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성군
철성군(鐵城郡)註 167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철원군(鐵圓郡)註 168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69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동주(東州)註 170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철성군(鐵城郡):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소속의 군으로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鐵原邑) 사요리(四要里)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6쪽; 정구복 외, 1997d, 252쪽). 동량현(㠉梁縣)과 공성현(功城縣) 등 영현(領縣) 2개를 거느렸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철원군(鐵圓郡)을 철성군으로 고쳤다고 한다. 철성군 지역이 신라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된 시기를 나당전쟁이 종료되던 675년 무렵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박성현, 2010, 195~200쪽; 전덕재, 2016, 114~115쪽), 그 이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본서 신라본기11의 진성왕 9년 8월조, 신라본기12 효공왕 7년조와 9년 7월조, 열전10 궁예전 등에 ‘철원(鐵圓)’이 다수 확인된다. 진성왕 9년(895년) 8월에 궁예(弓裔)가 철원 등 한주(漢州)의 10여 군현을 함락하였고, 효공왕 7년(903년)에는 철원과 부양(斧壤: 金化)을 둘러보며 도읍지를 물색하였고, 효공왕 9년 7월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철성군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철원읍의 동주산성이 있다(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6, 15-30쪽; 박성현, 2010, 262쪽).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다음,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철원을 고쳐 동주(東州)라 하였다. 『고려사』 권12 지리지3 교주도 동주조에 따르면 왕건이 태조로 즉위한 다음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철원을 고쳐 동주(東州)라 하였는데, 궁예의 궁전터는 주치의 북쪽 27리 풍천(楓川) 들판에 있다고 한다. 성종 14년(995)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에 없앴다. 현종 9년(1018)에 지동주사(知東州事)로 고쳤다가 고종 41년(1254)에 현령관(縣令官)으로 강등하였다. 뒤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가 충선왕 2년(1310)에 목(牧)을 정리하면서 철원부(鐵原府)로 강등하였다. 조선시기에 들어와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쳤고, 세종 16년(1434)에 경기에서 강원도로 편입하였고, 고종이 군(郡)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6, 『강원도 철원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16, 「신라의 북진과 서북 경계의 변화」, 『한국사연구』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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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재, 2016, 「신라의 북진과 서북 경계의 변화」, 『한국사연구』 173
철원군(鐵圓郡):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철성군(鐵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본서에는 경덕왕 시기보다 늦은 시기인 진성왕 9년 8월조, 효공왕 7년조와 효공왕 9년 7월조, 열전10 궁예전 등에 철성군으로 고치기 이전의 ‘철원’이라는 지명이 다수 확인된다. 이로 보아 ‘철원군’이 고구려 시기의 지명이라는 본서의 기사는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철원군(鐵圓郡)을 ‘모을동비(毛乙冬非)’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모을동비’의 ‘모을(毛乙)’은 훈음차를 통해 ‘뎔(毛)’ 곧 ‘쳘(鐵)’, ‘동비(冬非)’는 음차를 통해 ‘둥글~’ 곧 ‘원(圓)’을 각각 표기한 것으로 파악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6-507쪽 및 514~515쪽).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동량현(㠉梁縣)註 171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승량현(僧梁縣)註 172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73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승령현(僧嶺縣)註 174이다.
