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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세가(번역문)

권39. 진세가

한글 번역문

[ 卷三十九. 晉世家 ]

<진의 건국과 분열>
진(晉)나라 당숙우(唐叔虞)는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요, 성왕(成王)의 동생이다. 일찍이 무왕이 숙우의 어머니와 결합할 때 꿈에 천신이 무왕에게 “내가 너에게 아들 하나를 낳게 할 터이니 이름을 우(虞)라 하라. 내가 당(唐)을 그에게 주겠노라.”고 했다. 무왕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손에 ‘우(虞)’라는 무늬가 있었고, 그래서 이름을 우라 했다.

무왕이 죽고, 성왕이 섰으나 당에 난이 일어나 주공(周公)이 당을 멸망시켰다. 성왕이 숙우와 놀다가 오동나무 잎으로 규(珪)를 만들어 숙우에게 주면서 “이것으로 너를 봉하노라.”라고 했다. 사일(史佚)이 이 일로 날을 잡아 숙우를 제후로 세우라고 청했다. 성왕은 “내가 그와 장난을 쳤을 뿐이다.”라 했다. 사일은 “천자에게는 농담이 없습니다. 말씀하시면 사관이 기록하고, 예로 이루고 음악으로 노래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결국 숙우를 당에 봉했다.

당은 황하와 분하(汾河) 동쪽의 사방 100리의 땅이다. 이로써 당숙우라 불렀는데, 성은 희(姬)요 자는 자우(子于)이다.

당숙의 아들 섭(燮)이 진후(晉侯)이다.
진후의 아들 영족(寧族)이 무후(武侯)이다.
무후의 아들 복인(服人)이 성후(成侯)이다.
성후의 아들 복(福)이 여후(厲侯)이다.
여후의 아들 의구(宜臼)가 정후(靖侯)이다.
정후부터는 연대를 추산할 수 있으나, 당숙부터 정후에 이르는 5대는 연대가 없다.

정후 17년(기원전 842년)에 주(周)나라 여왕(厲王)이 어리석고 포학하여 국인이 난을 일으키니 여왕은 체(彘)나라로 달아났다. 대신들이 정치를 대행했으므로 ‘공화(共和)’라 했다.

18년에 여후가 죽고, 아들 희후(釐侯) 사도(司徒)가 섰다.
희후 14년에 주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했다.
18년에 희후가 죽고, 아들 헌후(獻侯) 적(籍)이 섰다.
헌후 11년에 죽고, 아들 목후(穆侯) 비왕(費王)이 이었다.

목후 4년에 제나라의 여자 강씨(姜氏)를 부인으로 삼았다.

7년에 조(條)나라를 정벌했다. 태자 구(仇)가 태어났다.

10년에 천무(千畝)를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 작은아들을 얻어 성사(成師)라 이름을 지었다. 진(晉)나라 사람 사복(師服)이 “이상하구나, 국군의 아들 이름이! 태자를 구(仇)라 했는데 구란 원수 아닌가. 그리고 작은아들은 성사라 했는데, 성사란 큰 이름인데다 무엇을 이룬다는 것 아닌가. 이름은 나름의 명이 있고, 사물은 나름 정해진 질서가 있거늘 지금 적자와 서자의 이름이 바뀌었으니 이것이 훗날 진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27년에 목후가 죽고, 아우 상숙(殤叔)이 자립하니 태자 구는 도망쳤다.
상숙 3년에 주나라 선왕이 세상을 떠났다.
4년에 목후의 태자 구가 그의 무리들을 이끌고 상숙을 습격하여 자리에 오르니 이가 문후(文侯)이다.

문후 10년(기원전 771년)에 주나라 유왕(幽王)이 무도(無道)하여 견융(犬戎)이 유왕을 죽이자, 주나라는 동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진(秦)나라 양공(襄公)이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35년에 문후가 죽고, 아들 소후(昭侯) 백(伯)이 즉위했다.

소후 원년에 문후의 동생 성사를 곡옥(曲沃)에 봉했다. 곡옥의 성읍(城邑)이 익성(翼城)보다 커졌다. 익성은 진나라 국군의 도읍이다. 성사는 곡옥에 봉해져 환숙(桓叔)으로 불렸다. 정후의 서손 난빈(欒賓)이 환숙의 재상이 되었다. 환숙이 이때 쉰여덟 살이었는데 덕을 즐겨 베푸니, 진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군자가 “진의 난은 곡옥에 있다. 가지가 줄기보다 크고 민심까지 얻었으니 어찌 난이 없겠는가?”라고 했다.

7년에 진나라의 대신 반보(潘父)가 그 국군 소후를 시해하고, 곡옥 환숙을 맞아들였다. 환숙이 진나라로 들어가려 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환숙을 공격했다. 환숙은 패하여 곡옥으로 다시 돌아갔다. 진나라 사람들은 함께 소후의 아들 평(平)을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효후(孝侯)이다. 반보를 죽였다.

효후 8년에 곡옥 환숙이 죽고, 아들 선(鮮)이 환숙을 대신하니 이가 곡옥 장백(莊伯)이다.

효후 15년에 곡옥 장백이 국군 효후를 익성에서 시해했다. 진나라 사람들이 곡옥 장백을 공격하자 장백은 다시 곡옥으로 들어갔다. 진나라 사람들이 다시 효후의 아들 극(郄)을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악후(鄂侯)이다.

악후 2년에 노나라의 은공(隱公)이 새로 즉위했다.

악후는 6년에 죽었다. 곡옥 장백은 진나라 악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병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했다. 주나라 평왕이 괵공(虢公)에게 군사를 이끌고 곡옥 장백을 토벌하게 하니, 장백은 달아나 곡옥을 지켰다. 진나라 사람들이 함께 악후의 아들 광(光)을 세우니 이가 애후(哀侯)이다.

애후 2년에 곡옥의 장백이 죽고, 그 아들 칭(稱)이 뒤를 이었는데 이가 곡옥 무공(武公)이다. 애후 6년에 노(魯)나라가 그 주군 은공(隱公)을 시해했다.

애후 8년에 진나라가 형정(陘廷)을 침공했다. 형정은 곡옥 무공과 모의하여 9년 분하 근처에서 진나라를 공격하여 애후를 사로잡았다. 진나라 사람들이 바로 애후의 아들 소자(小子)를 국군으로 옹립하니 이가 소자후(小子侯)이다.

소자 원년에 곡옥 무공이 한만(韓萬)을 시켜 포로로 잡힌 애후를 죽였다. 곡옥이 더 세졌고, 진나라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소자 4년에 곡옥 무공이 소자를 유인하여 죽였다. 주나라 환왕(桓王)이 괵중(虢仲)을 보내어 곡옥 무공을 토벌하자, 무공은 곡옥으로 들어갔고 (괵중은) 진나라 애후의 동생 민(緡)을 진후(晉侯)로 세웠다.

진후 민 4년에 송(宋)나라가 정(鄭)나라의 대부 제중(祭仲)을 잡고 돌(突)을 정나라의 국군으로 옹립했다.

진후 19년에 제나라 사람 관지보(管至父)가 그 국군 양공(襄公)을 시해했다.

진후 28년(기원전 681년)에 제나라 환공이 처음으로 패자(覇者)가 되었다. 곡옥 무공이 진후 민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보물을 모조리 주나라 희왕(釐王)에게 뇌물로 바쳤다. 희왕은 곡옥 무공을 진나라의 국군으로 삼아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무공은) 진나라의 땅 전부를 아울러 차지했다.

곡옥 무공은 즉위 37년째 진(晉)나라 무공(武公)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진나라 무공이 비로소 진에 도읍을 정했다. 이전 곡옥의 재위 기간까지 모두 38년이다.

무공 칭은 이전 진나라 목후(穆侯)의 증손이며, 곡옥 환숙의 손자이다. 환숙 때 처음으로 곡옥에 봉해졌다. 무공은 장백의 아들이다. 환숙이 처음 곡옥에 봉해진 이후 무공에 이르러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67년이 걸려 마침내 진나라를 대신하여 제후가 된 것이다.

무공이 진나라를 대신한 지 2년 만에 죽었다. 곡옥에서의 햇수를 합쳐 즉위 총 39년 만에 죽은 것이다. 아들 헌공(獻公) 궤제(詭諸)가 들어섰다.

헌공 원년에 주나라 혜왕의 동생 퇴(穨)가 혜왕을 공격했다. 혜왕은 도망쳐 나와 정나라의 역읍(櫟邑)에 머물렀다.

5년에 (헌공이) 여융(驪戎)을 정벌하여 여희(驪姬)와 여희의 동생을 얻었는데, 둘 모두를 예뻐했다.

8년에 대부 사위(士蔿)가 헌공에게 “예로부터 진나라는 공자들이 많기 때문에 죽이지 않으면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공자들을 다 죽이게 하고는 취(聚)에 성을 쌓아 도읍을 삼고 강(絳)이라 하니 도읍으로서의 강이 시작되었다.

9년에 진나라의 공자들이 이미 괵나라로 망명하니 괵나라는 이를 구실로 진나라를 다시 정벌하러 나섰으나 이기지 못했다.

10년에 진나라가 괵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사위가 “그들이 난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리십시오.”라고 했다.

12년에 여희가 해제(奚齊)를 낳았다. 헌공은 태자를 폐위시킬 생각으로 “곡옥은 우리 선조의 사당이 있는 곳이고, 포읍(蒲邑)은 진(秦)나라와 가까우며, 굴읍(屈邑)은 적(翟)나라와 가까워 아들을 그곳에 머물게 하지 않으면 내가 두렵다.”라 했다. 이에 태자 신생(申生)은 곡옥에, 공자 중이(重耳)는 포읍에, 공자 이오(夷吾)는 굴읍에 머물게 했다. 헌공과 여희의 아들 해제는 강(絳)에 머물렀다. 진나라는 이로써 태자가 즉위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태자 신생의 어머니는 제나라 환공의 딸인 제강(齊姜)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신생과 어머니가 같은 여동생은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부인이 되었다. 중이의 어머니는 적(翟)나라 호씨(狐氏)의 딸이었다. 이오의 어머니는 중이 어머니의 여동생이었다. 헌공의 여덟 아들들 중 태자 신생과 공자 중이, 이오가 유능했으나 여희를 얻고 난 뒤로 이 세 아들과 멀어졌다.

16년에 진나라 헌공이 2군을 만들어 헌공은 상군을, 태자 신생은 하군을 각각 거느렸다. 조숙(趙夙)은 수레와 전차를, 필만(畢萬)은 호위를 담당하여 괵(虢)나라, 위(魏)나라, 경(耿)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돌아와 태자에게는 곡옥에 성을 쌓게 하고, 조숙과 필만에게는 각각 경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주고 대부로 삼았다.

사위가 “태자께서는 (국군의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도성을 나누어 받고 경의 자리에 올라 갈 데까지 갔으니 어찌 오를 수 있겠습니까? 도망가서 죄를 피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오(吳)나라 태백(太伯)처럼 해서 좋은 명성을 남기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태자는 따르지 않았다.

복언(卜偃)은 “필만의 후손들이 틀림없이 커질 것이다. 만(萬)은 꽉 찬 숫자이고, 위(魏)는 크고 높다는 뜻이다. 이런 위나라 땅을 상으로 주었으니 하늘이 복을 열어 준 것이다. 천자에게는 억에 달하는 백성이 있고, 제후에게는 만민이 있다. 지금 이처럼 큰 뜻으로 상을 내려 수를 가득 채우게 했으니 틀림없이 무리들이 따를 것 아닌가?”라고 했다.

당초 필만이 진나라에서의 벼슬에 대해 점을 쳤더니 ‘둔(屯)’ 괘에서 ‘비(比)’ 괘로 변하는 점괘가 나왔다. 신료(辛廖)는 “길하다. 둔은 단단하고 비는 들어간다는 뜻이니 이보다 더 길한 괘가 어디 있을까! 그 후손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라고 했다.

17년에 헌공이 태자 신생에게 동산(東山)을 정벌하게 했다. 이극(里克)이 헌공에게 이렇게 간했다.

“태자는 종묘의 제사와 사직의 제물을 받들고, 아침저녁으로 국군의 식사를 시중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총자(冢子, 적자 맏아들)’라 합니다. 국군이 행차하면 안에서 지키고, 국군이 안에서 지키면 따릅니다. 따르는 것을 ‘무군(撫軍)’이라 하고, 지키는 것을 ‘감국(監國)’이라 하는데 예로부터의 제도입니다. 군대를 이끌며 전략을 전담하는 일과 군대를 호령하는 일은 국군과 정경들이 꾀하는 것이지 태자의 일이 아닙니다. 군의 통솔은 명령의 통제에 있는데 일마다 지시를 받아야 한다면 위엄을 잃게 되고, 함부로 명령을 내리는 것은 불효입니다. 그래서 국군의 적자는 군대를 통솔하지 않는 것입니다. 국군이 직무 임명의 원칙을 잃어 태자의 군대 통솔도 위엄을 잃는다면 장차 태자를 어찌 쓸 수 있겠습니까?”

