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중종이 태종의 묘호를 고치라고 하였으나 거절하다
(
692년
)
당나라 중종(中宗)이註 001 사신을 보내 구두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우리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께서는註 002 신이한 공(功)과 성스러운 덕(德)이 천고(千古)에 뛰어났다. 이런 까닭에 〔문황제께서〕 승하하신 날에 묘호(廟號)를註 003 태종(太宗)이라 지었다. 너희 나라 선왕(先王) 김춘추(金春秋)에게도 같은 묘호를 쓴 것은 매우 참람(僭濫)된 것이니, 모름지기 빨리 칭호를 고쳐라.”고 하였다.註 004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대답하기를, “소국(小國) 선왕(先王) 춘추의 시호(諡號)가 우연히 성조(聖朝)의 묘호와 서로 저촉되어 칙령(勅令)을 내려 고치라고 하였사오니, 신이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질고 덕망이 있었으며, 더구나 생전(生前)에 어진 신하인 김유신(金庾信)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사(政社)를 돌보아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니,註 005 이룩한 공적(功績)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에 선왕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온 나라의 관리와 백성들이 슬퍼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추서(追敍)한 존호(尊號)가 성조(聖朝)〔의 묘호〕와 서로 저촉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교칙(敎勅)을 들으매 송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사신께서 〔당으로 돌아가서〕 대궐의 뜰에서 〔황제께〕 복명(復命)하실 때에 이와 같이 아뢰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다시 별다른 조칙(詔勅)이 없었다.註 006
당나라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 모름지기 빨리 칭호를 고쳐라.”라고 하였다: 본 기록에는 692년에 당나라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태종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하였다고 전하나, 중종은 684년 2월 26일에 폐위되었고, 692년은 측천무후가 예종(睿宗)마저 폐위시키고 황제로 군림하던 때였기 때문에 사신을 보낸 황제가 중종이라는 언급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태종춘추공조에 신문왕 때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당나라 고종이 683년 12월에 죽었으므로, 이에 따른다면, 신문왕이 즉위한 681년 7월 1일에서 683년 12월 사이에 고종이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하였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여, 신문왕 원년(681)에 신라에 온 당나라 사신을 통해 고종이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권덕영, 2005, 96~97쪽; 서영교, 2006, 306~307쪽; 노태돈, 2009. 278~279쪽). 한편 『삼국유사』의 기록과 본 기록이 별도의 사실을 전한 것이라고 이해한 다음, 당나라 고종과 중종이 모두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하였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김수태, 1999, 672~674쪽). 이밖에 당나라 고종이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언급한 『삼국유사』의 기록이 본 기록보다 원전에 가깝고, 이에 관한 기록을 본서의 찬자들이 신문왕 말년 기사에 첨입하면서, 고종을 중종으로 바꾸고, 692년이 측천무후 집권기임을 감안하여 구칙(口勅)을 통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변개하였다고 이해한 견해도 있다(윤경진, 2013, 214~215쪽).
〈참고문헌〉
서영교, 2006, 『나당전쟁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김수태, 1999, 「나당관계의 변화와 김인문」, 『백산학보』 52
권덕영, 2005, 「8~9세기 군자국에 온 당나라 사절」, 『신라문화』 25
윤경진, 2013, 「신라 중대 태종(무열왕) 시호의 追上과 재해석」, 『한국사학보』 53
〈참고문헌〉
서영교, 2006, 『나당전쟁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김수태, 1999, 「나당관계의 변화와 김인문」, 『백산학보』 52
권덕영, 2005, 「8~9세기 군자국에 온 당나라 사절」, 『신라문화』 25
윤경진, 2013, 「신라 중대 태종(무열왕) 시호의 追上과 재해석」, 『한국사학보』 53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니: 종래에 이 구절과 ‘삼한(三韓)’이라는 표현이 전하는 「청주(淸州) 운천동(雲泉洞) 신라사적비(新羅事蹟碑)」(686년 건립 추정) 등을 주목하여, 7세기 중반에 신라인 사이에 삼국을 삼한(三韓)으로 여기는 인식이 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삼한을 하나로 통일, 즉 일통삼한(一統三韓)하였다고 자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노태돈, 1982; 1998, 84~87쪽). 한편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는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고, 당나라에서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한 기록의 원전은 김장청(金長淸)이 저술한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이었다고 주장한 다음, 신라인들이 삼국을 삼한으로 여기는 인식은 7세기 중반이 아니라 9세기 후반에 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르러 신라인들이 비로소 삼한을 하나로 통일하였다고 자부하는 일통삼한의식(一統三韓意識)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한 견해가 새롭게 제기되었다(윤경진, 2013; 2015a; 2015b; 2020). 이밖에 문무왕대까지 신라는 백제의 통합에 전력을 기울였고, 신문왕대에 보덕국(報德國)을 해체하면서 비로소 고구려를 포함한 일통삼한의식이 확립되었으며, 본 기록은 바로 신문왕대에 신라인들이 태종무열왕의 업적으로 부회된 일통삼한의식을 표방하였음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주장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영하, 2010).
