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
125년
01월
)
14년(125) 봄 정월에 말갈(靺鞨)註 001이 북쪽 경계에 대거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말갈(靺鞨): 일반적으로 6~10세기 만주 동부 지역에 거주한 퉁구스계 종족에 대한 지칭이다. 중국 역사서에 ‘말갈(靺鞨)’이란 종족명은 『북제서(北齊書)』 무성제기(武成帝紀) 청하(河淸) 2년(563)조에 처음 나온다. 이후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구오대사(舊五代史)』,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말갈전이 수록되어 있는데(『신당서』 이하는 흑수말갈전), 특히 『수서』 말갈전에는 ‘말갈 7부(部)’의 존재가 나타나 있다. 이들의 계통에 대해서는 숙신(肅愼)-읍루(挹婁)-물길(勿吉)-말갈이라는 일원적 계통으로 보는 견해와 지역, 부족에 따라 숙신(읍루)계와 예맥계(濊貊系)로 계통을 달리해서 보는 다원적 계통론이 있다(김현숙, 2018). 후자의 경우 본서에 나오는 말갈 기사가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본서 본기에는 말갈이 초기부터 신라 말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6세기 이후의 말갈은 중국 역사서에 보이는 것과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지만, 초기 기사의 말갈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시기적, 지역적으로 도저히 같은 존재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라본기, 백제본기 초기 기사의 말갈은 낙랑 또는 고구려에 연결되어 신라나 백제의 북쪽 경계를 침입하는 존재로 나타나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일찍이 정약용(丁若鏞)은 이들의 실체가 동예(‘東沃沮의 濊人, 漢史의 不耐濊’라고 함)이며 남북국 시기에 신라인들이 북도(北道)를 말갈이라고 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옛 기록의 북쪽에서 침입하는 자들을 모두 말갈로 기록했다고 하는 위말갈설(僞靺鞨說)을 제시하였다(丁若鏞, 「靺鞨考」). 많은 연구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발전시키고 있는데, 예컨대 동예 외에 영서 지역에도 예족이 거주했으며 본서에 보이는 말갈은 영서예라고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文安植, 1998). 초기 기사의 ‘말갈’은 애초 사료에 ‘예맥(濊貊)’으로 표기되었던 종족이 후대 사서 편찬 시 일괄적으로 ‘말갈’로 개필된 결과로 파악하기도 한다(강종훈, 2011). 한편 말갈의 다원적 계통론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본서에서 이른 시기의 예계 종족을 말갈로 표현한 것은 실제로 이들이 6세기 이후에 말갈로 지칭되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丁若鏞, 「靺鞨考」, 『與猶堂全書』 第6集 疆域考 其2
文安植, 1998, 「三國史記 羅·濟本紀의 靺鞨 史料에 대하여 -靺鞨勢力의 地域的 分布 및 種族 構成上의 차이와 변화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13
문안식, 2003,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
강종훈, 2011,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김현숙, 2018, 「‘고구려사에서의 말갈’ 연구의 현황과 과제」, 『東北亞歷史論叢』 61
본서 본기에는 말갈이 초기부터 신라 말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6세기 이후의 말갈은 중국 역사서에 보이는 것과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지만, 초기 기사의 말갈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시기적, 지역적으로 도저히 같은 존재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라본기, 백제본기 초기 기사의 말갈은 낙랑 또는 고구려에 연결되어 신라나 백제의 북쪽 경계를 침입하는 존재로 나타나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일찍이 정약용(丁若鏞)은 이들의 실체가 동예(‘東沃沮의 濊人, 漢史의 不耐濊’라고 함)이며 남북국 시기에 신라인들이 북도(北道)를 말갈이라고 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옛 기록의 북쪽에서 침입하는 자들을 모두 말갈로 기록했다고 하는 위말갈설(僞靺鞨說)을 제시하였다(丁若鏞, 「靺鞨考」). 많은 연구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발전시키고 있는데, 예컨대 동예 외에 영서 지역에도 예족이 거주했으며 본서에 보이는 말갈은 영서예라고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文安植, 1998). 초기 기사의 ‘말갈’은 애초 사료에 ‘예맥(濊貊)’으로 표기되었던 종족이 후대 사서 편찬 시 일괄적으로 ‘말갈’로 개필된 결과로 파악하기도 한다(강종훈, 2011). 한편 말갈의 다원적 계통론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본서에서 이른 시기의 예계 종족을 말갈로 표현한 것은 실제로 이들이 6세기 이후에 말갈로 지칭되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丁若鏞, 「靺鞨考」, 『與猶堂全書』 第6集 疆域考 其2
文安植, 1998, 「三國史記 羅·濟本紀의 靺鞨 史料에 대하여 -靺鞨勢力의 地域的 分布 및 種族 構成上의 차이와 변화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13
문안식, 2003,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
강종훈, 2011,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김현숙, 2018, 「‘고구려사에서의 말갈’ 연구의 현황과 과제」, 『東北亞歷史論叢』 61
