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가 사신을 보내 任那 재건에 대한 그간 사정을 보고함
3월 백제에서 奈率
註 001 阿乇得文·許勢의 奈率
奇麻·物部의 奈率
奇非 등을 보내어 表를 올려 말하였다. “奈率
彌麻沙·奈率
己連 등이 臣의 나라에 이르러 詔書註 002를 받들어 ‘너희들은 저 日本府와 함께 좋은 계책을 꾀하여 빨리 任那註 003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니, 너희는 경계하여 저들(신라)에게 속지 말라’고 하였습니다註 004. 또 津守連 등이 신의 나라에 이르러 勅書를 받들어 任那를 세우는 일을 물었습니다. 삼가 勅에 따라 감히 시간을 지체하지 못하고 함께 도모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내어『百濟本記』에는 烏胡跛臣을 보내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的臣인 듯하다
日本府와 任那를 불렀으나 모두 대답하기를 ‘새해가 이미 왔으니 지나간 다음에 가고자 한다註 005’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나아오지 아니하므로 다시 사신을 보내어 부르니 모두 대답하기를 ‘이미 제사지낼 때가 되었으니 지나간 다음에 가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나, 오랫동안 나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불렀는데, 미천한 자를 보낸 까닭으로 함께 도모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任那가 부름에 나아오지 않은 것은 본심이 아니라, 阿賢移那斯·佐魯麻都
註 006
두 사람의 이름이다. 이미 윗 문장에 보인다가 간교하게 속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무릇 任那는 安羅註 007를 兄으로 삼아 오직 그 뜻을 좇고, 安羅人들은 日本府를 하늘로 삼아 오직 그 뜻을 따르므로『百濟本記』에는 安羅를 아버지로 삼고 日本府로써 근본을 삼았다고 하였다, 이제 的臣·吉備臣·河內直 등은 모두 移那斯·麻都의 지휘를 좇았을 따름입니다. 移那斯·麻都는 비록 小家의 미천한 자이나 日本府의 정치를 오로지 제멋대로 하며 또 任那를 제압하여 (길을) 막고 (사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註 008 이로 말미암아 함께 꾀하여 天皇에게 답변을 아뢸 수 없었으므로, 己麻奴跪
註 009
아마도 津守連인 듯하다가 머무르고 있었는데 특별히 나는 새와 같이 빠른 사신을 보내어 天皇에게 받들어 아뢰기를, ‘만일 두 사람두 사람은 移那斯와 麻都이다이 安羅에 있어 간특하고 아첨하는 일을 많이 행하면 任那도 세우기 힘들 것이며, 바다 서쪽의 여러 나라도 반드시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 두 사람을 옮겨 그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日本府와 任那에게 칙을 내려 任那 건설을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신이 奈率
彌麻沙·奈率
己連 등을 己麻奴跪에게 딸려 보내어 표를 올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조를 내려, ‘的臣 等等이라 한 것은 吉備弟君臣·河內直 등을 말한다이 신라를 왕래한 것은 짐의 뜻이 아니다. 옛날 印支彌
자세하지 않다와 阿鹵旱岐가 있을 때 신라의 핍박을 받아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못하였는데, 백제는 길이 멀어 그 위급함을 구하지 못하였다. 的臣 등이 신라를 왕래함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고 짐은 일찍이 들었다. 만일 이미 任那를 세웠다면 移那斯·麻都는 자연히 물러났을 것이니 어찌 족히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이 조를 듣고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며, 신라가 천조를 속이고 칙명을 따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신라는 봄에 㖨淳註 010을 취하고 이어 우리의 久禮山
註 011 수비병을 내쫒고 드디어 점유하였습니다. 安羅에 가까운 곳은 안라가 논밭을 일구어 씨를 뿌렸고, 久禮山에 가까운 곳은 斯羅註 012가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는데, 각각 경작하여 서로 침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移那斯·麻都가 남의 경계를 넘어 경작하다가 6월에 도망하였습니다. 印支彌의 뒤에 온 許勢臣의 때에는『百濟本記』에는 “우리가 印支彌를 머무르게 한 뒤에 온 旣洒臣의 때”라고 하였으나 모두 자세하지 않다 신라가 다시 남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安羅는 신라의 핍박을 받아 농사짓지 못함을 말하지 않았는데, 신이 일찍이 듣건대 신라는 매년 봄과 가을에 군사와 무기를 많이 모아놓고 安羅와 荷山