동량현(㠉梁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철성군(鐵城郡) 소속의 현으로 경기도 연천군 구읍(舊邑) 동쪽에 위치하였는데(이병도, 1977: 2012, 586쪽),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인목면 갈현리(북한의 강원도 철원군 갈현리) 일대로 비정된다(정구복 외, 1997d, 253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승량현(僧梁縣)을 동량현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본서에는 이 기사 이외에는 동량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사』 권12 지리지3 교주도 승령현조에 따르면 고려가 승령현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동주(東州)의 속현으로 삼았다고 한다.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어 삭녕(朔寧)을 겸임하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3 경기 삭녕군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3년(1403)에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외가 고향이기 때문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키고 승령을 합하였다. 14년에 안협현(安峽縣)을 없애고 예속시켜서 안삭군(安朔郡)을 만들었다가, 16년에 다시 안협현을 설치하고 옛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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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승량현(僧梁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량현(㠉梁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4 고구려조 이외에는 ‘승량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승량현을 ‘비물(非勿)’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비(非)’가 ‘승려(僧)’의 뜻으로 쓰였을 가능성을 상정하며 중세국어 ‘비구(比丘)’와 연관시키기도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7쪽).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승령현(僧嶺縣): 신라 동량현(㠉梁縣: 현 ((? 수정 필요)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인목면 갈현리;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 갈현리)의 고려 인종 때 이름. 본서 열전10 궁예전에는 진성왕 10년(896년)에 궁예가 승령현과 임강현(臨江縣: 장단군 강상면 임강리) 등 두 현을 획득한 기사가 나온다. 위의 동량현에 대한 주석 참조.
공성현(功成縣)註 175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공목달현(功木達縣)註 176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77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장주(獐州)註 178이다.
공성현(功成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철성군(鐵城郡) 소속의 현으로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漣川邑)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6쪽; 정구복 외, 1997d, 253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공목달현(功木達縣)을 공성현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본서에는 이 기사 이외에는 ‘공성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공성현에 대응되는 신라 성곽으로는 연천 군자산성이 있다(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0, 211~213쪽; 박성현, 2010, 262쪽). 『고려사』 권12 지리지3 교주도 장주현조에 따르면 고려가 통일신라의 공성현을 ‘장주(漳州)’로 바꾸었다고 한다. 성종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에 없앴다. 현종 9년(1018)에 동주(東州)의 속군으로 삼았다. 명종 5년(1175)에 감무(監務)를 두어 승령(僧嶺)을 겸임하게 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한 다음 왕의 이름을 피하여 연주(漣州)라고 고쳤다. 관내에 징파도(澄波渡)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3 경기 연천현에 따르면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으로 고쳤고, 14년에 마전현(麻田縣: 연천군 미산면)에 병합되어 마련현(麻漣縣)이라 하였다가, 16년에 다시 나누어 현(縣)으로 삼았다. 현종이 다시 마전에 병합하였다가 복구하였다. 고종이 군(郡)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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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0,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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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목달현(功木達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공성현(功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 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4 고구려조 이외에는 ‘공목달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공목달현을 ‘웅섬산(熊閃山)’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공목달의 ‘공목(功木)’은 곰 곧 ‘웅(熊)’, ‘달(達)’은 산(山)을 뜻한다(도수희, 2005, 498~499쪽 및 507쪽). 본서 권23 백제본기1의 온조왕 22년조와 다루왕 4년조에는 ‘고목성(高木城)’이 나오는데, 음이 유사하여 공목달현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한다(천관우, 1976, 120쪽; 이병도, 1977: 2012, 405쪽; 김기섭, 1994, 8쪽; 정구복 외, 1997d, 606쪽; 서영일, 2004, 229~230쪽). 그에 따르면 온조왕 22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을 축조하였고, 다루왕 4년 8월에는 고목성의 곤우(昆優)가 동예로 비정되는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고 한다. 백제 초기에 연천 일대에서 백제가 동예와 싸우던 양상을 잘 보여준다. 본서 백제본기4의 무령왕 3년 9월조, 6년 7월조, 7년 5월조 등에도 백제가 고목성 일대에서 말갈(동예)와 각축전을 벌이는 기사가 다수 확인되지만, 백제의 웅진시기 한강 영유 기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실로 보기도 하고, 실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고 이해하기도 한다(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4년 8월조 참조).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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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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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우, 1976, 「삼한의 국가형성(하)」, 『한국학보』 3
