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책봉하다
(
670년
07월
)
〔10년(670) 7월〕 사찬(沙湌) 수미산(須彌山)註 001을 보내어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670)註 002 경오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이 고구려의 후계자[嗣子] 안승에게 명을 내린다. 공(公)의 태조 중모왕(中牟王)註 003은 덕을 산처럼 쌓고, 공을 남쪽 바다만큼 세워, 위엄 있는 풍모가 청구(靑丘)註 004에 떨쳤으며, 어진 가르침이 현토(玄菟)註 005를 덮었다. 자손이 서로 이어져 뿌리와 줄기가 끊어지지 않았고, 땅은 천리(千里), 햇수는 거의 800년이나 되었다.註 006 건(建)註 007·산(産)註 008 형제에 이르러 화(禍)가 병풍 안에서 일어나고,註 009 골육(骨肉) 간에 틈이 생겨나, 집안과 나라가 깨져 없어지고, 종묘와 사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살아있는 사람들은 혼란에 휩싸여 마음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공은 산과 들에서 위험과 곤란을 피하다가 이웃 나라에 홀몸을 투탁하였다. 정처 없이 떠돌며 겪은 고생은 그 자취가 진(晉)나라 문공(文公)註 010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업이 위후(衛侯)註 011와 같다. 대저 백성은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황천(皇天)은 반드시 돌보라는 명령[眷命]을 내림이 있다. 선왕의 정당한 계승자는 오직 공(公)뿐이며, 제사를 주관하는 것 또한 공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서 나아가 책(策)을 펼쳐 공을 고구려왕으로 삼도록 명하니, 공은 마땅히 남은 백성을 어루만져 모아 옛 업적[舊緖]을 계승하고 일으켜서 영원히 이웃나라가 되어 형제와 같이 지내야 할 것이다. 삼가고 삼갈지어다. 아울러 멥쌀[粳米] 2,000석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무늬 있는 비단 다섯 필, 명주와 곱게 짠 베 각 10필, 솜 15칭(稱)註 012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중모왕(中牟王):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으로 중해(衆解), 추모(鄒牟)하고도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7 천지천황(天智天皇) 7년(668) 겨울 10월조)에 중모왕(仲牟王)으로 전하고,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지안 고구려비(集安 高句麗碑)」)에는 ‘추모(鄒牟)’로 전한다. (『위서(魏書)』 고구려전)에서 고구려의 시조를 처음으로 주몽으로 기술하였다. 한편 (『속일본기(續日本記)』 권40 환무천황(桓武天皇) 연력(延曆) 8년(789) 12월조)와 (연력 9년(790) 7월조)에서는 도모왕(都慕王)이라고도 하였다. 본 기록을 통해 신라가 고구려의 시조(태조)를 주몽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왕호(王號)에서 시조적 인식이 반영된 태조왕(太祖王)의 존재를 주목하여, 고구려가 한동안 태조왕을 시조로 인식하다가 4세기 후반 소수림왕(小獸林王) 때에 추모왕(중모왕)을 시조로 인식하면서 왕계(王系)를 개편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조인성; 노태돈). 주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13 고구려본기제1 동명성왕 즉위년(B.C. 37)조 참조.