헌공은 “과인에게 아들이 몇 있지만 누구를 태자로 세울지 모르는 일이오.”라고 했다. 이극이 대꾸하지 않고 물러나와 태자를 만났다. 태자가 “내가 폐위되겠지요?”라고 묻자 이극은 “태자께서는 애를 쓰십시오. 군에 명령을 내리되 일을 완수하지 못할까 걱정한다면 폐위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으로서 불효가 아닐까 걱정하실 일이지 자리를 잇지 못할까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탓하지 않는다면 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태자가 군대를 이끌자 헌공은 태자에게 좌우 색이 다른 옷을 입고 청동제 패옥을 차게 했다. 이극이 병을 핑계로 태자를 따르지 않았다. 태자가 마침내 동산을 정벌했다.

19년에 헌공은 “예전 우리 선군이신 장백과 무공께서 진(晉)나라의 난을 평정하셨을 때 괵(虢)나라는 늘 진나라를 도와 우리를 공격했고, 또 진나라에서 망명한 공자를 숨겨주더니 지금 정말 난을 일으켰다. 토벌하지 않으면 앞으로 자손들에게 근심을 남길 것이다.”라 했다. 이에 순식(荀息)에게 굴읍(屈邑)에서 나는 말을 타고 우(虞)나라의 길을 빌리게 했다. 우나라가 길을 빌려주자 마침내 괵나라를 토벌하여 하양(下陽)을 취하고 돌아왔다.

헌공이 사사로이 여희에게 “내가 태자를 폐하고 해제로 그를 대신하고 싶다.”고 했다. 여희가 울면서 “태자의 계승은 제후들이 다 알고 있고, 여러 차례 군대를 통솔하여 백성들이 태자를 따르는데 천첩 때문에 어떻게 태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운단 말씀입니까? 국군이 꼭 그렇게 하시겠다면 첩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입니다.”라 했다. 여희는 태자를 치켜세우는 것 같았지만 몰래 사람을 시켜 태자에 대해 나쁜 말을 하게 하면서 자기 아들을 세우고자 했다.

21년에 여희가 태자에게 “국군께서 꿈에서 제강을 보셨다 하니 태자께서는 서둘러 곡옥으로 가서 제사를 올리고 돌아와 제수용 고기를 국군께 드리도록 하세요.”라 했다. 이에 태자는 곡옥에서 그 어머니 제강에게 제를 올리고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드렸다. 헌공이 마침 사냥 나가고 없어서 고기를 궁중에 두었다. 여희가 사람을 시켜 고기에 독약을 넣었다.

이틀 뒤 헌공이 사냥에서 돌아오자 주방장이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올렸다. 헌공이 그것을 먹으려 하자 옆에 있던 여희가 헌공을 제지하여 “제사 고기가 먼 곳에서 왔으니 시식해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 하고는 (술을) 땅에 부으니 땅이 부풀어 올랐다. (고기를) 개에게 주니 개가 죽었고, 어린 환관에게 주니 어린 환관도 죽었다.

여희가 울면서 “태자가 어찌 이리도 잔인할 수가! 그 아버지를 죽이고 대신하려 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국군께서 연로하시어 머지않았는데도 그걸 못 기다리고 시해하려 하다니!”라 하고는 헌공에게 “태자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다름 아닌 신첩과 해제 때문입니다. 신첩은 아들과 다른 나라로 피하길 원합니다. 일찌감치 자살하더라도 우리 모자가 태자의 어육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초 국군께서 태자를 폐위시키려고 하셨을 때 첩이 오히려 그것을 좋지 않게 여겼는데 지금 보니 첩이 크게 실수했습니다.”라고 했다.

태자가 이 소식을 듣고 곡옥의 신성(新城)으로 달아났다. 헌공은 노하여 태자의 사부 두원관(杜原款)을 죽였다. 누군가 태자에게 “독약을 넣은 사람은 여희인데 태자께서는 어째서 스스로 해명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했다. 태자는 “우리 국군께서 연로하여 여희가 아니면 잠도 편히 못 주무시고 먹어도 맛을 모르시오. 해명을 한다면 국군께서 여희에게 화를 낼 것이니 안 됩니다.”라고 했다. 또 어떤 자가 태자에게 “다른 나라로 달아날 수 있습니다.”라 하자 태자는 “이런 오명을 뒤집어 쓴 채 나가봤자 누가 날 받아주겠소? 내가 자살하면 그만이오.”라고 했다.

12월 무신일에 신생이 신성에서 자살했다.

신생을 모함하여 자결하게 만드는 여희(그림의 아랫부분)

신생을 모함하여 자결하게 만드는 여희(그림의 아랫부분)

이때 중이와 이오가 헌공을 알현했다. 누군가 여희에게 “두 공자는 여희께서 태자를 중상하여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여희는 겁이 나서 두 공자에 대해 “신생이 제사 고기에 약을 넣는 것을 두 공자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중상했다. 두 공자가 이를 듣고는 두려워 중이는 포읍으로, 이오는 굴읍으로 달아나 성을 지키며 스스로를 수비했다.

당초 헌공은 사위(士蔿)에게 두 공자를 위해 포읍과 굴읍의 성을 쌓게 했으나 일을 끝내지 않고 있었다. 이오가 이를 헌공에게 보고하자 헌공은 사위에게 화를 냈다. 사위는 “변방의 성읍에 도적도 적은데 어디다 쓰려 하십니까?”라며 사죄하고 물러나와 “여우 가죽으로 만든 옷, 털이 어수선하구나. 한 나라에 공자가 셋, 내가 누구를 따라야 할꼬!”라는 노래를 불렀다. 마침내 성은 완공되었고, 신생이 죽자 두 공자도 그들의 성으로 돌아가 지킨 것이다.

22년에 헌공은 두 아들이 인사도 없이 돌아간 것에 화를 내며 정말 모반할 것으로 생각하여 군대를 보내 포읍을 치게 했다. 포읍 사람 환관 발제(勃鞮)가 중이에게 자살할 것을 재촉했다. 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났고, 환관이 뒤를 쫓아 옷소매를 베었다. 중이는 마침내 적(翟)나라으로 도망갔다.

(헌공은) 굴읍도 토벌하게 했으나 굴읍은 성을 굳게 지켜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해 진나라는 다시 괵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우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우나라의 대부 궁지기(宮之奇)는 우나라의 국군에게 “진나라에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우나라의 멸망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우나라의 국군은 “진나라가 우리와 같은 성이니 우리를 정벌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궁지기는 “태백과 우중(虞仲)은 태왕의 아들들이었는데, 태백은 도망갔기 때문에 자리를 잇지 못했습니다. 괵중과 괵숙은 왕계의 아들이자 문왕의 경사로서 그 공훈이 왕실에 기록되어 동맹 관계 서류를 보관하고 있는 창고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괵나라 조차 멸망시키려 하거늘 우나라를 애석해 하겠습니까? 또 (진나라와) 우나라가 아무리 가깝다 해도, 환숙과 장백 일족만 하겠습니까? 환숙과 장백 일족이 무슨 죄가 있어 모조리 없앴습니까? 우나라와 괵나라는 입술과 이 같아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립니다.”라고 했다.

우의 국군은 듣지 않고 진에 길을 빌려 주기로 했다. 궁지기는 그 가족을 데리고 우를 떠났다.

그 해 겨울에 진나라는 괵나라를 멸망시켰고, 괵공 축(丑)은 주나라로 달아났다.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키고는 우나라의 국군과 대부 정백(井伯) 그리고 백리해(百里奚)를 포로로 잡아 진(秦)나라 목희(穆姬)가 시집갈 때 데리고 가는 폐백으로 바쳤다. 그리고는 우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순식이 전에 우나라에 주었던 굴읍의 말을 끌고 와서 헌공에게 바치니 헌공은 웃으면서 “말은 내 말인데, 이빨을 보니 많이 늙었구나.”라고 했다.

진나라에 포로로 잡혀 온 현자 백리해

진나라에 포로로 잡혀 온 현자 백리해

23년에 헌공은 가화(賈華) 등을 보내 굴읍을 토벌하니 굴읍이 무너졌다. 이오가 적나라으로 달아나려 하자 기예(冀芮)가 “안 됩니다. 중이가 이미 거기에 있는데 지금 갔다가는 진나라가 분명 군대를 이동시켜 적나라를 칠 것입니다. 적은 진나라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 화가 (우리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양(梁)나라로 도망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양나라는 진(秦)나라와 가깝고 진나라는 강합니다. 우리 국군이 죽으면 귀국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양나라로 달아났다.

25년에 진(晉)나라가 적나라를 토벌하러 나섰다. 적나라는 중이 때문에 진나라를 공격했고, 진나라의 군대는 물러나 돌아갔다.

이 무렵 진(晉)나라가 강해져 서쪽으로 하서(河西)를 차지하여 진(秦)나라와 국경을 접했고, 북쪽으로는 적나라와 가까웠으며, 동쪽으로는 하내(河內)에 이르렀다.

여희의 동생이 도자(悼子)를 낳았다.

26년(기원전 651년) 여름에 제나라 환공이 규구(葵丘)에서 제후들과 큰 회맹을 가졌다. 진(晉)나라 헌공(獻公)은 병이 나서 늦게 출발했다. 도착하지 않았는데 마침 주나라 왕실의 재공(宰孔)을 만났다. 재공이 “제나라 환공이 갈수록 교만해져 덕을 닦지 않고 변방을 공략하는 데만 힘을 기울이니, 제후들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국군께서 회맹에 가지 않는다 해서 진나라를 어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헌공이) 병이 심해져 순식에게 “내가 해제에게 뒤를 잇게 할 터인데 나이가 어려 여러 대신들이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킬까 두렵소. 그대가 해제를 세울 수 있겠소?”라 했다. 순식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헌공은 “무엇으로 증거를 삼겠소?”라고 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다 해도 산 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할 것임을 보증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해제를 순식에게 맡기고, 순식을 상으로 삼아 국정을 주도하게 했다.

가을 9월에 헌공이 죽었다. 이극과 비정(邳鄭)은 중이를 맞아들이고자 세 공자의 무리로 난을 일으키고는 순식에게 “세 무리의 원한에다가 진(秦)나라, 진(晉)나라가 이를 돕고 있으니 그대는 어찌 하려는가?”라 하자 순식은 “내가 선군의 말씀을 어길 수 없다!”라고 했다.

10월에 이극이 영안실에서 해제를 살해했다. 헌공을 미처 묻지 못했다. 순식이 따라 죽으려 하자 누군가가 해제의 동생 도자를 옹립하여 그를 돕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하자 순식이 도자를 세우고 헌공을 안장했다. 11월에 이극이 조정에서 도자를 시해하자 순식은 따라서 죽었다. 군자들이 “ 『시경』에 ‘백옥의 반점은 갈아 없앨 수 있으나 말이 잘못되면 어쩔 수가 없다’고 하더니 순식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는 자신의 말을 어기지 않았다.”라 했다. 당초 헌공이 여융을 정벌하면서 점을 쳤는데 ‘치아가 화근이다’라 했다. 여융을 격파하고 여희를 얻어 예뻐했으나 결국은 그 때문에 진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이다.

어린 해제를 끝까지 지지하다 죽은 순식(그림의 윗부분)

어린 해제를 끝까지 지지하다 죽은 순식(그림의 윗부분)

이극 등이 해제와 도자를 죽이고 적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공자 중이를 맞아들여 옹립하고자 했다. 중이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나라 밖으로 도망쳤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자식의 예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이 중이가 어찌 감히 들어간단 말이오? 대부께서는 다른 아들을 세우시오.”라며 사양했다. 돌아와 이극에게 보고하자 이극은 양나라에 가 있는 이오에게 사람을 보내 맞이하려 했다. 이오가 가려하자 여성(呂省)과 극예(郤芮)는 “안에 세울 만한 공자가 있는데 밖에서 구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진(秦)나라와 같은 강한 나라의 위엄을 빌리지 않고 들어갔다간 위험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극예에게 후한 뇌물을 가지고 진(秦)나라로 가게 해서는 “들어갈 수만 있다면 진(晉)나라의 하서 땅을 진(秦)나라에게 줄 것입니다.”라고 약속했다. 이극에게도 편지를 보내 “정말 자리에 오른다면 분양(汾陽) 성읍을 그대에게 봉해주겠다.”라 했다.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바로 군대를 내어 이오를 진나라로 호송했다. 제나라 환공은 진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후를 이끌고 진으로 갔다. 진(秦)나라의 군대와 이오가 진에 이르자 제나라는 바로 습붕(隰朋)을 시켜 진(秦)나라와 합류하여 함께 이오를 입국시켜 진나라의 국군으로 옹립하니 이가 혜공(惠公)이다. 제나라 환공은 진(晉)나라의 고량(高梁)까지 갔다가 돌아갔다.