김기섭, 1994, 「백제 근초고왕대의 북경」, 『군사』 29
서영일, 2004, 「한성시대의 백제 북방 교통로」, 『문화사학』 21
酒井改藏, 1970, 「三國史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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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井改藏, 1970, 「三國史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註) 167
철성군(鐵城郡):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소속의 군으로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鐵原邑) 사요리(四要里)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6쪽; 정구복 외, 1997d, 252쪽). 동량현(㠉梁縣)과 공성현(功城縣) 등 영현(領縣) 2개를 거느렸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철원군(鐵圓郡)을 철성군으로 고쳤다고 한다. 철성군 지역이 신라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된 시기를 나당전쟁이 종료되던 675년 무렵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박성현, 2010, 195~200쪽; 전덕재, 2016, 114~115쪽), 그 이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본서 신라본기11의 진성왕 9년 8월조, 신라본기12 효공왕 7년조와 9년 7월조, 열전10 궁예전 등에 ‘철원(鐵圓)’이 다수 확인된다. 진성왕 9년(895년) 8월에 궁예(弓裔)가 철원 등 한주(漢州)의 10여 군현을 함락하였고, 효공왕 7년(903년)에는 철원과 부양(斧壤: 金化)을 둘러보며 도읍지를 물색하였고, 효공왕 9년 7월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철성군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철원읍의 동주산성이 있다(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6, 15-30쪽; 박성현, 2010, 262쪽).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다음,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철원을 고쳐 동주(東州)라 하였다. 『고려사』 권12 지리지3 교주도 동주조에 따르면 왕건이 태조로 즉위한 다음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철원을 고쳐 동주(東州)라 하였는데, 궁예의 궁전터는 주치의 북쪽 27리 풍천(楓川) 들판에 있다고 한다. 성종 14년(995)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에 없앴다. 현종 9년(1018)에 지동주사(知東州事)로 고쳤다가 고종 41년(1254)에 현령관(縣令官)으로 강등하였다. 뒤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가 충선왕 2년(1310)에 목(牧)을 정리하면서 철원부(鐵原府)로 강등하였다. 조선시기에 들어와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都護府)로 고쳤고, 세종 16년(1434)에 경기에서 강원도로 편입하였고, 고종이 군(郡)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6, 『강원도 철원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16, 「신라의 북진과 서북 경계의 변화」, 『한국사연구』 173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1996, 『강원도 철원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16, 「신라의 북진과 서북 경계의 변화」, 『한국사연구』 173
註) 168
철원군(鐵圓郡):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철성군(鐵城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본서에는 경덕왕 시기보다 늦은 시기인 진성왕 9년 8월조, 효공왕 7년조와 효공왕 9년 7월조, 열전10 궁예전 등에 철성군으로 고치기 이전의 ‘철원’이라는 지명이 다수 확인된다. 이로 보아 ‘철원군’이 고구려 시기의 지명이라는 본서의 기사는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철원군(鐵圓郡)을 ‘모을동비(毛乙冬非)’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모을동비’의 ‘모을(毛乙)’은 훈음차를 통해 ‘뎔(毛)’ 곧 ‘쳘(鐵)’, ‘동비(冬非)’는 음차를 통해 ‘둥글~’ 곧 ‘원(圓)’을 각각 표기한 것으로 파악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6-507쪽 및 514~515쪽).
註) 169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註) 171
동량현(㠉梁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철성군(鐵城郡) 소속의 현으로 경기도 연천군 구읍(舊邑) 동쪽에 위치하였는데(이병도, 1977: 2012, 586쪽),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인목면 갈현리(북한의 강원도 철원군 갈현리) 일대로 비정된다(정구복 외, 1997d, 253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승량현(僧梁縣)을 동량현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본서에는 이 기사 이외에는 동량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사』 권12 지리지3 교주도 승령현조에 따르면 고려가 승령현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동주(東州)의 속현으로 삼았다고 한다. 예종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어 삭녕(朔寧)을 겸임하게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3 경기 삭녕군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3년(1403)에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외가 고향이기 때문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키고 승령을 합하였다. 14년에 안협현(安峽縣)을 없애고 예속시켜서 안삭군(安朔郡)을 만들었다가, 16년에 다시 안협현을 설치하고 옛 이름으로 환원하였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172
승량현(僧梁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동량현(㠉梁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4 고구려조 이외에는 ‘승량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승량현을 ‘비물(非勿)’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비(非)’가 ‘승려(僧)’의 뜻으로 쓰였을 가능성을 상정하며 중세국어 ‘비구(比丘)’와 연관시키기도 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7쪽).
