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가은현에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나다
견훤(甄萱)註 001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註 002 사람이다.註 003 본래의 성(姓)은 이(李)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註 004 아버지 아자개(阿慈介)註 005는 농사를 지으며 제 스스로의 힘으로 살다가 후註 006에 가문을 일으켜 장군註 007이 되었다.
견훤(甄萱): 생몰년 867~936년. 후백제의 건국자로 900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동사강목』 제5 상 임자년 진성여주 6년(唐 景福 원년)조에 ‘甄’의 음(音)은 진(眞)이라고 하였고, 『증보문헌비고』 제14권 여지고 2 역대 국계(國界) 2 신라국 후백제국조에도 동일하게 나온다. 『완산견씨세보』에는 원래는 ‘진’이었는데 왕씨의 압박을 받아 ‘견’으로 고쳐 읽었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이상에 근거하여 견훤을 ‘진훤’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설이 있다(李道學, 2001, 「甄萱의 出身地와 그 初期 勢力 基盤」,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전북전통문화연구소 편), 주류성, 54~56쪽). 중국에서는 ‘甄’을 성(姓)으로 하는 경우 ‘진’이라고 읽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견훤의 자손들이 모두 견씨(甄氏)를 칭하고 있다고 한다〔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역주, 2000, 『국역 증보문헌비고』제14권 여지고 2 역대 국계(國界) 2 신라국 후백제국조의 주 309)〕. 견훤 자체가 이름일 가능성이 높으며, ‘견’을 성으로 본 것은 김부식의 해석일 것이라고 여기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정신문화연구원, 859쪽의 주 66)]. 이에 본 역주에서는 견훤이라고 칭한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가은현은 일반적으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으로 보나, 상주시와 상 주시 함창읍 부근이었다고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姜仁求 외, 2002, 204쪽의 주 3)]. 이 지역에 견 훤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견훤산성(甄萱山城)이라고 전하는 것이 있다.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의 북쪽에 있는 표고 약 400m의 속칭 장바위산을 에워싼 길이 약 1㎞의 석성이다. 『상주읍 지(尙州邑誌)』에는 견훤이 축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전승은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 가 상주 출신이라고 되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정영호, 1969). 이상 『삼국유사』권제 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의 주 참조.
〈참고문헌〉
姜仁求 외, 2002, 『譯註 三國遺事』Ⅱ, 以會文化社
정영호, 1969, 『상주지구 고적조사 보고서』, 단국대학교출판부
〈참고문헌〉
姜仁求 외, 2002, 『譯註 三國遺事』Ⅱ, 以會文化社
정영호, 1969, 『상주지구 고적조사 보고서』, 단국대학교출판부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는 본문에 이어 견훤이 함통(咸通) 8년 정해(867)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한편 같은 곳에 인용된 『고기(古記)』에는 광주(光州) 북촌(北村)의 부잣집 딸이 남자로 변한 큰 지렁이와 관계하여 견훤을 낳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에 따라 견훤을 지금의 광주광역시 출신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金庠基, 1966; 1974 : 邊東明, 2000). 이에 대한 반론은 申虎澈, 1991; 1993, 204~207쪽 참조.
〈참고문헌〉
金庠基, 1966, 「甄萱의 家鄕에 대하여」, 『가람李秉岐博士頌壽紀念論文集』; 1974,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 出版部
申虎澈, 1991, 「後百濟와 관련된 여러 이설들의 종합적 검토」, 『國史館論叢』 29; 1993, 「甄萱關係 諸異說의 검토」,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邊東明, 2000, 「甄萱의 出身地 再論」, 『震檀學報』 90
〈참고문헌〉
金庠基, 1966, 「甄萱의 家鄕에 대하여」, 『가람李秉岐博士頌壽紀念論文集』; 1974,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 出版部
申虎澈, 1991, 「後百濟와 관련된 여러 이설들의 종합적 검토」, 『國史館論叢』 29; 1993, 「甄萱關係 諸異說의 검토」,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邊東明, 2000, 「甄萱의 出身地 再論」, 『震檀學報』 90
본래의 성은 이(李)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 및 같은 조에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阿慈介)의 가계 와 견훤의 자식 등에 대한 기록이 인용되어 있는데, 전거는 ‘이비가기(李碑家記)’ 혹은 ‘이제가기(李磾家記)’라고 한다. 이에 아자개가 이씨를 칭하였고, 그 자손들 중에서 이를 따르는 경우가 있 었다고 풀이하는 견해가 있다(申虎澈, 1989; 1993, 9~10쪽). 이와 달리 본래는 성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오월 국과의 외교 관계상 견훤이 이씨를 칭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李道學, 59~60쪽), 견훤 자체가 이름일 가능성이 높으며, ‘견’을 성으로 본 것은 김부식의 해석일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정구복 외, 859쪽의 주 66)].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 인용된 『고기』에 의하면 광주 북촌의 부잣 집 딸과 남자로 변한 큰 지렁이 사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가 15세가 되자 견훤을 자칭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정신문화연구원
申虎澈, 1989, 「甄萱의 出身과 社會的 進出」, 『東亞硏究』 17;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李道學, 2001, 「甄萱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전북전통문화연구소 편), 주류성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정신문화연구원
申虎澈, 1989, 「甄萱의 出身과 社會的 進出」, 『東亞硏究』 17;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李道學, 2001, 「甄萱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전북전통문화연구소 편), 주류성
아자개(阿慈介):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는 ‘阿慈个’로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다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견훤이 가장 걸출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같은 곳에 인용된 ‘이비가기(李碑家記)’에는 아자개가 진흥왕의 후손 원선(元善)이었다고 되어 있다.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고,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이며, 5남 1녀를 두었다고 한다. 장자가 상보(尙父) 훤(萱)이며, 둘째 아들은 장군 능애(能哀), 셋째 아들은 장군 용개(龍蓋), 넷째 아들은 보개(寶蓋), 다섯째 아들은 장군 소개(小蓋)이며,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라고 하였다.