즉위에 공을 세운 대신들을 죽이는 진 혜공(그림의 윗부분)

즉위에 공을 세운 대신들을 죽이는 진 혜공(그림의 윗부분)

혜공 이오 원년에 비정을 진(秦)나라에 보내 “처음 이오가 하서를 국군께 드리기로 하고 지금 다행히 귀국하여 자리에 올랐습니다. 대신들이 ‘땅은 선군의 땅인데 나라 밖에 망명하셨던 국군이 어찌 마음대로 진(秦)나라에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기에 과인이 이들과 다투기까지 했으나 어쩔 수 없어 이렇게 진에 사죄하는 것입니다.”라고 사과하게 했다. 또 이극에게는 분양의 땅을 주지 않고 그 권력을 빼앗았다.

4월에 주나라 양왕(襄王)이 주공(周公) 기보(忌父)를 보내 제나라와 진(秦)나라의 대부와 만나 함께 진나라 혜공에게 인사를 가기로 했다. 혜공은 중이가 국외에 있고 이극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이극에게 죽음을 내리며 “그대가 없었더라면 과인은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대 역시 두 국군과 한 대부를 죽였으니 그대의 국군된 사람으로 어찌 난처하지 않겠소?”라고 했다. 이극은 “폐위시키지 않고서 국군께서 어찌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저를 죽이고 싶은데 어찌 구실이 없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신은 명을 따를 뿐입니다.”라 하고는 마침내 검에 엎어져 죽었다, 이 때 비정은 진(秦)나라에 사죄의 사죄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난이 미치지 않았다.

진나라의 국군이 태자 신생의 무덤을 개장했다.

가을에 호돌(狐突)이 곡옥으로 갔다가 (꿈에서) 신생을 만났다. 신생이 (수레를) 함께 타자면서 “이오가 무례하다. 내가 천제께 청하여 진(晉)나라를 진(秦)나라에 주게 하면 진(秦)나라가 내 제사를 지내 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호돌이 “신이 듣기에 신령은 그 종친이 아니면 제사를 받지 않는다는데, 그렇다면 군의 제사가 끊어지는 것 아닙니까? 군께서는 이 점을 살피십시오.”라고 대응했다. 신생이 “그렇군. 내가 다시 천제께 청하겠다. 열흘 뒤 신성(新城) 서쪽 편의 무당이 내 혼령을 보게 할 것이다.”라 했다. 그러겠노라 하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날이 되어 갔더니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신생은 호돌에게 “천제께서 죄 있는 자를 벌해도 된다고 하셨으니 한원(韓原)에서 패하게 될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아이들은 “공(恭) 태자의 무덤을 개장했다네. 14년이 지나면 진은 번창하지 못한다네. 번창은 형에게 있겠지.”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간 비정은 이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진(秦)나라 목공을 설득하길 “여성, 극칭(郤稱), 기예는 확실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후한 뇌물로 그들과 공모하면 진의 국군을 내쫓고 중이를 입국시키는 일은 분명 성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진나라 목공은 이를 허락하고 사람을 시켜 함께 진(晉)나라를 답방하게 하는 한편 세 사람에게 뇌물을 후하게 보냈다.

세 사람은 “선물은 후하고, 말은 달콤한 것이 비정이 우리를 진에 팔려는 것이 분명하다.”라 하고는 마침내 비정, 이극, 비정의 무리 일곱 대부를 죽였다. 비정의 아들 비표(邳豹)는 진(秦)나라로 달아나서 진나라를 토벌해야 한다고 했으나 목공은 듣지 않았다.

혜공이 들어서고 진(秦)나라와 이극에게 한 약속을 어긴데다 일곱 대부를 죽이니 국인이 따르지 않았다.

2년에 주나라가 소공(召公) 과(過)를 진나라 혜공에게 보내 인사를 드리게 했는데 혜공이 거만하게 굴자 소공이 그를 조롱했다.

4년에 진(晉)나라에 기근이 들자 진(秦)나라에 식량을 사겠다고 부탁했다. 목공이 백리해(百里奚)에게 묻자 백리해는 “천재지변은 돌고 도는 것이라 나라마다 돌아가며 생깁니다. 재난에 빠진 이웃을 구하고 돕는 것은 나라의 도리이니 주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비정의 아들 비표는 “저들을 정벌합시다.”라고 했다. 목공은 “그 국군이 나쁘지 인민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라며 마침내 식량을 보내니 (그 선박의 행렬이) 옹(雍)에서 강읍(絳邑)에까지 이르렀다.

5년에 진(秦)나라에 기근이 들어 진(晉)나라에게 식량을 사겠다고 청했다. 진(晉)나라의 국군이 이를 상의하자 경정(慶鄭)은 “진나라의 도움으로 자리에 오르셨고 땅을 주기로 한 약속도 어긴 바 있습니다. 진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 진(秦)나라는 우리에게 양식을 팔았습니다. 지금 진(秦)나라에 기근이 들어 식량을 사겠다고 청하니 주는 것이 마땅하거늘 무슨 의심이 들어 상의를 한단 말입니까?”라고 했다. 괵석(虢射)은 “지난 해 하늘이 진(晉)나라를 진(秦)나라에게 주고자 하셨을 때 진(秦)나라는 그 기회를 취하지 않고 우리에게 식량을 팔았습니다. 지금 하늘이 진(秦)나라를 우리 진(晉)나라에게 주시고자 하는데 진나라가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습니까? 진(秦)나라를 정벌합시다.”라고 했다. 혜공은 괵석의 계획을 채용하여 진(秦)나라에 식량을 팔지 않고 오히려 군대를 일으켜 진(秦)나라를 정벌했다. 진(秦)나라는 크게 노하여 군대를 일으켜 진(晉)나라를 토벌했다.

진·진 전투도(그림의 아랫부분)

진·진 전투도(그림의 아랫부분)

6년 봄에 진(秦)나라 목공이 군대를 이끌고 진(晉)나라를 토벌했다. 진(晉)나라 혜공은 경정에게 “진나라의 군대가 깊이 들어왔는데 어찌 해야 하오?”라고 말했다. 경정은 “진(秦)나라가 국군을 환국시켰는데 국군께서는 땅을 주기로 한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우리 진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 진나라는 식량을 보냈습니다. 지금 저들 진에 기근이 들었는데 우리 진나라는 이를 저버리고 기근을 틈타 저들 진을 정벌하러 나섰으니 깊이 쳐들어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진나라는 수레와 호위 담당을 점을 쳤는데 모두 경정이 좋다고 나왔다. 혜공은 “경정은 불손하다.”라 하고는 보양(步陽)에게 수레와 전차를 맡게 하고 가복도(家僕徒)에게 호위를 맡겨 진군시켰다.

9월 임술일에 진나라 목공과 진나라 혜공이 한원에서 맞붙었다. 혜공의 말이 무거워 진흙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진(秦)나라의 병사가 접근하니 다급해진 혜공이 경정을 불러 전차를 몰게 했다. 경정이 “점괘를 믿지 않으셨으니 패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라 하고는 그냥 가버렸다. 다시 양요미(梁繇靡)에게 전차를 몰고 괵석에게 호위를 맡겨 목공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목공의 장사들이 앞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니 진나라의 군대는 패하고 목공을 놓쳤다. 뿐만 아니라 (목공은) 오히려 혜공까지 사로잡아 돌아갔다.

진(秦)나라가 (혜공을 죽여)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자 했다. 혜공의 누이가 목공의 부인이었는데 소복을 입고 울며불며 애원했다. 목공이 “진(晉)나라의 국군을 잡아 기쁘거늘 지금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내가 듣기에 당숙이 처음 제후에 봉해지는 것을 본 기자가 ‘그 후손이 분명 창성할 것이다’라 하셨으니 진나라를 어찌 멸망시킬 수 있겠소?”라 하고는 혜공과 왕성에서 맹서한 다음 귀국을 허용했다.

혜공도 여성 등을 보내 국인들에게 “내가 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사직을 뵐 면목이 없다. 날을 잡아 자어(子圉)를 세우도록 하라.”고 했다.

진(晉)나라 사람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통곡했다. 진나라 목공이 여성에게 “진(晉)나라는 화목한가?”라고 묻자 여성은 “화목하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국군과 부모를 잃을까 겁을 낼 뿐 자어를 세우는 일은 걱정하지 않으면서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 융이나 적을 섬길 지언정’라고 말합니다. 군자들은 국군을 사랑하나 (국군이 지은) 죄를 아는 지라 진(秦)나라의 명령만 기다리면서 ‘은혜에 반드시 보답할 것이오’라고 말합니다. 의견이 이렇듯 둘로 나뉘었으니 화목할 수 없지요.”라고 했다. 이에 목공은 혜공의 숙소를 바꾸고 7뢰(牢)의 가축을 보내 제후로 대접했다.

11월에 혜공을 돌려보냈다. 혜공은 귀국하자 경정을 죽이고 정치와 교화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중이가 밖에 있고 제후들은 대부분 그를 귀국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모의한 다음 사람을 보내 적에서 중이를 죽이려 했다. 중이가 이를 듣고 제나라로 갔다.

진 문공(중이)의 열국 망명도(그림의 아랫부분)

진 문공(중이)의 열국 망명도(그림의 아랫부분)

8년에 태자 어를 진(秦)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당초 혜공이 양에 망명했을 때 양의 국군 양백(梁伯)이 딸을 혜공에게 시집보내 1남 1녀를 낳았다. 양백이 점을 쳐보니 사내아이는 신하가 되고 여자아이는 첩이 된다고 나왔다. 그래서 사내아이는 어(圉), 여자아이는 첩(妾)이라 이름을 지었다.

10년에 진(秦)나라가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양백이 토목건축을 좋아하여 성벽을 쌓고 해자를 파는 등 백성의 힘을 피곤하게 하니 원성이 많았다. 그 무리들이 여러 차례 “진나라 도적놈들이 쳐들어온다!”며 서로 소란을 떨었다. 인민들은 두려움과 당혹함에 떨었고, 진나라는 결국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13년에 진나라 혜공이 병이 났다. 그에게는 국내에 자식이 여럿 있었다. 태자 어는 “내 어머니의 집은 양인데 양이 지금 진에게 망했다. 내가 밖으로는 진에 무시당하고 국내에서도 도움을 바랄 수 없다. 국군께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대부들이 쉽게 다른 공자로 바꾸어 옹립하지 않을까 걱정이다.”라 하고는 그 아내와 함께 도망치는 일을 상의했다.

진(秦)나라 출신의 아내는 “당신은 한 나라의 태자로서 이곳에서 욕을 보고 있습니다. 진(秦)나라가 보잘 것 없는 저더러 당신을 모시며 당신의 마음을 다잡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도망친다면 저는 그대를 따를 수도 없고 이 일을 발설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자어가 기어코 도망쳐 진(晉)나라로 돌아갔다.

14년 9월에 혜공이 죽고, 태자 어가 뒤를 이으니 이가 회공(懷公)이다.

자어가 도망가자 진(秦)나라는 그를 원망하여 바로 공자 중이를 찾아 그를 돌려보내고자 했다. 자리에 오른 자어는 진나라가 정벌에 나설까 두려웠다. 이에 나라 안에 중이를 따라 망명한 사람들에게 (돌아올) 기간을 정해주는 한편, 기간이 다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 집안을 몰살시키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호돌은 아들 호모(狐毛)와 호언(狐偃)이 중이를 따라 진(秦)나라에 있었지만 부르려 하지 않았다. 회공이 노하여 호돌을 가두었다. 호돌은 “신의 아들이 중이를 모신지 벌써 몇 년인데 지금 그들을 부르는 것은 주군을 배반하라고 교사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들을 설득합니까?”라고 했다.

회공은 끝내 호돌을 죽였다. 목공이 군사를 뽑아 중이를 호송하여 돌려보내는 한편 사람을 보내 난지(欒枝)와 극곡(郤穀)의 무리에게 내응케 하여 고량에서 회공을 죽이고 중이를 맞아들였다. 중이가 자리에 오르니 이가 문공(文公)이다.

19년 망명 끝에 즉의 통치자가 된 진 문공의 상

19년 망명 끝에 즉의 통치자가 된 진 문공의 상

<문공의 칭패>
진(晉)나라 문공(文公) 중이(重耳)는 진나라 헌공의 아들이다. 젊어서부터 선비를 좋아하여 17세에 유능한 선비 다섯을 얻으니 조최(趙衰), 외삼촌 호언구범(狐偃咎犯), 가타(賈佗), 선진(先軫), 위무자(魏武子)가 그들이었다. 헌공이 태자 때 중이는 이미 성인었고, 헌공이 즉위할 때 중이 나이 스물 하나였다.

헌공 13년에 여희로 인해 중이는 포성(蒲城)에서 진(秦)나라를 방어했다.

헌공 21년에 헌공이 태자 신생을 죽이고 여희가 중이를 모함하자 두려워 헌공에게 인사도 드리지 않고 포성을 지켰다.