〈참고문헌〉
노태돈, 1998, 『한국사를 통해 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 풀빛
노태돈, 1982,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연구』 38
김영하, 2010, 「일통삼한의 실상과 의식」, 『한국고대사연구』 59
윤경진, 2013, 「‘청주운천동사적기’의 건립 시기에 대한 재검토」, 『사림』 45
윤경진, 2015a, 「신라 흥덕왕대 체제정비와 김유신추봉-삼한일통의식 출현의 일배경」, 『사림』 52
윤경진, 2015b, 「신라 신무-문성왕대의 정치변동과 삼한일통의식의 출현」, 『신라문화』 46
윤경진, 2020, 「신라의 영토의식과 삼한일통의식」, 『역사비평』 126
〈참고문헌〉
노태돈, 1998, 『한국사를 통해 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 풀빛
노태돈, 1982,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연구』 38
김영하, 2010, 「일통삼한의 실상과 의식」, 『한국고대사연구』 59
윤경진, 2013, 「‘청주운천동사적기’의 건립 시기에 대한 재검토」, 『사림』 45
윤경진, 2015a, 「신라 흥덕왕대 체제정비와 김유신추봉-삼한일통의식 출현의 일배경」, 『사림』 52
윤경진, 2015b, 「신라 신무-문성왕대의 정치변동과 삼한일통의식의 출현」, 『신라문화』 46
윤경진, 2020, 「신라의 영토의식과 삼한일통의식」, 『역사비평』 126
그 후에 다시 별다른 조칙(詔勅)이 없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태종춘추공조에 “황제가 〔신문왕이 올린〕 그 글을 보고, 곧 자신이 태자로 있을 때에 하늘에서 이르기를, ‘33천(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 김유신이 되었다.’고 하던 것을 글로 적어 둔 것이 생각나서 꺼내보고 놀랍고 두렵지 않을 수 없어 다시 사신을 보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실제 역사적 사실을 전한다기 보다는 후대에 김유신과 관련된 내용으로 부회, 윤색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봄이 합리적일 것이다.
註) 001
註) 002
註) 003
註) 004
당나라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 모름지기 빨리 칭호를 고쳐라.”라고 하였다: 본 기록에는 692년에 당나라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태종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하였다고 전하나, 중종은 684년 2월 26일에 폐위되었고, 692년은 측천무후가 예종(睿宗)마저 폐위시키고 황제로 군림하던 때였기 때문에 사신을 보낸 황제가 중종이라는 언급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태종춘추공조에 신문왕 때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당나라 고종이 683년 12월에 죽었으므로, 이에 따른다면, 신문왕이 즉위한 681년 7월 1일에서 683년 12월 사이에 고종이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하였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종래에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여, 신문왕 원년(681)에 신라에 온 당나라 사신을 통해 고종이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권덕영, 2005, 96~97쪽; 서영교, 2006, 306~307쪽; 노태돈, 2009. 278~279쪽). 한편 『삼국유사』의 기록과 본 기록이 별도의 사실을 전한 것이라고 이해한 다음, 당나라 고종과 중종이 모두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하였다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김수태, 1999, 672~674쪽). 이밖에 당나라 고종이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언급한 『삼국유사』의 기록이 본 기록보다 원전에 가깝고, 이에 관한 기록을 본서의 찬자들이 신문왕 말년 기사에 첨입하면서, 고종을 중종으로 바꾸고, 692년이 측천무후 집권기임을 감안하여 구칙(口勅)을 통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변개하였다고 이해한 견해도 있다(윤경진, 2013, 214~215쪽).
