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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이 지은 12곡과 이문이 지은 3곡
우륵(于勒)이 지은 12곡은註 417 첫째는 하가라도(下加羅都)註 418, 둘째는 상가라도(上加羅都)註 419, 셋째는 보기(寳伎)註 420, 넷째는 달이(逹已)註 421, 다섯째는 사물(思勿)註 422, 여섯째는 물혜(勿慧)註 423, 일곱째는 하기물(下竒物)註 424, 여덟째는 사자기(師子伎)註 425, 아홉째는 거열(居烈)註 426, 열째는 사팔혜(沙八兮)註 427, 열한째는 이사(爾赦)註 428, 열두째는 상기물(上竒物)註 429이다. 이문(泥文)註 430이 지은 3곡은 첫째는 오(烏)註 431, 둘째는 서(鼠)註 432, 셋째는 순(鶉)註 433이다【사자(赦字)는 자세히 알 수 없다註 434】.
註) 417
우륵(于勒)이 지은 12곡: 12곡 중에서 백희잡기(百戲雜技)인 사자기(師子伎)와 보기(寶伎)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가야연맹의 일원이었던 가야의 소국 명칭에 해당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야금 12곡은 우륵이 모두 지었다고 보기보다는 5~6세기 대가야 중심 후기 가야연맹 소속 국가들의 국풍(國風)을 우륵이 정리하여 금곡화(琴曲化)한 것으로, 노래와 춤, 가야금 반주가 모두 포괄되어 있는 종합적 가무곡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김동욱, 1966, 24~27쪽 및 32쪽). 우륵 12곡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510년대설(田中俊明, 1992, 118~119쪽), 520년대설(백승충, 1995, 70~78쪽), 530년대설(주보돈, 2006, 70~71쪽), 541년경설(이영호, 2006, 119쪽) 등이 제기되었다.
521년에 양(梁)나라에 파견된 백제 사신에게서 정보를 얻어 찬술한 『양직공도(梁職貢圖)』에 상기문(上己文), 탁(卓) 등이 백제에 부용(附庸)되었다고 전한다. 우륵 12곡에 상기문을 가리키는 상기물(上奇物)이 나오므로, 우륵 12곡은 상기문(상기물)이 백제에 부용되기 이전에 제작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시기의 하한은 521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권17 계체천황(繼體天皇) 10년(516) 9월조에 백제가 기문(己汶)을 차지하였음을 시사해주는 내용이 전한다. 결국 기문세력이 대가야에서 이탈하여 백제에 부용된 시점이 대체로 516년 9월경이었으므로, 우륵 12곡은 그 이전에 제작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이와 더불어 562년 대가야가 멸망할 때에 우륵(于勒)이 생존하였음을 감안한다면, 그가 우륵 12곡을 지은 시기는 500년에서 516년 사이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종래에 이러한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514년에서 516년 사이로 보는 견해(전덕재, 2020, 89~96쪽)와 505년부터 512년 사이로 보는 견해(김태식, 2009, 100~102쪽)가 제기되었다. 백희잡기를 제외한 우륵 10곡은 낙동강 서쪽 경상도와 소백산맥 서쪽 전라도지역에 위치한 10개의 소국명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전덕재, 2020, 『한국 고대 음악과 고려악』, 학연문화사
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백승충, 1995, 「가라국과 우륵십이곡」, 『부대사학』 19
이영호, 2006, 「우륵 12곡을 통해 본 대가야의 정치체제」,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대가야박물관·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주보돈, 2006, 「우륵의 삶과 가야금」,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대가야박물관·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김태식, 2009, 「대가야의 발전과 우륵 12곡」,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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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18
하가라도(下加羅都):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이다. 하가라도의 위치를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일찍이 하가라도를 함안의 아라가야(阿羅加耶)라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양주동, 1965, 31쪽). 현재까지 하가라도에 대해 김해의 금관가야(金官加耶)로 보는 견해(이병도, 1976, 304쪽; 김태식, 1993, 293~294쪽; 주보돈, 2004, 123쪽),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에 위치한 다라국(多羅國)으로 이해하는 견해(田中俊明, 1992, 110~113쪽; 백승충, 1995, 70쪽), 저포리유적(苧浦里遺蹟) 및 반계제고분군(磻溪堤古墳群) 등이 위치한 합천군 봉산면지역으로 이해하는 견해(이형기, 2009, 140~144쪽) 등이 제기되었다. 이외에 상·하라가도를 가야연맹의 중심지, 즉 왕도(王都)인 대가야를 크게 상·하로 구분한 개념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전덕재, 2020, 80쪽).
