謙, 『東國地理志』
李晬光, 『芝峯類說』卷2 「諸國部」
申景濬, 『疆界志』 「目支國」· 「辰國考」
韓鎭書, 『海東繹史』續3 「地理考」
韓致奫, 『海東繹史』 「三韓總考」
安鼎福, 『東史綱目』附下 「辰國三韓說」
丁若鏞, 『我邦疆域考』3 「三韓總考」
申采浩, 「前後三韓考」『朝鮮日報』1925(『朝鮮史硏究草』1929); 『朝鮮上古史』1948, 鍾路書院.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1933, 改造社.
李丙燾, 「三韓問題의 新考察」『震檀學報』1·3·4·5·6·7·8卷, 1934~1937(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安在鴻, 『朝鮮上古史鑑』(上·下) 1947~48, 民友社; 「三韓國과 그 法俗」『韓國學硏究叢書』2卷, 1971, 成進文化社.
金庠基, 「韓·濊·貊 移動考」『史海』1948.
崔南善, 『朝鮮常識』1947~48, 東明社.
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十周年紀念論文集』1956.
金廷鶴, 「韓國民族形成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5, 高麗大出版部; 「魏志 韓傳小考」『釜山大文理大論文集』14, 1975.
金元龍, 「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考察」『東亞文化』7, 1967.
金貞培, 「辰國과 韓에 關한 考察」『金成植博士華甲紀念論叢』1968;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韓國民族文化의 起源』1973, 高麗大出版部;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의 諸問題-益山의 靑銅器文化와 관련하여-」『韓國史硏究』13, 1976; 「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百濟文化』12, 1979;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三韓攷 第1部-」『史學硏究』26, 1975;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三韓攷 第2部-」『震檀學報』41,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上·下)-三韓攷 第3部-」『韓國學報』2·3合輯, 1976.
李賢惠, 「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歷史學報』69, 1976(『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1984) : 「馬韓 小國의 形成에 대하여」『歷史學報』92,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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稻葉岩吉, 「魏志弁辰傳の瀆盧國與倭接界は如何に讀むべきか」『考古學雜誌』5卷 4號,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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坪井九馬三, 「三韓考」『史學雜誌』34編 9號, 1923; 「三韓古地名考」『史學雜誌』35編 2號, 1924; 「朝鮮古地名の二三に就て」『史學雜誌』38編 8號, 1927.
鮎貝房之進, 「三韓古地名考補正考讀む」『史學雜誌』36編11號, 1925; 「韓·三韓」『雜攷』7輯 上卷, 1938.
白鳥庫吉, 「朝鮮古代諸國稱考」『史學雜誌』48編 7號, 1937.
今西龍, 「百衲本史記の朝鮮傳について」『朝鮮古史の硏究』1970, 圖書刊行會.
鐵甚平, 『三韓昔がたり』1942, 學習社, 東京.
三品影英, 「史實と考證-魏志東夷傳の辰國と辰王-」『史學雜誌』55編 1號, 1944.
末松保和, 「魏志韓人傳寸考」『歷史學月報』11卷, 1951.
三上次男, 「古代の南朝鮮-諸韓國の發達と辰王政權の成立-」『邪馬台國』1954, 朝倉書店(『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宮崎市定, 「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輯, 1959.
2.『三國志』韓傳 註 5)
辰韓
辰韓은 그 社會의 母胎가 ‘秦之亡人’이란 記事가 밝혀주고 있듯이 北朝鮮(樂浪) 方面에서 南下한 流移民으로서 형성되었던 나라이다.
이에 李丙燾는 韓의 명칭은 朝鮮王 準의 南來 以後로부터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여 北來流移民社會 全體를 「韓」 혹은 「辰韓」이라 일컬었다고 파악하였다. 즉, 그는 辰의 東北界인 流移民社會가 韓王 準이래로 「韓」이라 일컬어 「辰王」의 保護와 支配下에 있었으므로, 樂浪의 漢人들로부터 「辰韓」의 一名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다.( 「三韓問題의 硏究」pp.238~299)
辰韓의 位置는 현재 慶尙道의 洛東江 東쪽으로 비정되어지고 있으나, 현재 辰韓을 漢江 流域에 비정하는 새로운 견해도 있다.(李丙燾, 앞의 논문, pp260~277)
≪參考文獻≫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韓條.
『隋書』卷81 「東夷列傳」新羅條.
『舊唐書』卷199上 「東夷列傳」新羅條.
『新唐書』卷220 「東夷列傳」新羅條.
三韓 전체를 말하는 것은 統一新羅를 가리키는 바 『隋書』에 나타나는 新羅는 統一前이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辰韓을 뜻한다고 하겠다. 특히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三國志』 「東夷傳」辰韓條)’이기 때문에 이때의 韓이 辰韓을 지칭함은 확실하다. 물론 『舊·新唐書』에서 ‘弁韓之裔’라는 異說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류라 하겠다.
<참조>
1.『三國志』韓傳 註 2)
韓
三韓의 韓은 韓國民族을 中國人들이 지칭하였던 濊·貊·韓에 속하는 槪念이다. 흔히 云謂하는 바와 같이 漢人들은 濊貊과 아울러 남쪽의 우리 民族을 가르켜 韓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어떤 學者는 이 韓이라는 名稱이 箕子朝鮮에 대치된 韓氏朝鮮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pp.249~259) 即 準王이 南奔하면서 韓이라는 社會가 名稱上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남쪽의 住民을 가르켜 韓이라고 한 것이다.
地域的으로 北쪽에 있던 住民들을 濊와 貊으로 指稱한 것처럼 결국 南쪽에 있던 住民들은 韓으로 불리운 것이다. 이 경우에 자칫 韓이라는 社會가 北쪽의 濊·貊과 種族的으로나 文化的으로 크게 區別되는 사실로 파악된다면 이것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지난날 한때 우리나라 南쪽의 社會와 文化를 마치 異質的인 文化로 취급한 바 있지만 이는 韓國史를 연구하던 近代 초기에 日本學者를 비롯한 外國人들이 잘못 영향을 끼친 때문이었다.
≪參考文獻≫
李瀷, 『星湖僿說』卷1下 「三韓金馬」
韓百謙, 『東國地理志』
李晬光, 『芝峯類說』卷2 「諸國部」
申景濬, 『疆界志』 「目支國」· 「辰國考」
韓鎭書, 『海東繹史』續3 「地理考」
韓致奫, 『海東繹史』 「三韓總考」
安鼎福, 『東史綱目』附下 「辰國三韓說」
丁若鏞, 『我邦疆域考』3 「三韓總考」
申采浩, 「前後三韓考」『朝鮮日報』1925(『朝鮮史硏究草』1929); 『朝鮮上古史』1948, 鍾路書院.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1933, 改造社.
李丙燾, 「三韓問題의 新考察」『震檀學報』1·3·4·5·6·7·8卷, 1934~1937(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安在鴻, 『朝鮮上古史鑑』(上·下) 1947~48, 民友社; 「三韓國과 그 法俗」『韓國學硏究叢書』2卷, 1971, 成進文化社.
金庠基, 「韓·濊·貊 移動考」『史海』1948.
崔南善, 『朝鮮常識』1947~48, 東明社.
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十周年紀念論文集』1956.
金廷鶴, 「韓國民族形成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5, 高麗大出版部; 「魏志 韓傳小考」『釜山大文理大論文集』14, 1975.
金元龍, 「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考察」『東亞文化』7, 1967.
金貞培, 「辰國과 韓에 關한 考察」『金成植博士華甲紀念論叢』1968;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韓國民族文化의 起源』1973, 高麗大出版部;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의 諸問題-益山의 靑銅器文化와 관련하여-」『韓國史硏究』13, 1976; 「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百濟文化』12, 1979;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三韓攷 第1部-」『史學硏究』26, 1975;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三韓攷 第2部-」『震檀學報』41,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上·下)-三韓攷 第3部-」『韓國學報』2·3合輯, 1976.
李賢惠, 「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歷史學報』69, 1976(『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1984) : 「馬韓 小國의 形成에 대하여」『歷史學報』92, 1981.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津田左右吉, 「三韓疆域考」『朝鮮歷史地理』卷1, 1913.
稻葉岩吉, 「魏志弁辰傳の瀆盧國與倭接界は如何に讀むべきか」『考古學雜誌』5卷 4號, 1914.
那珂通世, 「三韓考」『外交繹史』卷2, 1915; 「三韓朝貢志」『那珂通世遺書外交繹史』4號, 1915; 「朝鮮古史考」『史學雜誌』47編 3號~49編 10號, 1936~1938.
坪井九馬三, 「三韓考」『史學雜誌』34編 9號, 1923; 「三韓古地名考」『史學雜誌』35編 2號, 1924; 「朝鮮古地名の二三に就て」『史學雜誌』38編 8號, 1927.
鮎貝房之進, 「三韓古地名考補正考讀む」『史學雜誌』36編11號, 1925; 「韓·三韓」『雜攷』7輯 上卷, 1938.
白鳥庫吉, 「朝鮮古代諸國稱考」『史學雜誌』48編 7號, 1937.
今西龍, 「百衲本史記の朝鮮傳について」『朝鮮古史の硏究』1970, 圖書刊行會.
鐵甚平, 『三韓昔がたり』1942, 學習社, 東京.
三品影英, 「史實と考證-魏志東夷傳の辰國と辰王-」『史學雜誌』55編 1號, 1944.
末松保和, 「魏志韓人傳寸考」『歷史學月報』11卷, 1951.
三上次男, 「古代の南朝鮮-諸韓國の發達と辰王政權の成立-」『邪馬台國』1954, 朝倉書店(『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宮崎市定, 「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輯, 1959.
2.『三國志』韓傳 註 5)
辰韓
辰韓은 그 社會의 母胎가 ‘秦之亡人’이란 記事가 밝혀주고 있듯이 北朝鮮(樂浪) 方面에서 南下한 流移民으로서 형성되었던 나라이다.
이에 李丙燾는 韓의 명칭은 朝鮮王 準의 南來 以後로부터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여 北來流移民社會 全體를 「韓」 혹은 「辰韓」이라 일컬었다고 파악하였다. 즉, 그는 辰의 東北界인 流移民社會가 韓王 準이래로 「韓」이라 일컬어 「辰王」의 保護와 支配下에 있었으므로, 樂浪의 漢人들로부터 「辰韓」의 一名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다.( 「三韓問題의 硏究」pp.238~299)
辰韓의 位置는 현재 慶尙道의 洛東江 東쪽으로 비정되어지고 있으나, 현재 辰韓을 漢江 流域에 비정하는 새로운 견해도 있다.(李丙燾, 앞의 논문, pp260~277)
≪參考文獻≫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韓條.
『隋書』卷81 「東夷列傳」新羅條.
