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정백동 고분군 ( )

선사문화
유적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나무널무덤 · 덧널무덤 · 귀틀무덤 · 벽돌무덤 · 독널무덤 등 다양한 묘제가 산재하는 낙랑 시기의 무덤군.
이칭
이칭
평양대동강면고분군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군
건립 시기
초기국가시대
관련 국가
한나라
소재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내용 요약

평양정백동고분군(平壤貞柏洞古墳群)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나무널무덤 · 덧널무덤 · 귀틀무덤 · 벽돌무덤 · 독널무덤 등 다양한 묘제가 산재하는 낙랑 시기의 무덤군이다. 1909년 세키노 다다시에 의해 발굴되면서 일찍이 그 중요성이 인지되었고, 광복 이후에도 1990년대까지 수천 개의 낙랑고분이 발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평양정백동고분군은 낙랑토성과 함께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서북한 지역에 분포하는 고분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하나이다.

정의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나무널무덤 · 덧널무덤 · 귀틀무덤 · 벽돌무덤 · 독널무덤 등 다양한 묘제가 산재하는 낙랑 시기의 무덤군.
발굴 경위 및 결과

평양정백동고분군은 행정구역상으로 북한의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정백동에 있는 주1 시기의 무덤군이다. 평양직할시를 동에서 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대동강 남쪽 기슭에 형성된 무덤군으로 지금은 흔적만 남은 오봉산에서 동북 방향의 낮게 뻗은 구릉을 중심으로 남쪽의 평양정오동고분군과 마주 보는 곳이다.

평양정백동고분군은 낙랑군의 치소로 알려진 낙랑토성의 동쪽에 형성된 무덤군으로, 평양정오동고분군, 평양토성리고분군 등과는 행정구역상으로 분리되지만 원래는 하나의 고분군이었다.

정백동은 1896년에 평안남도 평양부 대동강면 정백동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정리 시 정백리로 바뀌었다. 1916년에 발굴된 고분이 대동강면고분으로 불리기도 하고, 정백동고분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유이다.

광복 후인 1946년에 평양특별시 동구 정백리가 되면서 석암리를 흡수하였고, 1950년에는 오야리까지 병합하여 정오리가 되면서 폐지되었다. 이후 1959년에 락랑구역이 신설되어 소속되었다가 1986년에는 토성동까지를 흡수하여 정백일동과 정백이동으로 분리된 상태이다.

평양정백동고분군은 1909년에 처음으로 발굴되었는데 조사자는 도쿄대학에서 파견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였다. 이후 1910년에도 일부 무덤이 발굴되었으며, 191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광복 후에는 북한학계가 평양정백동고분군의 발굴 조사를 주도하여 수백 기의 무덤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1970년대에는 락랑구역 정백동 서남측의 구릉에서 다수의 무덤군이 조사되었는데, 분구가 삭평되어 일제강점기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무덤군이 지하에 다수 남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의 발굴을 계기로 북한 고고학계에서는 낙랑고분에 대한 연구에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당시의 연구 분위기는 평양 지역의 낙랑고분이 주2 시기 이래로 지역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고분 형식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980년대에는 락랑구역 통일거리 건설 과정에서 수많은 낙랑고분이 발굴되었는데, 평양정백동고분들도 포함되었다. 1982년과 1984년 사이에는 정백동이 포함된 락랑구역에서 단장 덧널무덤과 병혈합장 덧널무덤 46기가 조사되었으며, 동혈합장 덧널무덤 56기, 벽돌방무덤 199기, 독무덤 15기, 주3 13기 등 모두 329기의 낙랑고분이 발굴되었다고 보고되었다.

1990년대에는 락랑구역 일대에서 모두 2,000기 이상의 낙랑고분이 발굴 조사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구체적인 전모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형태와 특징

평양정백동고분군에서 발굴된 무덤은 나무널무덤과 덧널무덤, 벽돌무덤, 귀틀무덤, 독널무덤 등이 있다.

나무널무덤은 무덤구덩이 속에 널재목으로 조립한 나무널을 안치하고 무덤구덩이와 나무널 사이 혹은 나무널의 한쪽 윗면에 토기를 부장하는 형태의 무덤으로 간혹 부장 유물이 없는 경우도 있다. 낙랑 묘제 중에서는 가장 고식(古式)으로 분류되며, 세형동검과 관련된 청동기를 부장하는 전 단계의 토착계 널무덤과는 분명한 계승 관계가 인정된다.