헌공 22년에 헌공이 환관 이제(履鞮)에게 서둘러 중이를 죽이라고 했다. 중이가 담을 넘어 도망가자 환관이 뒤쫓아 그 옷소매를 베어갔다. 중이는 마침내 적(狄)나라로 달아났다. 적나라는 중이 어머니의 나라이다. 이 때 중이의 나이 마흔 둘이었다. 수행한 다섯 사람과 그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십 명이 적에 이르렀다.

적나라는 구여(咎如)를 토벌하고 두 여자를 얻었다. 장녀는 중이에게 시집보내 백조(伯鯈)와 숙유(叔劉)를 낳았고, 젊은 여자는 조최에게 시집을 보내 조돈(趙盾)을 낳았다. 중이가 적나라에서 5년 머무르는 사이 진나라 헌공이 죽자, 이극이 해제와 도자를 죽이고는 사람을 보내 중이를 맞아들여 옹립하려 했다. 중이는 죽을까 두려워 한사코 사양하며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진나라는 다시 중이의 동생 이오를 맞아들여 옹립하니 이가 혜공이었다.

혜공 7년에 중이의 존재가 두려워 환관 이제를 시켜 장사들과 함께 중이를 죽이려 했다. 중이가 이를 듣고는 조최 등과 상의하길 “처음 내가 적나라로 도망쳐왔을 때부터 적나라가 도움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소. 거리가 가까워 쉽게 갈 수 있어 잠시 쉬어 가려 했을 뿐. 그런데 너무 오래 쉬어서 큰 나라로 옮기고 싶소. 무릇 제 환공이 선행을 좋아하고 패왕에 뜻을 두고 제후들을 거두어 돕고 있다 하오. 지금 관중과 습붕도 죽었다 하니 지금이야말로 유능한 인재의 도움을 바랄 것이 어찌 가지 않으리오!”라 하고는 마침내 떠났다.

중이가 그의 아내에게 “25년을 기다려도 내가 오지 않으면 재가하시오.”라고 하자, 그 아내는 웃으며 “25년이면 제 무덤 위 측백나무도 많이 자랐겠습니다. 하지만 첩은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라고 했다. 중이는 적나라에서 12년을 머무르다 떠났다.

진 문공의 망명을 수행한 조최, 호언, 개자추

진 문공의 망명을 수행한 조최, 호언, 개자추

위(衛)나라를 지나는데 위나라 문공(文公)이 무례하게 대했다. 그곳을 떠나 오록(五鹿)을 지나가는데 배가 고파 촌사람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자 촌사람은 그릇에 흙을 담아 내놓았다. 중이가 노하자 조최는 “흙은 땅을 갖는다는 의미이니 주군께서는 절하고 받으시지요.”라고 했다.

제나라에 이르자 제나라 환공은 후한 예로 접대하고, 종실의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하는 한편 20승의 말까지 주니 중이가 이에 편안해 했다. 중이가 제에 온 지 2년, 환공이 죽고, 수조(竪刁) 등의 내란을 맞이했다.

제나라 효공(孝公)이 즉위하자, 제후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제나라에 머문 지 5년째였다. 중이는 제나라의 여자를 사랑해서 떠날 마음이 없었다. 조최와 구범이 뽕나무 아래에서 상의했다. 제나라 여자의 시종이 뽕나무 위에서 이 말을 듣고는 주인에게 알렸다. 주인은 시종을 죽이고, 중이에게 서둘러 떠날 것을 권했다. 중이는 “인생이 이렇게 편한데 다른 일을 알아서 무엇 하겠소? 반드시 여기서 죽을 것이니 떠나지 않겠소!”라고 했다. 제나라 여자가 “당신은 한 나라의 공자로서 일이 어려워져 이곳에 오셨고, 저 사람들은 당신께 목숨을 맡겼습니다. 당신이 빨리 돌아가 신하들의 노고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여색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니 당신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고 언제 공을 이루려고 하십니까?”라고 했다. 그리고는 조최 등과 상의하여 중이를 취하게 한 다음 수레에 실어 떠났다. 일행이 한참을 가자 중이가 깨어나서는 크게 성을 내며 창을 들어 구범을 죽이려 했다. 구범은 “신을 죽여 주군이 뜻을 이룬다면 그건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했다. 중이가 “일이 성사되지 못하면 내가 외삼촌을 씹어 먹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구범은 “일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이 구범의 고기를 비려서 어찌 드시렵니까?”라고 했다. 이에 그 정도로 그치고 계속 길을 떠났다.

조(曹)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조나라의 공공(共公)이 무례하게 중이의 통갈비뼈만 구경하려 했다. 조나라의 대부 희부기(釐負羈)는 “진나라의 공자는 현명하고 우리와 같은 성씨입니다. 곤궁에 처해 우리나라를 지나는데 어찌 무례하게 대하십니까?”라고 했다. 공공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희부기는 개인적으로 중이에게 먹을 것을 보내면서 음식 아래에 벽옥(璧玉)을 넣어 두었다. 중이는 먹을 것만 받고 벽옥은 돌려주었다.

진 문공의 망명 때 도움을 준 희부기

진 문공의 망명 때 도움을 준 희부기

(조나라를) 떠나서 송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송나라 양공(襄公)은 최근 초나라에서 군대가 곤욕을 치르고 홍수(泓水)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중이가 어질다는 것을 알고는 국빈의 예로 중이를 대접했다.

송나라의 사마(司馬) 공손고(公孫固)는 친한 구범에게 “송나라는 작고 최근 곤경에 처해 당신들의 귀국을 도울 수 없으니 더 큰 나라로 가시오.”라고 해서 바로 떠났다.

정(鄭)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정나라 문공(文公)은 무례했다. 정나라 숙첨(叔瞻)이 그 국군에게 “진나라 공자는 어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라의 재상감들입니다. 게다가 같은 성씨입니다. 정나라는 여왕(厲王)에게서 나왔고, 진나라는 무왕(武王)에서 나왔사옵니다.”라고 간했다.

정나라의 국군은 “제후국의 망명을 떠난 공자들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많은데 어찌 일일이 다 예를 갖춘단 말이오?”라고 했다. 숙첨은 “국군께서 예를 갖추지 않으시겠다면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낫습니다. 앞으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터이니.”라고 했다. 정나라의 국군은 듣지 않았다.

중이는 정나라를 떠나 초(楚)나라로 갔다. 초나라 성왕(成王)은 제후의 예로 그를 우대했다. 중이는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 조최가 “당신께서 밖으로 떠돈 지 10여 년, 작은 나라들도 당신을 깔보는데 큰 나라야 오죽하겠습니까? 지금 초나라라는 큰 나라가 한사코 당신을 대우하겠다하니 사양하지 마세요. 이는 하늘이 당신을 도우시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중이는 객의 예로 성왕을 만났다. 성왕은 중이를 후하게 접대했고, 중이는 자신을 한껏 낮추었다. 성왕이 “그대가 귀국하면 과인에게 무엇으로 보답하겠소?”라고 물었다. 중이는 “진기한 금수나 옥구슬 그리고 비단 따위는 군왕께 남아도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성왕은 “그렇긴 하지만 무엇으로든 제게 보답해야 하지 않겠소?”라고 했다. 중이는 “만약 어쩔 수 없이 평원이나 너른 연못에서 군대가 서로 부딪치게 되면 왕을 위해 사흘거리를 뒤로 물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초나라의 장수 자옥(子玉)이 화를 내며 “왕께서 진나라 공자를 아주 후하게 대하셨거늘 지금 중이가 이렇게 불손한 말을 하니 죽이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성왕은 “진나라 공자는 어질고 오랫동안 외지에서 힘들게 지냈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나라의 그릇들이오. 이는 하늘이 안배한 것이니 어찌 죽일 수 있겠소? 그리고 이미 뱉은 말을 어찌 바꾸겠소?”라고 했다.

초나라에 머무는 몇 달 사이 진(晉)나라 태자 어가 진(秦)나라에서 도망쳤다. 진(秦)나라가 그를 원망하며 중이가 초나라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불렀다. 성왕은 “초나라는 멀어서 다시 몇 개 나라를 거쳐야 진에 이를 수 있을 것이오. 진(秦)나라와 진(晉)나라는 국경이 붙어 있고, 진나라의 국군은 현명하니 그대는 부디 잘 가도록 하시오.”라 하고는 후한 예물을 중이에게 딸려 보냈다.

중이가 진(秦)나라에 이르자 진나라 목공(穆公)은 종실 여자 다섯을 중이의 아내로 삼게 했는데 저번 자어의 아내도 함께 있었다. 중이는 받지 않으려 했으나 사공(司空) 계자(季子)가 “그 나라도 토벌할 참인데 하물며 그 전처 정도야! 받아들여 진나라와 친분을 맺어 귀국해야 할 터인데 당신께서는 자잘한 예에 얽매여 큰 치욕을 잊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받아들였다.

목공이 크게 기뻐하며 중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조최가 ‘서묘(黍苗)’라는 시를 노래했다. 목공이 “그대가 서둘러 나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알겠소.”라고 했다. 조최가 중이와 함께 자리를 뜨면서 두 번 절하고 “떠도는 외로운 신하가 군주를 우러러 보는 것이 백곡이 때맞추어 내리는 비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이때가 진(晉)나라 혜공(惠公) 14년 가을이었다.

혜공이 9월에 죽고, 자어가 들어섰다. 11월에 혜공을 장례 지냈다. 12월에 진(晉)나라의 대부 난지와 극곡 등이 중이가 진(秦)나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다 같이 몰래 들어와서는 중이와 조최 등에게 환국을 권하니 내응하는 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진나라 목공은 군사를 내어 중이가 진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도왔다. 진(晉)나라는 진(秦)나라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에 역시 군대를 내어 맞섰다. 그러나 모두가 공자 중이가 들어온다는 것을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다만 혜공의 옛 신하 여성과 극예 등은 중이를 세우려 하지 않았다. 중이는 망명을 떠난 지 19년 만에 돌아왔는데 그 때 나이가 62세였다. 진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따랐다.

문공 원년(기원전 636년) 봄에 진(秦)나라가 중이를 황하까지 호송했다. 구범이 “신이 주군을 따라 천하를 떠돌면서 잘못한 일이 참 많았습니다. 신이 이를 알고 있는데 하물며 주군께서야? 이제 저는 여기서 떠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중이는 “나라로 돌아간다면 구범과 같이 하지 않는 자도 있을 것이나 하백(河伯)께서 잘 살피실 것이오.”라 하고는 구슬을 황하에 던지면서 구범과 맹서했다.

이때 개자추(介子推)가 뒤따르다가 배 위에서 웃으면서 “하늘이 실로 공자를 보우하셨는데 구범이 자신의 공이라 여기고는 주군과 거래를 하려고 하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내가 차마 그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며 스스로를 숨긴 채 황하를 건넜다.

진(秦)나라의 병사들이 영호(令狐)를 포위하자 진(晉)나라는 여류(廬柳)에 군을 주둔시켰다. 2월 신축일, 구범과 진(秦)나라, 진(晉)나라의 대부들이 순(郇)나라에서 회맹했다. 임인일에 중이가 진(晉)나라의 군영으로 들어갔다. 병오일, 곡옥으로 들어갔다. 정미일, 무궁(武宮)에서 조회하고 진(晉)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하니 이가 문공(文公)이다. 신하들이 모두 왔다. 회공 어는 고량(高梁)으로 달아났다. 무신일, 사람을 보내 회공을 죽였다.

개자추와 그 어머니

개자추와 그 어머니

회공의 옛 대신들인 여성과 극예는 본래부터 문공을 따르지 않았다. 문공이 즉위하자 주살당할까 두려워 그 무리들과 문공의 궁에 불을 질러 죽일 계획을 짰다. 문공은 몰랐다. 전에 문공을 죽이려고 했던 환관 이제(履鞮)가 이 음모를 알고는 문공에게 알려서 지난 죄를 갚고자 문공을 만나려 했다. 문공은 만나지 않고 사람을 보내 “포성에서는 네가 내 옷소매를 벤 일이 있었다. 그 뒤 내가 적의 군주와 사냥을 나갔는데 너는 혜공을 위해 나를 죽이러 왔다. 혜공이 너에게 사흘을 주었는데 너는 하루 만에 왔으니 어찌 그리 빠를 수 있단 말이냐? 네가 이런 일들을 잘 생각해 보아라!”라고 꾸짖었다. 이제는 “저는 궁형을 당한 몸으로 감히 두 마음을 품고 국군을 섬기거나 주인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국군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국군께서 이미 환국하셨지만 포성이나 적나라에서와 같은 일들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관중은 환공을 허리띠를 쏘았지만 환공은 관중 덕에 패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궁형을 당한 이 사람이 일이 있어 보고하려 하는데 국군께서는 보지 않으려 하시니 화가 곧 이를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그를 만나니 여성과 극예 등의 음모를 문공에게 일렀다. 문공이 여성과 극예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그들의 무리가 많았다. 문공은 당초 입국할 때 국인이 자신을 팔까 두려워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왕성에서 진나라 목공을 만났기 때문에 국인들이 몰라 보았던 것이다.