『舊唐書』卷199上 「東夷列傳」新羅條.
『新唐書』卷220 「東夷列傳」新羅條.
濊는 沃沮의 남쪽에 있는데 『三國志』濊傳에 의하면 ‘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이라 하여 沃沮보다는 큰 나라였다.
사회·법 속은 沃沮와 비슷하지만,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捐棄舊宅更作新居 …… (中略) ……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三國志』濊傳)
라 하여 몇가지 특이한 내용이 있었다.
우선 山川을 중시하여 排他的인 生活區域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활영역은 古代의 聚落이 발생하는 배경이 되는 것으로 祭祀·宗敎·血緣·親族·Totem·山神共同體이며, M. Weber가 지적한 ‘地域的 小宇宙’이다. 또한 Durkheim의 지적에 따르면 그것은 환절적 조직일 수도 있고, 후세에는 貢納團體로서의 뜻을 지닐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배타적인 생활구역은 邑落이 되어 氏族·部族의 구별이 되는 것으로서,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이었다(Raymond Firth, 『Element of Social Organization』p.53).
그리스 polis의 경우에도 城邑을 중심으로 한 群少 Polis들이 각기 土豪인 首長을 받들고 할거하여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하였을 것이며, 祭祀共同體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梁秉祐, 「Synoikismos考」pp.24~25).
다음의 同姓不婚은 族外婚(Exogamy)을 뜻하는 것으로 Totemism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舞天은 秋收共同大祭로서 部落祭의 성격을 띤 것이다. 특히 호랑이를 神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서 북방계열의 토착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
<참조>
1.『三國志』濊傳 註 2)
濊
濊의 종족적 계통과 濊·貊·濊貊의 상호관계에 관해선 다수의 논고가 있다. 이를 크게 大別해 보면 濊·貊同種說과 濊·貊異種說로 나뉘어진다. 前者로는 일찍이 丁若鏞이 貊은 種族名이고 濊는 地名 또는 水名이라고 보아, 濊貊은 九貊 중의 一種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疆域考』 「濊貊考」) 凌純聲도 濊는 濊水地域에 거주하였던 貊族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를 하였다. (『松花江下游的赫哲族』p.30)
三品彰英은 先秦文獻上의 貊은 北方族에 대한 汎稱이며, 濊는 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漢代의 汎稱的인 濊는 고구려·부여·東濊를 포괄하는 民族名이고, 濊貊이라는 熟語的인 호칭은 濊라는 현실적인 民族名과 古典的인 北族에 대한 汎稱인 貊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보고, 고구려를 지칭한 貊은 民族名인 汎濊族內의 특정 部族名으로 보았다. 곧 漢代 이후의 貊은 濊와 同一한 系統이라고 보았다. ( 「濊貊族小考」) 尹武炳은 濊貊이라는 명칭은 『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濊族과 貊族을 합친 汎稱이 아니라 貊族인 高句麗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漢代 이후의 濊와 (濊)貊을 同一系統 내에서 各各 구분되는 實體로 보았다.
한편 臺灣의 芮逸夫는 韓民族을 濊貊과 韓의 兩系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濊貊族중 濊族은 한반도 중북부와 松花江·吉林·嫩江 등에 살았고, 貊族은 山東·遼東·渤海岸 등에 거주하여, 그 居住分布에 따라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韓國古代民族考略』) 金貞培도 濊·貊·韓은 同一系 족속으로서 그 分布地域의 차이에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 「濊貊族에 관한 硏究」)異種說의 대표로서 三上次男은 濊族은 有文土器文化를 영위하였고, 生活方式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율이 컸던 古아시아族 系統이고, 貊族은 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계통으로 파악하였다.(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
三上次男說은 빗살문토기文化와 無文土器文化가 同時代의 것이 아니라 時代를 先後하는 文化였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시된다. 그런데 高句麗族과 濊貊과의 관계에 대해 李玉은 독특한 입론을 제기하였다. 즉, 그는 貊族과 濊族은 中國의 山西省·河北省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東으로 이동해 왔는데, B.C.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定着해 있던 濊族은 이어 貊族에게 밀려 南으로 왔다가 고조선에게 쫓겨 요동군에 예속된 것이 濊君 南閭의 집단이고, 이 濊의 일부가 貊族에 흡수되어 B.C. 2세기 무렵 새로운 종족인 濊貊이 成立되었으니, 이것이 高句麗族이라고 하였다.(『高句麗民族의 形成과 社會』)
≪參考文獻≫
丁若鏞, 『疆域考』卷2 「濊貊考」
尹武炳, 「濊貊考」『白山學報』1, 1966.
金貞培, 「濊貊族에 관한 硏究」『白山學報』5, 1968.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1984, 敎保文庫.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1935.
芮逸夫, 「韓國古代民族考略」『中韓論集』1, 1955.
三品彰英, 「濊貊族小考」『朝鮮學報』4輯, 1953.
三上次男,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2.『三國志』濊傳 註 9)
山川各有部分
산과 내를 경계로 한 일정지역이 각 邑落에 귀속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다른 부락의 사람들이 허락없이 이 지역 내에 들어와 활동하면 곧 그에 대한 벌(責禍)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당시 東濊社會에서 각 읍락의 區域 內에서의 경작지는 그 住民들에게 개별적으로 占有되었더라도 그에 대한 원천적인 소유권은 읍락에 귀속되었으며, 山林과 河川 및 草地 등은 共有의 상태이었음을 말해주는 바이다. 근세기 초까지도 시베리아의 소-ㄹ족(Shors), 에벤크족(Evenks), 토파라족(Tofalas) 등과 같은 종족의 各 氏族들은 江이나 일정지역을 저마다의 배타적인 생활권으로 소유하고 있으면서 씨족공동체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다. 이는 濊族의 그것과 상통하는 면을 보여준다. 濊의 각 姓(氏族)은 族外婚의 단위가 되는 등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록에 의거해 東濊社會가 氏族制 社會 末期의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東濊社會에선 농업이 상당히 진전되었고, 生口 즉, 노예도 존재하는 등 씨족공동체적인 상태는 벗어났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邑落單位의 공동체적 면모는 아직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參考文獻≫
金哲埈, 「新羅時代의 親族集團」『韓國史硏究』1, 1968 (『韓國古代社會硏究』1975)
M.G. Levin & Pipotapov, 『The Peoples of Siberia』1964.
3.『三國志』濊傳 註 10)
同姓不婚
같은 씨족 내에서의 혼인이 금지되었다는 뜻이다. 이 당시 濊에는 아직 중국식의 姓이 없었으며 同姓이라는 用語는 씨족단위를 姓으로 이해한 중국인 나름의 표현이다. 部落外婚·同姓不婚 등 일정한 단위집단 바깥에서 배우자를 구하는 것은 집단 간의 연계관계를 통해 용이한 물품교환 및 상호안전을 도모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반대로 內婚은 그 社會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爲한 目的에서 成立하였다.
4.『三國志』濊傳 註 13)
祭虎以爲神
호랑이는 후세에 주로 山神靈의 化身으로 취급되어 민간 신앙의 주요한 대상이 되었다. 호랑이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은 本 記事가 가장 오랜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濊條.
梁秉祐, 「Synoikismos考」『史叢』12·13合輯, 1968.
Raymond Firth, 『Element of Social Organization』1966, Beacon Press, Boston.
Loewenstein K., 『M. Weber’s Political Ideas in the Perspective of our times』1966(鄭文吉譯, 『막스베버의 政治思想』1980, 三英社)
사회·법 속은 沃沮와 비슷하지만,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捐棄舊宅更作新居 …… (中略) ……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三國志』濊傳)
라 하여 몇가지 특이한 내용이 있었다.
우선 山川을 중시하여 排他的인 生活區域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활영역은 古代의 聚落이 발생하는 배경이 되는 것으로 祭祀·宗敎·血緣·親族·Totem·山神共同體이며, M. Weber가 지적한 ‘地域的 小宇宙’이다. 또한 Durkheim의 지적에 따르면 그것은 환절적 조직일 수도 있고, 후세에는 貢納團體로서의 뜻을 지닐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배타적인 생활구역은 邑落이 되어 氏族·部族의 구별이 되는 것으로서,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이었다(Raymond Firth, 『Element of Social Organization』p.53).
그리스 polis의 경우에도 城邑을 중심으로 한 群少 Polis들이 각기 土豪인 首長을 받들고 할거하여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하였을 것이며, 祭祀共同體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梁秉祐, 「Synoikismos考」pp.24~25).
다음의 同姓不婚은 族外婚(Exogamy)을 뜻하는 것으로 Totemism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舞天은 秋收共同大祭로서 部落祭의 성격을 띤 것이다. 특히 호랑이를 神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서 북방계열의 토착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
<참조>
1.『三國志』濊傳 註 2)
濊
濊의 종족적 계통과 濊·貊·濊貊의 상호관계에 관해선 다수의 논고가 있다. 이를 크게 大別해 보면 濊·貊同種說과 濊·貊異種說로 나뉘어진다. 前者로는 일찍이 丁若鏞이 貊은 種族名이고 濊는 地名 또는 水名이라고 보아, 濊貊은 九貊 중의 一種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疆域考』 「濊貊考」) 凌純聲도 濊는 濊水地域에 거주하였던 貊族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를 하였다. (『松花江下游的赫哲族』p.30)
三品彰英은 先秦文獻上의 貊은 北方族에 대한 汎稱이며, 濊는 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漢代의 汎稱的인 濊는 고구려·부여·東濊를 포괄하는 民族名이고, 濊貊이라는 熟語的인 호칭은 濊라는 현실적인 民族名과 古典的인 北族에 대한 汎稱인 貊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보고, 고구려를 지칭한 貊은 民族名인 汎濊族內의 특정 部族名으로 보았다. 곧 漢代 이후의 貊은 濊와 同一한 系統이라고 보았다. ( 「濊貊族小考」) 尹武炳은 濊貊이라는 명칭은 『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濊族과 貊族을 합친 汎稱이 아니라 貊族인 高句麗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漢代 이후의 濊와 (濊)貊을 同一系統 내에서 各各 구분되는 實體로 보았다.