〈참고문헌〉
서영교, 2006, 『나당전쟁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김수태, 1999, 「나당관계의 변화와 김인문」, 『백산학보』 52
권덕영, 2005, 「8~9세기 군자국에 온 당나라 사절」, 『신라문화』 25
윤경진, 2013, 「신라 중대 태종(무열왕) 시호의 追上과 재해석」, 『한국사학보』 53
〈참고문헌〉
서영교, 2006, 『나당전쟁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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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태, 1999, 「나당관계의 변화와 김인문」, 『백산학보』 52
권덕영, 2005, 「8~9세기 군자국에 온 당나라 사절」, 『신라문화』 25
윤경진, 2013, 「신라 중대 태종(무열왕) 시호의 追上과 재해석」, 『한국사학보』 53
註) 005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니: 종래에 이 구절과 ‘삼한(三韓)’이라는 표현이 전하는 「청주(淸州) 운천동(雲泉洞) 신라사적비(新羅事蹟碑)」(686년 건립 추정) 등을 주목하여, 7세기 중반에 신라인 사이에 삼국을 삼한(三韓)으로 여기는 인식이 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삼한을 하나로 통일, 즉 일통삼한(一統三韓)하였다고 자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노태돈, 1982; 1998, 84~87쪽). 한편 「청주 운천동 신라사적비」는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고, 당나라에서 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고 한 기록의 원전은 김장청(金長淸)이 저술한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이었다고 주장한 다음, 신라인들이 삼국을 삼한으로 여기는 인식은 7세기 중반이 아니라 9세기 후반에 확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르러 신라인들이 비로소 삼한을 하나로 통일하였다고 자부하는 일통삼한의식(一統三韓意識)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한 견해가 새롭게 제기되었다(윤경진, 2013; 2015a; 2015b; 2020). 이밖에 문무왕대까지 신라는 백제의 통합에 전력을 기울였고, 신문왕대에 보덕국(報德國)을 해체하면서 비로소 고구려를 포함한 일통삼한의식이 확립되었으며, 본 기록은 바로 신문왕대에 신라인들이 태종무열왕의 업적으로 부회된 일통삼한의식을 표방하였음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주장한 견해도 제기되었다(김영하, 2010).
〈참고문헌〉
노태돈, 1998, 『한국사를 통해 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 풀빛
노태돈, 1982,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연구』 38
김영하, 2010, 「일통삼한의 실상과 의식」, 『한국고대사연구』 59
윤경진, 2013, 「‘청주운천동사적기’의 건립 시기에 대한 재검토」, 『사림』 45
윤경진, 2015a, 「신라 흥덕왕대 체제정비와 김유신추봉-삼한일통의식 출현의 일배경」, 『사림』 52
윤경진, 2015b, 「신라 신무-문성왕대의 정치변동과 삼한일통의식의 출현」, 『신라문화』 46
윤경진, 2020, 「신라의 영토의식과 삼한일통의식」, 『역사비평』 126
〈참고문헌〉
노태돈, 1998, 『한국사를 통해 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 풀빛
노태돈, 1982,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연구』 38
김영하, 2010, 「일통삼한의 실상과 의식」, 『한국고대사연구』 59
윤경진, 2013, 「‘청주운천동사적기’의 건립 시기에 대한 재검토」, 『사림』 45
윤경진, 2015a, 「신라 흥덕왕대 체제정비와 김유신추봉-삼한일통의식 출현의 일배경」, 『사림』 52
윤경진, 2015b, 「신라 신무-문성왕대의 정치변동과 삼한일통의식의 출현」, 『신라문화』 46
윤경진, 2020, 「신라의 영토의식과 삼한일통의식」, 『역사비평』 126
註) 006
그 후에 다시 별다른 조칙(詔勅)이 없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태종춘추공조에 “황제가 〔신문왕이 올린〕 그 글을 보고, 곧 자신이 태자로 있을 때에 하늘에서 이르기를, ‘33천(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 김유신이 되었다.’고 하던 것을 글로 적어 둔 것이 생각나서 꺼내보고 놀랍고 두렵지 않을 수 없어 다시 사신을 보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실제 역사적 사실을 전한다기 보다는 후대에 김유신과 관련된 내용으로 부회, 윤색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봄이 합리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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