註) 173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註) 174
승령현(僧嶺縣): 신라 동량현(㠉梁縣: 현 ((? 수정 필요)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인목면 갈현리; 북한의 강원도 철원군 갈현리)의 고려 인종 때 이름. 본서 열전10 궁예전에는 진성왕 10년(896년)에 궁예가 승령현과 임강현(臨江縣: 장단군 강상면 임강리) 등 두 현을 획득한 기사가 나온다. 위의 동량현에 대한 주석 참조.
註) 175
공성현(功成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철성군(鐵城郡) 소속의 현으로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漣川邑)으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6쪽; 정구복 외, 1997d, 253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공목달현(功木達縣)을 공성현으로 고쳤다고 하는데, 본서에는 이 기사 이외에는 ‘공성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공성현에 대응되는 신라 성곽으로는 연천 군자산성이 있다(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0, 211~213쪽; 박성현, 2010, 262쪽). 『고려사』 권12 지리지3 교주도 장주현조에 따르면 고려가 통일신라의 공성현을 ‘장주(漳州)’로 바꾸었다고 한다. 성종 14년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에 없앴다. 현종 9년(1018)에 동주(東州)의 속군으로 삼았다. 명종 5년(1175)에 감무(監務)를 두어 승령(僧嶺)을 겸임하게 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한 다음 왕의 이름을 피하여 연주(漣州)라고 고쳤다. 관내에 징파도(澄波渡)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3 경기 연천현에 따르면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으로 고쳤고, 14년에 마전현(麻田縣: 연천군 미산면)에 병합되어 마련현(麻漣縣)이라 하였다가, 16년에 다시 나누어 현(縣)으로 삼았다. 현종이 다시 마전에 병합하였다가 복구하였다. 고종이 군(郡)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2000,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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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76
공목달현(功木達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공성현(功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 한다. 다만 이 기사와 본서 지리4 고구려조 이외에는 ‘공목달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공목달현을 ‘웅섬산(熊閃山)’으로도 일컬었다고 하는데, 공목달의 ‘공목(功木)’은 곰 곧 ‘웅(熊)’, ‘달(達)’은 산(山)을 뜻한다(도수희, 2005, 498~499쪽 및 507쪽). 본서 권23 백제본기1의 온조왕 22년조와 다루왕 4년조에는 ‘고목성(高木城)’이 나오는데, 음이 유사하여 공목달현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한다(천관우, 1976, 120쪽; 이병도, 1977: 2012, 405쪽; 김기섭, 1994, 8쪽; 정구복 외, 1997d, 606쪽; 서영일, 2004, 229~230쪽). 그에 따르면 온조왕 22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을 축조하였고, 다루왕 4년 8월에는 고목성의 곤우(昆優)가 동예로 비정되는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고 한다. 백제 초기에 연천 일대에서 백제가 동예와 싸우던 양상을 잘 보여준다. 본서 백제본기4의 무령왕 3년 9월조, 6년 7월조, 7년 5월조 등에도 백제가 고목성 일대에서 말갈(동예)와 각축전을 벌이는 기사가 다수 확인되지만, 백제의 웅진시기 한강 영유 기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실로 보기도 하고, 실제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고 이해하기도 한다(본서 권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4년 8월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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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井改藏, 1970, 「三國史記の地名考」, 『朝鮮學報』 54
註) 177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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