한편 臺灣의 芮逸夫는 韓民族을 濊貊과 韓의 兩系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濊貊族중 濊族은 한반도 중북부와 松花江·吉林·嫩江 등에 살았고, 貊族은 山東·遼東·渤海岸 등에 거주하여, 그 居住分布에 따라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韓國古代民族考略』) 金貞培도 濊·貊·韓은 同一系 족속으로서 그 分布地域의 차이에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 「濊貊族에 관한 硏究」)異種說의 대표로서 三上次男은 濊族은 有文土器文化를 영위하였고, 生活方式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율이 컸던 古아시아族 系統이고, 貊族은 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계통으로 파악하였다.(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
三上次男說은 빗살문토기文化와 無文土器文化가 同時代의 것이 아니라 時代를 先後하는 文化였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시된다. 그런데 高句麗族과 濊貊과의 관계에 대해 李玉은 독특한 입론을 제기하였다. 즉, 그는 貊族과 濊族은 中國의 山西省·河北省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東으로 이동해 왔는데, B.C.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定着해 있던 濊族은 이어 貊族에게 밀려 南으로 왔다가 고조선에게 쫓겨 요동군에 예속된 것이 濊君 南閭의 집단이고, 이 濊의 일부가 貊族에 흡수되어 B.C. 2세기 무렵 새로운 종족인 濊貊이 成立되었으니, 이것이 高句麗族이라고 하였다.(『高句麗民族의 形成과 社會』)
≪參考文獻≫
丁若鏞, 『疆域考』卷2 「濊貊考」
尹武炳, 「濊貊考」『白山學報』1, 1966.
金貞培, 「濊貊族에 관한 硏究」『白山學報』5, 1968.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1984, 敎保文庫.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1935.
芮逸夫, 「韓國古代民族考略」『中韓論集』1, 1955.
三品彰英, 「濊貊族小考」『朝鮮學報』4輯, 1953.
三上次男,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2.『三國志』濊傳 註 9)
山川各有部分
산과 내를 경계로 한 일정지역이 각 邑落에 귀속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다른 부락의 사람들이 허락없이 이 지역 내에 들어와 활동하면 곧 그에 대한 벌(責禍)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당시 東濊社會에서 각 읍락의 區域 內에서의 경작지는 그 住民들에게 개별적으로 占有되었더라도 그에 대한 원천적인 소유권은 읍락에 귀속되었으며, 山林과 河川 및 草地 등은 共有의 상태이었음을 말해주는 바이다. 근세기 초까지도 시베리아의 소-ㄹ족(Shors), 에벤크족(Evenks), 토파라족(Tofalas) 등과 같은 종족의 各 氏族들은 江이나 일정지역을 저마다의 배타적인 생활권으로 소유하고 있으면서 씨족공동체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다. 이는 濊族의 그것과 상통하는 면을 보여준다. 濊의 각 姓(氏族)은 族外婚의 단위가 되는 등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록에 의거해 東濊社會가 氏族制 社會 末期의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東濊社會에선 농업이 상당히 진전되었고, 生口 즉, 노예도 존재하는 등 씨족공동체적인 상태는 벗어났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邑落單位의 공동체적 면모는 아직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參考文獻≫
金哲埈, 「新羅時代의 親族集團」『韓國史硏究』1, 1968 (『韓國古代社會硏究』1975)
M.G. Levin & Pipotapov, 『The Peoples of Siberia』1964.
3.『三國志』濊傳 註 10)
同姓不婚
같은 씨족 내에서의 혼인이 금지되었다는 뜻이다. 이 당시 濊에는 아직 중국식의 姓이 없었으며 同姓이라는 用語는 씨족단위를 姓으로 이해한 중국인 나름의 표현이다. 部落外婚·同姓不婚 등 일정한 단위집단 바깥에서 배우자를 구하는 것은 집단 간의 연계관계를 통해 용이한 물품교환 및 상호안전을 도모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반대로 內婚은 그 社會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爲한 目的에서 成立하였다.
4.『三國志』濊傳 註 13)
祭虎以爲神
호랑이는 후세에 주로 山神靈의 化身으로 취급되어 민간 신앙의 주요한 대상이 되었다. 호랑이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은 本 記事가 가장 오랜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濊條.
梁秉祐, 「Synoikismos考」『史叢』12·13合輯, 1968.
Raymond Firth, 『Element of Social Organization』1966, Beacon Press, Boston.
Loewenstein K., 『M. Weber’s Political Ideas in the Perspective of our times』1966(鄭文吉譯, 『막스베버의 政治思想』1980, 三英社)
당초에는 백제에 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그리하여 백제를 습격하고, 迦羅國註 133을 附庸國으로 삼았다.
迦羅國은 加耶(加洛)를 뜻한다. 加耶는 中國文獻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韓國·日本側 記錄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참조>
1.『南齊書』加羅傳 註 1)
加羅傳
加耶는 중국문헌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韓國·日本側 기록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加耶는 ‘갓나라(邊國)’를 뜻하는 말로 보기도 하며,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p.306) 一族·同族을 뜻하는 滿洲語의 hala, 혹은 퉁구스어의 kala, Xala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說도 있다.(崔鶴根, 『國語方言硏究』)
중국정사중 加耶에 대하여 立傳하고 있는 것은 『南齊書』가 유일한데, 이는 5C 末 加耶의 해상발전이 활발하였음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南齊書』加羅傳은 國王 荷知가 479年 南齊와 교섭하여 册封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加耶에 관한 보다 상세한 상태서술은 없다.
≪參考文獻≫
廣開土大王陵碑.
新羅眞鏡大師寶月淩空塔碑.
『三國史記』卷34 「地理志」1 康州 高靈郡條.
『三國遺事』卷2 「紀異」2 所錄 『駕洛國記』
『日本書紀』卷19 欽明天皇 23年條.
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10周年記念論文集』1956; 『加羅史草』1962, 釜山大韓日文化硏究所.
崔鶴根, 『國語方言硏究』1968, 서울大出版部.
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史學硏究』26, 1975;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78.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文定昌, 『伽倻史』1978, 柏文堂.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金泰植, 「5세기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硏究」『韓國史論』12, 1985.
2.『南齊書』加羅傳 註 2)
加羅國 三韓種也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는 것은 弁辰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後漢書』·『三國志』등의 史料上에는 三韓에 加羅가 들어있지 않았으나, 弁辰지역에서 加羅가 뒤에 등장하여 弁辰지역과 加羅가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같게 되었기 때문에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三國志』 「東夷傳」弁辰條에 3C 중엽 洛東江 중·하류지역의 弁韓 12國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나라 중 狗邪國·彌烏邪馬國·安邪國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三國遺事』에 인용된 『駕洛國記』에서는 本加耶를 비롯한 大加耶·古寧加耶·星山加耶·小加耶 등 6加耶의 이름이 보이며, 같은 책에 인용된 『本朝史略』에서는 本加耶 대신 非火加耶의 이름이 보인다. 12國이나 加耶 6國은 개별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며, 대개 4C初를 경계로 하여 弁韓에서 加耶로 그 명칭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李弘稙, 「任那問題を中心とする欽明紀の整理-主要關係人物の硏究-」『靑丘學叢』25, 1936.
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10周年記念論文集』1956; 『加羅史草』1962; 「加羅史硏究-日本關係를 中心으로-」『東亞論叢』4, 1968.
金錫亨, 『초기조일관계연구』1960(『古代朝日關係史-大和政權と任那-』朝鮮史硏究會編譯, 1969, 勁草書房); 「三韓三國の日本列島內分國について」『歷史評論』165·168·169, 1964.
金昌雨, 『駕洛國史傳記』1962, 國都文化社.
鄭在英, 「駕洛國記說話攷」『語文論集』10, 1967, 高麗大國文學會.
金英培, 『駕洛文獻』1968, 嘉林出版社.
金元龍, 「伽耶土器의 問題」『考古美術』100, 1968.
金基雄, 「三國時代의 馬具小考」『白山學報』5, 1968; 『任那の古墳』1978. 學生社.
李殷昌, 「伽倻地域土器의 硏究-洛東江流域出土土器樣相을 中心으로-」『新羅伽倻文化』2, 1970; 「新羅馬刻文土製品과 伽耶鎧馬武人像土器」『新羅伽耶文化』11, 1980
. 金廷鶴, 「金海地方의 先史文化」『金海地區綜合學術調査報告書』1973; 「加耶境域新攷-加耶史硏究(Ⅰ)-」『釜山大學校論文集』21, 1976; 「任那と日本」『日本の歷史』別卷 1, 1977; 「金海禮安里古墳群發掘調査報告」『韓國考古學報』2, 1979; 「古代國家의 發達(伽耶)」『韓國考古學報』12, 1982; 「加耶史의 硏究」『史學硏究』37, 1983.
朴東伯, 「伽倻의 金屬文化와 日本에 미친 影響」『馬山敎育大學論文集』4, 1973; 「伽倻國數와 位置考」『馬山敎育大學論文集』6, 1975.
李炳銑, 「駕洛國의 國名·王名·姓氏名·人名의 表記와 金海地名考」『釜山大學校論文集』15, 1973.
千寬宇, 「任那問題について」『韓』14, 1973; 「任那問題」『韓』18·19·23·25, 1973~1974; 「辰·弁韓諸國의 位置試論」『白山學報』20, 1976;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년 여름·가을호, 1978년 봄호; 「任那日本府管見」『韓』78, 1977.
尹世英, 「古新羅·伽倻古墳의 編年에 關하여-古墳出土 冠帽를 中心으로-」『白山學報』17, 1974; 「古新羅伽耶古墳の編年案をめぐって-伊藤秋男氏の見解に對する反論-」『考古學ジゃ-ナル』111, 1975.
鄭基漢, 「伽耶問題에 對한 綜合的 整理」『高麗大學校大學院碩士學位論文集』1975.
文暻鉉, 「伽倻史의 新考察-大伽耶問題를 中心으로-」『大丘史學』9, 1975; 「加耶聯盟形成의 經濟的 考察」『大丘史學』12·13合輯, 1977.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1976.
李鍾琦, 『駕洛國探査』1977, 一志社.
李鍾恒, 「伽耶와 倭」『國民大學校論文集』11, 1977.
金哲埈, 「能步戰과 便鞍馬」『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1981, 知識産業社.
朱甫噋 , 「加耶滅亡問題에 대한 一考察」『慶北史學』4, 1982.
李永植, 「加耶諸國의 國家形成問題-加耶聯盟說의 再檢討와 戰爭記事分析을 중심으로-」『高麗大學校大學院碩士學位論文』1983.
尹錫曉, 「伽倻의 倭地進出에 대한 硏究」『白山學報』28, 1984.
權鶴洙, 「加耶諸國의 成長과 環境」『白山學報』30·31合輯, 1985.
金貞培, 「任那日本府說의 虛構性-日本書紀史料批判 및 廣開土王陵碑文을 中心으로-」『思想과 政策』1, 1984.
芳●(加/良)登, 「日本에 있어서의 百濟史硏究의 意義」『馬韓·百濟文化』7, 1984.
李貞姬, 「古代日本의 政治的 勢力成長에 對하여-任那日本府와의 關係檢討를 爲한 試論으로-」『韓國傳統文化硏究』1, 1985.
金泰植, 「5세기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硏究」『韓國史論』12, 1985.
