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솔까이야기 > 1530 황창랑
 
 황창랑은 백제왕을 살해한 신라의 소년자객인가?
삼국사기에는 백제 분서왕이 낙랑을 습격했다가 나중에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된다는 기록이 있다.
http://qindex.info/i.php?f=2413#25938
 
 1145 삼국사기 기림왕 03년
(300년)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http://qindex.info/i.php?f=2413#25937
 
 1145 삼국사기 분서왕 07년
(403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http://qindex.info/i.php?f=2413#32851
 
 1145 삼국사기 무열왕 07년
(660년)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 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서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의 모범이 되리라!”고 하였다. 관장이 “예!”라 하고는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으로 달려 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혀서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http://qindex.info/i.php?f=2413#35690
 
 1145 삼국사기 열전 - 관창
황산(黃山)벌에 이르러 양쪽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였다. 아버지 품일이 이르기를,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다. 어찌 용기가 없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관창이 “예.” 하고는, 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빗겨 들고 곧바로 적진을 공격하여 말을 달리면서 몇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상대편의 수가 많고 우리 편의 수가 적어서 적의 포로가 되었다.
http://qindex.info/i.php?f=2413#35689
 
 153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첨(李詹 1345-1405)이 고증(考證)하기를, “... 한 나라 임금이 적국의 아이에게 살해된 것과 어린 아이로서 적국의 임금에게 원수를 갚았다는 것은 모두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지 않으니, 진실로 의심스럽다. ... 이 아이는 필시 관창일 것이다. 전해지는 것이 잘못된 것일 것이다. ...” 하였다.
http://qindex.info/i.php?f=2413#32856
 
 1814-1888 임하필기(林下筆記 李裕元)
官昌訛誤黃昌郞... 관창이 황창랑으로 와전된 것인데...
http://qindex.info/i.php?f=2413#32853
 
 1859 동환록(東寰錄 尹廷琦)
황창은 낙랑국이 파견한 자객이다. 백제사에는 분서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서현을 빼앗자 낙랑태수가 자객을 보내어 분서왕을 죽였다고 한다. 여지승람과 김종직의 황창랑가에는 그것이 신라자객이라고 하나 그르다.
http://qindex.info/i.php?f=2413#32857
 
 1901-1950 국로추사(菊露秋寫 姜璘)
황창랑은 본래 신라인으로 낙랑에 망명했다. 백제에 들어가 검무를 추니 소문이 퍼져 분서왕 앞에서 하게 되었다. 이때 낙랑의 원수를 갚겠다며 분서왕을 찌르고 살해되었다. 분서왕은 곧 죽었다.
http://qindex.info/i.php?f=2413#32849
 
 1932 별건곤 제59호 朝鮮刺客列傳
신라 흘해왕 7년(316) 백제가 신라와 속지 악랑(악랑은 원래 고구려에 속하얏다가 신라 기림왕 3년에 대방과 가티 귀복하얏다.)의 서현을 음습하야 빼아스니 악랑 태수가 크게 분한하야 그 보복을 하랴고 여러 가지로 게책을 생각하다가 최후에 자객 황창랑을 뽑아 보냇스니 황창랑은 원래 악랑 사람으로 검술의 천재가 잇서서 여덜 살 때부터 칼춤을 잘 추기로 유명할 뿐 아니라 비분강개한 의협심이 만어 자긔 생명을 초개 가티 녁이는 용소년이엿다.
http://qindex.info/i.php?f=2413#32852
 
 1940 삼천리 제12권 제7호
백제에는 계백이라는 유명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 그러니까 싸우는 대로 신라를 이긴 것이었습니다. 이 때에 한 대신이 아뢰기를, 「죽기를 무서워하지 아니하는 장수 한 사람만 있으면 백제를 막을 수 있소」 하였습니다. 이 때에 어떤 소년 하나가 「신이 나가 죽겠소」 하고 나섰습니다. 다들 돌아보니 그는 아직 얼닐곱살밖에 아니 된 화랑(花郞) 황창랑(黃倡郞)이었습니다.
http://qindex.info/i.php?f=2413#32855
 
 2003 이야기 삼국야사(김형광)
낙랑 태수는 자기 딸이 백제 분서왕의 습격으로 살해되자 사위 보육을 신라로 보내어 원병을 요청한다. 그러나 신라가 이를 거절하자 보육은 칼춤을 잘 추는 황창랑을 데리고 돌아온다. 그리고 낙랑 태수와 계획 끝에 황창랑을 백제에 자객으로 보내어 분서왕을 죽이게 한다. 그리고 황창랑에게 제공하기로 했던 도주로를 제공하지 않아 황창랑이 죽임을 당하게 만든다.
http://qindex.info/i.php?f=2413#32859
 
 ‘黃倡舞’ 硏究 - ‘黃倡’의 由來문제를 中心으로
Ⅰ. 머리 Ⅱ. 創作假面劍舞로서의 黃倡舞 Ⅲ. 黃倡舞의 歷史的 形成動因 Ⅳ. 黃倡談의 실체와 中國流傳 Ⅴ. 黃倡談과 官昌談의 관련성 문제 Ⅵ. 맺음
http://qindex.info/i.php?f=2413#32850
 
 위키백과: 검무
한국의 검무는 신라 시대(서기 667년경)에 황창랑(黃昌郎)이 지은 것이라고 <동경잡기> <풍속조(風俗條)>와 <문헌비고>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황창랑이란 7세(8세)의 소년이 검무(劍舞)를 빙자하여 백제왕을 척살하고 백제인들에게 피살되었으므로, 신라사람들이 이를 슬피 여겨, '소년의 얼굴을 닮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춘 것'이 지금껏 전한다고 하였다.
http://qindex.info/i.php?f=2413#328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