〈참고문헌〉
양주동, 1965, 『증정고가연구』, 일조각
김태식, 1993, 『가야연맹사』, 일조각
이형기, 2009, 『대가야의 형성과 발전 연구』, 경인문화사
전덕재, 2020, 『한국 고대 음악과 고려악』, 학연문화사
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이병도, 1976, 「가야사상의 제문제」,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백승충, 1995, 「가라국과 우륵십이곡」, 『부대사학』 19
주보돈, 2004, 「고대사회 거창의 향방」, 『영남학』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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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19
상가라도(上加羅都):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이다. 현재 경상북도 고령군에 위치한 대가야를 가리킨다. 따라서 상가라도라는 음악은 후기 가야연맹의 중심 국가인 대가야의 음악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상·하라가도를 가야연맹의 중심지, 즉 왕도(王都)인 대가야를 크게 상·하로 구분한 개념으로 이해한 견해도 있다(전덕재, 2020, 『한국 고대 음악과 고려악』, 학연문화사, 80쪽).바로가기
註) 420
보기(寳伎):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로서, 금색(金色)의 칠을 한 공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곡예의 반주로 사용되었다. 공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곡예를 고구려의 장천1호분, 수산리고분벽화, 약수리고분벽화, 팔청리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다. 백제에서는 이를 농주지희(弄珠之戱)라고 불렀다. 고대 일본의 고려악(高麗樂) 가운데 식파(埴破; はんなり)가 이와 비슷한 가무(歌舞)에 해당한다. 이것을 일명(一名) 금옥무(金玉舞), 또는 등옥무(登玉舞), 농옥(弄玉), 오지무(五持舞)라고 불렀으며, 음악의 반주에 맞추어 진흙으로 만든 옥환(玉丸)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곡예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공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곡예를 도환(跳丸) 또는 농환(弄丸)이라고 불렀다. 최치원이 지은 「향악잡영(鄕樂雜詠)」에 전하는 5가지 곡예 가운데 금환(金丸)이 바로 공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가무에 해당한다. 금환, 금옥무라는 명칭은 공에 황금색을 칠한 다음, 그것을 가지고 재주를 부렸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보기를 공연할 때에 황금색을 칠한 공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곡예라는 의미에서 보기(寶伎)라고 명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대가야에서 479년에 남제(南齊)와 교통하였으므로, 남제에서 직접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해볼 수 있고, 아니면 백제를 통해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전덕재, 2020, 86쪽). 한편 보기를 지명으로 이해한 다음, 그것을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에 해당하는 포촌현(浦村縣)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田中俊明, 1992, 110쪽).