金鉉球, 『任那の對外關係と任那日本府の實體-大和政權の對外關係硏究-』1985, 吉川弘文館.
林泰輔, 「加羅の起源『史學雜誌』2卷 25號, 1891; 「加羅の起源續考」『史學雜誌』5編 3號, 1894; 『支那上代之硏究』1927.
津田左右吉, 「韓史に見える廣義の加羅及び駕洛國記の六伽耶に就いて」『朝鮮歷史地理』1, 1911; 「任那疆域考」『朝鮮歷史地理』3, 1913.
關野貞, 「伽耶時代の遺蹟」『考古學雜誌』1卷 7號, 1911.
今西龍, 「加羅疆域考(上·下)」『史林』4卷 3·4號, 1914.
三品彰英, 『日本書紀日鮮關係記事考證(上)』, 1923, 吉川弘文館; 「日本書紀日韓關係記事考證」『朝鮮學報』14輯, 1959.
宮崎道三郞, 「任那疆域考」『宮崎博士法制史論集』1929.
大原利武, 「任那加耶考」『小田先生頌壽記念朝鮮論集』1934.
那珂通世, 「朝鮮古史考」『史學雜誌』47編 3號~49編 10號, 1936~1938.
末松保和, 「任那問題の緖末」『歷史任那興亡史』1卷 7號, 1948; 『任那興亡史』1960, 吉川弘文館.
村上四男, 「金官國補遺」『朝鮮學報』31輯, 1964.
坂元義種, 「古代東アヅアの國際關係」『ヒストリア』49·50, 1967~1968.
井上秀雄, 「任那諸國の地理的條件」『小葉田淳敎授退官記念國史論集』31~46, 1971.
鬼頭淸明, 「加耶諸國の史的發展について」· 「任那日本府の問題」『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ヅア』1976.
平野邦雄, 「繼體·欽明紀の對外關係記事」『古代東アヅア史論集』(下), 1978.
山尾幸久, 「任那に關する-試論」『古代東アヅア史論集』(下), 1978.
3.『隋書』新羅傳 註 5)
迦羅國
迦羅國은 加耶(加洛)를 뜻한다. 百濟와 新羅 사이에서 정치적 위협을 항상 받아온 가야국은 일찍부터 鐵器文化를 바탕으로 크게 발전한 바 있다.
가야는 6개의 연맹체로서 주로 북방의 內陸的인 大加耶(高靈)와 남방의 海洋的인 金官加耶(金海)로 대별되는 바, 일찍부터 일본에 진출했지만 정치적 구심체가 없어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金官加耶는 法興王 19년(532)에, 大加耶는 眞興王 23년(562)에 각각 신라에 投降하였다.
비록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지만 加耶는 신라의 정치와 문화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중에서도 金庾信系의 정치적 역할과 于勒의 예가 대표적이다.
<참조>
1.『南齊書』加羅傳 註 1)
加羅傳
加耶는 중국문헌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韓國·日本側 기록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加耶는 ‘갓나라(邊國)’를 뜻하는 말로 보기도 하며,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p.306) 一族·同族을 뜻하는 滿洲語의 hala, 혹은 퉁구스어의 kala, Xala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說도 있다.(崔鶴根, 『國語方言硏究』)
중국정사중 加耶에 대하여 立傳하고 있는 것은 『南齊書』가 유일한데, 이는 5C 末 加耶의 해상발전이 활발하였음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南齊書』加羅傳은 國王 荷知가 479年 南齊와 교섭하여 册封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加耶에 관한 보다 상세한 상태서술은 없다.
≪參考文獻≫
廣開土大王陵碑.
新羅眞鏡大師寶月淩空塔碑.
『三國史記』卷34 「地理志」1 康州 高靈郡條.
『三國遺事』卷2 「紀異」2 所錄 『駕洛國記』
『日本書紀』卷19 欽明天皇 23年條.
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10周年記念論文集』1956; 『加羅史草』1962, 釜山大韓日文化硏究所.
崔鶴根, 『國語方言硏究』1968, 서울大出版部.
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史學硏究』26, 1975;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78.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文定昌, 『伽倻史』1978, 柏文堂.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金泰植, 「5세기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硏究」『韓國史論』12, 1985.
2.『南齊書』加羅傳 註 2)
加羅國 三韓種也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는 것은 弁辰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後漢書』·『三國志』등의 史料上에는 三韓에 加羅가 들어있지 않았으나, 弁辰지역에서 加羅가 뒤에 등장하여 弁辰지역과 加羅가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같게 되었기 때문에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三國志』 「東夷傳」弁辰條에 3C 중엽 洛東江 중·하류지역의 弁韓 12國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나라 중 狗邪國·彌烏邪馬國·安邪國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三國遺事』에 인용된 『駕洛國記』에서는 本加耶를 비롯한 大加耶·古寧加耶·星山加耶·小加耶 등 6加耶의 이름이 보이며, 같은 책에 인용된 『本朝史略』에서는 本加耶 대신 非火加耶의 이름이 보인다. 12國이나 加耶 6國은 개별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며, 대개 4C初를 경계로 하여 弁韓에서 加耶로 그 명칭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李弘稙, 「任那問題を中心とする欽明紀の整理-主要關係人物の硏究-」『靑丘學叢』2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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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雨, 『駕洛國史傳記』1962, 國都文化社.
鄭在英, 「駕洛國記說話攷」『語文論集』10, 1967, 高麗大國文學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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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田左右吉, 「韓史に見える廣義の加羅及び駕洛國記の六伽耶に就いて」『朝鮮歷史地理』1, 1911; 「任那疆域考」『朝鮮歷史地理』3,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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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西龍, 「加羅疆域考(上·下)」『史林』4卷 3·4號,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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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元義種, 「古代東アヅアの國際關係」『ヒストリア』49·50, 1967~1968.
井上秀雄, 「任那諸國の地理的條件」『小葉田淳敎授退官記念國史論集』31~46, 1971.
鬼頭淸明, 「加耶諸國の史的發展について」· 「任那日本府の問題」『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ヅア』1976.
平野邦雄, 「繼體·欽明紀の對外關係記事」『古代東アヅア史論集』(下),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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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隋書』新羅傳 註 5)
迦羅國
迦羅國은 加耶(加洛)를 뜻한다. 百濟와 新羅 사이에서 정치적 위협을 항상 받아온 가야국은 일찍부터 鐵器文化를 바탕으로 크게 발전한 바 있다.
가야는 6개의 연맹체로서 주로 북방의 內陸的인 大加耶(高靈)와 남방의 海洋的인 金官加耶(金海)로 대별되는 바, 일찍부터 일본에 진출했지만 정치적 구심체가 없어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金官加耶는 法興王 19년(532)에, 大加耶는 眞興王 23년(562)에 각각 신라에 投降하였다.
비록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지만 加耶는 신라의 정치와 문화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중에서도 金庾信系의 정치적 역할과 于勒의 예가 대표적이다.
註) 129
沃沮는 동해안에 있는 초기국가로서 臨屯國의 域內에 있다가 衛滿朝鮮代에는 그 세력권내에 있었다.
그후 漢 武帝의 侵入 이후 臨屯郡이 설치되었다가 그것이 폐지되어 玄菟郡에 병합되었으나, 정치적 구심력이 적어 高句麗 太祖王代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沃沮는 고구려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東沃沮라 하였으며, 『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에는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甫與濊貊接’이라 하고 있다. 沃沮의 地形을 ‘東北狹 西南長’이라 한 것은 ‘東西狹 南北長’으로 고쳐야 할 것이다.
즉, 沃沮의 地域은 오늘발의 입장에서 본다면 咸與 一帶를 중심으로 南은 定平에서 東濊와 접경하고, 北은 利原에서 北沃沮와 境界를 나눈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李丙燾, 「沃沮와 東濊」pp.228~229).
沃沮는 5千의 戶가 있으며, 각 邑落에는 渠帥들이 있어 스스로 三老라 하며 下戶를 통치 한다고 되어 있다.
이 나라는 土地는 비옥하지만 ‘國小 迫于大國(高句麗·樂浪)之間(『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이라는 정치적 불리성과 항상 고구려에 착취를 당하여 크게 발전될 수가 없었다. 더구나 先進中國文物을 受容할 수가 없었으며,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어 古代國家로 성장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 나라의 풍속에 특기할 것은 豫婦制(責錢婚)와 洗骨葬이다. 전자는 ‘女年十歲 巳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 (『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라 하여 일종의 責買婚이다.
후자는 ‘新死者皆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라 하여 死者를 일단 假埋葬한 후 다시 장례(매장)를 하는 것으로 특히 家族共同墓制의 일종이다.
<참조>
1.『三國志』東沃沮傳 註 2)
東沃沮
대체로 오늘날의 咸興에서 豆滿江에 이르는 지역에 비정된다. 沃沮란 말의 語源에 대해서『滿洲源流考』에서는 ‘森林’이라는 뜻의 滿洲語 ‘窩集(weji)'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원래 濊의 일부였던 夫租가 성장하여 沃沮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李丙燾, 「臨屯郡考」pp.206~207)
『三國史記』太祖王 4年條에서는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蕯水’라 하여 東沃沮가 A.D. 40年 高句麗에 복속되어 그 支配를 받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5 「高句麗本紀」3 太祖王 4年條.
『滿洲源流考』卷9 「疆域」2 沃沮·濊條.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2.『三國志』東沃沮傳 註 4)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東沃沮의 地形이 東北方으로는 狹小하고, 西南方으로는 길게 뻗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三國志』의 기록에 의거한『後漢書』 및 그 이후의 史書에는 모두 ‘東西狹 南北長’으로 되어 있다.
3.『三國志』東沃沮傳 註 17)
其嫁娶之法 …… 乃復還壻(豫婦制)
민며느리제도라고도 한다. 購買婚的 요소가 짙다. 高麗 및 朝鮮時代를 거쳐 금세기 초까지도 西北地方 일부에는 이러한 풍습이 남아 있었다. 또한 滿洲族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婚姻方式이 今世紀까지 존재하였다.
≪參考文獻≫
金斗憲, 『韓國家族制度硏究』1969.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Manchus』1924.
4.『三國志』東沃沮傳 註 18)
其葬作大木槨 …… 乃取骨置槨中
洗骨葬이라 불리는 것으로 複葬法의 일종이다. 洗骨葬은 예부터 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행해졌다. 석관묘와 옹관묘 같은 墓制에서도 그 내부 구조상으로 보아 일부 洗骨葬이 행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洗骨葬은 오늘날에도 서·남해안 및 도서지방, 일본의 오끼나와 등에 草墳이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예를 들어 전라도 해안 지방에서는 시체를 넣는 임시초옥을 草墳이라 하고, 대개 100일 내지 3년 후에 草墳을 열어 洗骨한다. 이것의 1次葬 형태에는 平地葬·平台葬·樹葬·假埋葬의 네 가지 유형이 있다.