물론 나무널무덤은 귀틀식 덧널무덤이 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하위 계층의 무덤으로 선호되었다. 정백동 353호, 494호, 1001호는 나무널 안에 약간의 장신구만이 부장될 뿐 별도의 부장용 토기가 없는 나무널무덤이다. 그 후 나무널무덤에 토기가 부장되는데, 주로 활석 혼입계의 화분모양토기와 두드림무늬짧은목항아리가 짝을 이루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러한 전통은 덧널무덤 단계까지 이어진다. 화분모양토기는 취사용 토기이며 두드림무늬짧은목항아리는 저장 용기를 대표하는 기종인데, 이러한 관계로 토기를 부장하는 전통은 삼한 사회에서도 확인된다.

낙랑 지역에서 나무널무덤에 비해서 출현 시기가 늦은 덧널무덤은 크게 단장 덧널무덤과 합장 덧널무덤으로 나누어진다. 합장 덧널무덤은 다시 병혈 합장과 동혈 합장으로 구분된다. 단장 덧널무덤에는 판재식 덧널무덤과 귀틀 덧널무덤이 있다.

판재식 덧널무덤은 무덤구덩이를 조성한 다음 널빤지를 여러 장 잇대어 덧널로 삼은 것이고, 귀틀 덧널무덤은 각재목으로 무덤구덩이 안에다 덧널 바닥과 사방벽 그리고 천장을 만든 다음 그 안에 나무널을 안치하는 것이다. 나무널을 안치하는 양상은 비슷하다.

귀틀무덤이라는 용어는 북한 고고학계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인데,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덧널무덤 내지 귀틀무덤이라고 부른다. 남정리 116호가 대표적인 귀틀무덤이고, 정백동 127호인 왕광묘가 대표적인 귀틀덧널무덤이다. 북한학계에서 발굴 조사한 정백동 382호도 이혈 합장의 귀틀덧널무덤으로 분류된다.

낙랑군의 귀틀덧널무덤은 중국에서 전한(前漢) 시기에 유행한 덧널무덤의 영향으로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낙랑 문물에서 한화(漢化) 현상이 두드러지는 서기전 1세기 대일 가능성이 높다.

낙랑 덧널무덤에는 병혈 덧널무덤이 있다. 즉 먼저 만들어진 무덤구덩이 옆에 추가장을 할 때 무덤구덩이 하나가 추가되는 것이다. 무덤구덩이 2개가 나란히 늘어서는 것이 많으나 선행 무덤구덩이를 살짝 침범하는 사례도 있다. 이러한 병혈 합장무덤은 대개 부부 합장무덤으로 이해되는데, 여성의 관이 남성의 관보다 낮게 설치된다는 특징이 있다. 주축을 남북으로 두는 경우 남성의 관이 서쪽, 여성의 관이 동쪽에 배치된다.

대표적인 병혈 합장무덤으로는 정백동 37호와 53호가 있다. 이 단계의 무덤에서는 여전히 토착계 청동기가 부장되고 화분모양토기도 공반된다. 대표적인 전한 대 거울인 이체자명대경(異體字銘帶鏡)이 부장되는 사례가 많은 것을 보면, 그 시기는 서기전 1세기 대가 중심일 가능성이 높다.

동혈 합장무덤은 방형 내지는 장방형으로 조성된 무덤구덩이에 비교적 규모가 큰 덧널을 설치하고 그 내부에 복수의 나무널을 안치한 구조이다. 모두 귀틀로 조립된다. 격벽으로 부장 공간을 따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지만, 격벽 없이 덧널의 한쪽에 치우쳐 복수의 나무널을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내부에 나무널이 3기 이상 안치되는 경우에는 덧널의 내부 구조를 고치거나 덧널 외부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추가장이 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고분으로 정백동 2호, 정백동 127호 등을 들 수 있다. 출토된 칠기의 주4과 구리거울의 형식으로 보아 1세기에서 2세기 대가 중심 연대임을 알 수 있다.

동혈 합장덧널무덤에 후행하는 묘제가 벽돌무덤이다. 벽돌무덤의 등장은 추가장이 어려운 덧널무덤의 구조적 결함을 보완시켜 주었다. 낙랑의 벽돌무덤은 한 칸 무덤인 외방무덤과 두 칸 무덤인 여러방무덤이 있다. 그리고 작은 측실, 즉 곁방이 부가된 경우도 있다.

지붕의 형태는 나무 뚜껑이라서 남아 있지 않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벽돌을 이용해서 돔 형태 즉 주5의 천장이 많다. 중국 대륙에서는 일반적인 터널형 지붕 구조는 낙랑 지역에서 발견된 바 없다.

낙랑 벽돌무덤은 무덤구덩이를 굴착하고 바닥에 벽돌을 넓게 깐 다음, 그 위 사방벽을 따라 벽돌을 쌓아 올리는데, ‘3횡 1수’가 일반적이다. 즉 세 번을 눕혀 쌓고 한 번을 세워서 쌓는다는 것이다. 무덤방은 그 벽면이 대개 바깥으로 배가 부른 형태이다. 이를 동장구조(胴張構造)라고 한다.