3월 기축일, 여성과 극예 등이 과연 반란을 일으켜 궁에 불을 질렀으나 문공을 찾지 못했다. 문공의 호위병들과 싸움이 붙었고, 여성과 극예 등은 병사들을 이끌고 도망치려 했다. 진 목공이 여성과 극예 등을 유인하여 황하 가에서 죽이니 진은 평정을 되찾고 문공은 되돌아왔다.

여름에 문공은 진(秦)나라로부터 부인을 맞아들였고, 진나라가 문공의 아내로 주었던 사람들이 모두 부인이 되었다. 진(秦)나라가 3천 명을 보내 지키면서 진나라의 분란에 대비했다.

문공은 정치를 잘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망명에 따라 온 자와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는데, 공이 큰 자는 봉읍을 주고 작은 자에게는 작위를 올렸다. 상을 다 주기도 전에 주나라 양왕(襄王)의 동생 대(帶)가 난을 일으켜 (양왕은) 정나라로 도망쳐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진나라가 막 안정을 찾았는데 군사를 출동시켰다가 다른 난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이 때문에 망명에 따라 온 사람들에 대한 상이 은자 개자추에게 미치지 못했다. 개자추 또한 녹봉을 말하지 않았기에 녹봉 또한 주어지지 않았다. 개자추는 이렇게 말했다.

“헌공의 아들이 아홉이었는데 주군만 살아 계실 뿐이다. 혜공과 회공은 가까운 사람도 없었고 안팎으로 버림을 받았다. 하늘이 진나라를 없애지 않아 틀림없이 주인이 나타나 진나라의 제사를 드리게 되었으니 주군이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하늘이 실로 그 분을 도우셨거늘 몇몇 사람이 자신들의 힘이라 하니 어찌 기만이 아니겠는가? 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을 절도라 하거늘 하물며 하늘의 공을 탐내 자신의 힘으로 여기는 자들이야! 아랫사람들은 그 죄를 무릅쓰고, 윗사람은 그 간사함에 상을 내리면서 위아래가 서로를 속이니 함께 하기 어렵구나!”

개자추의 어머니가 “어째서 가서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이냐? 이렇게 죽는다면 누구를 원망하겠느냐?”라 했다. 개자추는 “잘못인 줄 알면서 그것을 본받으면 죄는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게다가 원망의 말까지 내뱉었으니 그 녹을 먹을 수 없지요.”라고 했다. 어머니가 “그래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라 하자 개자추는 “말이란 사람 몸을 꾸미는 것입니다. 몸을 숨기려 하는데 꾸며서 뭐 하겠습니까? 꾸민다는 것은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너와 함께 숨겠다.”라고 했다. 죽을 때까지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면산에서 불에 타 죽은 개자추(그림의 윗부분)

면산에서 불에 타 죽은 개자추(그림의 윗부분)

개자추의 시종이 이를 가련하게 여겨 궁문에다가 “용이 하늘에 오르고자 하여 다섯 마리의 뱀이 보좌했다. 용은 구름에 올랐고 뱀 네 마리는 각자 그 집으로 들어갔거늘 한 마리만 원망하여 끝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구나!”라는 글을 적어 걸었다.

문공이 나오면서 이 글을 보고는 “이는 개자추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왕실 걱정 때문에 그의 공을 챙기지 못했구나.”며 사람을 시켜 그를 불렀으나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그 행방을 찾게 하니 그가 면산(綿山)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문공은 면산을 봉지로 주어 개자추의 농지로 삼게 하는 한편 산 이름을 ‘개산(介山)’으로 부르게 하면서 “이로써 나의 잘못을 기억하게 하고 착한 사람을 표창하노라!”라고 했다.

면산 정상에 남아 있는 개자추 무덤

면산 정상에 남아 있는 개자추 무덤

망명에 따라왔던 시종 호숙(壺叔)이 “국군께서 세 번이나 상을 내리셨는데 신에게는 상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감히 아뢰옵건대 제게 무슨 죄가 있는지요?”라고 했다. 문공은 “대저 나를 인의로 이끌고 덕과 은혜로 나를 지킨 사람은 제일 높은 상을 받았다. 화살과 돌의 위험을 무릅쓰고 땀 흘린 공로가 있는 사람은 그 다음 상을 받았다. 힘으로 나를 섬기되 나의 부족함을 보완하지 못한 사람은 그 다음 상을 받았다. 이 상들을 모두 내린 다음 그대에게도 돌아갈 것이다.”라고 답했다. 진 사람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기뻐했다.

2년 봄에 진(秦)나라의 군대가 황하 가에 있다가 주나라 양왕을 입국시키려 했다. 조최가 “패주가 되시려면 양왕을 입국시켜 주나라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주나라와 진(晉)나라는 같은 성인데, 진나라가 먼저 왕을 귀국시키지 않고 진(秦)나라가 입국시킨다면 천하를 호령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왕을 받드는 일이 진나라의 자본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3월 갑진일에 진(晉)나라가 병사를 출동시켜 양번(陽樊)에 이르러 온(溫)나라를 포위한 다음 양왕을 주로 입국시켰다. 4월에 양왕의 아우 동생 대(帶)를 죽였다. 주나라 양왕은 하내의 양번 땅을 진나라에 하사했다.

4년에 초나라 성왕과 제후들이 송나라를 포위하자 송나라의 공손고(公孫固)가 진(晉)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선진(先軫)은 “은혜를 갚고 패업을 확정하려면 지금입니다.”라고 했다. 호언(狐偃)은 “초나라가 최근 조(曹)나라를 얻고 위(衛)나라와 처음으로 혼인 관계를 맺었으니 조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면 초나라가 반드시 구원하러 나설 것이고 송나라는 위기를 면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진(晉)나라는 삼군을 만들었다. 조최는 극곡이 중군을 이끌도록 추천했고, 극진(郤臻)이 보좌했다. 호언으로 하여금 상군을 이끌게 하고 호모(狐毛)가 보좌했다. 조최는 경으로 삼았다. 난지가 하군을 이끌고 선진이 보좌했다. 순임보(荀林父)는 전차를 맡았고, 위주는 호위를 맡아 정벌에 나섰다.

겨울 12월에 진나라의 군대가 먼저 산동을 공략했고, 조최에게 원읍(原邑)을 봉해 주었다.

5년 봄에 진나라 문공이 조(曹)나라를 정벌하려고 위(衛)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위나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길을 바꾸어 황하 남쪽에서 강을 건너 조나라를 치고 위나라까지 공격했다.

정월에 오록을 취했고, 2월에 문공은 제나라의 국군(소공)과 염우(斂盂)에서 회맹했다. 위나라의 국군이 진나라와 동맹하길 청했으나 진나라는 허락하지 않았다. 위나라의 국군이 초나라와 회맹하고자 했으나, 국인이 원치 않으면서 그 국군을 축출하여 진나라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위나라의 국군은 양우(襄牛)에 머무르고, 공자 매(買)가 위나라를 지켰다. 초나라가 위나라를 구원했으니 성공하지 못했다.

진나라 문공이 조나라를 포위했다. 3월 병오일에 진나라의 군대가 조나라에 들어가 당초 희부기의 말을 듣지 않고 미녀 300명을 화려한 수레에 태워 보낸 일을 나무랐다. 군대에다가는 희부기 집에 들어가지 않도록 명령함으로써 그의 덕에 보답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포위하자 송나라는 다시 진(晉)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문공은 구원에 나서 초나라를 공격하고 싶었으나 일찍이 초나라에 은혜를 입었으므로 정벌할 수는 없었다. 송나라를 포기하자니 송나라 또한 과거 진나라에 은혜를 베푼 적이 있어 난감했다. 선진이 “조나라의 국군을 잡고 조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송나라에 주겠다고 하면 초나라는 급히 조나라와 위나라를 구할 것이고, 이런 형세라면 송나라의 포위를 풀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에 따랐고, 초나라 성왕은 곧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초나라의 장군 성자옥(成子玉)은 “왕께서 진나라를 지극히 후대했는데 지금 조나라와 위나라를 급히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들을 공격하니 이는 왕을 깔보는 것입니다.”라 했다. 성왕은 “진(晉)나라의 국군은 외지에서 19년을 망명하며 오랫동안 곤경에 처했다가 끝내 환국했으니 험난함을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백성들도 제대로 활용할 줄 안다. 이는 하늘이 보우하신 바이니 당해 낼 수 없다.”고 했다.

자옥은 “반드시 공을 세운다고는 감히 말씀드릴 수 없사오나 이참에 저 헛소리 하는 간사한 자의 입을 막아버리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성왕이 화가 나서 적은 병력을 내주었다. 이에 자옥은 대부 완춘(宛春)을 진에 보내 “위나라의 국군을 복위시키고 조나라의 땅을 돌려준다면 신도 송나라를 풀어 줄 것이오.”라고 전했다. 구범은 “자옥이 무례하구나. 국군은 하나를 얻는데 신하가 둘을 취하려 들다니!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선진은 이렇게 말했다.

“남을 편하게 하는 것이 예입니다. 초나라는 한 마디로 세 나라를 안정시키려 하고, 그대의 한 마디는 그들을 망하게 만드는 것이니 우리가 무례한 것이오. 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송나라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은밀히 조나라와 위나라를 회복시켜 준다고 약속하여 그들을 유인하고 완춘을 포로로 잡아 초나라를 화나게 만들어 결전한 다음 다시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진나라 문공이 바로 완춘을 위에 감금하고 은밀히 조나라와 위나라를 회복시키겠노라 약속했다. 조나라와 위나라는 초나라에 단교를 통보했다. 초나라의 득신(得臣, 자옥)이 화가 나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자 진나라의 군대는 후퇴했다. 군리가 “왜 후퇴하십니까?”라고 묻자 문공은 “지난 날 초에 있을 때 사흘거리를 뒤로 물리겠다고 약속했으니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초나라의 군대도 물러나려 했으나 득신이 반대했다.

4월 무진일에 송나라 국군, 제나라 장군, 진(秦)나라의 장군 등이 진나라 문공과 함께 성복(城濮)에 진을 쳤다.

기사일, 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맞붙어 싸우니 초나라의 군대가 패했고, 득신은 남은 병사들을 거두어 돌아갔다. 갑오일에 진나라의 군대는 형옹(衡雍)으로 돌아갔고, 천토(踐土)에 왕궁을 지었다.

당초 정나라는 초나라를 도왔는데 초나라가 패하자 겁이 나서 사람을 보내 진나라 문공에게 맹약을 청했다. 문공이 정백과 동맹했다.

5월 정미일에 초나라의 포로들을 주나라에 바치니,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가 100승, 보병이 1천 명이었다. 천자는 왕자호(王子虎)를 보내 문공을 패주로 선포하고 큰 수레, 붉은 화살 100개, 검은 화살 1,000개, 좋은 술 한 항아리, 옥으로 만든 주걱, 용맹한 병사 300명을 내려주었다. 문공은 세 번 사양한 다음 절을 하고 받았다. 주나라의 왕은 「진문후명(晉文侯命)」을 지었다.

“왕께서는 ‘어른신들께서 인의로 제후들을 화합시키셨네. 위대하고 빛나는 문왕과 무왕, 삼가 덕을 수양하시어 밝은 덕이 하늘에까지 오르고 땅에까지 널리 퍼졌네. 이에 상제께서 문왕과 무왕에 복을 내리셨다네! 나를 도와 조상의 업을 계승하여 영원히 왕위에 있도록 해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진나라 문공을 패자로 선포했다. 계해일에 왕자호가 제후들과 왕궁에서 회맹했다.

진나라가 초나라의 군대에 불을 지르니, 불은 며칠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 문공이 탄식하자 좌우에서 “초나라에게 이겼는데 국군께서는 울적해 하시니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했다. 문공은 “내가 듣기에 전쟁에서 이기고도 편한 사람은 성인 뿐이라니 그것이 두렵소. 게다가 자옥이 아직 있는데 어찌 기뻐하겠소?”라고 했다.

자옥이 패하여 돌아가니 초나라 성왕은 화를 내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욕심에서 진나라와 싸웠다고 자옥을 꾸짖으니 자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나라 문공은 “우리는 그 밖을 공격했는데 초나라는 그 안에서 죽이니 안팎이 잘 맞는구나!”라며 기뻐했다.

성복 전투에서 패한 초나라 장수 자옥의 자살(그림의 윗부분)

성복 전투에서 패한 초나라 장수 자옥의 자살(그림의 윗부분)

6월에 진(晉)나라가 위(衛)나라의 국군을 다시 귀국시켰다. 임오일에 진나라 문공이 황하를 건너 북쪽 길로 귀국했다. 상을 내렸는데 호언이 으뜸이었다. 누군가 “성복의 일은 선진의 계책이었습니다.”라고 하자, 문공은 “성복의 일에서 호언은 내게 믿음을 잃지 말라고 했소. 선진은 ‘군사는 승리가 으뜸입니다’라고 했고, 내가 그것으로 승리를 거두었소. 그러나 이 말은 한 때 필요한 것이고, 호언은 만세의 공적을 말한 것이오. 한 순간의 이익이 어찌 만세의 공적보다 더 하겠소? 그래서 호언을 앞세운 것이오.”라 했다.