≪參考文獻≫
李杜鉉, 『草墳』1973.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東沃沮條.
李丙燾, 「沃沮와 東濊」『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그후 漢 武帝의 侵入 이후 臨屯郡이 설치되었다가 그것이 폐지되어 玄菟郡에 병합되었으나, 정치적 구심력이 적어 高句麗 太祖王代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沃沮는 고구려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東沃沮라 하였으며, 『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에는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甫與濊貊接’이라 하고 있다. 沃沮의 地形을 ‘東北狹 西南長’이라 한 것은 ‘東西狹 南北長’으로 고쳐야 할 것이다.
즉, 沃沮의 地域은 오늘발의 입장에서 본다면 咸與 一帶를 중심으로 南은 定平에서 東濊와 접경하고, 北은 利原에서 北沃沮와 境界를 나눈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李丙燾, 「沃沮와 東濊」pp.228~229).
沃沮는 5千의 戶가 있으며, 각 邑落에는 渠帥들이 있어 스스로 三老라 하며 下戶를 통치 한다고 되어 있다.
이 나라는 土地는 비옥하지만 ‘國小 迫于大國(高句麗·樂浪)之間(『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이라는 정치적 불리성과 항상 고구려에 착취를 당하여 크게 발전될 수가 없었다. 더구나 先進中國文物을 受容할 수가 없었으며, 동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어 古代國家로 성장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 나라의 풍속에 특기할 것은 豫婦制(責錢婚)와 洗骨葬이다. 전자는 ‘女年十歲 巳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 (『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라 하여 일종의 責買婚이다.
후자는 ‘新死者皆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三國志』 「東夷傳」東沃沮條)’라 하여 死者를 일단 假埋葬한 후 다시 장례(매장)를 하는 것으로 특히 家族共同墓制의 일종이다.
<참조>
1.『三國志』東沃沮傳 註 2)
東沃沮
대체로 오늘날의 咸興에서 豆滿江에 이르는 지역에 비정된다. 沃沮란 말의 語源에 대해서『滿洲源流考』에서는 ‘森林’이라는 뜻의 滿洲語 ‘窩集(weji)'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원래 濊의 일부였던 夫租가 성장하여 沃沮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李丙燾, 「臨屯郡考」pp.206~207)
『三國史記』太祖王 4年條에서는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蕯水’라 하여 東沃沮가 A.D. 40年 高句麗에 복속되어 그 支配를 받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15 「高句麗本紀」3 太祖王 4年條.
『滿洲源流考』卷9 「疆域」2 沃沮·濊條.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2.『三國志』東沃沮傳 註 4)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東沃沮의 地形이 東北方으로는 狹小하고, 西南方으로는 길게 뻗쳐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三國志』의 기록에 의거한『後漢書』 및 그 이후의 史書에는 모두 ‘東西狹 南北長’으로 되어 있다.
3.『三國志』東沃沮傳 註 17)
其嫁娶之法 …… 乃復還壻(豫婦制)
민며느리제도라고도 한다. 購買婚的 요소가 짙다. 高麗 및 朝鮮時代를 거쳐 금세기 초까지도 西北地方 일부에는 이러한 풍습이 남아 있었다. 또한 滿洲族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婚姻方式이 今世紀까지 존재하였다.
≪參考文獻≫
金斗憲, 『韓國家族制度硏究』1969.
Shirokogoroff, 『Social Organization of the Manchus』1924.
4.『三國志』東沃沮傳 註 18)
其葬作大木槨 …… 乃取骨置槨中
洗骨葬이라 불리는 것으로 複葬法의 일종이다. 洗骨葬은 예부터 동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행해졌다. 석관묘와 옹관묘 같은 墓制에서도 그 내부 구조상으로 보아 일부 洗骨葬이 행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洗骨葬은 오늘날에도 서·남해안 및 도서지방, 일본의 오끼나와 등에 草墳이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예를 들어 전라도 해안 지방에서는 시체를 넣는 임시초옥을 草墳이라 하고, 대개 100일 내지 3년 후에 草墳을 열어 洗骨한다. 이것의 1次葬 형태에는 平地葬·平台葬·樹葬·假埋葬의 네 가지 유형이 있다.
≪參考文獻≫
李杜鉉, 『草墳』1973.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東沃沮條.
李丙燾, 「沃沮와 東濊」『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註) 130
不耐는 不而縣으로 『漢書』 「地理志」의 樂浪郡 不而縣條에 ‘東部都尉治’라 하고, 『三國志』東沃沮傳에도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이라 한 것으로 보아 不而가 不耐이며 그곳이 곧 東部都尉治所이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光武帝 建武 6년(30)에 漢은 東部都尉를 혁파하고 渠帥로서 縣侯를 삼으니, 不耐는 侯國이 되어 漢에 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국세가 미약하여 高句麗에 복속되었다.
不耐의 위치에 대해서 李丙燾는 比列忽 즉, 安邊·通川 一帶로 비정하였다( 「臨屯郡考」p.201).
<참조>
『三國志』東沃沮傳 註 11)
不耐
『漢書』 「地理志」樂浪郡條에는 ‘不而’라 하였고, 『三國志』毌丘儉傳과 濊傳에는 不耐라 하였다. 『三國志』毌丘儉傳에 따르면 魏軍이 高句麗 東川王을 뒤쫓아 不耐에 이르러 紀功碑를 세웠다고 하나, 安邊·元山 일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해선 弗奈·佛訥和 등 不耐와 비슷한 지명을 근거로 毌丘儉傳의 不耐之城을 두만강 유역이나 瑚爾哈河 沿岸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不耐는 華麗와 함께 新羅에 침입하기도 하였고, A.D. 247年에는 그 長이 魏로부터 不耐濊王이라는 칭호도 받지만 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三國史記』에 언급된 濊王印, 경상북도 영일군 북단에서 발견된 ‘晋率善穢佰長’의 銅印은 不耐濊王과 같은 類인 濊의 君長에게 중국측이 내린 印緩 의 實例이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樂浪郡條.
安鼎福, 『東史綱目』附下 「地理考」不耐·華麗考.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梅原未治, 「晋率善穢佰長銅印」『考古美術』第8卷 1號, 1967.
≪參考文獻≫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樂浪郡 不而縣條.
『三國志』卷30 「東夷傳」東沃沮條.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光武帝 建武 6년(30)에 漢은 東部都尉를 혁파하고 渠帥로서 縣侯를 삼으니, 不耐는 侯國이 되어 漢에 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국세가 미약하여 高句麗에 복속되었다.
不耐의 위치에 대해서 李丙燾는 比列忽 즉, 安邊·通川 一帶로 비정하였다( 「臨屯郡考」p.201).
<참조>
『三國志』東沃沮傳 註 11)
不耐
『漢書』 「地理志」樂浪郡條에는 ‘不而’라 하였고, 『三國志』毌丘儉傳과 濊傳에는 不耐라 하였다. 『三國志』毌丘儉傳에 따르면 魏軍이 高句麗 東川王을 뒤쫓아 不耐에 이르러 紀功碑를 세웠다고 하나, 安邊·元山 일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해선 弗奈·佛訥和 등 不耐와 비슷한 지명을 근거로 毌丘儉傳의 不耐之城을 두만강 유역이나 瑚爾哈河 沿岸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不耐는 華麗와 함께 新羅에 침입하기도 하였고, A.D. 247年에는 그 長이 魏로부터 不耐濊王이라는 칭호도 받지만 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三國史記』에 언급된 濊王印, 경상북도 영일군 북단에서 발견된 ‘晋率善穢佰長’의 銅印은 不耐濊王과 같은 類인 濊의 君長에게 중국측이 내린 印緩 의 實例이다.
≪參考文獻≫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樂浪郡條.
安鼎福, 『東史綱目』附下 「地理考」不耐·華麗考.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李龍範, 「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
梅原未治, 「晋率善穢佰長銅印」『考古美術』第8卷 1號, 1967.
≪參考文獻≫
『漢書』卷28下 「地理志」8下 樂浪郡 不而縣條.
『三國志』卷30 「東夷傳」東沃沮條.
李丙燾, 「臨屯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註) 131
이때의 韓은 漢江 以南의 옛 三韓故地를 말하며, 『三國志』韓傳의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을 뜻한다.
三韓 전체를 말하는 것은 統一新羅를 가리키는 바 『隋書』에 나타나는 新羅는 統一前이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辰韓을 뜻한다고 하겠다. 특히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三國志』 「東夷傳」辰韓條)’이기 때문에 이때의 韓이 辰韓을 지칭함은 확실하다. 물론 『舊·新唐書』에서 ‘弁韓之裔’라는 異說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류라 하겠다.
<참조>
1.『三國志』韓傳 註 2)
韓
三韓의 韓은 韓國民族을 中國人들이 지칭하였던 濊·貊·韓에 속하는 槪念이다. 흔히 云謂하는 바와 같이 漢人들은 濊貊과 아울러 남쪽의 우리 民族을 가르켜 韓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어떤 學者는 이 韓이라는 名稱이 箕子朝鮮에 대치된 韓氏朝鮮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pp.249~259) 即 準王이 南奔하면서 韓이라는 社會가 名稱上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남쪽의 住民을 가르켜 韓이라고 한 것이다.
地域的으로 北쪽에 있던 住民들을 濊와 貊으로 指稱한 것처럼 결국 南쪽에 있던 住民들은 韓으로 불리운 것이다. 이 경우에 자칫 韓이라는 社會가 北쪽의 濊·貊과 種族的으로나 文化的으로 크게 區別되는 사실로 파악된다면 이것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지난날 한때 우리나라 南쪽의 社會와 文化를 마치 異質的인 文化로 취급한 바 있지만 이는 韓國史를 연구하던 近代 초기에 日本學者를 비롯한 外國人들이 잘못 영향을 끼친 때문이었다.
≪參考文獻≫
李瀷, 『星湖僿說』卷1下 「三韓金馬」
韓百謙, 『東國地理志』
李晬光, 『芝峯類說』卷2 「諸國部」
申景濬, 『疆界志』 「目支國」· 「辰國考」
韓鎭書, 『海東繹史』續3 「地理考」
韓致奫, 『海東繹史』 「三韓總考」
安鼎福, 『東史綱目』附下 「辰國三韓說」
丁若鏞, 『我邦疆域考』3 「三韓總考」
申采浩, 「前後三韓考」『朝鮮日報』1925(『朝鮮史硏究草』1929); 『朝鮮上古史』1948, 鍾路書院.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1933, 改造社.
李丙燾, 「三韓問題의 新考察」『震檀學報』1·3·4·5·6·7·8卷, 1934~1937(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安在鴻, 『朝鮮上古史鑑』(上·下) 1947~48, 民友社; 「三韓國과 그 法俗」『韓國學硏究叢書』2卷, 1971, 成進文化社.