후: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 따르면 광계(光啓) 연간의 일이었다고 한다. 광계는 당(唐) 희종(僖宗)의 연호로 885(헌강왕 11년)~888년(진성여왕 2년) 동안 사용되었다.
장군: 장군은 본래 신라의 최고위 무관직으로 진골 출신이 맡을 수 있었다[본서 권제40 잡지제9 무관(武官) 제군관(諸軍官)]. 하지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 말에는 호족들이 성주 혹은 장군을 칭하였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는 아자개가 사불성(沙弗城)에 웅거하면서 장군을 자칭하였다고 되어 있다. 사불(沙弗)은 사벌(沙伐)로도 표기되며(『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8 상주목 건치연혁조), 사벌성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로 비정된다. 한편 본서 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 2년(918) 7월조에 상주의 적수(賊帥) 아자개(阿玆盖)가 사신을 보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918) 9월 갑오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아자개(阿玆盖)를 아자개(阿字盖)라고 표기하였다. 이 둘은 동일인으로 여겨지는데, 이를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와 동명이인으로 보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었으나, 같은 사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申虎澈, 1991, 「後百濟와 관련된 여러 이설들의 종합적 검토」, 『國史館論叢』 29; 1993, 「甄萱關係 諸異說의 검토」,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210~212쪽).
연관콘텐츠
註) 001
견훤(甄萱): 생몰년 867~936년. 후백제의 건국자로 900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동사강목』 제5 상 임자년 진성여주 6년(唐 景福 원년)조에 ‘甄’의 음(音)은 진(眞)이라고 하였고, 『증보문헌비고』 제14권 여지고 2 역대 국계(國界) 2 신라국 후백제국조에도 동일하게 나온다. 『완산견씨세보』에는 원래는 ‘진’이었는데 왕씨의 압박을 받아 ‘견’으로 고쳐 읽었다고 되어 있다고 한다. 이상에 근거하여 견훤을 ‘진훤’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설이 있다(李道學, 2001, 「甄萱의 出身地와 그 初期 勢力 基盤」,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전북전통문화연구소 편), 주류성, 54~56쪽). 중국에서는 ‘甄’을 성(姓)으로 하는 경우 ‘진’이라고 읽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견훤의 자손들이 모두 견씨(甄氏)를 칭하고 있다고 한다〔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역주, 2000, 『국역 증보문헌비고』제14권 여지고 2 역대 국계(國界) 2 신라국 후백제국조의 주 309)〕. 견훤 자체가 이름일 가능성이 높으며, ‘견’을 성으로 본 것은 김부식의 해석일 것이라고 여기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정신문화연구원, 859쪽의 주 66)]. 이에 본 역주에서는 견훤이라고 칭한다.
註) 002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가은현은 일반적으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으로 보나, 상주시와 상 주시 함창읍 부근이었다고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姜仁求 외, 2002, 204쪽의 주 3)]. 이 지역에 견 훤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견훤산성(甄萱山城)이라고 전하는 것이 있다.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의 북쪽에 있는 표고 약 400m의 속칭 장바위산을 에워싼 길이 약 1㎞의 석성이다. 『상주읍 지(尙州邑誌)』에는 견훤이 축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전승은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 가 상주 출신이라고 되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정영호, 1969). 이상 『삼국유사』권제 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의 주 참조.
