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이 임언에게 영주 관청의 벽에 전적을 기록하게 하다
윤관(尹瓘)이 또 임언(林彦)으로 하여금 그 일을 기록하게 하고, 영주(英州) 관청의 벽에 쓰게 하여 말하기를,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약한 것은 본디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으며, 작은 것은 본디 큰 적을 대적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외운 것이 오래되었으나 지금에서야 〈이것을〉 믿게 되었다. 여진(女眞)은 우리나라보다 강함을 따지면 약하고 많은 것을 따지면 적어 그 기세가 아주 다른데, 변방을 엿보다가 숙종(肅宗) 10년(1105)에 틈을 타 난을 일으켜 우리의 사민(士民)을 많이 죽였고, 포승으로 묶어 노예로 삼은 것이 또한 많았다. 숙종께서 분노하여 군사를 모아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그들을 토벌하려 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지금 임금〈예종〉께서 왕위를 이어 상복을 입으신지 3년이라 이제 막 대상(大祥)과 담제(禫祭)를 마치시고 좌우에 말하기를, ‘여진은 본디 고구려[勾高麗]의 부락으로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공직(貢職)을 바치며 우리 조종(祖宗)의 깊은 은혜를 깊이 입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무도(無道)하게 배반하니, 선고(先考)께서 크게 분노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옛사람이 말하는 큰 효도라는 것은 그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일 뿐이라 하였다. 짐이 지금 다행스럽게도 달제(達制)를 마치고 국사(國事)를 보게 되었으니, 어찌 의로운 깃발을 들어 무도함을 정벌하여 아버지의 치욕을 완전히 씻지 않겠는가?’라 하셨다. 이에 명령하여,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守司徒 中書侍郞平章事) 윤관을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 翰林學士承旨)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정병(精兵) 30만 명을 거느리고 정벌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윤관은 일을 하는데 뛰어난 사람으로 일찍이 김유신(金庾信)의 사람 됨됨이를 사모하여 말하기를, ‘김유신은 6월에 강을 얼게 하여 3군을 건너게 하였으니, 이것은 다름 아니라 지극한 정성일 뿐이다. 나 역시 그렇게 하지 못할 사람이겠는가?’라 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에 감응하여 신이한 행적이 여러 번 들렸다. 오연총이 그때 명망이 뛰어나 천성이 진실하고 근면하여 일에 닥쳐서는 반드시 세 번 생각하여 좋은 계획과 큰 계책이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두 공이 일찍이 이것에 뜻을 두어 명령을 듣자 분격하여 군사를 데리고 동쪽으로 갔다. 군사가 출발하는 날에 몸소 갑옷을 두르고 맹세하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며 모두 명령을 따랐다. 적경(賊境)에 들어서서는 3군이 분격하여 소리치며 일당백으로 싸우니, 마른 나무를 꺾고 대나무를 쪼개는 것처럼 말할 것이 못될 정도로 쉽게 깨우쳐 주었다. 6,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고 그 활과 화살을 싣고 진(陣) 앞으로 와서 항복하는 자는 50,000여명이었으며, 그 흙먼지를 보고 혼이 빠져 북쪽 끝까지 달아나는 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아! 여진이 완악하고 어리석어, 강약(强弱)과 중과(衆寡)의 기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으로 간 것이 이와 같았다. 그 땅의 둘레는 300리로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렀고 서북의 경계는 개마산(盖馬山)이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정주(定州)의 2주에 닿았는데, 산천은 수려하고 토지는 기름져서 우리 백성들이 살만하였다. 본디 고구려의 소유로 옛 비석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릇 고구려가 예전에 잃었던 것인데 지금 임금께서 그 후에 얻은 것이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6성(城)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진동군(鎭東軍)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로, 병민(兵民)이 1,948정호(丁戶)이다. 두 번째는 안령군(安嶺軍) 영주방어사(英州防禦使)로 병민이 1,238정호이다. 세 번째는 영해군(寧海軍) 웅주방어사(雄州防禦使)로 병민이 1,436정호이다. 네 번째는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로 병민이 680정호이다. 다섯 번째로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로 병민이 632정호이다. 여섯 번째는 공험진방어사(公嶮鎭防禦使)로 병민이 532정호이다. 현달하여 어질고 재주가 뛰어나 그 책임을 감당할 만한 인물을 선발하여 그곳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울타리가 되고 담장이 되어 왕실의 번병(藩屛)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편안하게 높은 베개를 벨 수 있게 되었고 전쟁의 근심[東顧之憂]이 없어졌다. 원수가 나에게 말하기를, ‘옛날 당(唐)의 재상 배진공(裴晋公)이 회서(淮西)로 출정하여 평정했을 때, 막객(幕客)인 한유(韓愈)가 비석을 세워 그 일을 널리 알렸다. 후대 사람들은 헌종(憲宗)이 장엄하며 남보다 뛰어난 덕이 있음을 알고 그를 칭송하였다. 네가 다행히 이 일에 종군하여 그 본말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기문(記文)을 지어 우리 성조(聖朝)의 전에 없는 위대한 공적을 무궁토록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임언이 명을 받고 붓을 잡아 그것을 기록한다.”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