金庠基, 「韓·濊·貊 移動考」『史海』1948.
崔南善, 『朝鮮常識』1947~48, 東明社.
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十周年紀念論文集』1956.
金廷鶴, 「韓國民族形成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5, 高麗大出版部; 「魏志 韓傳小考」『釜山大文理大論文集』14, 1975.
金元龍, 「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考察」『東亞文化』7, 1967.
金貞培, 「辰國과 韓에 關한 考察」『金成植博士華甲紀念論叢』1968;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韓國民族文化의 起源』1973, 高麗大出版部;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의 諸問題-益山의 靑銅器文化와 관련하여-」『韓國史硏究』13, 1976; 「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百濟文化』12, 1979;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三韓攷 第1部-」『史學硏究』26, 1975;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三韓攷 第2部-」『震檀學報』41,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上·下)-三韓攷 第3部-」『韓國學報』2·3合輯, 1976.
李賢惠, 「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歷史學報』69, 1976(『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1984) : 「馬韓 小國의 形成에 대하여」『歷史學報』92, 1981.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津田左右吉, 「三韓疆域考」『朝鮮歷史地理』卷1, 1913.
稻葉岩吉, 「魏志弁辰傳の瀆盧國與倭接界は如何に讀むべきか」『考古學雜誌』5卷 4號, 1914.
那珂通世, 「三韓考」『外交繹史』卷2, 1915; 「三韓朝貢志」『那珂通世遺書外交繹史』4號, 1915; 「朝鮮古史考」『史學雜誌』47編 3號~49編 10號, 1936~1938.
坪井九馬三, 「三韓考」『史學雜誌』34編 9號, 1923; 「三韓古地名考」『史學雜誌』35編 2號, 1924; 「朝鮮古地名の二三に就て」『史學雜誌』38編 8號, 1927.
鮎貝房之進, 「三韓古地名考補正考讀む」『史學雜誌』36編11號, 1925; 「韓·三韓」『雜攷』7輯 上卷, 1938.
白鳥庫吉, 「朝鮮古代諸國稱考」『史學雜誌』48編 7號, 1937.
今西龍, 「百衲本史記の朝鮮傳について」『朝鮮古史の硏究』1970, 圖書刊行會.
鐵甚平, 『三韓昔がたり』1942, 學習社, 東京.
三品影英, 「史實と考證-魏志東夷傳の辰國と辰王-」『史學雜誌』55編 1號, 1944.
末松保和, 「魏志韓人傳寸考」『歷史學月報』11卷, 1951.
三上次男, 「古代の南朝鮮-諸韓國の發達と辰王政權の成立-」『邪馬台國』1954, 朝倉書店(『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宮崎市定, 「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輯, 1959.
2.『三國志』韓傳 註 5)
辰韓
辰韓은 그 社會의 母胎가 ‘秦之亡人’이란 記事가 밝혀주고 있듯이 北朝鮮(樂浪) 方面에서 南下한 流移民으로서 형성되었던 나라이다.
이에 李丙燾는 韓의 명칭은 朝鮮王 準의 南來 以後로부터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여 北來流移民社會 全體를 「韓」 혹은 「辰韓」이라 일컬었다고 파악하였다. 즉, 그는 辰의 東北界인 流移民社會가 韓王 準이래로 「韓」이라 일컬어 「辰王」의 保護와 支配下에 있었으므로, 樂浪의 漢人들로부터 「辰韓」의 一名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다.( 「三韓問題의 硏究」pp.238~299)
辰韓의 位置는 현재 慶尙道의 洛東江 東쪽으로 비정되어지고 있으나, 현재 辰韓을 漢江 流域에 비정하는 새로운 견해도 있다.(李丙燾, 앞의 논문, pp260~277)
≪參考文獻≫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韓條.
『隋書』卷81 「東夷列傳」新羅條.
『舊唐書』卷199上 「東夷列傳」新羅條.
『新唐書』卷220 「東夷列傳」新羅條.

三韓 전체를 말하는 것은 統一新羅를 가리키는 바 『隋書』에 나타나는 新羅는 統一前이기 때문에 그중에서도 辰韓을 뜻한다고 하겠다. 특히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三國志』 「東夷傳」辰韓條)’이기 때문에 이때의 韓이 辰韓을 지칭함은 확실하다. 물론 『舊·新唐書』에서 ‘弁韓之裔’라는 異說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류라 하겠다.
<참조>
1.『三國志』韓傳 註 2)
韓
三韓의 韓은 韓國民族을 中國人들이 지칭하였던 濊·貊·韓에 속하는 槪念이다. 흔히 云謂하는 바와 같이 漢人들은 濊貊과 아울러 남쪽의 우리 民族을 가르켜 韓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어떤 學者는 이 韓이라는 名稱이 箕子朝鮮에 대치된 韓氏朝鮮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pp.249~259) 即 準王이 南奔하면서 韓이라는 社會가 名稱上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남쪽의 住民을 가르켜 韓이라고 한 것이다.
地域的으로 北쪽에 있던 住民들을 濊와 貊으로 指稱한 것처럼 결국 南쪽에 있던 住民들은 韓으로 불리운 것이다. 이 경우에 자칫 韓이라는 社會가 北쪽의 濊·貊과 種族的으로나 文化的으로 크게 區別되는 사실로 파악된다면 이것은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지난날 한때 우리나라 南쪽의 社會와 文化를 마치 異質的인 文化로 취급한 바 있지만 이는 韓國史를 연구하던 近代 초기에 日本學者를 비롯한 外國人들이 잘못 영향을 끼친 때문이었다.
≪參考文獻≫
李瀷, 『星湖僿說』卷1下 「三韓金馬」
韓百謙, 『東國地理志』
李晬光, 『芝峯類說』卷2 「諸國部」
申景濬, 『疆界志』 「目支國」· 「辰國考」
韓鎭書, 『海東繹史』續3 「地理考」
韓致奫, 『海東繹史』 「三韓總考」
安鼎福, 『東史綱目』附下 「辰國三韓說」
丁若鏞, 『我邦疆域考』3 「三韓總考」
申采浩, 「前後三韓考」『朝鮮日報』1925(『朝鮮史硏究草』1929); 『朝鮮上古史』1948, 鍾路書院.
白南雲, 『朝鮮社會經濟史』1933, 改造社.
李丙燾, 「三韓問題의 新考察」『震檀學報』1·3·4·5·6·7·8卷, 1934~1937(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7.
安在鴻, 『朝鮮上古史鑑』(上·下) 1947~48, 民友社; 「三韓國과 그 法俗」『韓國學硏究叢書』2卷, 1971, 成進文化社.
金庠基, 「韓·濊·貊 移動考」『史海』1948.
崔南善, 『朝鮮常識』1947~48, 東明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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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廷鶴, 「韓國民族形成史」『韓國文化史大系』Ⅰ, 1965, 高麗大出版部; 「魏志 韓傳小考」『釜山大文理大論文集』14, 1975.
金元龍, 「三國時代의 開始에 關한 考察」『東亞文化』7, 1967.
金貞培, 「辰國과 韓에 關한 考察」『金成植博士華甲紀念論叢』1968; 「三韓位置에 對한 從來說과 文化性格의 檢討」『史學硏究』20, 1968; 『韓國民族文化의 起源』1973, 高麗大出版部;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의 諸問題-益山의 靑銅器文化와 관련하여-」『韓國史硏究』13, 1976; 「君長社會의 發展過程 試論」『百濟文化』12, 1979; 「辰國의 政治發展段階」『領土問題硏究』창간호, 1983.
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三韓攷 第1部-」『史學硏究』26, 1975; 「三國志 韓傳의 再檢討-三韓攷 第2部-」『震檀學報』41,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上·下)-三韓攷 第3部-」『韓國學報』2·3合輯, 1976.
李賢惠, 「三韓의 國邑과 그 成長에 대하여」『歷史學報』69, 1976(『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1984) : 「馬韓 小國의 形成에 대하여」『歷史學報』92, 1981.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津田左右吉, 「三韓疆域考」『朝鮮歷史地理』卷1, 1913.
稻葉岩吉, 「魏志弁辰傳の瀆盧國與倭接界は如何に讀むべきか」『考古學雜誌』5卷 4號, 1914.
那珂通世, 「三韓考」『外交繹史』卷2, 1915; 「三韓朝貢志」『那珂通世遺書外交繹史』4號, 1915; 「朝鮮古史考」『史學雜誌』47編 3號~49編 10號, 1936~1938.
坪井九馬三, 「三韓考」『史學雜誌』34編 9號, 1923; 「三韓古地名考」『史學雜誌』35編 2號, 1924; 「朝鮮古地名の二三に就て」『史學雜誌』38編 8號, 1927.
鮎貝房之進, 「三韓古地名考補正考讀む」『史學雜誌』36編11號, 1925; 「韓·三韓」『雜攷』7輯 上卷, 1938.
白鳥庫吉, 「朝鮮古代諸國稱考」『史學雜誌』48編 7號, 1937.
今西龍, 「百衲本史記の朝鮮傳について」『朝鮮古史の硏究』1970, 圖書刊行會.
鐵甚平, 『三韓昔がたり』1942, 學習社, 東京.
三品影英, 「史實と考證-魏志東夷傳の辰國と辰王-」『史學雜誌』55編 1號, 1944.
末松保和, 「魏志韓人傳寸考」『歷史學月報』11卷, 1951.
三上次男, 「古代の南朝鮮-諸韓國の發達と辰王政權の成立-」『邪馬台國』1954, 朝倉書店(『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宮崎市定, 「三韓時代の位階制について」『朝鮮學報』14輯, 1959.
2.『三國志』韓傳 註 5)
辰韓
辰韓은 그 社會의 母胎가 ‘秦之亡人’이란 記事가 밝혀주고 있듯이 北朝鮮(樂浪) 方面에서 南下한 流移民으로서 형성되었던 나라이다.
이에 李丙燾는 韓의 명칭은 朝鮮王 準의 南來 以後로부터 비로소 생기기 시작하여 北來流移民社會 全體를 「韓」 혹은 「辰韓」이라 일컬었다고 파악하였다. 즉, 그는 辰의 東北界인 流移民社會가 韓王 準이래로 「韓」이라 일컬어 「辰王」의 保護와 支配下에 있었으므로, 樂浪의 漢人들로부터 「辰韓」의 一名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다.( 「三韓問題의 硏究」pp.238~299)
辰韓의 位置는 현재 慶尙道의 洛東江 東쪽으로 비정되어지고 있으나, 현재 辰韓을 漢江 流域에 비정하는 새로운 견해도 있다.(李丙燾, 앞의 논문, pp260~277)
≪參考文獻≫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1976.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韓條.
