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표(年表) 작성 목적
해동(海東)에 국가가 있은 지는 오래되었다. 기자(箕子)註 001가 주(周)註 002 왕실의 책봉을 받고註 003한(漢)註 004 초에 위만(衛滿)註 005이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부터이지만, 연대가 아득히 오래되고 기록이 소략하여 진실로 상세히 알 수 없다. 삼국이 정립(鼎立)하게 되자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 많아졌는데, 신라(新羅)는 56왕 992년이었고, 고구려[高麗]는 28왕 705년, 백제(百濟)는 31왕 678년이었다. 그 시작과 마지막을 살펴 알 수 있기에 삼국의 연표를 만든다.【당(唐)註 006의 가언충(賈言忠)註 007이 이르기를, “고구려[高麗]는 한(漢) 때부터 나라가 있어 지금 900년이 되었다.註 008”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기자(箕子): 중국 상(商)나라 주왕대(紂王代)의 현인(賢人)으로서 왕의 무도(無道)를 간언하였다가 감옥에 갇혔으나 주(周)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풀어주었다고 알려졌다. 그가 무왕(武王)에게 유교통치의 근간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바쳤다고 전하고 있다. 한대(漢代) 이후의 사서(史書)에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기술되기 시작하였지만, 현재 기자동래설은 부정되고 있다. 이는 한(漢) 무제(武帝)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이래 유포되기 시작한 것으로, 고조선 지역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실제 사실과 다른 전승이 전해진 것이다.
주(周): B.C.1046~B.C.256 동안 존속하였던 중국의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 고대 국가. 주 무왕(武王)이 여러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 주왕(紂王)의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상(商)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하였다. 제후들에게 분봉(分封)하는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 단(旦)이 국가 통치를 예제(禮制)로 정리하였는데, 이후 후대 국가 통치 제도의 전범으로서 자리 잡았다. 후대에 회복해야 할 이상적인 가치를 가진 나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B.C. 9세기부터 제후들의 이반(離反)과 융적(戎狄)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쇠퇴하다가, 유왕(幽王) 대인 B.C.771년 견융(犬戎)에게 도읍 호경(鎬京, 시안)이 함락되어 망하였다. 이후 제후들이 유왕의 아들 평왕(平王)을 왕으로 받들면서 동쪽 낙읍(洛邑, 뤄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 시점을 기점으로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구분한다. 동주 시기는 제후들이 할거하는 분열기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 불리며, 주는 명목상 종주국의 지위만을 가지게 되고 정치적 권위와 지배력을 잃게 된다. 결국 전국시대에 이르면 낙읍 부근을 통치하는 작은 제후국 정도가 되었다가, B.C.256년 난왕(赧王)이 진(秦)에 항복하면서 주는 멸망한다.
B.C. 9세기부터 제후들의 이반(離反)과 융적(戎狄)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쇠퇴하다가, 유왕(幽王) 대인 B.C.771년 견융(犬戎)에게 도읍 호경(鎬京, 시안)이 함락되어 망하였다. 이후 제후들이 유왕의 아들 평왕(平王)을 왕으로 받들면서 동쪽 낙읍(洛邑, 뤄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 시점을 기점으로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구분한다. 동주 시기는 제후들이 할거하는 분열기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 불리며, 주는 명목상 종주국의 지위만을 가지게 되고 정치적 권위와 지배력을 잃게 된다. 결국 전국시대에 이르면 낙읍 부근을 통치하는 작은 제후국 정도가 되었다가, B.C.256년 난왕(赧王)이 진(秦)에 항복하면서 주는 멸망한다.
기자(箕子)가 … 받고: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1 기이제1 고조선왕검조선조『삼국유사』 권제1 왕력(王曆) 제1 기이(紀異第一)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전승이 전한다. 하지만 이는 후대의 윤색으로 사실이 아니다.
