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하여 말하다
논하여 말한다. 신라 고사(古事)에 이르기를, “하늘이 금궤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註 001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괴상해서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신(臣)이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보니 그 전승이 오래되어 그 말을 빼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또 들으니,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註 002의 후예이므로註 003 성을 김씨라고 했으며신라의 국자박사(國子博士)註 004 설인선(薛因宣)註 005이 지은 김유신의 비註 006와 박거물(朴居勿)註 007이 짓고 요극일(姚克一)註 008이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註 009에 보인다., 고구려 또한 고신씨(高辛氏)註 010의 후예이기에 성이 고씨(高氏)이다.”라고 하였다.『진서(晉書)』註 011 재기(載記)에 보인다.註 012 옛 기록[古史]에 이르기를,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註 013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진(秦)나라註 014·한(漢)나라註 015의 난리 때 중국 사람이 많이 해동(海東)으로 도망하였다.”라고 하였으니註 016 곧 세 나라의 조상이 어찌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그 나라를 향유함이 길었으나, 백제의 마지막에 이르러 행하는 일은 도리에 어긋난 일이 많고, 또 대대로 신라와 원수가 되어 고구려와 연합하고 화목함으로써 침략하며, 이익과 편의에 따라 신라의 중요한 성(城)과 큰 진(鎭)을 나누어 차지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사람과 친하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나라의 보배註 017라는 말과 달랐다. 이에 당나라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서 그 원한을 풀라고 하였는데, 겉으로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 어겨 큰 나라에 죄를 지었으니, 그 멸망은 또한 마땅하다.
하늘이 금궤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9년(65)조와 『三國遺事』 권1 紀異1 金閼智脫解王代條에 이에 관한 설화가 실려 있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 중국의 전설상의 군주인 5제(帝)의 하나이며, 주선씨(朱宣氏)로도 불린다. 황제의 아들로서 이름은 지(摯) 또는 질(質)이며, 소호를 소호(少嗥), 소호(少昊)로도 쓰는데, 태호(太昊)의 법을 닦았기 때문에 소호(少昊)라고 하였고, 금덕(金德)으로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으므로 금천씨(金天氏)라고 했다고 전한다. 궁상(窮桑)에 거처하였기 때문에 궁상씨(窮桑氏), 청양(靑陽)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청양씨(靑陽氏), 운양(雲陽)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운양씨(雲陽氏)라고도 하였다. 곡부(曲阜)에 도읍을 정하고 84년간 재위했다고 전한다(『辭海』 少昊).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 본서 권41 열전1 金庾信傳 上, 「김인문 묘비(金仁問 墓碑)」, 「(당고)김씨부인 묘지명((唐故)金氏夫人 墓誌銘)」 등에도 이러한 출자 관념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李文基, 1999, 「新羅 金氏 王室의 少昊金天氏 出自觀念의 標榜과 變化」, 『歷史敎育論集』 23·24, 역사교육학회 및 권덕영, 2009, 「〈大唐故金氏夫人墓銘〉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韓國古代史硏究』 54, 한국고대사연구회 등 참조.
국자박사(國子博士) : 국자감에서 교육을 담당한 박사이다. 본서 권38 職官 上 國學조에 따르면 신라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국학이 있었는데, 신문왕 2년(682)에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대학감(大學監)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국자감(國子監)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신라 하대에 대학감을 국자감으로 개칭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국자감은 당나라에서 설치해 운영하였는데, 당나라의 국자감은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으로 구성되었고, 교관(敎官)으로 국자(國子)박사・태학(太學)박사・조교(助敎) 등을 두었다. 『高麗史』 권76 百官1 成均館條에 따르면 고려왕조는 성종 때 국자감을 설치하였으며, 國子司業博士・助敎, 大學博士・助敎, 四門博士・助敎 등을 두었다고 한다.
박거물(朴居勿) : 신라 경문왕 무렵에 활동한 문장가로서 생몰년 등 구체적 행적은 알 수 없다.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唐나라에 유학하여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것으로 보이며, 귀국한 뒤에는 한림대(翰林臺)・숭문대(崇文臺) 등 주로 문한기구(文翰機構)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신라 경문왕 12년(872)에 「경주 황룡사 9층목탑 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를 찬술하였는데, 이 당시 그의 관직은 시독 우군대감 겸 성공(侍讀 右軍大監 兼 省公)이었다(黃壽永 編, 1974; 李基東, 1980).
〈참고문헌〉
黃壽永 編, 1974, 『韓國金石遺文』, 一志社.