註 013을 습격하고자 한다 하며, 또는 加羅를 습격하려 한다고 들었습니다.註 014 최근에 서신을 받고서 바로 군대를 보내어 任那를 굳게 지키는 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자주 날랜 군사를 보내어 필요할 때마다 가서 구하였습니다. 이로써 任那가 때에 따라 농사를 짓고 신라가 감히 침범하여 핍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길이 멀어 능히 위급함을 구하지 못하였는데, 的臣 등이 신라를 왕래하면서부터 바야흐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아뢰었으니, 이는 위로는 천조를 속이는 것으로서 매우 간특한 일입니다. 사실의 명확함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천조를 속이니 그 밖에도 거짓됨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的臣 등이 여전히 安羅에 거주하고 있다면 임나의 나라를 건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마땅히 일찍 물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매우 두려워 하는 것은 佐魯麻都가 비록 韓 출신으로서 지위가 大連에 이르러 일본 執事의 사이에 섞여 명예롭고 권세있는 자리에 들어섰지만, 이제는 오히려 신라 奈麻禮註 015의 冠을 썼으니 곧 몸과 마음으로 귀부하여 다른 사람에게 쉽게 드러나는 바입니다. 행한 바를 자세히 보면 도무지 두려워 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악행을 아뢰고 모두 글을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 아직도 다른 나라의 관복을 입고 날마다 신라의 땅에 나아가 公·私의 일로 來往하면서 도대체가 꺼려하지 않습니다. 무릇 㖨國의 멸망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㖨國의 函跛旱岐
註 016가 加羅國註 017에 두 마음을 품어 신라에 내응하고 加羅는 밖에서 싸움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망한 것입니다.註 018 만일 函跛旱岐로 하여금 내응하지 못하게 하였다면 㖨國이 비록 작다 하더라도 반드시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卓淳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만일 卓淳國의 왕이 신라에 내응하여 적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어찌 멸망에 이르렀겠습니까. 여러 나라가 패망하게 된 화근을 살펴 보면 모두 안에서 응하여 두 마음을 품은 자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제 麻都 등이 신라에 마음을 두어 드디어는 그 나라의 옷을 입고 아침 저녁으로 내왕하면서 속으로 간악한 마음을 굳혀왔습니다. 이에 任那가 이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까 두렵습니다. 任那가 만일 멸망한다면 신의 나라가 고립되어 위태할 것이니, 朝謁하고자 생각하나 어찌 다시 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천황께서는 깊이 살피시고 멀리 헤아리시어, 속히 본래 있었던 곳으로 옮기셔서 任那를 안정시키십시오.”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보이는 弁辰 24국 가운데 하나인 彌烏耶馬國(彌馬耶烏國) 곧 彌麻那의 略稱이다. 이는 낙동강 중류지역인 고령 일대의 大加耶(上加羅)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가야제국을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곧 「廣開土王碑」의 “追至任那加羅”, 『三國史記』 强首傳의 “臣本任那加良人”, 「鳳林寺眞鏡大師碑」의 “其先任那王族” 등에 보이는 ‘任那’는 모두 加羅를 가리키는 말로서, 특히 「광개토왕비」와 강수전의 경우는 마치 五加耶, 六加耶처럼 가야제국을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라 하겠다. 일본의 경우도 『日本書紀』 欽明天皇 23년 춘 정월조의 註記에 “總言任那 別言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이라 하여 임나를 가야제국의 총칭으로 일컬었지만, 加羅와 任那를 서로 혼동하여 사용한 예가 많다(李丙燾, 「洛東江流域의 地理와 上·下加羅」,『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p. 304).