원래 낙랑 지역의 벽돌무덤은 2세기 말에 출현하여 3세기 대에 가장 유행한 묘제로 이해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덧널에 부분적으로 사용된 문양 벽돌을 근거로 그 상한이 1세기 말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낙랑의 벽돌무덤은 늦은 시기가 되면 천장에 돌을 얹거나 벽면의 일부를 돌로 축조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돌을 섞어서 쌓거나 돌로 뚜껑을 삼는 속성을 고구려적 요소라고 판단한다. 이를 낙랑 멸망 전에 이미 평양 지역이 고구려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부분적으로 돌이 활용된 평양역 구내 벽돌무덤에서 출토된 벽돌의 기년을 참고하면 낙랑 지역의 벽돌무덤은 낙랑과 대방군이 멸망한 4세기 중엽까지 계속해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초의 기년이 있는 벽돌도 확인되는데, 이것이 무덤 축조에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평양정백동고분군에서는 독무덤도 발견되었다. 대부분 이음식인데 화분모양토기와 두드림무늬짧은목항아리가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독무덤이 무리를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에 배속(配屬)되는 것이 많다. 벽돌을 작게 둘러서 만든 벽돌덧널무덤도 있는데, 이는 무덤을 조영할 수 있는 계층 중에서 가장 하위 계층의 묘제로 판단된다.

서기전 1세기 대 낙랑고분의 최상 수준인 3호분과 7호분의 부장품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구리거울류, 철제 무기류, 차마구류와 각종 칠기류 등 한식 공예품의 비중이 큰 가운데, 고조선계 구리창과 화분모양토기 등 낙랑의 지역성을 가진 공예품들이 혼합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북방 유목권의 주6들이나 주7들이 즐겨 패용하던 장신구로 알려진 은제타출동물문대구(銀製打出動物文帶鉤)가 남성의 장신구로 부장된 반면, 남방계로 추정되는 사자모양드리개가 여성의 장신구로 부장된 이원전 계보가 동시에 나타난다.

사자모양드리개는 모두 여성의 장신구로 부장되었는데, 북방이나 중원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 없고 인도에 그 조형(祖形)이 있다. 현재 중국 광둥성과 장쑤성 등 중국 남방에서만 발견되며, 액운을 막아 주는 용도로 몸에 지녔다. 사자모양드리개가 남방의 한정된 지역성을 보이는 양상은 당시 중국과 서방 간에 이루어진 바닷길 무역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되며, 중국 남방에서 산둥반도를 거쳐 한반도의 낙랑으로 유입되었다고 추정한다.

평양정백동고분군 중 중요 무덤으로 1호와 2호를 들 수 있다. 1호는 널리 알려진 부조예군묘이다.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정백동에 자리하는데 구(舊)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정백리의 무덤이다.

1958년 11월 건축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피장자가 부조예군으로 알려져 유명해졌다. 봉분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무덤구덩이는 동남쪽으로 약간 틀어졌지만 남북 방향이다. 바닥에는 각재목을 한 벌 깔았다.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좁은 편이지만 바닥에 각재목이 깔린 점으로 보아 귀틀덧널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물은 무덤구덩이의 북쪽과 한가운데에서 출토되었다. 북쪽 부장칸에는 화분모양토기, 짧은목항아리, 삿갓모양구리쇠고리와 권총모양구리쇠고리를 포함한 거마구와 주8 같은 마구, 쇠도끼와 비닐갑옷 조각, 세형동검과 그 부속구, 좁은놋창, 쇠뇌, 쇠칼을 비롯하여 다양한 무기들이 출토되었다.

세형동검이 부장되었지만 쇠칼이 공반되는 사실이 주목되며, 청동제 세모촉과 함께 주9 속이 비어 있는 청동제 날개촉도 출토되었다. 무덤구덩이 가운데 피장자의 곁에서 인장이 출토되었는데, 소재는 은이다. 손잡이는 짐승 모양으로 밑면은 한 변의 길이가 2.2㎝인 방형이며, 그 두께는 0.5㎝이다. 도장의 밑을 4등분하여 매 칸에 한 자씩 깊고 굵게 ‘부조예군(夫租濊君)’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보고자는 피장자가 예족으로 이루어진 부조 땅에 파견되었던 관리로 현지의 반란으로 인해 평양으로 도망쳐 지내다 죽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부조장’과 ‘고상현’의 인장이 발견된 정백동 2호분과도 비슷한 설명 구조이다.