〈참고문헌〉
전덕재, 2020, 『한국 고대 음악과 고려악』, 학연문화사
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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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21
달이(逹已):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이다. 종래에 ‘達已’를 ‘達巳’의 오기로 이해하여, ‘達已’를 현재 경남 하동으로 비정되는 다사(多沙)[대사(帶沙)]로 보는 견해(田中俊明, 1992, 107쪽). 『일본서기』에 전하는 상·하치리(上·下哆利)와 연결시켜 전남 여수시 및 돌산읍으로 이해하는 견해(김태식, 2009, 110쪽)가 제기되었다. 이외에 『일본서기』에 전하는 탁국[㖨國] 또는 탁기탄[㖨己呑] 또는 탁이탄[㖨已呑]을 ‘탁(달)국’ 또는 탁기실(기실이나 이실)로 음독(音讀)할 수 있고, 특히 ‘㖨己(㖨已)’를 ‘기(이)’로 음독할 수 있음을 주목하여, ‘달이(達已)’를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의 옥전고분을 축조한 탁국(탁기탄), 즉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백제 곁에 위치한 소국(小國) 가운데 하나로 전하는 ‘탁(卓)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전덕재, 2020, 81~82쪽). 이외에 본서 지리지에 다인현(多仁縣)의 본래 명칭인 달이현(達已縣)과 연결시켜 경북 예천[달이현은 오늘날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으로 비정]으로 이해하는 견해(이병도, 1977, 507쪽), 예천 또는 달구화(達句火)와 연결시켜 대구시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末松保和, 1949, 242쪽)도 제기된 바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전덕재, 2020, 『한국 고대 음악과 고려악』, 학연문화사
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김태식, 2009, 「대가야의 발전과 우륵 12곡」,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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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22
사물(思勿):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로서 현재 경상남도 사천시에 위치한 가야 소국의 음악이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강주(康州) 고성군(固城郡)조에 “사수현(泗水縣)은 본래 사물현(史勿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사주(泗州)이다.”라고 전한다. 사물은 바로 오늘날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에 해당하는 사물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바로가기
註) 423
물혜(勿慧):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이다. 물혜를 무주(武州) 소속 무안군(務安郡)의 본래 이름인 물아혜군(勿阿兮郡)과 연결시켜 전라남도 무안으로 비정하는 견해(견해(末松保和, 1949, 242쪽), 강주(康州) 함양군(咸陽郡)의 영현(領縣)인 이안현(利安縣)의 본래 이름인 마리현(馬利縣)과 연결시켜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으로 비정하는 견해(양주동, 1965, 31쪽), 상주(尙州) 숭선군(崇善郡)의 영현인 효령현(孝寧縣)의 본래 이름인 모혜현(芼兮縣)과 연결시켜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으로 비정하는 견해(김동욱, 1966, 27쪽), 강주 고성군(固城郡)의 영현인 문화량현(蚊火良縣)과 연결시켜 경상남도 고성군 상리면으로 비정하는 견해(田中俊明, 1992, 138쪽)가 제기되었다. 이외에 무주 승평군(昇平郡)의 영현인 희양현(晞陽縣)의 본래 이름인 마로현(馬老縣)이 『일본서기』에 모루(牟婁), 만해(滿奚),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마련(麻連)으로 전하는 사실을 주목하여 물혜를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김태식, 2009. 110~111쪽).
〈참고문헌〉
양주동, 1965, 『증정고가연구』, 일조각
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김동욱, 1966, 「우륵십이곡에 대하여」, 『신라가야문화』 1, 영남대학교 신라가야문화연구소
김태식, 2009, 「대가야의 발전과 우륵 12곡」,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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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24
하기물(下竒物):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이다. 본 기록에 우륵 12곡의 하나로 전하는 상기물(上奇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서기』에 기문(己汶)이라는 지명이 나오고, 『양직공도(梁職貢圖)』에 상기문(上己文)이 전한다. 또한 『괄지지(括地志)』에 기문하(基汶河),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상·중·하기문(上·中·下己汶)이 나온다. 상기물과 하기물의 위치 비정은 바로 기문(己汶)이나 상기문의 위치 비정과 연계하여 이루어졌다. 일찍이 기물(竒勿)을 상주(尙州) 감문군(甘文郡)의 영현(領縣)인 어모현(禦侮縣)의 본래 이름인 금물현(今勿縣)과 연결하여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또는 감문군(甘文郡)과 연계하여 경상북도 김천시, 또는 전주(全州) 임실군(任實郡)의 영현인 청웅현(靑雄縣)의 본래 이름인 거사물현(居斯勿縣)과 연계하여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가운데 하나로 비정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末松保和, 1949, 242쪽). 한편 『괄지지』에 전하는 기문하를 섬진강으로 이해한 다음, 거사물이라는 지명을 유념하여, 상기물을 장수군 번암면, 하기물을 남원시로 비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田中俊明, 1992, 103~106쪽). 또한 거사물이라는 지명과 남원시의 옛 명칭인 고룡군(古龍郡)에서 ‘古龍’이 ‘고밀’로 발음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상기물을 장수군 번암면 및 임실군 임실읍 일대, 하기물을 남원시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김태식, 2009, 108~109쪽).
