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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 343년 07월 )
〔13년(343)〕가을 7월에 평양 동황성(東黃城)註 001으로 〔왕의〕거처를 옮겼다. 성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註 002 동쪽 목멱산(木覓山)註 003 중에 있다
註) 001
평양 동황성(平壤 東黃城) : 동천왕 때에도 조위의 관구검에 의해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자, 247년에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묘사(廟社)를 옮겼다고 전한다. 본서의 찬자는 동천왕 시기의 평양성과 이 기사의 평양 동황성을 모두 고려 시기의 서경(西京) 곧 현재의 평양으로 비정했다. 이에 대해 일찍이 고구려가 4세기 중엽까지는 평양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되지 못했다며 평양을 국내성 동쪽의 강계지역으로 보고 동황성은 그곳의 성곽 명칭이라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56: 1976, 370~373쪽; 서영대, 90-91쪽). 중국학계에서는 평양성을 국내성으로 상정한 다음 이 구절을‘평양 동쪽의 황성(黃城)’으로 해석하여 황성을 국내성 동쪽의 동대자(東臺子) 유적으로 비정하거나(魏存成, 33쪽), 평양성을 국내성 동쪽의 양민고성(良民古城)으로 상정한 다음 동황성을 그 보다 동쪽인 臨江 樺皮甸子古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張福有). 북한학계에서는 고구려가 2세기 말∼3세기 초에 평양지방을 확고히 지배하였다며 동천왕 시기의 평양성을 지금의 평양으로 비정하고, 평양 동황성도 본서 고구려본기7 안장왕 11년(529) 3월조의 ‘황성(黃城)’과 연계시켜 모란봉 부근의 장안성 북성(채희국, 26쪽), 고방산의 용당산성(정찬영, 16-18쪽), 청호동 토성(손영종, 172-173쪽) 등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국내학계에서는 동천왕 시기의 평양성은 대체로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 위치했다고 보면서도 이 기사의 평양 동황성은 지금의 평양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늘어나고 있는데(신동하, 19-20쪽; 차용걸, 15-16쪽; 임기환 1995, 17쪽; 김미경, 29-30쪽), 청암동토성(민덕식, 126-127쪽; 장효정, 142-143쪽; 김지희, 26-39쪽), 안학궁 일대(임기환 2007, 16-17쪽) 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과 「동여도(東輿圖)」 등 조선시기의 지지(地誌) 자료를 참조하여 평양 동황성을 평양 동쪽의 의암동토성으로 비정한 다음, 이 기사는 후대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기경량, 327-343쪽). 이처럼 평양 동황성의 위치 비정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데, 고구려가 4세기 초에 평양지역으로 진출한 이후 압록강 중상류에 있던 평양성의 명칭을 평양 동황성으로 개칭했을 가능성(여호규, 163-165쪽),‘거처를 옮겼다[移居]’라는 표현이 임시적 거처 이동으로 기존의 도성인 국내성이나 환도성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권순홍, 21쪽)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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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서경(西京) : 고려 시기의 지명으로 지금의 평양을 일컫는다. 이 부분은 본서 찬자의 주석이다.바로가기
註) 003
목멱산(木覓山) : 평양의 동남방에 있는 산이다. 본서의 찬자가 평양 동황성의 위치를 현재의 평양지역으로 보고, 고려 당시 서경(西京)의 목멱산에 그 유적이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이에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여도(東輿圖)」 등 조선시대의 지지(地誌) 자료에서도 지금의 평양 동쪽에 목멱산과 함께 황성(黃城)이 위치했다고 표기했는데, 대동강 남안에 있었던 의암동토성으로 비정된다(기경량, 2020 「고국원왕대 ‘平壤東黃城’의 위치와 移居 기록의 성격」, 『한국학연구』 57, 327-343쪽).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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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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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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