李基東, 1980, 「新羅 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 文人의 交驩」, 『新羅骨品制와 花郞徒』, 一潮閣.
〈참고문헌〉
黃壽永 編, 1974, 『韓國金石遺文』, 一志社.
李基東, 1980, 「新羅 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 文人의 交驩」, 『新羅骨品制와 花郞徒』, 一潮閣.
요극일(姚克一) : 신라 하대의 서예가로서 생몰년 등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본서 권48 열전8 金生傳에는 그가 당나라 구양순의 체를 습득하였으며 필력이 힘찼다고 적혀 있다. 그는 경문왕 12년(872) 8월 14일에 만들어진 전남 곡성의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탑비(谷城 大安寺 寂忍禪師塔碑)」를 썼으며, 당시의 관직은 중사인(中舍人)이었다. 또 3개월 뒤인 11월 25일에 완성된 「경주 황룡사 9층목탑 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를 썼는데 이때의 관직은 숭문대랑 겸 충궁중사성(崇文臺郞 兼 春宮中事省)이었다. 이외에 그는 박거물이 찬한 「三郞寺碑文」을 썼고, 「興德王陵碑文」도 쓴 듯하다(李基東, 1980, 「新羅 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 文人의 交驩」, 『新羅骨品制와 花郞徒』, 一潮閣).
삼랑사비문(三郎寺碑文) : 삼랑사는 경북 경주시 성건동 서천(西川)에 위치한 사찰로서 신라 진평왕 19년(597)에 창건되었다. 삼랑사(三郞寺)라는 절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절은 세 사람의 화랑과 관련 깊은 듯한데, 화랑의 이름은 알 수 없다. 『三國遺事』 권5 感通7 景興遇聖條에는 신문왕대에 국로(國老)였던 경흥(景興)이 이 절에 주석(住錫)한 것으로 나온다. 삼랑사비(三郞寺碑)는 삼랑사의 창건연기(創建緣起)를 적은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진서』 재기(載記)에 보인다 : 본 기사는 『晉書』 권124 載記 제24 慕容雲條에 “모용운의 자는 자우이며, 보의 양자이다. 할아버지는 고화로서 구려의 갈래인데, 스스로 말하기를, 고양씨의 후예이므로 고를 성씨로 삼았다고 하였다(慕容雲 字子雨 寶之養子也 祖父高和 句驪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는 대목이 있다.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17년(408)조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 報之 雲祖父高和 句驪之支屬 自云 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晉書』 載記와 본서 고구려본기에는 “高陽氏의 苗裔”로 되어 있는데 비해 본 기사에는 “高辛氏의 後裔”라고 한 점이 다르다.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 : 이와 같은 내용이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B.C.18)조와 권25 개로왕 20년(475)조 및 『魏書』 권100 百濟傳에도 보인다. 538년 백제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꾼 것도 이러한 인식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한다.
“진나라・한나라의 … 도망하였다.”라고 하였으니 : 이는 秦나라가 망하고 漢나라가 일어나던 무렵에 중국 유망민들이 한반도 방면으로 이주한 것에 대해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濊條에는 “진승 등이 일어나자 천하가 진나라에 반대하였으며, 연·제·조의 백성으로 조선땅으로 피난한 사람이 수만명(陳勝等起 天下反秦 燕齊趙民 避地朝鮮數萬口)”이라는 기록이 있고, 같은 책 辰韓條에는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그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는 말에 옛날에 사람들이 진나라의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왔는데(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自言 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라는 기록이 있다.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辰韓條에 진한 사람들이 낙랑 사람을 본래 자신들의 남은 무리로 여겨 ‘아잔(阿殘)’이라고 불렀다고 한 기록을 근거로 사로국의 성장 과정에 낙랑계 유이민이 신라에 대거 유입되었다고 보기도 하며(文昌魯, 2004, 81쪽). 진한 지역으로 이동한 유이민 집단에는 진(秦)의 통일 및 장성 수축기에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이동한 동이 계통의 집단이 포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盧泰敦, 1990). 또한 기원후 2세기 중·후반경 후한의 세력약화와 함께 진행된 낙랑 방면의 유이민 파동이 사로국의 지배세력 교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1988, 81쪽). 『梁書』 권54 新羅傳에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인데,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서로 1만리 떨어져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는 진나라 때 달아난 사람이 역을 피해 마한으로 오니 마한이 또한 그 동쪽 경계를 떼어주고 살게 하고 진나라 사람이므로 이름을 진한이라 했다고 한다. 그 언어와 사물을 지칭하는 이름이 중국인과 비슷하다(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는 기록이 있다.