〈참고문헌〉
姜仁求 외, 2002, 『譯註 三國遺事』Ⅱ, 以會文化社
정영호, 1969, 『상주지구 고적조사 보고서』, 단국대학교출판부
〈참고문헌〉
姜仁求 외, 2002, 『譯註 三國遺事』Ⅱ, 以會文化社
정영호, 1969, 『상주지구 고적조사 보고서』, 단국대학교출판부
註) 003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는 본문에 이어 견훤이 함통(咸通) 8년 정해(867)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한편 같은 곳에 인용된 『고기(古記)』에는 광주(光州) 북촌(北村)의 부잣집 딸이 남자로 변한 큰 지렁이와 관계하여 견훤을 낳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에 따라 견훤을 지금의 광주광역시 출신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金庠基, 1966; 1974 : 邊東明, 2000). 이에 대한 반론은 申虎澈, 1991; 1993, 204~207쪽 참조.
〈참고문헌〉
金庠基, 1966, 「甄萱의 家鄕에 대하여」, 『가람李秉岐博士頌壽紀念論文集』; 1974,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 出版部
申虎澈, 1991, 「後百濟와 관련된 여러 이설들의 종합적 검토」, 『國史館論叢』 29; 1993, 「甄萱關係 諸異說의 검토」,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邊東明, 2000, 「甄萱의 出身地 再論」, 『震檀學報』 90
〈참고문헌〉
金庠基, 1966, 「甄萱의 家鄕에 대하여」, 『가람李秉岐博士頌壽紀念論文集』; 1974, 『東方史論叢』, 서울大學校 出版部
申虎澈, 1991, 「後百濟와 관련된 여러 이설들의 종합적 검토」, 『國史館論叢』 29; 1993, 「甄萱關係 諸異說의 검토」,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邊東明, 2000, 「甄萱의 出身地 再論」, 『震檀學報』 90
註) 004
본래의 성은 이(李)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 및 같은 조에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阿慈介)의 가계 와 견훤의 자식 등에 대한 기록이 인용되어 있는데, 전거는 ‘이비가기(李碑家記)’ 혹은 ‘이제가기(李磾家記)’라고 한다. 이에 아자개가 이씨를 칭하였고, 그 자손들 중에서 이를 따르는 경우가 있 었다고 풀이하는 견해가 있다(申虎澈, 1989; 1993, 9~10쪽). 이와 달리 본래는 성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오월 국과의 외교 관계상 견훤이 이씨를 칭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李道學, 59~60쪽), 견훤 자체가 이름일 가능성이 높으며, ‘견’을 성으로 본 것은 김부식의 해석일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정구복 외, 859쪽의 주 66)].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 인용된 『고기』에 의하면 광주 북촌의 부잣 집 딸과 남자로 변한 큰 지렁이 사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가 15세가 되자 견훤을 자칭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정신문화연구원
申虎澈, 1989, 「甄萱의 出身과 社會的 進出」, 『東亞硏究』 17;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李道學, 2001, 「甄萱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전북전통문화연구소 편), 주류성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정신문화연구원
申虎澈, 1989, 「甄萱의 出身과 社會的 進出」, 『東亞硏究』 17; 1993,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李道學, 2001, 「甄萱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전북전통문화연구소 편), 주류성
註) 005
아자개(阿慈介):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는 ‘阿慈个’로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다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견훤이 가장 걸출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같은 곳에 인용된 ‘이비가기(李碑家記)’에는 아자개가 진흥왕의 후손 원선(元善)이었다고 되어 있다.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고,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이며, 5남 1녀를 두었다고 한다. 장자가 상보(尙父) 훤(萱)이며, 둘째 아들은 장군 능애(能哀), 셋째 아들은 장군 용개(龍蓋), 넷째 아들은 보개(寶蓋), 다섯째 아들은 장군 소개(小蓋)이며,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라고 하였다.
註) 006
후: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 따르면 광계(光啓) 연간의 일이었다고 한다. 광계는 당(唐) 희종(僖宗)의 연호로 885(헌강왕 11년)~888년(진성여왕 2년) 동안 사용되었다.
註) 007
장군: 장군은 본래 신라의 최고위 무관직으로 진골 출신이 맡을 수 있었다[본서 권제40 잡지제9 무관(武官) 제군관(諸軍官)]. 하지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 말에는 호족들이 성주 혹은 장군을 칭하였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후백제 견훤조에는 아자개가 사불성(沙弗城)에 웅거하면서 장군을 자칭하였다고 되어 있다. 사불(沙弗)은 사벌(沙伐)로도 표기되며(『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8 상주목 건치연혁조), 사벌성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로 비정된다. 한편 본서 권12 신라본기12 경명왕 2년(918) 7월조에 상주의 적수(賊帥) 아자개(阿玆盖)가 사신을 보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 권1 세가1 태조 원년(918) 9월 갑오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오는데, 아자개(阿玆盖)를 아자개(阿字盖)라고 표기하였다. 이 둘은 동일인으로 여겨지는데, 이를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와 동명이인으로 보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었으나, 같은 사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申虎澈, 1991, 「後百濟와 관련된 여러 이설들의 종합적 검토」, 『國史館論叢』 29; 1993, 「甄萱關係 諸異說의 검토」,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210~212쪽).
주제분류
- 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 사회>사회조직>신분>촌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