겨울에 진나라 문공은 온읍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이들을 이끌고 주나라에 조회하려 했다. 힘이 미치지 못하고 그 중 이반자가 있을까 두려워 사람을 주 양왕에게 보내 하양(河陽)으로 사냥을 나오게 했다. 임신일에 제후들을 이끌고 천토에 와서 주 양왕에게 조회했다. 공자(孔子)가 역사 기록을 읽다가 문공에 이르러 “제후는 황을 부를 수 없다.” “왕이 하양에서 사냥을 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춘추(春秋)』가 이를 기피한 것이다.

정축일에 제후들이 허(許)나라를 포위했다. 조(曹)나라의 신하 중 누군가 문공에게 “제나라 환공은 제후들을 모아 성이 다른 나라를 보존했는데, 지금 국군께서는 제후들을 모아 같은 성을 멸망시키고 계십니다. 조나라는 숙진탁(叔振鐸)의 후손이고, 진나라는 당숙우(唐叔虞)의 후손입니다. 제후들을 모아 형제를 없애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진나라 문공이 기쁜 마음으로 조나라의 국군을 복귀시켰다.

이때 무렵 진나라는 3행(三行)을 신설하여 순임보가 중행을, 선곡(先縠)이 우행을, 선멸(先蔑)이 좌행을 맡았다.

7년에 진나라 문공과 진나라 목공이 함께 정나라를 포위했다. 문공이 망명하고 있을 때 무례하게 대했고, 성복 때 정나라가 초나라를 도왔기 때문이다. 정나라를 포위하여 숙첨(叔瞻)을 얻으려 했다. 숙첨이 이를 듣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나라가 숙첨의 시신을 진나라에 보냈으나 진나라는 “정나라의 국군을 얻어야 마음이 풀릴 것이다!”라고 했다. 정나라가 두려워 바로 틈을 봐서 진나라 목공에게 사람을 보내 “정나라가 망해 진(晉)나라가 강해지면 진나라는 얻고 진(秦)나라는 이득이 없습니다. 국군께서는 어째서 정나라의 포위를 풀어 동쪽 길의 우방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진나라 목공은 기뻐하며 병사를 철수시켰다. 진나라 역시 병사를 철수시켰다.

9년(기원전 628년) 겨울에 진나라 문공이 죽고, 아들 양공(襄公) 환(歡)이 뒤를 이었다. 이해에 정나라의 국군도 죽었다.

진 문공의 무덤

진 문공의 무덤

정나라의 누군가가 진(秦)나라에 나라를 팔려고 하자, 진나라 목공은 군대를 일으켜 정나라를 습격했다. 12월에 진(秦)나라의 병사가 진나라의 교외를 지나갔다.

<문공 이후 진의 상황>
양공 원년 봄에 진(秦)나라의 군대가 주나라를 지나면서 무례하게 굴자 왕손만(王孫滿)이 그를 비난했다. 군대가 활(滑)나라에 이르렀을 때 주나라로 장사를 하러가던 정나라의 상인 현고(弦高)가 진나라의 군대와 마주치자 소 열두 마리로 진나라의 병사들을 위로했다. 진나라의 군대가 놀라 돌아가는 길에 활나라를 멸망시키고 갔다.

진(晉)나라의 선진이 “진(秦)나라의 국군은 건숙(蹇叔)의 말을 듣지 않는데다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섰으니 공격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난지가 “선군께서 진(秦)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를 아직 갚지 않았는데 공격한다는 것은 안 됩니다.”라고 했다. 선진은 “진(秦)나라가 우리 국군을 모욕하고 우리와 같은 성을 정벌하는데 무슨 은덕을 갚는단 말이오!”라고 했다. 마침내 진(秦)나라를 쳤다. 양공은 검은 상복을 입었다.

4월, 효산(殽山)에서 진(秦)의 군대를 물리치고 진의 세 장수 맹명시(孟明視), 서기술(西乞秫), 백을병(白乙丙)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검은 상복을 입고 문공을 안장했다. 문공의 부인은 진(秦) 여자였는데 양공에게 “진(秦)이 그 세 장수를 잡아다 죽이려 한답니다.”라고 하니 양공이 이들을 돌려보내도록 허락했다. 선진이 이를 듣고는 양공에게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선진이 진의 세 장수를 뒤쫓았으나 진의 장수들은 황하를 건너 이미 배 안에 있으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3년 뒤(기원전 625년), 진(秦)이 과연 맹명시를 보내어 진(晉)을 정벌하여 효산에서의 패배를 갚는 한편 진(晉)의 왕(汪) 땅을 취하고 돌아갔다.

4년에 진나라 목공은 진(晉)나라를 대대적으로 정벌하여 황하를 건너 왕관(王官)을 취한 다음 효산에서 병사들의 시신을 묻고 돌아갔다. 진(晉)나라가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한 채 성을 지켰다.

5년에 진(晉)나라가 진(秦)나라를 정벌하여 신성(新城)을 취함으로써 왕관에서의 전역을 되갚았다.

6년에 조최성자(趙衰成子, 조최), 난정자(欒貞子, 난지), 구계자범(咎季子犯, 구범), 곽백(霍白) 등이 모두 죽었다. 조돈(趙盾)이 조최를 이어 집정했다.

7년 8월에 양공이 죽었다. 태자 이고(夷皐)는 어렸다. 진나라 사람들이 난리 때문에 나이가 든 국군을 세우고 싶어 했다. 조돈은 “양공의 동생인 옹(雍)을 세웁시다. 선행을 좋아하고 나이도 있으며 선군께서 예뻐하셨습니다. 또 진(秦)나라와도 가까운데 진나라는 옛날부터 우리와 사이가 좋았습니다. 착한 사람을 세우면 단단해지고, 나이가 든 사람을 섬기면 순조로워지며, 사랑받는 사람을 받들면 효성스러워지고, 오랫동안 잘 지내던 나라와 손잡으면 안정됩니다.”라고 했다.

가계(賈季)는 “그 동생 낙(樂)만 못합니다. (그 어머니) 신영(辰嬴)은 두 국군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 아들을 세우면 인민들이 틀림없이 안심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조돈은 “신영은 천하고 그 자리도 아홉 번째 다음이니 그 아들에게 무슨 위엄이 있겠소? 그리고 두 선군의 총애를 받은 것은 음란함이오. 선군의 아들로서 큰 나라의 도움도 구하지 못한 채 작은 나라에 나가 있으니 비루하기 짝이 없지요. 어미는 음란하고 아들은 비루하니 위엄이 없소이다! 또 진(陳)나라는 작고 멀어서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뭐가 되겠소이까?”라고 했다.

이에 사회(士會)를 진(秦)나라에 보내 공자 옹을 맞아들였다. 가계 역시 진(陳)나라로 사람을 보내 공자 낙을 불러들였다. 조돈은 양처보(陽處父)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가계를 파면시켰다.

10월에 양공을 안장했다.

11월에 가계가 적(狄)나라으로 달아났다. 이해에 진나라 목공도 죽었다.

진(秦)나라를 물리친 진 양공(그림의 윗부분)

진(秦)나라를 물리친 진 양공(그림의 윗부분)

영공(靈公) 원년 4월에 진(秦)나라 강공(康公)이 “전에 문공이 환국할 때 호위가 없었기 때문에 여성과 극예의 난이 있었다.”라 하고는 공자 옹에게 호위병을 많이 주었다.

태자의 어머니 목영(穆嬴)은 밤낮으로 태자를 껴안고 조정에서 “선군께서 무슨 죄가 있으며, 그 후계자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적자를 버리고 밖에서 국군을 구하니 장차 이 아이를 어찌 할꼬!”라며 울었다. 궁궐을 나와 태자를 안고 조돈이 있는 곳으로 가서는 머리를 조아리며 “선군께서 이 아이를 그대에게 맡기시면서 ‘이 아이가 재목이 되면 내가 그대에게 감사하겠지만 재목으로 크지 못하면 그대를 원망할 것이오’라고 하지 않았소이까? 지금 국군께서 돌아가셨지만 그 말씀이 아직 귓가에 맴도는데 그 당부를 저버리려 하시다니 어찌 이럴 수가 없소?”라고 했다.

조돈과 대부들은 모두 목영을 꺼렸고, 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바로 맞이하려던 옹을 배반하고 태자 이고를 옹립하니 이가 영공(靈公)이다. 그리고 군대를 내어 공자 옹을 호송하던 진(秦)나라를 막고는 조돈이 장수가 되어 진나라를 공격하여 영호(令狐)에서 물리쳤다. 선멸(先蔑)과 사회(士會)는 진(秦)나라로 달아났다.

가을에 제나라, 송나라, 위(衛)나라, 정나라, 조(曹나라), 허나라의 국군들이 모두 조돈과 합류하여 호읍(扈邑)에서 회맹하니 영공이 막 즉위했기 때문이다.

4년에 진(秦)나라를 정벌하여 소량(少梁)을 탈취했다. 진(秦)나라 역시 진(晉)나라의 효읍(郩邑)을 취했다.

6년에 진나라 강공이 진(晉)나라를 정벌하여 기마(羈馬)를 취했다. 영공이 노하여 조돈, 조천(趙穿), 극결(郤欠)로 하여금 진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하곡(河曲)에서 크게 싸웠다. 조천이 가장 큰 공을 세웠다.

7년에 진(晉)나라의 육경(六卿)들이 진(秦)나라에 있는 수회가 진(晉)나라를 어지럽힐까 걱정되어 위수여(魏壽餘)에게 거짓으로 진(晉)나라를 배반하고 진(秦)나라에 항복하게 했다. 진(秦)나라가 수회를 위읍(魏邑)에 보내자 (위수여가) 잡아서 진(晉)나라로 돌아왔다.

8년에 주나라 경왕(頃王)이 죽자 공경들이 권력을 다투느라 상을 알리지도 못했다. 진나라는 조순에게 전차 800승을 몰고 가서 주나라의 난을 평정하고 광왕(匡王)을 세웠다. 이해에 초나라 장왕이 즉위했다.

12년에 제나라 사람들이 그 국군 의공(懿公)을 시해했다.

14년에 영공이 장성하자 사치스러워져 세금을 무겁게 물리고 담장을 그림으로 장식했다. 대 위에서 사람들을 향해 탄환을 쏘고 탄환을 피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궁중 요리사가 곰발바닥을 덜 익혀서 내오자 영공은 화가 나서 요리사를 죽이고 그 부인에게 시체를 들고 조당을 지나 나가서 버리게 했다. 조돈과 사회가 전부터 몇 차례 일렀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그러다 또 죽은 사람의 손을 보게 되자 두 사람은 나아가 일렀다. 사회가 먼저 일렀으나 듣지 않았다. 영공은 이들이 두려워 서마(鉏麑)를 시켜 조돈을 죽이게 했다. 조돈의 내실 문이 열려 있었는데 행동거지가 절제가 있었다. 서마가 물러나와 “충신을 죽이는 것과 국군의 명령을 어기는 것, 모두 같은 죄로구나!”라고 탄식하며 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전부터 조돈은 수산(首山)으로 자주 사냥을 나갔는데, 뽕나무 아래에서 굶주린 사람을 보았다. 굶주린 사람은 기미명(亓眯明)이란 자였다. 조돈이 먹을 것을 주자 그 절반만 먹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남의 집살이 3년에 어머니가 살아 계신지조차 모르지만 어머니를 위해 남겨 놓고 싶습니다.”라 했다. 조돈은 그를 의롭게 여겨 먹을 것과 고기를 더 주었다. 얼마 뒤 진나라의 주방장이 되었지만 조돈은 알지 못했다.

9월에 진나라 영공이 조돈에게 술을 먹이고 매복시킨 병사로 조돈을 공격하려 했다. 영공의 주방장 기미명이 이를 알고는 조돈이 취하여 일어나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앞으로 나아가 “국군께서 신하에게 베푸는 술자리는 술이 석 잔씩 돌면 끝나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조돈이 먼저 자리를 떠서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조돈은 자리를 떴고, 영공이 매복시킨 병사들은 다 모이기에 앞서 먼저 오(獒)라는 사나운 개를 풀었다. 기미명이 조돈을 위해 개를 때려 죽였다. 조돈이 “사람을 버리고 개를 쓰다니 아무리 사나운들 무슨 소용인가?”라 했다. 그러나 (조돈은) 기미명이 베푼 은덕을 몰랐다. 이윽고 영공은 자신이 매복시킨 병사들을 풀어 조돈을 쫓게 했으나 기미명이 반격을 가하여 더 이상 쫓지 못했고, 조돈은 결국 벗어날 수 있었다. 조돈이 (자신을 구해준) 까닭을 묻자 (기미명은) “내가 뽕나무 아래의 그 굶주린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이름을 물으니 말하지 않았다. 기미명도 틈을 타서 달아났다.