〈참고문헌〉
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김태식, 2009, 「대가야의 발전과 우륵 12곡」,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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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25
사자기(師子伎):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로, 사자 가면을 쓰고 공연하는 사자춤을 이른다. 한나라 때 장건(張騫) 일행이 서역과 통한 이후에 서역의 여러 나라에서 사자를 헌상(獻上)하였고, 그 후 비로소 중국에 사자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한편 중국이나 한국에서 사자를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맹수(猛獸)로 인식하여 불상이나 불탑에 널리 배치하였다. 신라의 분황사탑에 사자상을 안치하였고, 고구려의 장천1호분 벽화에 사자좌 좌우에 혀를 내밀고 꼬리는 위로 들어 올린 사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에서도 5세기대에 불상이나 불탑에 사자상을 배치하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한편 당나라의 능묘제도가 도입된 통일신라시대에 괘릉 앞이나 성덕왕릉 또는 흥덕왕릉 주위에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이때 사자상은 벽사(辟邪)의 기능을 가진 석수(石獸)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이와 같은 사자의 이미지는 사자춤의 그것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을 것이다.
479년에 대가야왕 하지(荷知)가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481년(소지마립간 3)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를 침략하자, 백제와 가야(대가야)가 신라를 구원한 사례가 발견된다. 이를 통해 5세기 후반에 백제와 대가야가 밀접한 관계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여기서 대가야에 사자춤이 전래된 경로를 두 가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하나는 479년에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된 대가야의 사신이 남제에서 직접 사자춤을 배워왔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를 통해 대가야에 사자춤이 전래되었을 가능성이다. 현재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열어둘 필요가 있다(전덕재, 2020, 84~86쪽). 한편 사자기를 지명으로 이해한 다음, 그것을 강주(康州) 강양군(江陽郡)의 영현(領縣)인 삼기현(三岐縣)이나 이것의 본래 이름인 삼지현(三支縣)과 연결하여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田中俊明, 1992, 109쪽).
〈참고문헌〉
전덕재, 2020, 『한국 고대 음악과 고려악』, 학연문화사
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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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26
거열(居烈):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로,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에 위치하였던 가야 소국의 음악을 이른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강주(康州)조에 “거창군(居昌郡)은 본래 거열군(居烈郡)【혹은 거타(居陁)라고 한다】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쓴다.”고 전한다. 거창군, 즉 거열군은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에 해당한다.바로가기
註) 427
사팔혜(沙八兮):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이다. 일찍부터 현재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의 옛 지명인 초팔혜현(草八兮縣)과 연결하여 사팔혜를 합천군 초계면으로 비정하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졌다(末松保和, 1949, 242쪽; 양주동, 1965, 31쪽; 田中俊明, 1992, 102쪽; 김태식, 2009, 111쪽). 기와의 종류 가운데 수막새를 부막새(夫莫斯) 또는 부방초(夫防草), 암막새를 여막사(女莫斯) 또는 여방초(女防草)라고 표현한다(강봉진, 1998, 166쪽). 기와를 가리키는 ‘새’를 ‘사(斯)’ 또는 ‘초(草)’로 표기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를 통하여 초팔혜(草八兮)와 사팔혜(沙八兮)는 서로 통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팔혜를 초팔혜와 연결시켜 합천군 초계면 지역으로 비정하는 기존의 견해는 나름 타당성을 지녔다고 판단된다. 한편 합천군 쌍책면과 초계면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데, 만약 쌍책지역에 다라국(多羅國)이 있다고 본다면, 사팔혜는 다른 지역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사팔혜를 의령 부림과 신반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이형기, 2009, 154쪽).