〈참고문헌〉
趙仁成, 1991, 「4·5세기 高句麗 王室의 世系認識 變化」, 『韓國古代史硏究』 4
노태돈, 1994, 「고구려 초기 王系에 대한 일고찰」,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上)』, 일조각
〈참고문헌〉
趙仁成, 1991, 「4·5세기 高句麗 王室의 世系認識 變化」, 『韓國古代史硏究』 4
노태돈, 1994, 「고구려 초기 王系에 대한 일고찰」,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上)』, 일조각
자손이 서로 이어져 … 거의 800년이나 되었다: 본 기록에 따른다면, 고구려는 B.C. 130년 무렵에 건국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본서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가 B.C. 37년에 건국되어 668년에 멸망되었다고 전하고, (「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에 “고구려가 처음 세워진 후부터 나라가 망하기까지 708년, 30대(代) 동안 〔고자 가문의 사람들이〕 대대로 공후장상(公侯將相)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고자묘지명」을 통해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인들이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대체로 B.C. 37년을 전후한 시기로 인식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7 천지천황(天智天皇) 7년(668) 겨울 10월조)에 “고려(고구려) 중모왕(仲牟王)이 처음 건국하였을 때, 1천년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어머니가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700년 정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나라가 망한 것은 700년의 끝에 해당한다.”라고 전하여, 일본인도 고구려가 B.C. 37년에 건국되어 668년에 멸망하였다고 이해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신당서(新唐書)』 권220 고려전)에는 “고려비기(高麗秘記)에 이르기를, ‘900년이 되기 전에 마땅히 팔십(八十) 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전한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건국 연대에 대해 B.C. 230년 무렵(900년), B.C. 130년 무렵(800), B.C. 37년 무렵(700년) 등 세 가지 설이 존재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신라인들이 고구려가 80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인식한 구체적인 이유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인들은 왕위가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바뀐 시기, 즉 계루부의 대표인 주몽(朱蒙)이 소노부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B.C. 37년 무렵에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이해하면서 그 이전 소노부 왕권이 통치하던 고구려의 역사를 배제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註) 001
註) 003
중모왕(中牟王):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으로 중해(衆解), 추모(鄒牟)하고도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7 천지천황(天智天皇) 7년(668) 겨울 10월조)에 중모왕(仲牟王)으로 전하고,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지안 고구려비(集安 高句麗碑)」)에는 ‘추모(鄒牟)’로 전한다. (『위서(魏書)』 고구려전)에서 고구려의 시조를 처음으로 주몽으로 기술하였다. 한편 (『속일본기(續日本記)』 권40 환무천황(桓武天皇) 연력(延曆) 8년(789) 12월조)와 (연력 9년(790) 7월조)에서는 도모왕(都慕王)이라고도 하였다. 본 기록을 통해 신라가 고구려의 시조(태조)를 주몽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왕호(王號)에서 시조적 인식이 반영된 태조왕(太祖王)의 존재를 주목하여, 고구려가 한동안 태조왕을 시조로 인식하다가 4세기 후반 소수림왕(小獸林王) 때에 추모왕(중모왕)을 시조로 인식하면서 왕계(王系)를 개편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조인성; 노태돈). 주몽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13 고구려본기제1 동명성왕 즉위년(B.C. 37)조 참조.
〈참고문헌〉
趙仁成, 1991, 「4·5세기 高句麗 王室의 世系認識 變化」, 『韓國古代史硏究』 4
노태돈, 1994, 「고구려 초기 王系에 대한 일고찰」,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上)』, 일조각
〈참고문헌〉
趙仁成, 1991, 「4·5세기 高句麗 王室의 世系認識 變化」, 『韓國古代史硏究』 4
노태돈, 1994, 「고구려 초기 王系에 대한 일고찰」,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上)』, 일조각
註) 004
註) 005
註) 006
자손이 서로 이어져 … 거의 800년이나 되었다: 본 기록에 따른다면, 고구려는 B.C. 130년 무렵에 건국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본서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가 B.C. 37년에 건국되어 668년에 멸망되었다고 전하고, (「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에 “고구려가 처음 세워진 후부터 나라가 망하기까지 708년, 30대(代) 동안 〔고자 가문의 사람들이〕 대대로 공후장상(公侯將相)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고자묘지명」을 통해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인들이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대체로 B.C. 37년을 전후한 시기로 인식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7 천지천황(天智天皇) 7년(668) 겨울 10월조)에 “고려(고구려) 중모왕(仲牟王)이 처음 건국하였을 때, 1천년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어머니가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700년 정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나라가 망한 것은 700년의 끝에 해당한다.”라고 전하여, 일본인도 고구려가 B.C. 37년에 건국되어 668년에 멸망하였다고 이해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신당서(新唐書)』 권220 고려전)에는 “고려비기(高麗秘記)에 이르기를, ‘900년이 되기 전에 마땅히 팔십(八十) 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전한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건국 연대에 대해 B.C. 230년 무렵(900년), B.C. 130년 무렵(800), B.C. 37년 무렵(700년) 등 세 가지 설이 존재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신라인들이 고구려가 80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인식한 구체적인 이유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인들은 왕위가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바뀐 시기, 즉 계루부의 대표인 주몽(朱蒙)이 소노부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B.C. 37년 무렵에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이해하면서 그 이전 소노부 왕권이 통치하던 고구려의 역사를 배제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註) 007
註) 009
註) 010
註)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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