한(漢): 유방(劉邦)에 의해 건국된 중국의 대표적 통일 왕조 국가로, B.C.202~A.D 220년 동안 존속하였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열국들을 통일한 진(秦)이 몰락하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유방이 재차 통일하면서 한의 시대가 시작된다. 고조선 등 한국 고대 국가들도 한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 갔으나, 고조선이 한 무제(武帝)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는 등 군사적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진‧한대 이래 정립된 유교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한 강력한 황제권 중심 통치 체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8~23년 존속하였던 왕망(王莽)의 신(新)에 의해 일시적으로 망하였다가, 25년 광무제(光武帝)가 낙양을 도읍으로 하여 재건하면서 한 왕조는 이어지게 된다. 이 신에 의한 일시적 국망을 기점으로 전한(前漢)‧후한(後漢) 혹은 서한(西漢)‧동한(東漢)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한(서한) 시기 수도는 장안(長安, 현재의 중국 산시성 시안시)이었고, 후한(동한) 시기 도읍은 낙양(洛陽, 허난성 뤄양시)이다.
위만(衛滿): 고조선(古朝鮮)의 왕으로, 소위 삼조선 중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제1대 왕이다. 중국 연(燕) 지역에 거주하다가, 한 초의 혼란기인 B.C.194~B.C.180 시기에 연왕(燕王) 노관(盧綰)의 반란시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다. 고조선 준왕의 신임을 얻어 박사(博士)직과 100리 땅을 받아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중국계 유민들과 주변 세력을 모아 힘을 키운 후 왕위를 찬탈하였다. 다만 그의 왕위 찬탈은 고조선 내부의 왕실 교체일 뿐으로, 고조선의 기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그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어서, 위만조선이 이전의 고조선과 다른 국가라 하기는 힘들다.
당(唐):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세운 중국의 통일 왕조 국가이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분열을 통일한 수(隋)가 무리한 고구려(高句麗) 원정 등으로 급격히 쇠퇴하여 분열하였는데, 이를 재통일하였다. 당은 한(漢)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로서 활발한 국제 교류를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고, 동서 교역을 통해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그 통치제도와 사상 및 문화 등이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쳐 동아시아 고대 세계를 형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당은 신라와 군사 협력을 맺고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는 등 여러 측면에서 우리나라 고대 국가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高麗]는 … 되었다: 668년 2월 시작된 당(唐)의 마지막 고구려 원정시 요동(遼東) 전장으로 군량을 운반하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가언충(賈言忠)에게 당 고종(高宗)이 전황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이때 가언충이 『고려비기(高麗祕記)』라는 도참서를 인용하여 승리를 장담한 발언의 일부이다. 상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22 고구려본기제10 보장왕 27년(668) 2월조『삼국사기』 권 제22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寶藏王)와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전『중국정사조선전』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등에 실려있다.
註) 001
기자(箕子): 중국 상(商)나라 주왕대(紂王代)의 현인(賢人)으로서 왕의 무도(無道)를 간언하였다가 감옥에 갇혔으나 주(周)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풀어주었다고 알려졌다. 그가 무왕(武王)에게 유교통치의 근간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바쳤다고 전하고 있다. 한대(漢代) 이후의 사서(史書)에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 기술되기 시작하였지만, 현재 기자동래설은 부정되고 있다. 이는 한(漢) 무제(武帝)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이래 유포되기 시작한 것으로, 고조선 지역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실제 사실과 다른 전승이 전해진 것이다.
註) 002
주(周): B.C.1046~B.C.256 동안 존속하였던 중국의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 고대 국가. 주 무왕(武王)이 여러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 주왕(紂王)의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상(商)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하였다. 제후들에게 분봉(分封)하는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 단(旦)이 국가 통치를 예제(禮制)로 정리하였는데, 이후 후대 국가 통치 제도의 전범으로서 자리 잡았다. 후대에 회복해야 할 이상적인 가치를 가진 나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B.C. 9세기부터 제후들의 이반(離反)과 융적(戎狄)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쇠퇴하다가, 유왕(幽王) 대인 B.C.771년 견융(犬戎)에게 도읍 호경(鎬京, 시안)이 함락되어 망하였다. 이후 제후들이 유왕의 아들 평왕(平王)을 왕으로 받들면서 동쪽 낙읍(洛邑, 뤄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 시점을 기점으로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구분한다. 동주 시기는 제후들이 할거하는 분열기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 불리며, 주는 명목상 종주국의 지위만을 가지게 되고 정치적 권위와 지배력을 잃게 된다. 결국 전국시대에 이르면 낙읍 부근을 통치하는 작은 제후국 정도가 되었다가, B.C.256년 난왕(赧王)이 진(秦)에 항복하면서 주는 멸망한다.