〈참고문헌〉
양주동, 1965, 『증정고가연구』, 일조각
강봉진, 1998, 『건축문화유산대요』, 기문사
이형기, 2009, 『대가야의 형성과 발전 연구』, 경인문화사
末松保和, 1956,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김태식, 2009, 「대가야의 발전과 우륵 12곡」,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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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28
이사(爾赦):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이다. 종래에 이사를 『일본서기』에 전하는 사이기국(斯二岐國)과 연결하여,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田中俊明, 1992, 109쪽; 김태식, 2009, 112~114쪽).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강주(康州) 강양군(江陽郡)조에 “의상현(宜桑縣)은 본래 신이현(辛尒縣)【또는 주조촌(朱烏村) 또는 천주현(泉州縣)이라고도 한다】이었고,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고려]의 신번현(新繁縣)이다.”라고 전한다. 의상현, 즉 신이현이 현재의 의령군 부림면에 해당한다. 신이(辛尒)를 고려에서 신번(新繁)으로 개칭하였던 것에서 ‘신(辛)’과 ‘신(新)’이 서로 통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실제로 고대 중국에서 신(辛)은 신(新)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사기(史記)』 율서(聿書)에서 ‘신(辛)’자를 ‘만물이 새로 생성된다[신생(辛生)]’는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여기서 신(辛)은 신(新)과 동일한 의미였다. 『석명(釋名)』 석천(釋天)편에서 신(辛)은 신(新)을 의미하며, ‘물(物)의 처음 새 것[辛新也 物初新者皆收成也]’을 가리킨다고 하였다(諸橋轍次, 1985, 1072쪽). 신(新)은 ‘새’ 또는 ‘사’의 훈차(訓借)이므로 신이(辛尒), 즉 신이(新尒)는 ‘새이’ 또는 ‘사이’로 음독(音讀)할 수 있다. 사이기국에서 ‘기(岐)’는 ‘지(支)’나 ‘지(只)’와 마찬가지로 지명 어미에 해당한다. 사이(斯二)는 신이(辛尒)[신이(新尒)]의 음독(音讀)인 ‘새이’ 또는 ‘사이’와 통한다. 따라서 사이기국을 신이현(辛尒縣), 즉 의령군 부림면에 위치하였다고 고증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사(爾赦)는 바로 ‘사이’의 도치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사를 경남 의령군 부림면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나름 타당성이 높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諸橋轍次, 1985, 『大漢和辭典 10』, 大修館書店
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김태식, 2009, 「대가야의 발전과 우륵 12곡」, 『악사 우륵과 의령지역의 가야사』,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홍익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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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429
상기물(上竒物):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 중의 하나이다. 현재 상기물은 전라북도 장수면 번암면과 임실군 임실읍으로 비정하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하기물(下竒物)은 전라북도 남원시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기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앞의 하기물(下竒物) 주석 참조.바로가기
註) 430
이문(泥文): 우륵(于勒)의 제자이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2년(551) 3월조에는 이문(尼文)으로 전한다. 이 기록에는 진흥왕이 낭성(娘城)에 순행할 때에 이문이 우륵과 함께 왕의 부름을 받고 하림궁(河臨宮)에서 가야금곡을 연주하였다고 전한다. 그가 지은 가야금곡으로 오(烏)[까마귀], 서(鼠)[쥐], 순(鶉)[메추라기]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들은 순수한 창작곡으로서 동물의 소리나 행동을 가야금 선율로 묘사한 서정적인 곡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정구복 등,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75쪽).바로가기
註) 431
오(烏): 우륵(于勒)의 제자 이문(泥文)이 지은 가야금곡이다. 까마귀 소리나 행동을 소재로 하여 만든 가야금곡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註) 432
서(鼠): 우륵(于勒)의 제자 이문(泥文)이 지은 가야금곡이다. 쥐 소리나 행동을 소재로 하여 만든 가야금곡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註) 433
순(鶉): 우륵(于勒)의 제자 이문(泥文)이 지은 가야금곡이다. 메추라기 소리나 행동을 소재로 하여 만든 가야금곡으로 추정된다.바로가기
註) 434
사자(赦字)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본서 악지의 찬자가 본래 우륵 12곡의 하나인 ‘이사(爾赦)’ 다음에 ‘赦字未詳’이라고 세주를 달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문(泥文)이 지은 3곡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기술된 ‘三曰鶉’ 다음에 세주를 달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본서 악지의 찬자가 세주(細注)로 ‘赦字未詳’이라고 기술한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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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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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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