『隋書』卷81 「東夷列傳」新羅條.
『舊唐書』卷199上 「東夷列傳」新羅條.
『新唐書』卷220 「東夷列傳」新羅條.
註) 132
濊는 沃沮의 남쪽에 있는데 『三國志』濊傳에 의하면 ‘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이라 하여 沃沮보다는 큰 나라였다.
사회·법 속은 沃沮와 비슷하지만,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捐棄舊宅更作新居 …… (中略) ……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三國志』濊傳)
라 하여 몇가지 특이한 내용이 있었다.
우선 山川을 중시하여 排他的인 生活區域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활영역은 古代의 聚落이 발생하는 배경이 되는 것으로 祭祀·宗敎·血緣·親族·Totem·山神共同體이며, M. Weber가 지적한 ‘地域的 小宇宙’이다. 또한 Durkheim의 지적에 따르면 그것은 환절적 조직일 수도 있고, 후세에는 貢納團體로서의 뜻을 지닐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배타적인 생활구역은 邑落이 되어 氏族·部族의 구별이 되는 것으로서,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이었다(Raymond Firth, 『Element of Social Organization』p.53).
그리스 polis의 경우에도 城邑을 중심으로 한 群少 Polis들이 각기 土豪인 首長을 받들고 할거하여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하였을 것이며, 祭祀共同體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梁秉祐, 「Synoikismos考」pp.24~25).
다음의 同姓不婚은 族外婚(Exogamy)을 뜻하는 것으로 Totemism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舞天은 秋收共同大祭로서 部落祭의 성격을 띤 것이다. 특히 호랑이를 神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서 북방계열의 토착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
<참조>
1.『三國志』濊傳 註 2)
濊
濊의 종족적 계통과 濊·貊·濊貊의 상호관계에 관해선 다수의 논고가 있다. 이를 크게 大別해 보면 濊·貊同種說과 濊·貊異種說로 나뉘어진다. 前者로는 일찍이 丁若鏞이 貊은 種族名이고 濊는 地名 또는 水名이라고 보아, 濊貊은 九貊 중의 一種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疆域考』 「濊貊考」) 凌純聲도 濊는 濊水地域에 거주하였던 貊族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를 하였다. (『松花江下游的赫哲族』p.30)
三品彰英은 先秦文獻上의 貊은 北方族에 대한 汎稱이며, 濊는 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漢代의 汎稱的인 濊는 고구려·부여·東濊를 포괄하는 民族名이고, 濊貊이라는 熟語的인 호칭은 濊라는 현실적인 民族名과 古典的인 北族에 대한 汎稱인 貊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보고, 고구려를 지칭한 貊은 民族名인 汎濊族內의 특정 部族名으로 보았다. 곧 漢代 이후의 貊은 濊와 同一한 系統이라고 보았다. ( 「濊貊族小考」) 尹武炳은 濊貊이라는 명칭은 『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濊族과 貊族을 합친 汎稱이 아니라 貊族인 高句麗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漢代 이후의 濊와 (濊)貊을 同一系統 내에서 各各 구분되는 實體로 보았다.
한편 臺灣의 芮逸夫는 韓民族을 濊貊과 韓의 兩系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濊貊族중 濊族은 한반도 중북부와 松花江·吉林·嫩江 등에 살았고, 貊族은 山東·遼東·渤海岸 등에 거주하여, 그 居住分布에 따라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韓國古代民族考略』) 金貞培도 濊·貊·韓은 同一系 족속으로서 그 分布地域의 차이에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 「濊貊族에 관한 硏究」)異種說의 대표로서 三上次男은 濊族은 有文土器文化를 영위하였고, 生活方式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율이 컸던 古아시아族 系統이고, 貊族은 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계통으로 파악하였다.(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
三上次男說은 빗살문토기文化와 無文土器文化가 同時代의 것이 아니라 時代를 先後하는 文化였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시된다. 그런데 高句麗族과 濊貊과의 관계에 대해 李玉은 독특한 입론을 제기하였다. 즉, 그는 貊族과 濊族은 中國의 山西省·河北省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東으로 이동해 왔는데, B.C.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定着해 있던 濊族은 이어 貊族에게 밀려 南으로 왔다가 고조선에게 쫓겨 요동군에 예속된 것이 濊君 南閭의 집단이고, 이 濊의 일부가 貊族에 흡수되어 B.C. 2세기 무렵 새로운 종족인 濊貊이 成立되었으니, 이것이 高句麗族이라고 하였다.(『高句麗民族의 形成과 社會』)
≪參考文獻≫
丁若鏞, 『疆域考』卷2 「濊貊考」
尹武炳, 「濊貊考」『白山學報』1, 1966.
金貞培, 「濊貊族에 관한 硏究」『白山學報』5, 1968.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1984, 敎保文庫.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1935.
芮逸夫, 「韓國古代民族考略」『中韓論集』1, 1955.
三品彰英, 「濊貊族小考」『朝鮮學報』4輯, 1953.
三上次男,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2.『三國志』濊傳 註 9)
山川各有部分
산과 내를 경계로 한 일정지역이 각 邑落에 귀속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다른 부락의 사람들이 허락없이 이 지역 내에 들어와 활동하면 곧 그에 대한 벌(責禍)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당시 東濊社會에서 각 읍락의 區域 內에서의 경작지는 그 住民들에게 개별적으로 占有되었더라도 그에 대한 원천적인 소유권은 읍락에 귀속되었으며, 山林과 河川 및 草地 등은 共有의 상태이었음을 말해주는 바이다. 근세기 초까지도 시베리아의 소-ㄹ족(Shors), 에벤크족(Evenks), 토파라족(Tofalas) 등과 같은 종족의 各 氏族들은 江이나 일정지역을 저마다의 배타적인 생활권으로 소유하고 있으면서 씨족공동체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다. 이는 濊族의 그것과 상통하는 면을 보여준다. 濊의 각 姓(氏族)은 族外婚의 단위가 되는 등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록에 의거해 東濊社會가 氏族制 社會 末期의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東濊社會에선 농업이 상당히 진전되었고, 生口 즉, 노예도 존재하는 등 씨족공동체적인 상태는 벗어났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邑落單位의 공동체적 면모는 아직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參考文獻≫
金哲埈, 「新羅時代의 親族集團」『韓國史硏究』1, 1968 (『韓國古代社會硏究』1975)
M.G. Levin & Pipotapov, 『The Peoples of Siberia』1964.
3.『三國志』濊傳 註 10)
同姓不婚
같은 씨족 내에서의 혼인이 금지되었다는 뜻이다. 이 당시 濊에는 아직 중국식의 姓이 없었으며 同姓이라는 用語는 씨족단위를 姓으로 이해한 중국인 나름의 표현이다. 部落外婚·同姓不婚 등 일정한 단위집단 바깥에서 배우자를 구하는 것은 집단 간의 연계관계를 통해 용이한 물품교환 및 상호안전을 도모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반대로 內婚은 그 社會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爲한 目的에서 成立하였다.
4.『三國志』濊傳 註 13)
祭虎以爲神
호랑이는 후세에 주로 山神靈의 化身으로 취급되어 민간 신앙의 주요한 대상이 되었다. 호랑이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은 本 記事가 가장 오랜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濊條.
梁秉祐, 「Synoikismos考」『史叢』12·13合輯, 1968.
Raymond Firth, 『Element of Social Organization』1966, Beacon Press, Boston.
Loewenstein K., 『M. Weber’s Political Ideas in the Perspective of our times』1966(鄭文吉譯, 『막스베버의 政治思想』1980, 三英社)

사회·법 속은 沃沮와 비슷하지만,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分 不得妄相涉入 同姓不婚 多忌諱 疾病死亡輒捐棄舊宅更作新居 …… (中略) ……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 其邑落相侵犯 輒相罰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三國志』濊傳)
라 하여 몇가지 특이한 내용이 있었다.
우선 山川을 중시하여 排他的인 生活區域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활영역은 古代의 聚落이 발생하는 배경이 되는 것으로 祭祀·宗敎·血緣·親族·Totem·山神共同體이며, M. Weber가 지적한 ‘地域的 小宇宙’이다. 또한 Durkheim의 지적에 따르면 그것은 환절적 조직일 수도 있고, 후세에는 貢納團體로서의 뜻을 지닐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배타적인 생활구역은 邑落이 되어 氏族·部族의 구별이 되는 것으로서,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이었다(Raymond Firth, 『Element of Social Organization』p.53).
그리스 polis의 경우에도 城邑을 중심으로 한 群少 Polis들이 각기 土豪인 首長을 받들고 할거하여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하였을 것이며, 祭祀共同體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梁秉祐, 「Synoikismos考」pp.24~25).
다음의 同姓不婚은 族外婚(Exogamy)을 뜻하는 것으로 Totemism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舞天은 秋收共同大祭로서 部落祭의 성격을 띤 것이다. 특히 호랑이를 神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서 북방계열의 토착신앙을 살펴볼 수 있다.
<참조>
1.『三國志』濊傳 註 2)
濊
濊의 종족적 계통과 濊·貊·濊貊의 상호관계에 관해선 다수의 논고가 있다. 이를 크게 大別해 보면 濊·貊同種說과 濊·貊異種說로 나뉘어진다. 前者로는 일찍이 丁若鏞이 貊은 種族名이고 濊는 地名 또는 水名이라고 보아, 濊貊은 九貊 중의 一種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疆域考』 「濊貊考」) 凌純聲도 濊는 濊水地域에 거주하였던 貊族이라고 하여 동일하게 이해를 하였다. (『松花江下游的赫哲族』p.30)
三品彰英은 先秦文獻上의 貊은 北方族에 대한 汎稱이며, 濊는 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漢代의 汎稱的인 濊는 고구려·부여·東濊를 포괄하는 民族名이고, 濊貊이라는 熟語的인 호칭은 濊라는 현실적인 民族名과 古典的인 北族에 대한 汎稱인 貊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보고, 고구려를 지칭한 貊은 民族名인 汎濊族內의 특정 部族名으로 보았다. 곧 漢代 이후의 貊은 濊와 同一한 系統이라고 보았다. ( 「濊貊族小考」) 尹武炳은 濊貊이라는 명칭은 『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濊族과 貊族을 합친 汎稱이 아니라 貊族인 高句麗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漢代 이후의 濊와 (濊)貊을 同一系統 내에서 各各 구분되는 實體로 보았다.