B.C. 9세기부터 제후들의 이반(離反)과 융적(戎狄)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쇠퇴하다가, 유왕(幽王) 대인 B.C.771년 견융(犬戎)에게 도읍 호경(鎬京, 시안)이 함락되어 망하였다. 이후 제후들이 유왕의 아들 평왕(平王)을 왕으로 받들면서 동쪽 낙읍(洛邑, 뤄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 시점을 기점으로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구분한다. 동주 시기는 제후들이 할거하는 분열기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 불리며, 주는 명목상 종주국의 지위만을 가지게 되고 정치적 권위와 지배력을 잃게 된다. 결국 전국시대에 이르면 낙읍 부근을 통치하는 작은 제후국 정도가 되었다가, B.C.256년 난왕(赧王)이 진(秦)에 항복하면서 주는 멸망한다.
註) 003
기자(箕子)가 … 받고: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제1 기이제1 고조선왕검조선조『삼국유사』 권제1 왕력(王曆) 제1 기이(紀異第一)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전승이 전한다. 하지만 이는 후대의 윤색으로 사실이 아니다.
註) 004
한(漢): 유방(劉邦)에 의해 건국된 중국의 대표적 통일 왕조 국가로, B.C.202~A.D 220년 동안 존속하였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열국들을 통일한 진(秦)이 몰락하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유방이 재차 통일하면서 한의 시대가 시작된다. 고조선 등 한국 고대 국가들도 한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 갔으나, 고조선이 한 무제(武帝)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는 등 군사적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진‧한대 이래 정립된 유교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한 강력한 황제권 중심 통치 체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8~23년 존속하였던 왕망(王莽)의 신(新)에 의해 일시적으로 망하였다가, 25년 광무제(光武帝)가 낙양을 도읍으로 하여 재건하면서 한 왕조는 이어지게 된다. 이 신에 의한 일시적 국망을 기점으로 전한(前漢)‧후한(後漢) 혹은 서한(西漢)‧동한(東漢)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한(서한) 시기 수도는 장안(長安, 현재의 중국 산시성 시안시)이었고, 후한(동한) 시기 도읍은 낙양(洛陽, 허난성 뤄양시)이다.
註) 005
위만(衛滿): 고조선(古朝鮮)의 왕으로, 소위 삼조선 중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제1대 왕이다. 중국 연(燕) 지역에 거주하다가, 한 초의 혼란기인 B.C.194~B.C.180 시기에 연왕(燕王) 노관(盧綰)의 반란시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다. 고조선 준왕의 신임을 얻어 박사(博士)직과 100리 땅을 받아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중국계 유민들과 주변 세력을 모아 힘을 키운 후 왕위를 찬탈하였다. 다만 그의 왕위 찬탈은 고조선 내부의 왕실 교체일 뿐으로, 고조선의 기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그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어서, 위만조선이 이전의 고조선과 다른 국가라 하기는 힘들다.
註) 006
당(唐):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세운 중국의 통일 왕조 국가이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분열을 통일한 수(隋)가 무리한 고구려(高句麗) 원정 등으로 급격히 쇠퇴하여 분열하였는데, 이를 재통일하였다. 당은 한(漢)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로서 활발한 국제 교류를 바탕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고, 동서 교역을 통해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그 통치제도와 사상 및 문화 등이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쳐 동아시아 고대 세계를 형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당은 신라와 군사 협력을 맺고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키는 등 여러 측면에서 우리나라 고대 국가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註) 007
註) 008
고구려[高麗]는 … 되었다: 668년 2월 시작된 당(唐)의 마지막 고구려 원정시 요동(遼東) 전장으로 군량을 운반하는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가언충(賈言忠)에게 당 고종(高宗)이 전황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이때 가언충이 『고려비기(高麗祕記)』라는 도참서를 인용하여 승리를 장담한 발언의 일부이다. 상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22 고구려본기제10 보장왕 27년(668) 2월조『삼국사기』 권 제22고구려본기 제10 보장왕(寶藏王)와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전『중국정사조선전』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 등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