新羅의 別稱이다. 『三國史記』 권 4, 지증마립간 4년조에 신라의 국호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라고 하여 이 이름이 보인다. 또 같은 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迎日冷水里新羅碑」에도 “斯羅 綠 斯夫智王 乃智王 此二王敎 ……”라고 하여 이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6세기 초엽 중국인의 對新羅觀을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526~539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梁의 「職貢圖」에도 “百濟 …… 旁小國 叛波·卓·多羅·前羅·斯羅 …… 等附之”라고 보인다.
매년 봄과 가을에 실시하는 신라의 閱兵 행사에 대한 백제의 의구심을 나타낸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閱兵은 군사훈련과 군사통수권의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베풀어졌지만 유사시에는 바로 군사작전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金瑛河,「百濟 新羅王의 軍事訓練과 統帥」, 『泰東古典硏究』 6, 1990). 신라의 경우 탈해이사금 때 居道가 변경의 官長이 되어 매년 한 번씩 馬匹을 모아 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들판에 모아 놓고 즐겨 놀게 하다가 于尸山國과 居柒山國을 불의에 쳐들어가 멸망시킨 일이 있으며(『三國史記』 권 44, 居道傳), 지증왕 때에 異斯夫가 居道의 權謀를 이어 받아 ‘馬遊’로써 加耶를 속여 취한 사례가 있다(『三國史記』 권 44, 異斯夫傳). 이에 대해 상고사회 전쟁과 유희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基東, 「新羅上古의 戰爭과 遊戱」, 『素軒南都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4).
註) 003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보이는 弁辰 24국 가운데 하나인 彌烏耶馬國(彌馬耶烏國) 곧 彌麻那의 略稱이다. 이는 낙동강 중류지역인 고령 일대의 大加耶(上加羅)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가야제국을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곧 「廣開土王碑」의 “追至任那加羅”, 『三國史記』 强首傳의 “臣本任那加良人”, 「鳳林寺眞鏡大師碑」의 “其先任那王族” 등에 보이는 ‘任那’는 모두 加羅를 가리키는 말로서, 특히 「광개토왕비」와 강수전의 경우는 마치 五加耶, 六加耶처럼 가야제국을 총괄하여 일컫는 말이라 하겠다. 일본의 경우도 『日本書紀』 欽明天皇 23년 춘 정월조의 註記에 “總言任那 別言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이라 하여 임나를 가야제국의 총칭으로 일컬었지만, 加羅와 任那를 서로 혼동하여 사용한 예가 많다(李丙燾, 「洛東江流域의 地理와 上·下加羅」,『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p. 304).
註) 006
註) 011
註) 012
新羅의 別稱이다. 『三國史記』 권 4, 지증마립간 4년조에 신라의 국호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라고 하여 이 이름이 보인다. 또 같은 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迎日冷水里新羅碑」에도 “斯羅 綠 斯夫智王 乃智王 此二王敎 ……”라고 하여 이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6세기 초엽 중국인의 對新羅觀을 반영하는 것이긴 하지만, 526~539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梁의 「職貢圖」에도 “百濟 …… 旁小國 叛波·卓·多羅·前羅·斯羅 …… 等附之”라고 보인다.
註) 014
매년 봄과 가을에 실시하는 신라의 閱兵 행사에 대한 백제의 의구심을 나타낸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閱兵은 군사훈련과 군사통수권의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베풀어졌지만 유사시에는 바로 군사작전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金瑛河,「百濟 新羅王의 軍事訓練과 統帥」, 『泰東古典硏究』 6, 1990). 신라의 경우 탈해이사금 때 居道가 변경의 官長이 되어 매년 한 번씩 馬匹을 모아 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들판에 모아 놓고 즐겨 놀게 하다가 于尸山國과 居柒山國을 불의에 쳐들어가 멸망시킨 일이 있으며(『三國史記』 권 44, 居道傳), 지증왕 때에 異斯夫가 居道의 權謀를 이어 받아 ‘馬遊’로써 加耶를 속여 취한 사례가 있다(『三國史記』 권 44, 異斯夫傳). 이에 대해 상고사회 전쟁과 유희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李基東, 「新羅上古의 戰爭과 遊戱」, 『素軒南都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4).
註) 016
註) 017
국가명
- 백제(百濟)
- 가야(加耶)
- 신라(新羅)
- 한(韓)
주제분류
-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