한편 臺灣의 芮逸夫는 韓民族을 濊貊과 韓의 兩系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濊貊族중 濊族은 한반도 중북부와 松花江·吉林·嫩江 등에 살았고, 貊族은 山東·遼東·渤海岸 등에 거주하여, 그 居住分布에 따라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韓國古代民族考略』) 金貞培도 濊·貊·韓은 同一系 족속으로서 그 分布地域의 차이에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 「濊貊族에 관한 硏究」)異種說의 대표로서 三上次男은 濊族은 有文土器文化를 영위하였고, 生活方式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율이 컸던 古아시아族 系統이고, 貊族은 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계통으로 파악하였다.(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
三上次男說은 빗살문토기文化와 無文土器文化가 同時代의 것이 아니라 時代를 先後하는 文化였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시된다. 그런데 高句麗族과 濊貊과의 관계에 대해 李玉은 독특한 입론을 제기하였다. 즉, 그는 貊族과 濊族은 中國의 山西省·河北省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東으로 이동해 왔는데, B.C.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定着해 있던 濊族은 이어 貊族에게 밀려 南으로 왔다가 고조선에게 쫓겨 요동군에 예속된 것이 濊君 南閭의 집단이고, 이 濊의 일부가 貊族에 흡수되어 B.C. 2세기 무렵 새로운 종족인 濊貊이 成立되었으니, 이것이 高句麗族이라고 하였다.(『高句麗民族의 形成과 社會』)
≪參考文獻≫
丁若鏞, 『疆域考』卷2 「濊貊考」
尹武炳, 「濊貊考」『白山學報』1, 1966.
金貞培, 「濊貊族에 관한 硏究」『白山學報』5, 1968.
李 玉, 『高句麗 民族形成과 社會』1984, 敎保文庫.
凌純聲, 『松花江下游的赫哲族』1935.
芮逸夫, 「韓國古代民族考略」『中韓論集』1, 1955.
三品彰英, 「濊貊族小考」『朝鮮學報』4輯, 1953.
三上次男, 「東北アジアの古代文化と穢人の民族的性格」『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2.『三國志』濊傳 註 9)
山川各有部分
산과 내를 경계로 한 일정지역이 각 邑落에 귀속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다른 부락의 사람들이 허락없이 이 지역 내에 들어와 활동하면 곧 그에 대한 벌(責禍)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당시 東濊社會에서 각 읍락의 區域 內에서의 경작지는 그 住民들에게 개별적으로 占有되었더라도 그에 대한 원천적인 소유권은 읍락에 귀속되었으며, 山林과 河川 및 草地 등은 共有의 상태이었음을 말해주는 바이다. 근세기 초까지도 시베리아의 소-ㄹ족(Shors), 에벤크족(Evenks), 토파라족(Tofalas) 등과 같은 종족의 各 氏族들은 江이나 일정지역을 저마다의 배타적인 생활권으로 소유하고 있으면서 씨족공동체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었다. 이는 濊族의 그것과 상통하는 면을 보여준다. 濊의 각 姓(氏族)은 族外婚의 단위가 되는 등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록에 의거해 東濊社會가 氏族制 社會 末期의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당시 東濊社會에선 농업이 상당히 진전되었고, 生口 즉, 노예도 존재하는 등 씨족공동체적인 상태는 벗어났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邑落單位의 공동체적 면모는 아직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參考文獻≫
金哲埈, 「新羅時代의 親族集團」『韓國史硏究』1, 1968 (『韓國古代社會硏究』1975)
M.G. Levin & Pipotapov, 『The Peoples of Siberia』1964.
3.『三國志』濊傳 註 10)
同姓不婚
같은 씨족 내에서의 혼인이 금지되었다는 뜻이다. 이 당시 濊에는 아직 중국식의 姓이 없었으며 同姓이라는 用語는 씨족단위를 姓으로 이해한 중국인 나름의 표현이다. 部落外婚·同姓不婚 등 일정한 단위집단 바깥에서 배우자를 구하는 것은 집단 간의 연계관계를 통해 용이한 물품교환 및 상호안전을 도모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반대로 內婚은 그 社會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爲한 目的에서 成立하였다.
4.『三國志』濊傳 註 13)
祭虎以爲神
호랑이는 후세에 주로 山神靈의 化身으로 취급되어 민간 신앙의 주요한 대상이 되었다. 호랑이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은 本 記事가 가장 오랜 것이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濊條.
梁秉祐, 「Synoikismos考」『史叢』12·13合輯, 1968.
Raymond Firth, 『Element of Social Organization』1966, Beacon Press, Boston.
Loewenstein K., 『M. Weber’s Political Ideas in the Perspective of our times』1966(鄭文吉譯, 『막스베버의 政治思想』1980, 三英社)
註) 133
迦羅國은 加耶(加洛)를 뜻한다. 加耶는 中國文獻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韓國·日本側 記錄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참조>
1.『南齊書』加羅傳 註 1)
加羅傳
加耶는 중국문헌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韓國·日本側 기록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加耶는 ‘갓나라(邊國)’를 뜻하는 말로 보기도 하며,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p.306) 一族·同族을 뜻하는 滿洲語의 hala, 혹은 퉁구스어의 kala, Xala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說도 있다.(崔鶴根, 『國語方言硏究』)
중국정사중 加耶에 대하여 立傳하고 있는 것은 『南齊書』가 유일한데, 이는 5C 末 加耶의 해상발전이 활발하였음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南齊書』加羅傳은 國王 荷知가 479年 南齊와 교섭하여 册封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加耶에 관한 보다 상세한 상태서술은 없다.
≪參考文獻≫
廣開土大王陵碑.
新羅眞鏡大師寶月淩空塔碑.
『三國史記』卷34 「地理志」1 康州 高靈郡條.
『三國遺事』卷2 「紀異」2 所錄 『駕洛國記』
『日本書紀』卷19 欽明天皇 23年條.
丁仲煥, 「辰國三韓及加羅名稱考」『釜山大開校10周年記念論文集』1956; 『加羅史草』1962, 釜山大韓日文化硏究所.
崔鶴根, 『國語方言硏究』1968, 서울大出版部.
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史學硏究』26, 1975; 「復元 加耶史」『文學과 知性』28·29·31, 1977~78.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韓國古代史硏究』1976, 博英社.
文定昌, 『伽倻史』1978, 柏文堂.
李基白·李基東 共著,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一潮閣.
金泰植, 「5세기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대한 硏究」『韓國史論』12, 1985.
2.『南齊書』加羅傳 註 2)
加羅國 三韓種也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는 것은 弁辰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後漢書』·『三國志』등의 史料上에는 三韓에 加羅가 들어있지 않았으나, 弁辰지역에서 加羅가 뒤에 등장하여 弁辰지역과 加羅가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같게 되었기 때문에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三國志』 「東夷傳」弁辰條에 3C 중엽 洛東江 중·하류지역의 弁韓 12國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나라 중 狗邪國·彌烏邪馬國·安邪國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三國遺事』에 인용된 『駕洛國記』에서는 本加耶를 비롯한 大加耶·古寧加耶·星山加耶·小加耶 등 6加耶의 이름이 보이며, 같은 책에 인용된 『本朝史略』에서는 本加耶 대신 非火加耶의 이름이 보인다. 12國이나 加耶 6國은 개별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며, 대개 4C初를 경계로 하여 弁韓에서 加耶로 그 명칭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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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尾幸久, 「任那に關する-試論」『古代東アヅア史論集』(下), 1978.
3.『隋書』新羅傳 註 5)
迦羅國
迦羅國은 加耶(加洛)를 뜻한다. 百濟와 新羅 사이에서 정치적 위협을 항상 받아온 가야국은 일찍부터 鐵器文化를 바탕으로 크게 발전한 바 있다.
가야는 6개의 연맹체로서 주로 북방의 內陸的인 大加耶(高靈)와 남방의 海洋的인 金官加耶(金海)로 대별되는 바, 일찍부터 일본에 진출했지만 정치적 구심체가 없어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金官加耶는 法興王 19년(532)에, 大加耶는 眞興王 23년(562)에 각각 신라에 投降하였다.
비록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지만 加耶는 신라의 정치와 문화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중에서도 金庾信系의 정치적 역할과 于勒의 예가 대표적이다.

<참조>
1.『南齊書』加羅傳 註 1)
加羅傳
加耶는 중국문헌에는 加羅 또는 加邏로 표기되어 있으며, 韓國·日本側 기록에는 加羅·加良·加耶·伽倻·狗邪·駕洛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加耶는 ‘갓나라(邊國)’를 뜻하는 말로 보기도 하며, (李丙燾, 「加羅史上의 諸問題」p.306) 一族·同族을 뜻하는 滿洲語의 hala, 혹은 퉁구스어의 kala, Xala와 관련이 있으리라는 說도 있다.(崔鶴根, 『國語方言硏究』)
중국정사중 加耶에 대하여 立傳하고 있는 것은 『南齊書』가 유일한데, 이는 5C 末 加耶의 해상발전이 활발하였음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南齊書』加羅傳은 國王 荷知가 479年 南齊와 교섭하여 册封을 받았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뿐, 加耶에 관한 보다 상세한 상태서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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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南齊書』加羅傳 註 2)
加羅國 三韓種也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는 것은 弁辰을 두고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後漢書』·『三國志』등의 史料上에는 三韓에 加羅가 들어있지 않았으나, 弁辰지역에서 加羅가 뒤에 등장하여 弁辰지역과 加羅가 차지한 지역이 대체로 같게 되었기 때문에 加羅가 三韓의 한 種族이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三國志』 「東夷傳」弁辰條에 3C 중엽 洛東江 중·하류지역의 弁韓 12國이 있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나라 중 狗邪國·彌烏邪馬國·安邪國을 제외하고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三國遺事』에 인용된 『駕洛國記』에서는 本加耶를 비롯한 大加耶·古寧加耶·星山加耶·小加耶 등 6加耶의 이름이 보이며, 같은 책에 인용된 『本朝史略』에서는 本加耶 대신 非火加耶의 이름이 보인다. 12國이나 加耶 6國은 개별로 볼 수 없다고 생각되며, 대개 4C初를 경계로 하여 弁韓에서 加耶로 그 명칭이 바뀌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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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隋書』新羅傳 註 5)
迦羅國
迦羅國은 加耶(加洛)를 뜻한다. 百濟와 新羅 사이에서 정치적 위협을 항상 받아온 가야국은 일찍부터 鐵器文化를 바탕으로 크게 발전한 바 있다.
가야는 6개의 연맹체로서 주로 북방의 內陸的인 大加耶(高靈)와 남방의 海洋的인 金官加耶(金海)로 대별되는 바, 일찍부터 일본에 진출했지만 정치적 구심체가 없어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金官加耶는 法興王 19년(532)에, 大加耶는 眞興王 23년(562)에 각각 신라에 投降하였다.
비록 中央集權的인 古代國家로 성장하지는 못하였지만 加耶는 신라의 정치와 문화 개발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중에서도 金庾信系의 정치적 역할과 于勒의 예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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