〈참고문헌〉
盧泰敦, 1990, 「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韓國史論』 23,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이기동, 1988, 「신라의 성립과 변천」, 『韓國古代史論』, 한길사.
文昌魯, 2004, 「新羅와 樂浪의 關係」, 『韓國古代史硏究』 34.
〈참고문헌〉
盧泰敦, 1990, 「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韓國史論』 23,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이기동, 1988, 「신라의 성립과 변천」, 『韓國古代史論』, 한길사.
文昌魯, 2004, 「新羅와 樂浪의 關係」, 『韓國古代史硏究』 34.
註) 001
하늘이 금궤를 내렸으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9년(65)조와 『三國遺事』 권1 紀異1 金閼智脫解王代條에 이에 관한 설화가 실려 있다.
註) 002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 중국의 전설상의 군주인 5제(帝)의 하나이며, 주선씨(朱宣氏)로도 불린다. 황제의 아들로서 이름은 지(摯) 또는 질(質)이며, 소호를 소호(少嗥), 소호(少昊)로도 쓰는데, 태호(太昊)의 법을 닦았기 때문에 소호(少昊)라고 하였고, 금덕(金德)으로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으므로 금천씨(金天氏)라고 했다고 전한다. 궁상(窮桑)에 거처하였기 때문에 궁상씨(窮桑氏), 청양(靑陽)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청양씨(靑陽氏), 운양(雲陽)에 장사지냈기 때문에 운양씨(雲陽氏)라고도 하였다. 곡부(曲阜)에 도읍을 정하고 84년간 재위했다고 전한다(『辭海』 少昊).
註) 003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 본서 권41 열전1 金庾信傳 上, 「김인문 묘비(金仁問 墓碑)」, 「(당고)김씨부인 묘지명((唐故)金氏夫人 墓誌銘)」 등에도 이러한 출자 관념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李文基, 1999, 「新羅 金氏 王室의 少昊金天氏 出自觀念의 標榜과 變化」, 『歷史敎育論集』 23·24, 역사교육학회 및 권덕영, 2009, 「〈大唐故金氏夫人墓銘〉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韓國古代史硏究』 54, 한국고대사연구회 등 참조.
註) 004
국자박사(國子博士) : 국자감에서 교육을 담당한 박사이다. 본서 권38 職官 上 國學조에 따르면 신라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국학이 있었는데, 신문왕 2년(682)에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대학감(大學監)으로 개칭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국자감(國子監)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신라 하대에 대학감을 국자감으로 개칭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국자감은 당나라에서 설치해 운영하였는데, 당나라의 국자감은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으로 구성되었고, 교관(敎官)으로 국자(國子)박사・태학(太學)박사・조교(助敎) 등을 두었다. 『高麗史』 권76 百官1 成均館條에 따르면 고려왕조는 성종 때 국자감을 설치하였으며, 國子司業博士・助敎, 大學博士・助敎, 四門博士・助敎 등을 두었다고 한다.
註) 006
註) 007
박거물(朴居勿) : 신라 경문왕 무렵에 활동한 문장가로서 생몰년 등 구체적 행적은 알 수 없다.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唐나라에 유학하여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것으로 보이며, 귀국한 뒤에는 한림대(翰林臺)・숭문대(崇文臺) 등 주로 문한기구(文翰機構)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신라 경문왕 12년(872)에 「경주 황룡사 9층목탑 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를 찬술하였는데, 이 당시 그의 관직은 시독 우군대감 겸 성공(侍讀 右軍大監 兼 省公)이었다(黃壽永 編, 1974; 李基東, 1980).
〈참고문헌〉
黃壽永 編, 1974, 『韓國金石遺文』, 一志社.
李基東, 1980, 「新羅 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 文人의 交驩」, 『新羅骨品制와 花郞徒』, 一潮閣.
〈참고문헌〉
黃壽永 編, 1974, 『韓國金石遺文』, 一志社.
李基東, 1980, 「新羅 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 文人의 交驩」, 『新羅骨品制와 花郞徒』, 一潮閣.