정백동 2호도 락랑구역 정백동에 자리한다. 1961년에 발굴된 무덤으로 고상현인(高常賢印)이라 새겨진 인장이 출토되어 고상현묘(高常賢墓)라고도 불린다. 동혈 합장덧널무덤으로 덧널의 크기는 길이 280㎝, 너비 250㎝, 높이 56㎝이다.

약 2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서관에서는 은제 띠고리 1점, 도장 2점, 긴칼 1점, 구리거울 1면이 출토되었고, 동관에서는 화장곽 2점, 구슬류 58점, 은제 반지 18점, 그리고 비녀가 다수 출토되었다. 구리거울과 나무빗도 출토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피장자가 남성으로 추정되는 서관에서는 허리띠 띠고리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허리띠 띠고리는 중원계의 형식이 아니라 북방 유목민의 공간에서 출토되는 사례가 많은 것이다.

이를 두고 한나라의 왕실 공방에서 제작되어 유통된 것이라는 주장과 토착 제작설이 있다. 정백동 2호분은 출토된 주10주11의 영시 3년(永始三年, 서기전 14년)의 기년명을 참고로 서기전 1세기 말로 판단하는 연구자가 많다.

의의 및 평가

평양정백동고분군은 낙랑토성과 함께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서북한 지역에 분포하는 고분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래로 행정구역이 여러 번 개편되면서 평양정오동고분군과 평양토성리고분군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를 단일 무덤군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정인성 외, 『일본소재의 고구려 유물』 Ⅰ(동북아역사재단, 2008)
『낙랑』 9(國立中央博物館, 2001)
『鳳山 養洞里 塼室墓』(國立中央博物館, 2001)
『조선유적유물도감』 2(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89)
『고고학자료집』 6(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1983)
『고고학자료집』 5(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1978)

논문

정인성, 「일제강점기의 낙랑고고학」(『한국상고사학보』 71, 한국상고사학회, 2011)
정인성, 「대방태수 장무이묘(張撫二墓)의 재검토」(『한국상고사학보』 69, 한국상고사학회, 2010)
정인성, 「관야정(關野貞)의 낙랑유적 조사 · 연구 재검토-일제강점기 고적조사(古蹟調査)의 기억 1-」(『호남고고학보』 24, 호남고고학회, 2006)
정인성, 「樂浪土城의 土器」(『韓國古代史硏究』 34, 한국고대사학회, 2004)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락랑구역 일대의 고분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 6,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3)
리순진, 「부조예군무덤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 4, 사회과학출판사, 1974)
리순진, 「부조예군무덤에 대하여」(『고고민속』 4, 과학원출판사, 1964)
주석
주1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청천강 이남 황해도 자비령 이북 일대에 있던 행정 구역.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어 그 뒤 여러 번 변천을 거듭하다가 미천왕 14년(313)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우리말샘

주2

우리나라에서 출토되는 동검의 하나. 평양을 비롯하여 전국의 고인돌ㆍ돌무덤 따위 고분의 부장품(副葬品)으로서 남만주ㆍ연해주ㆍ시베리아ㆍ북중국에서도 발견되며,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한다.    우리말샘

주3

깬돌로 널을 안치하는 널방(玄室)을 만들고 외부로 통하는 널길(羨道)를 만든 뒤 흙으로 씌운 무덤 양식.    우리말샘

주4

쇠붙이와 돌, 살림살이에 쓰는 그릇 따위에 새겨 놓은 글.    우리말샘

주5

아치에서 발달되어 조적(組積), 돌, 콘크리트 따위의 재료로 반원형을 가지는 곡면 구조를 통틀어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6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흑해 동북 지방의 초원 지대에서 활약한 최초의 기마 유목 민족. 오리엔트ㆍ그리스의 금속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무기ㆍ마구(馬具) 따위를 발달시켜 강대한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동물의장을 기조로 한 독특한 미술 양식을 낳았으나, 후에 사르마트에게 쫓겨 쇠퇴하였다.    우리말샘

주7

중국의 이민족인 오호(五胡) 가운데 진(秦)나라ㆍ한(漢)나라 때에 몽골고원에서 활약하던 기마 민족. 기원전 3세기 말에, 묵돌 선우가 모든 부족을 통일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 국가를 건설하고,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하였으나, 한나라 무제의 잦은 침공으로 쇠약해져, 1세기경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우리말샘

주8

말의 이마나 얼굴에 씌우던 장식.    우리말샘

주9

칼, 괭이, 호미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    우리말샘

주10

햇빛을 반사경으로 반사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보내는 광학적 장치.    우리말샘

주11

수레의 좌석에 세우는 일산의 버팀목. 둥근 막대에 옻을 입혀 만들었으며, 고조선 말기와 낙랑 때의 고분에서 많이 나왔다.    우리말샘

집필자
정인성(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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