실권자 조돈을 물려고 하는 개

실권자 조돈을 물려고 하는 개

조돈은 달아나긴 했으나 진나라의 국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을축일에 조돈의 동생 조천이 복숭아밭에서 영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조돈을 맞아들였다. 조돈이 평소 존경을 받고 민심을 얻은 반면 영공은 젊은 나리에 사치스러워 인민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시해하기 수월했다. 조돈은 자리에 복귀했다.

진나라의 태사(太史) 동호(董狐)는 “조돈이 그 국군을 시해했다.”라고 기록하고는 조정에서 이를 보여주었다. 조돈은 “시해한 사람은 조천이고 나는 죄가 없다.”라고 했다. 태사는 “그대는 정경의 신분으로 도망쳤으나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나라를 어지럽힌 자를 죽이지 않았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오?”라고 했다. 공자가 이 일을 듣고는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으로 죄를 숨기지 않는 기록의 원칙을 지켰고, 조 선자(宣子)는 훌륭한 대부로서 원칙을 지키다가 오명을 썼다. 안타깝구나, 국경을 벗어났더라면 오명을 면했을 터인데!”라 했다.

사관 동호의 직필을 나무라는 조돈(그림의 아랫부분)

사관 동호의 직필을 나무라는 조돈(그림의 아랫부분)

조돈은 조천을 시켜 양공의 동생 흑둔(黑臀)을 주에서 맞아들여 세우니 이가 성공(成公)이다.

성공은 문공의 작은아들로, 그 어머니는 주나라 여자였다. 임신일에 무궁(武宮)에서 조회했다.

성공 원년(기원전 606년)에 조씨를 공족(公族)으로 삼았다. 정나라를 정벌했다. 진나라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3년에 정나라의 국군이 막 즉위하여 진나라에 붙고 초나라를 버렸다. 초나라가 노하여 정나라를 정벌하자 진나라가 가서 구원했다.

6년에 진(秦)나라를 정벌하여 장수 적(赤)을 포로로 잡았다.

7년에 성공과 초나라 장왕이 힘을 다투며 호읍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 진(陳)나라는 초나라가 두려워 회맹에 오지 않았다. 진(晉)나라가 중항환자(中行桓子, 순임보)를 보내 진(陳)나라를 토벌했다. 정나라를 구원하려고 초나라와 사워 초나라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해에 성공이 죽고, 아들 경공(景公) 거(據)가 즉위했다.

경공 원년 봄에 진(陳)나라의 대부 하징서(夏徵舒)가 그 국군 영공(靈公)을 시해했다.

2년에 초나라 장왕이 진(陳)나라를 토벌하여 하징서를 죽였다.

3년에 초나라 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하자 정나라는 진(晉)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진나라는 순임보에게 중군을, 사회에게 상군을 조삭에게 하군을 이끌게 하는 한편 극극(郤克), 난서(欒書), 선곡(先縠), 한궐(韓厥), 공삭(鞏朔)이 보좌했다.

6월에 황하에 이르렀으나, 초나라가 이미 정나라를 굴복시켰고, 정나라의 국군이 어깨를 드러내고 동맹을 맺으러 갔다는 소식에 순임보는 군대를 돌리려 했다. 선곡은 “어쨌거나 정나라를 구하러 왔는데 가지 않으면 안 되오. 병사들의 마음이 흩어 질 것이오.”라고 했다. 마침내 황하를 건넜다. 초나라는 이미 정나라를 굴복시키고 황하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며, 위세를 뽐내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초나라와 진나라의 군대가 크게 싸웠다. 정나라가 바로 초나라에 붙었기 때문에 초나라를 겁내서 도리어 초나라를 도와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군대는 패하여 황하로 달아나 서로 건너려고 다투니 배 안에는 잘린 손가락이 아주 많았다. 초나라는 진나라의 장수 지앵(智罃)을 사로잡았다.

귀국하자 순임보는 “신은 통솔자로서 군을 패배하게 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죽음을 내리십시오!”라고 했다. 경공이 허락하려고 하자 사회가 “지난 날 문공께서 초나라와 성복에서 싸웠을 때 초나라 성왕은 돌아가 자옥을 죽였고, 문공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군이 이미 초나라에 패했는데, 또 다시 장수를 죽인다면 초나라가 원수 죽이는 일을 돕는 꼴입니다.”라 하니 바로 그만 두었다.

4년에 선곡은 맨 먼저 계책을 냈다가, 황하에서 진나라의 군대가 패하자 죽음이 두려워 바로 적(狄)나라로 달아나서는 적과 진나라에 대한 정벌을 꾀했다. 진나라가 이를 알고는 바로 적의 가족을 다 죽였다. 선곡은 선진의 아들이다.

5년에 정나라를 토벌했다. 초나라를 도왔기 때문이다. 이 무렵 초나라 장왕은 강했는데, 황하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꺾었기 때문이다.

6년에 초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자 송나라는 진(晉)나라에 시급함을 알렸다. 진나라가 구원하려 했으나 백종(伯宗)이 “초나라는 하늘이 돕고 있어 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해양(解揚)에게 송나라를 구원한다고 속이게 했다. 정나라 사람들이 그를 잡아 초나라에 보내니 초나라는 재물을 후하게 주며 그 말을 반대로 하게 하여 송나라를 빨리 굴복시키려 했다. 해양이 거짓으로 허락하고는 끝내는 진나라의 국군이 한 말을 전했다. 초나라가 그를 죽이려 했으나 누군가 말려서 해양을 풀어주고 돌려보냈다.

7년에 진나라가 사회를 시켜 적적(赤狄)을 멸망시켰다.

8년게 극극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제나라 경공(頃公)의 어머니가 누각 위에서 보고는 웃었다. 그렇게 한 까닭은 극극은 꼽추, 노나라의 사신은 절름발이, 위(衛)나라의 사신은 애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나라도 이들과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손님을 이끌도록 했다. 극극은 화가 났고, 돌아가는 길에 황하에서 “제나라에 보복하지 않으면 하백께서 증명하실 것이다.”라고 했다. 나라에 도착하여 국군에게 제나라를 정벌하십사 청했다. 경공이 그 까닭을 묻고는 “그대의 원한 때문에 어찌 나라를 번거롭게 하겠는가?”라 하고는 들어주지 않았다. 위문자(魏文子)가 나이를 이유로 은퇴를 청하며 극극을 피하니 극극이 집정하게 되었다.

9년(기원전 581년)에 초나라 장왕이 죽었다. 진(晉)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자 제나라는 태자 강(彊)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고, 진나라는 군대를 물렸다.

11년 봄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융읍(隆邑)을 탈취했다. 노나라가 위(衛)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위나라와 노나라는 모두 극극을 통해 진나라에 급함을 알렸다. 진나라가 극극, 난서, 한궐에게 전차 800승을 주어 노나라, 위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치게 했다.

여름에 안(鞍) 지역에서 경공과 싸워 경공에게 상처를 입히고 곤경으로 몰았다. 경공은 그 시위병과 자리를 바꾸고 내려서는 물을 마시는 척하다가 탈출했다. 제나라에 패하여 달아나자 진나라는 북으로 제나라 땅까지 뒤쫓았다. 경공은 보물 따위를 바치며 강화를 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극극이 “소동(蕭桐)의 조카를 인질로 잡아야만 합니다.”라고 했다. 제나라의 사신은 “소동의 조카라면 경공의 어머니입니다. 경공의 어머니는 진나라 국군의 어머니와 같거늘 어찌 기어이 인질로 요구한단 말입니까? 의리가 아니니 다시 싸웁시다.”라고 했다. 이에 진나라는 강화를 받아들이고 철수했다.

초나라의 신공무신(申公巫臣)이 하희(夏姬)를 훔쳐 진(晉)나라로 도망쳐 오자 진나라는 무신을 형(邢)의 대부(大夫)로 삼았다.

12년 겨울에 제나라 경공이 진나라에 와서 진나라 경공을 왕으로 받들려 했으나 경공은 감당할 수 없다며 사양했다. 진나라가 처음으로 6군(六軍)을 창설하고, 한궐, 공삭, 조천, 순추(荀騅), 조괄(趙括), 조전(趙旃)을 경(卿)으로 삼았다. 지앵이 초나라에서 돌아왔다.

13년에 노나라 성공이 진나라에 인사를 드리러 왔으나 진나라가 그를 존중하지 않자 화가 나서 가버리고는 진나라를 등졌다. 진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하여 범(氾) 땅을 취했다.

14년에 양산(梁山)이 무너졌다. 진나라의 국군이 백종에게 물으니 백종은 괴이하게 여길 것 없다고 했다.

16년에 초나라의 장수 자반(子反)이 무신에 대한 한풀이로 그 가족을 모두 죽였다. 무신이 노하여 자반에게 편지를 보내 “반드시 네 놈을 도망 다니다 죽은 신세로 만들겠다!”라 하고는 바로 오(吳)나라의 사신이 되길 청하고, 그 아들은 오나라의 행인(行人)이 되어 오나라에게 전차와 용병을 가르치게 했다. 오나라와 진나라가 처음으로 관계를 열어 초나라를 정벌하기로 약속했다.

17년에 진나라가 조동(趙同)과 조괄을 죽이고 집안을 멸했다. 한궐이 “조최와 조돈의 공을 어찌 잊을 수 있는가? 제사를 어찌 끊을 수 있는가?”라고 하자 다시 조씨의 서자 조무(趙武)를 조씨의 후계로 삼고 봉읍을 회복시켜 주었다.

19년 여름에 경공의 병이 깊어져 태자 수만(壽曼)을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여공(厲公)이다. 한 달 남짓 뒤에 경공이 죽었다.

여공 원년에 막 즉위하여 제후들과 잘 지내려고 진(秦)나라 환공(桓公)과 황하를 사이에 두고 회맹했다. 돌아오니 진(秦)나라가 동맹을 깨고 적나라와 진나라 정벌을 꾀했다.

3년에 여상(呂相)에게 진(秦)나라를 꾸짖게 하고 이어 제후들과 진나라 정벌에 나섰다. 경하(涇河)에 이르러 마수(麻隨)에서 진나라를 물리치고 그 장수 성차(成差)를 포로로 잡았다.

5년에 극씨 셋이 백종을 헐뜯어 그를 죽였다. 백종이 바른 소리를 자주 하는 바람에 이런 화를 당했다. 국인이 이 때문에 여공을 따르지 않았다.

6년 봄에 정나라가 진나라를 배신하고 초나라와 동맹하자 진나라는 화가 났다. 난서는 “우리 세대에서 제후들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라 하니 바로 군대를 일으켰다. 여공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5월에 황하를 건넜다.

초나라의 군대가 구원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자 범문자(范文子)가 여공에게 군대를 돌리자고 청했다. 극지(郤至)가 “군사를 일으켜 반역자를 죽이려 하는데 강자를 만났다고 피한다면 제후들을 호령할 수 없습니다.”라 하여 마침내 초나라와 싸웠다.

계사일, 화살로 초나라 공왕(共王)의 눈을 쏘아 맞추니, 초나라의 군대가 언릉(鄢陵)에서 패배했다. 자반(子反)이 남은 병사들을 거두어 격려한 뒤 다시 싸우고자 하니 진나라가 겁을 먹었다. 공왕이 자반을 소환했는데, 시종 수양곡(豎陽穀)이 술을 갖다 주어 자반이 술에 취하는 바람에 공왕을 보지 못했다. 공왕이 화가 나서 자반을 꾸짖으니 자반이 자결했다. 공왕이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진나라는 이로써 제후들에게 위엄을 떨치고 천하의 패주로 호령하려고 했다.

여공에게는 남총과 희첩이 많았다. 귀국한 뒤로 대부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여러 희첩들의 형제를 기용하려 했다. 총애하는 희첩의 오라비로 서동(胥童)이란 자가 있었는데, 일찍이 극지와 원한이 있었다. 난서 또한 극지가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고 초나라를 패배시킨 것에 원한을 품고는 몰래 초나라에 알렸다. 초나라가 사람을 보내 여공에게 “언릉의 전투는 사실 극지가 초나라를 불러 난을 일으켜서 공자 주(周)를 옹립하려 한 것입니다. 함께 할 나라가 없어 일이 성사되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여공이 난서에게 이를 알리자 난서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공께서 사람을 주로 보내 가만히 조사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과연 여공은 극지를 주나라로 보냈다. 난서는 또 공자 주에게 극지를 만나게 했으나 극지는 속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여공이 검증해보니 사실이어서 극지를 원망하여 죽이려 했다.

8년에 여공이 사냥을 나가서 희첩과 술을 마시는데 극지가 산돼지를 잡아 바쳤으나 환관(맹장)이 빼앗아가자 극지가 맹장을 쏘아 죽였다. 여공이 노하여 “계자(극지)가 나를 속였다!”하고는 극씨 셋을 죽이려 했으나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

극의(郤錡)가 여공을 공격하려고 하면서 “내 죽을지 모르지만 여공 역시 피해를 볼 것이다!”라고 했다. 극지는 “신의는 내세우는 사람은 국군을 배반할 수 없고,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은 인민을 해칠 수 없고, 용감한 사람은 난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오, 이 셋을 잃으면 누가 나와 함께 하겠소? 나는 죽으면 그만이오!”라고 했다.

