ᐥ❸ 신라에 黃昌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나이는 15~6세 때쯤 되었고 칼춤을 잘 췄다. 신라왕에게 원수를 갚아주겠노라 고하고 백제에 들어가 거리에서 칼춤을 췄다. 사람들이 이를 구경하자 백제왕이 黃昌을 불러 궁중에서 칼춤을 추게 하였다. 그러자 黃昌은 백제왕을 죽이고 자신도 죽임을 당했다. 신라 사람들이 그를 기려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추었는데 풍습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ᐥ
李詹이 고증하기를, “을축년 겨울에 내가 계림에 손이 되었더니, 부윤 배공이 鄕樂을 연주하여 나를 위로하는데, 탈을 쓰고 뜰에서 칼춤을 추는 동자가 있었다. 물어보았더니, 말하기를, ‘신라 때에 黃昌이라는 자가 있어서 나이 15ㆍ6세 때쯤 되어 칼춤을 잘 추었는데, 왕을 뵙고 아뢰기를, ’신이 임금을 위하여 백제 왕을 쳐서 임금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허락하자 곧 백제로 가서 시가에서 춤을 추니, 백제 사람들이 담처럼 빙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임금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게 하고 구경하였다. 황창이 임금을 그 자리에서 찔러 죽이고, 드디어 좌우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듣고 울부짖다가 드디어 눈이 멀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눈이 다시 밝아지게 하려고 꾀를 내어 사람을 시켜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속여 말하기를, ‘황창이 와서 춤춘다. 황창이 죽었다는 전일의 말은 거짓이다.’ 하니, 어머니가 기뻐 울며 즉시 눈이 다시 밝아졌다 한다. 황창이 어려서 나라 일에 죽었으므로 향악에 실어서 전해 내려온다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三國史를 보니, 모든 관직을 임명하거나 이웃 나라를 침벌한 것은 거의 모두 씌어져 있으며, 해와 별과 우레와 비의 이변과 초목ㆍ금수의 요괴까지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나라 임금이 적국의 아이에게 살해된 것과 어린 아이로서 적국의 임금에게 원수를 갚았다는 것은 모두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지 않으니, 진실로 의심스럽다. 다만 열전에 관창의 일의 전말이 기재되어 있어서 그의 충의가 장하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통하게 한다. 이 아이는 필시 관창일 것이다. 전해지는 것이 잘못된 것일 것이다. 모든 적국에 대하여 변란을 음모하는 자는 혹은 행상으로 가장하거나, 혹은 본국에 죄를 지은 것처럼 꾸미고서 감언이설과 아첨하는 말로 속여도 더러는 정상이 드러나고 일이 탄로되어 성취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 백제가 이미 신라와는 적국이 되었으니, 황창이 응당 공공연하게 무기를 가지고 백제의 번화한 시가의 큰길 가운데로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과연 그렇게 하였다면 백제 사람들이 황창을 잡아다가 형구를 갖추어 고문하였을 것이다. 어찌 내버려 두어 임금의 뜰에서 사투한 짓을 하게 하였겠는가? 이것은 인정으로나 사리로 볼 때 맞지 않는 것이다. 내가 옛 사람으로 관창과 견주어 나란히 논할 만한 자를 찾아보니, 春秋에, 哀公 11년에 노 나라의 소년 汪錡가 공을 위하여 수레에 같이 탔다가 함께 국서의 난에 죽으매, 공자가 말하기를, ‘능히 창과 방패를 잡고서 사직을 수호하였으니, 상으로 대우하지 않음이 옳다.’ 하였다. 의에 죽고 인을 이루는 것은 진실로 어려운 일인데, 동자로서 용감히 이런 일을 한 자를 유독 왕기와 관창에게서 볼 수 있다. 이야기가 잘못되어 있기에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황창의 춤을 보는 자를 위하여 고증하고, 또 따로 역사를 읽는 사람을 위하여 이상함을 고증한다.”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