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을 침략하다
(
313년
10월
)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樂浪郡)註 001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註 002
낙랑군(樂悢郡)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 이때 낙랑군은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에 대하여 『자치통감』 권88 진기10 효민황제(孝愍皇帝) 상 건흥(建興) 원년(313) 4월조에는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을 점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한 것이 해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이 장통에게 말하여 그 백성 1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니, 모용외가 그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서진은 274년에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으며, 평주자사가 동이교위(東夷校尉)를 겸임하였다. 285년에 부여가 선비 모용외(慕容廆)에 의해 격파되자 부여의 복국을 추진하는 등 진의 동방정책이 본격화되었지만, 이후 요동지역에서 선비족 모용씨의 득세에 따라 평주자사나 동이교위의 역할이 점차 약화되었다. 특히 291년 8왕의 난으로 시작된 진 중앙의 혼란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권위와 교역체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동방 변군으로서 낙랑군, 대방군의 군현 기능은 급격히 쇠퇴해갔다. 313년 고구려에 복속되기 이전에 낙랑군과 대방군의 통솔자는 요동 출신의 장통(張統)이었는데, 진의 정부에 의해 태수로 임명된 인물이라기보다는 요동지역의 세력가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더 이상 진에 의한 동방 정책 추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을 시사한다.
서진은 274년에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으며, 평주자사가 동이교위(東夷校尉)를 겸임하였다. 285년에 부여가 선비 모용외(慕容廆)에 의해 격파되자 부여의 복국을 추진하는 등 진의 동방정책이 본격화되었지만, 이후 요동지역에서 선비족 모용씨의 득세에 따라 평주자사나 동이교위의 역할이 점차 약화되었다. 특히 291년 8왕의 난으로 시작된 진 중앙의 혼란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권위와 교역체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동방 변군으로서 낙랑군, 대방군의 군현 기능은 급격히 쇠퇴해갔다. 313년 고구려에 복속되기 이전에 낙랑군과 대방군의 통솔자는 요동 출신의 장통(張統)이었는데, 진의 정부에 의해 태수로 임명된 인물이라기보다는 요동지역의 세력가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더 이상 진에 의한 동방 정책 추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을 시사한다.
註) 001
註) 002
낙랑군(樂悢郡)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 이때 낙랑군은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에 대하여 『자치통감』 권88 진기10 효민황제(孝愍皇帝) 상 건흥(建興) 원년(313) 4월조에는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을 점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한 것이 해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이 장통에게 말하여 그 백성 1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니, 모용외가 그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서진은 274년에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으며, 평주자사가 동이교위(東夷校尉)를 겸임하였다. 285년에 부여가 선비 모용외(慕容廆)에 의해 격파되자 부여의 복국을 추진하는 등 진의 동방정책이 본격화되었지만, 이후 요동지역에서 선비족 모용씨의 득세에 따라 평주자사나 동이교위의 역할이 점차 약화되었다. 특히 291년 8왕의 난으로 시작된 진 중앙의 혼란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권위와 교역체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동방 변군으로서 낙랑군, 대방군의 군현 기능은 급격히 쇠퇴해갔다. 313년 고구려에 복속되기 이전에 낙랑군과 대방군의 통솔자는 요동 출신의 장통(張統)이었는데, 진의 정부에 의해 태수로 임명된 인물이라기보다는 요동지역의 세력가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더 이상 진에 의한 동방 정책 추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을 시사한다.
서진은 274년에 유주(幽州)를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으며, 평주자사가 동이교위(東夷校尉)를 겸임하였다. 285년에 부여가 선비 모용외(慕容廆)에 의해 격파되자 부여의 복국을 추진하는 등 진의 동방정책이 본격화되었지만, 이후 요동지역에서 선비족 모용씨의 득세에 따라 평주자사나 동이교위의 역할이 점차 약화되었다. 특히 291년 8왕의 난으로 시작된 진 중앙의 혼란에 따라 중앙정부의 정치적 권위와 교역체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동방 변군으로서 낙랑군, 대방군의 군현 기능은 급격히 쇠퇴해갔다. 313년 고구려에 복속되기 이전에 낙랑군과 대방군의 통솔자는 요동 출신의 장통(張統)이었는데, 진의 정부에 의해 태수로 임명된 인물이라기보다는 요동지역의 세력가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더 이상 진에 의한 동방 정책 추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을 시사한다.
주제분류
-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