註) 008
요극일(姚克一) : 신라 하대의 서예가로서 생몰년 등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본서 권48 열전8 金生傳에는 그가 당나라 구양순의 체를 습득하였으며 필력이 힘찼다고 적혀 있다. 그는 경문왕 12년(872) 8월 14일에 만들어진 전남 곡성의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탑비(谷城 大安寺 寂忍禪師塔碑)」를 썼으며, 당시의 관직은 중사인(中舍人)이었다. 또 3개월 뒤인 11월 25일에 완성된 「경주 황룡사 9층목탑 금동찰주본기(慶州 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를 썼는데 이때의 관직은 숭문대랑 겸 충궁중사성(崇文臺郞 兼 春宮中事省)이었다. 이외에 그는 박거물이 찬한 「三郞寺碑文」을 썼고, 「興德王陵碑文」도 쓴 듯하다(李基東, 1980, 「新羅 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 文人의 交驩」, 『新羅骨品制와 花郞徒』, 一潮閣).
註) 009
삼랑사비문(三郎寺碑文) : 삼랑사는 경북 경주시 성건동 서천(西川)에 위치한 사찰로서 신라 진평왕 19년(597)에 창건되었다. 삼랑사(三郞寺)라는 절 이름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절은 세 사람의 화랑과 관련 깊은 듯한데, 화랑의 이름은 알 수 없다. 『三國遺事』 권5 感通7 景興遇聖條에는 신문왕대에 국로(國老)였던 경흥(景興)이 이 절에 주석(住錫)한 것으로 나온다. 삼랑사비(三郞寺碑)는 삼랑사의 창건연기(創建緣起)를 적은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註) 010
註) 011
註) 012
『진서』 재기(載記)에 보인다 : 본 기사는 『晉書』 권124 載記 제24 慕容雲條에 “모용운의 자는 자우이며, 보의 양자이다. 할아버지는 고화로서 구려의 갈래인데, 스스로 말하기를, 고양씨의 후예이므로 고를 성씨로 삼았다고 하였다(慕容雲 字子雨 寶之養子也 祖父高和 句驪之支庶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는 대목이 있다.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17년(408)조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 報之 雲祖父高和 句驪之支屬 自云 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晉書』 載記와 본서 고구려본기에는 “高陽氏의 苗裔”로 되어 있는데 비해 본 기사에는 “高辛氏의 後裔”라고 한 점이 다르다.
註) 013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 : 이와 같은 내용이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B.C.18)조와 권25 개로왕 20년(475)조 및 『魏書』 권100 百濟傳에도 보인다. 538년 백제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꾼 것도 이러한 인식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한다.
註) 014
註) 015
註) 016
“진나라・한나라의 … 도망하였다.”라고 하였으니 : 이는 秦나라가 망하고 漢나라가 일어나던 무렵에 중국 유망민들이 한반도 방면으로 이주한 것에 대해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濊條에는 “진승 등이 일어나자 천하가 진나라에 반대하였으며, 연·제·조의 백성으로 조선땅으로 피난한 사람이 수만명(陳勝等起 天下反秦 燕齊趙民 避地朝鮮數萬口)”이라는 기록이 있고, 같은 책 辰韓條에는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그 노인들이 대대로 전하는 말에 옛날에 사람들이 진나라의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왔는데(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自言 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라는 기록이 있다.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辰韓條에 진한 사람들이 낙랑 사람을 본래 자신들의 남은 무리로 여겨 ‘아잔(阿殘)’이라고 불렀다고 한 기록을 근거로 사로국의 성장 과정에 낙랑계 유이민이 신라에 대거 유입되었다고 보기도 하며(文昌魯, 2004, 81쪽). 진한 지역으로 이동한 유이민 집단에는 진(秦)의 통일 및 장성 수축기에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이동한 동이 계통의 집단이 포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盧泰敦, 1990). 또한 기원후 2세기 중·후반경 후한의 세력약화와 함께 진행된 낙랑 방면의 유이민 파동이 사로국의 지배세력 교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1988, 81쪽). 『梁書』 권54 新羅傳에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인데,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서로 1만리 떨어져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는 진나라 때 달아난 사람이 역을 피해 마한으로 오니 마한이 또한 그 동쪽 경계를 떼어주고 살게 하고 진나라 사람이므로 이름을 진한이라 했다고 한다. 그 언어와 사물을 지칭하는 이름이 중국인과 비슷하다(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는 기록이 있다.
〈참고문헌〉
盧泰敦, 1990, 「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韓國史論』 23,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이기동, 1988, 「신라의 성립과 변천」, 『韓國古代史論』, 한길사.
文昌魯, 2004, 「新羅와 樂浪의 關係」, 『韓國古代史硏究』 34.
〈참고문헌〉
盧泰敦, 1990, 「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 『韓國史論』 23,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이기동, 1988, 「신라의 성립과 변천」, 『韓國古代史論』, 한길사.
文昌魯, 2004, 「新羅와 樂浪의 關係」, 『韓國古代史硏究』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