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에는 환혜왕이 죽고 아들 왕안(王安)이 즉위했다.
왕안 5년, 진이 한을 공격하자 한이 급해져 한비(韓非)를 진에 사신으로 보냈다. 진이 한비를 억류시켰다가 죽였다.
9년(기원전 230년), 진이 안왕을 포로로 잡고 그 땅을 전부 편입시켜 영천군(穎川郡)으로 삼았다. 한이 마침내 멸망했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한궐(韓厥)이 진(晉) 경공(景公)의 마음을 움직여 조씨 고아 조무(趙武)로 하여금 조씨의 제사를 잇게 함으로써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의 의로움이 성취되었으니 이는 천하의 음덕이다. 한씨의 공이 진(晉)에서는 크게 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조, 위와 함께 제후로서 10여 대를 간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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