12월 임오일에 여공은 서동에게 병사 800을 주고 세 극씨를 습격하게 했다. 서동은 이참에 조정에서 난서와 중항언(中行偃)까지 겁박하며 “이 두 자를 죽이지 않으면 우환이 공께 미칠 것입니다.”라 했다. 여공은 “하루에 세 명의 경을 죽였는데 과인은 차마 더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서동은 “사람들은 국군을 기꺼이 해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으나 여공은 듣지 않고 난서 등에게 감사하는 한편 그저 극씨의 죄를 다스린 것만 설명하고는 “대부들은 제 자리로 돌아가시오!”라 했다. 두 사람은 머리를 조아리며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라고 했다.

여공이 서동을 경(卿)에 임명했다. 윤달 을묘일, 여공은 장려씨(匠驪氏)의 집으로 놀러가자 난서와 중항언이 그 무리로 하여금 여공을 습격하여 체포해서는 가두었다. 서동은 죽이고 주로 사람을 보내 공자 주를 맞아들여 옹립하니 이가 도공(悼公)이다.

도공 원년 정월 경신일에 난서와 중항언이 여공을 시해하고 한 량의 수레로 장례를 치렀다. 여공은 갇힌 지 엿새 만에 죽었다. 죽은 뒤 열흘이 지난 경오일에 지앵이 공자 주를 맞아들여 강성(絳城)으로 오니 닭을 잡아 대부들과 맹서하고 옹립하니 이가 도공이다. 신사일에 무궁(武宮)으로 가서 제사를 올리고, 2월 을유일에 즉위했다.

도공 주(周)의 할아버지는 희첩(姬捷)으로 진(晉)나라 양공(襄公)의 작은아들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환숙(桓叔)이라 불렸다. 환숙이 가장 사랑을 받았다. 환숙이 혜백(惠伯) 희담(姬談)을 낳았고, 담이 도공 주를 낳았다. 주가 자리에 올랐을 때 나이가 열 넷이었다. 도공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자리에 오를 수 없어 난을 피해 주나라로 가셨다가 객사했습니다. 과인도 너무 멀었기 때문에 국군이 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지금 대부들께서 문공과 양공의 뜻을 잊지 않고 은혜롭게 환숙의 후손을 세움으로써 조종과 대부들의 위령에 기대어 진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으니 어찌 삼가 조심하지 않겠습니까? 대부들께서도 과인을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신하 일곱을 내치고, 과거의 공업을 닦고 은혜를 베푸는 한편 문공이 귀국할 당시의 공신들 후손을 거두었다.

가을에 정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진(陳)나라에까지 이르렀다.

3년에 진나라가 계택(鷄澤)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 도공은 여러 신하에게 기용할 만한 사람을 물었더니 기해(祁傒)가 해호(解狐)를 천거했다. 해호는 기해와 원수였다. 다시 물으니 기해는 그 아들 기오(祁午)를 천거했다. 군자는 “기해는 당파를 짓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밖에서 사람을 천거하되 원수라 해서 숨기지 않고, 안에서 사람을 천거하되 자식이라 해서 숨기지 않는구나!”라고 했다.

바야흐로 제후들이 회맹하려는데 도공의 동생 양간(楊干)이 소란을 피워 군열을 어지럽혔다. 위강(魏絳)이 그 마부를 죽였다. 도공이 노하자 누군가 도공에게 바른 말을 했고, 도공은 마침내 위강이 현명하다 하고 정치를 맡기는 한편 융(戎)에 사신으로 보내니 융은 한결 친숙함을 보였다.

11년에 도공이 “내가 위강을 기용하고부터 아홉 번이나 제후들을 회합시키고 유기 적과 가까워졌으니 위강의 힘이다.”라 하고는 여악(女樂)을 내리니 위강은 세 번 사양하고 받았다.

겨울에 진나라가 진(晉)나라의 역(櫟) 땅을 빼앗았다.

14년에 진나라가 육경에게 제후들을 이끌고 진(秦)나라 토벌에 나서게 했다. 경하(涇河)를 건너서 진(秦)나라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역림(棫林)에서 돌아왔다.

15년에 도공이 사광(師廣)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물었다. 사광은 “오직 인의를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겨울에 도공이 죽고 그 아들 평공(平公) 표(彪)가 자리에 올랐다.

평공 원년(기원전 557년)에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나라 영공(靈公)과 미하(靡下)에서 싸웠다. 제나라의 군대가 패하여 달아났다. 안영(晏嬰)이 “국군께서는 역시 용기가 없으시군요. 어째서 싸움을 멈추지 않으시는 겁니까?”라고 하니 마침내 떠났다. 진나라가 추격하여 임치를 포위해서는 그 외성을 모조리 태우고 도살했다. 동쪽으로 교수(膠水), 남쪽으로 기수(沂水)에 이르기까지 제나라는 모든 성을 닫고 수비에 들어가자, 진나라는 바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6년에 노나라 양공(襄公)이 진나라에 인사를 드리러 왔다. 진나라의 난영(欒逞)이 죄를 지어 제나라로 달아났다.

8년에 제나라 장공(莊公)이 살며시 난영을 곡옥으로 보내 군대를 수행하게 했다. 제나라의 군사들이 태항산(太行山)에 오르자 난영이 곡옥으로 가다말고 길을 돌려 강성을 기습했다. 강성은 경계하지 않았고, 평공은 자살하려 했으나 범헌자(范獻子)가 평공을 말리고 자신의 무리로 난영을 공격하니 난영은 패하여 곡옥으로 달아났다. 곡옥에서 난영을 공격하니 난영은 죽고 난영의 일족은 전멸했다.

난령은 난서의 손자로서 강성으로 들어와서는 위씨(魏氏)와 결탁했었다. 제나라 장공은 난영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돌아와 진나라의 조가(朝歌)를 빼앗아 돌아감으로써 임치의 패배를 갚았다.

10년에 제나라의 최서(崔杼)가 그 국군 장공을 시해했다. 진나라는 제나라의 난리를 틈타 제나라 정벌에 나서 고당(高唐)에서 패배시키고 태항에서의 싸움을 보복했다.

14년에 오나라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사신으로 와서 조문자(趙文子), 한선자(韓宣子), 위헌자(魏獻子)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진나라의 정권이 끝내는 이 세 집안에게 돌아가겠구나!”라고 했다.

19년에 제나라의 안영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와서는 숙향(叔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숙향이 “진나라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국군은 세금을 잔뜩 거두어 누대와 연못을 만들고 정사는 돌보지 않습니다. 정치가 개개인의 집안에서 나오니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안영도 그렇게 보았다.

진나라의 대부 숙향

진나라의 대부 숙향

22년에 연나라를 정벌했다.

26년에 평공이 죽고, 아들 소공(昭公) 이(夷)가 올랐다.

소공은 재위 6년 만에 죽었다. 6경이 강해지니 공실이 보잘 것 없어졌다. 아들 경공(頃公) 거질(去疾)이 즉위했다.

경공 6년에 주나라 경왕(景王)이 세상을 떠나고, 왕자들이 자리를 다투었다. 진나라의 6경이 왕실의 난리를 평정하고 경왕(敬王)을 세웠다.

9년에 노나라의 계씨가 그 국군 소공(昭公)을 내쫓았다. 소공은 간후(乾侯)에 머물렀다.

11년에 위(衛)나라와 송나라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와 진에게 노나라의 국군이 귀국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계평자가 사사로이 범헌자에게 뇌물을 주니 헌자가 이를 받고는 진 경공에게 “계씨는 죄가 없습니다.”라 하니 아니나 다를까 노나라의 국군을 귀국시키지 않았다.

12년에 진나라의 종실인 기해의 손자와 숙향의 아들이 국군 앞에서 서로를 욕했다. 6경은 종실을 약화시키려고 법으로 그 일족을 전부 없애고 그 봉읍을 열 개의 현으로 나누어 각자 자기 아들들을 대부로 삼았다. 진의 종실은 더욱 약해졌고, 6경은 모두가 더 커졌다.

14년에 경공이 죽고, 아들 정공(定公)이 즉위했다.

정공 11년에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진나라로 도망쳐오자 조앙간자(趙鞅簡子)가 거처를 내주었다.

12년(기원전 500년)에 공자가 노나라의 상이 되었다.

15년에 조앙이 한단(邯鄲)의 대부 오(午)를 사신으로 보내고도 믿지 못해 오를 죽이려 했다. 오는 중항인(中行寅), 범길석(范吉射)과 함께 몸소 조앙을 공격했고, 조앙은 달아나 진양(晉陽)을 지켰다. 정공이 진양을 포위했다.

순력(荀櫟), 한불신(韓不信), 위치(魏侈)는 범길석, 중항인과 원수지간이라 군대를 이동시켜 범길석, 중항인을 공격했다. 범길석과 중항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공은 그들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범길석과 중항인은 조가로 도망가서 그곳을 지켰다. 한불신과 위치가 조앙을 위하여 정공에게 사죄하니 정공은 조앙을 사면하고 복직시켰다.

22년에 진나라가 범길석과 중항인을 공격해 패배시키자 두 사람은 제나라로 도주했다.

30년에 정공이 오왕 부차(夫差)와 황지(黃池)에서 회맹해 맹주를 다투었다. 이 때 조앙이 수행했는데, 결국은 오나라가 맹주가 되었다.

31년에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 국군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간공의 동생 오(驁)를 세우니 이가 평공(平公)이다.

33년(기원전 479년)에 공자가 죽었다.

37년에 정공이 죽고,아들들 출공(出公) 착(鑿)이 즉위했다.

<삼가분진과 진의 멸망>
출공 17년에 지백(知伯)이 조씨, 한씨, 위씨와 함께 범씨와 중항씨의 땅을 나누어 (자신들의) 봉읍으로 삼았다. 출공이 화가 나서 제나라, 노나라에 통보하여 이들 4경을 토벌코자 했다. 4경이 겁이 나서 출공에게 반격을 가했다. 출공은 제나라로 도망가다가 길에서 죽었다. 이에 지백이 바로 소공의 증손자 교(驕)를 진나라의 국군의 옹립하니 이가 애공(哀公)이다.

애공의 할아버지 옹(雍)은 진나라 소공의 작은아들로 대자(戴子)로 불렸다. 대자는 기(忌)를 낳았다. 기(忌)는 지백과 잘 지냈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지백이 진나라를 완전히 차지하려다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기의 아들 교를 국군으로 세운 것이다. 당시 진나라의 국정은 모두 지백이 결정했고, 진나라 애공은 통제할 수 없었다. 지백이 마침내 범씨와 중항씨의 땅까지 차지하여 최강이 되었다.

애공 4년에 조양자(趙襄子), 한강자(韓康子), 위환자(魏桓子)가 함께 지백을 죽이고 그 땅을 다 차지했다.

18년에 애공이 죽고, 아들 유공(幽公) 유(柳)가 왕위에 올랐다.

유공 때는 진나라의 국군이 두려움에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의 군주에게 도리어 인사를 드렸다. 강과 곡옥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삼진(三晉 : 한, 조, 위)에게 돌아갔다.

15년에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새로 즉위했다.

18년에 유공(幽公)이 부녀자를 간음하며 밤에 몰래 읍으로 나다니다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위나라 문후가 군대로 진나라의 난을 토벌하고 유공의 아들 지(止)를 세우니 이가 열공(烈公)이다.

열공 19년(기원전 403년)에 주나라 위열왕(威烈王)이 한(韓)나라, 조(趙)나라, 위(魏) 나라모두를 제후로 임명했다.

27년에 열공이 죽고, 아들 효공(孝公) 기(頎)가 즉위했다.

효공 9년에 위나라 무후(武侯)가 새로 즉위하여 조나라의 한단을 기습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7년에 효공이 죽고, 아들 정공(靜公) 구주(俱酒)가 자리에 올랐다. 이해가 제나라 위왕(威王) 원년이다.

정공 2년에 위나라 무후, 한나라 애후(哀侯), 조나라 경후(敬侯)가 진(晉)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그 땅을 셋으로 나누었다. 정공은 평민으로 떨어졌고, 진나라의 제사는 끊어졌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말한다.

“진나라 문공은 옛날 말하는 명군이었다. 나라 밖에서 망명하길 19년 동안 매우 힘들었다. 즉위하여 상을 주는데 개자추를 잊긴 했지만 어찌 교만한 군주라 하겠는가? 영공이 시해당한 후 성공과 경공은 아주 엄격해졌고, 여공 때는 더 심해져 대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다가 끝내 난이 일어났다. 도공 이후 날이 갈수록 쇠퇴하고 6경이 권력을 오로지 했다. 그러니 국군이 그 신하를 부리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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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39. 「진세가」

권39. 「진세가」 『사기』 청나라 판본(중국 북경사범대학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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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기: 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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