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다
(
660년
11월
01일
)
〔7년(660)〕 11월 1일에 고구려가 칠중성(七重城)註 001을 침공하여 군주(軍主) 필부(匹夫)註 002가 전사하였다.
필부(匹夫): 본서 권제47 열전제 7 필부(匹夫)조에 의하면, 신라 왕경(王京)의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아버지는 아찬(阿湌) 존대(尊臺)라고 한다. 또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 10월에 고구려의 군사가 칠중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힘써 싸우다가 죽으므로 태종무열왕이 급찬(級湌)의 관등을 추증하였다고 한다. 신라본기의 기사는 칠중성의 군주(정덕본과 을해년 목활자본에는 ‘주’자가 결락되어 있으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 따라 보입함)였다고 하였으나, 군주는 주(州)의 장관으로 칠중성이 주급(州級)의 행정구역이 아니므로 열전에 기록된 ‘현령(縣令)’이 옳다. 한편 필부열전에는 고구려의 칠중성 공격이 10월에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본기의 기록은 11월 1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가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신라본기와 열전 기록의 전거가 달랐다고 여겨진다. 필부열전에 따르면,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할 때, 필부가 지휘하여 20여 일을 버티자, 고구려군이 물러났고, 대나마 비삽(比歃)이 고구려와 내통하여 다시 고구려 군사가 공격하여 왔다고 하였으므로, 열전의 기록처럼 10월에 공략하기 시작하여, 신라본기 기록처럼 11월 1일에 필부가 전사하였다고 보면, 이 전투의 진행 과정에 관한 두 기록을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註) 002
필부(匹夫): 본서 권제47 열전제 7 필부(匹夫)조에 의하면, 신라 왕경(王京)의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아버지는 아찬(阿湌) 존대(尊臺)라고 한다. 또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660) 10월에 고구려의 군사가 칠중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힘써 싸우다가 죽으므로 태종무열왕이 급찬(級湌)의 관등을 추증하였다고 한다. 신라본기의 기사는 칠중성의 군주(정덕본과 을해년 목활자본에는 ‘주’자가 결락되어 있으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에 따라 보입함)였다고 하였으나, 군주는 주(州)의 장관으로 칠중성이 주급(州級)의 행정구역이 아니므로 열전에 기록된 ‘현령(縣令)’이 옳다. 한편 필부열전에는 고구려의 칠중성 공격이 10월에 있었다고 하는데, 신라본기의 기록은 11월 1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가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신라본기와 열전 기록의 전거가 달랐다고 여겨진다. 필부열전에 따르면,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할 때, 필부가 지휘하여 20여 일을 버티자, 고구려군이 물러났고, 대나마 비삽(比歃)이 고구려와 내통하여 다시 고구려 군사가 공격하여 왔다고 하였으므로, 열전의 기록처럼 10월에 공략하기 시작하여, 신라본기 기록처럼 11월 1일에 필부가 전사하였다고 보면, 이 전투의 진행 과정에 관한 두 기록을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제분류
-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