註) 001
말갈(靺鞨): 일반적으로 6~10세기 만주 동부 지역에 거주한 퉁구스계 종족에 대한 지칭이다. 중국 역사서에 ‘말갈(靺鞨)’이란 종족명은 『북제서(北齊書)』 무성제기(武成帝紀) 청하(河淸) 2년(563)조에 처음 나온다. 이후 『수서(隋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구오대사(舊五代史)』, 『신오대사(新五代史)』 등에 말갈전이 수록되어 있는데(『신당서』 이하는 흑수말갈전), 특히 『수서』 말갈전에는 ‘말갈 7부(部)’의 존재가 나타나 있다. 이들의 계통에 대해서는 숙신(肅愼)-읍루(挹婁)-물길(勿吉)-말갈이라는 일원적 계통으로 보는 견해와 지역, 부족에 따라 숙신(읍루)계와 예맥계(濊貊系)로 계통을 달리해서 보는 다원적 계통론이 있다(김현숙, 2018). 후자의 경우 본서에 나오는 말갈 기사가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본서 본기에는 말갈이 초기부터 신라 말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6세기 이후의 말갈은 중국 역사서에 보이는 것과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지만, 초기 기사의 말갈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시기적, 지역적으로 도저히 같은 존재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라본기, 백제본기 초기 기사의 말갈은 낙랑 또는 고구려에 연결되어 신라나 백제의 북쪽 경계를 침입하는 존재로 나타나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일찍이 정약용(丁若鏞)은 이들의 실체가 동예(‘東沃沮의 濊人, 漢史의 不耐濊’라고 함)이며 남북국 시기에 신라인들이 북도(北道)를 말갈이라고 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옛 기록의 북쪽에서 침입하는 자들을 모두 말갈로 기록했다고 하는 위말갈설(僞靺鞨說)을 제시하였다(丁若鏞, 「靺鞨考」). 많은 연구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발전시키고 있는데, 예컨대 동예 외에 영서 지역에도 예족이 거주했으며 본서에 보이는 말갈은 영서예라고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文安植, 1998). 초기 기사의 ‘말갈’은 애초 사료에 ‘예맥(濊貊)’으로 표기되었던 종족이 후대 사서 편찬 시 일괄적으로 ‘말갈’로 개필된 결과로 파악하기도 한다(강종훈, 2011). 한편 말갈의 다원적 계통론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본서에서 이른 시기의 예계 종족을 말갈로 표현한 것은 실제로 이들이 6세기 이후에 말갈로 지칭되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丁若鏞, 「靺鞨考」, 『與猶堂全書』 第6集 疆域考 其2
文安植, 1998, 「三國史記 羅·濟本紀의 靺鞨 史料에 대하여 -靺鞨勢力의 地域的 分布 및 種族 構成上의 차이와 변화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13
문안식, 2003,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
강종훈, 2011,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김현숙, 2018, 「‘고구려사에서의 말갈’ 연구의 현황과 과제」, 『東北亞歷史論叢』 61
본서 본기에는 말갈이 초기부터 신라 말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6세기 이후의 말갈은 중국 역사서에 보이는 것과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지만, 초기 기사의 말갈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시기적, 지역적으로 도저히 같은 존재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라본기, 백제본기 초기 기사의 말갈은 낙랑 또는 고구려에 연결되어 신라나 백제의 북쪽 경계를 침입하는 존재로 나타나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일찍이 정약용(丁若鏞)은 이들의 실체가 동예(‘東沃沮의 濊人, 漢史의 不耐濊’라고 함)이며 남북국 시기에 신라인들이 북도(北道)를 말갈이라고 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옛 기록의 북쪽에서 침입하는 자들을 모두 말갈로 기록했다고 하는 위말갈설(僞靺鞨說)을 제시하였다(丁若鏞, 「靺鞨考」). 많은 연구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발전시키고 있는데, 예컨대 동예 외에 영서 지역에도 예족이 거주했으며 본서에 보이는 말갈은 영서예라고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文安植, 1998). 초기 기사의 ‘말갈’은 애초 사료에 ‘예맥(濊貊)’으로 표기되었던 종족이 후대 사서 편찬 시 일괄적으로 ‘말갈’로 개필된 결과로 파악하기도 한다(강종훈, 2011). 한편 말갈의 다원적 계통론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본서에서 이른 시기의 예계 종족을 말갈로 표현한 것은 실제로 이들이 6세기 이후에 말갈로 지칭되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丁若鏞, 「靺鞨考」, 『與猶堂全書』 第6集 疆域考 其2
文安植, 1998, 「三國史記 羅·濟本紀의 靺鞨 史料에 대하여 -靺鞨勢力의 地域的 分布 및 種族 構成上의 차이와 변화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13
문안식, 2003,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
강종훈, 2011,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김현숙, 2018, 「‘고구려사에서의 말갈’ 연구의 현황과 과제」, 『東北亞歷史論叢』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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