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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은] 漢나라 때에는 樂浪郡에 소속되어
○ [韓은] 漢나라 때에는 樂浪郡에 소속되어 철마다 朝謁하였다.
魏略: 일찍이 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에게 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辰國註 164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戶註 165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朝鮮에 조공하는 藩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王莽의 地皇 연간에, 廉斯鑡이 辰韓의 右渠帥가 되어 樂浪註 166의 土地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漢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戶來이다. 우리들 천 5백명은 材木을 벌채하다가 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鑡이
“나는 漢나라의 樂浪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戶來는,
“좋다.”
하였다. 그리하여 鑡은 戶來를 데리고 출발하여 含資縣으로 갔다. 含資縣에서 [樂浪]郡에 연락을 하자, [樂浪]郡은 鑡을 통역으로 삼아 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辰韓에 들어가서 戶來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鑡이 이때 辰韓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樂浪이 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라고 하니, 辰韓은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만 5천명과 弁韓布 만 5천필을 내어놓았다. 鑡은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樂浪]郡에서는 鑡의 功과 義를 표창하고, 冠幘과 田宅를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代를 지나 安帝 延光 4년(A.D.125; 百濟 己婁王 49)에 이르러서는 그로(선조의 공으로) 인하여 賦役을 면제받았다.
註) 164
여기 『魏略』의 ‘東之辰國’은 歷谿卿이 그의 백성과 함께 간 곳으로 되어 있으므로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인 辰國으로 해석되어진다. 여기에서의 辰國도 三韓 全體의 나라로서의 辰國은 아니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6
古之辰國也
『史記』 「朝鮮列傳」에는 ‘眞番旁辰國(혹은 衆國)’이라고 하여 辰國이 보이지만, 版本에 따라, 그리고 學者들의 의견에 따라 辰國, 衆國說로 갈라지고 있다. 또 하나의 辰國기사로는 『三國志』 「東夷傳」韓條 所引의 『魏略』에 ‘初 古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 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 二千餘戶’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衛滿朝鮮 당시에 辰國이 南쪽에 存在하였음은 틀림이 없다.
辰國을 기술하고 있는 『三國志』 「東夷傳」韓條의 기록과 『後漢書』 「東夷列傳」에 수록된 辰國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三國志』에서는 辰韓의 古之辰國으로 파악되는 반면에, 『後漢書』에서는 三韓이전의 全地域을 다스린 存在로 辰國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古代의 政治發展 段階로 보아도 辰韓의 古之辰國으로 보는 『三國志』의 기술이 올바른 견해라고 생각된다.
한가지 공통적인 사실은 辰國은 과거적인 存在라는 점이다. 이것은 辰王이 존재한 당시에는 이미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실체이기 때문에 辰國과 辰王은 쉽게 결부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辰國의 領域을 一部에서 생각하듯이 韓半島 남부 전체로 인식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北의 衛滿朝鮮과 南의 辰國만이 있는 듯이 이해하거나 그렇게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다. 辰國은 어디까지나 여러 國가운데 하나이며 著名한 실체일 뿐이다. 지난 날 어떤 學者는 辰國의 存在를 의심하거나 심지어 假名인듯이 간주하였지만,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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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65
史料에는 歷谿卿을 따라 간 사람들이 二千餘戶로 기록되어 있는 바 당시의 政治集團의 규모가 대체로 二千餘戶정도의 사회였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三國志』 「東夷傳』韓條에 보이는 戶數가 잘 말해준다.
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이 시기에 소위 ‘國’이라는 규모가 물론 大小의 차이가 있지만 平均을 해서 人口數를 헤아려 보면 대체로 萬名 정도의 숫자가 나타난다. 漢四郡의 戶數도 이것과 비슷한 수치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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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66
衛滿朝鮮이 漢의 武帝에게 멸망되고 소위 漢四郡이 成立되기에 이르렀다. 『漢書』 「武帝紀」元封 3年條에는 ‘夏 朝鮮斬其王右渠降 以其地爲樂浪·臨屯·玄菟·眞番郡’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B.C. 108년에 四郡을 둔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漢書』 「五行志」에는 ‘先時 兩將軍 征朝鮮 開三郡’이라는 다른 자료가 보인다. 이로 미루어 樂浪·眞番·臨屯이 설치되고 『漢書』 「地理志」玄菟條에 보이는 바와 같이 玄菟郡은 그 다음해에 설치되었다.
『漢書』『地理志」에 나타난 樂浪郡의 戶數와 人口數는 他郡에 비해서 월등한 郡勢가 돋보이고 있다. 戶數가 ‘六萬二千八百十二’戶이고, 人口數가 ‘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名이며, 屬縣이 25개나 되고 있다. 그러나 四郡 設置후 25년이 지난 昭帝 始元 五年 (B.C.82)에 大變化가 나타나 眞番과 臨屯을 파해서 樂浪과 玄菟에 통합하였다. 앞에서 樂浪의 屬縣이나 戶數, 人口數가 많은 것은 이러한 변화를 겪은 것을 말한다.
여기서 樂浪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어 기원후 313년에 멸망할 때 까지 계속 存在한 것으로 學界에서는 이해한 바 있었다. 그러나 漢四郡의 위치비정과 아울러 과연 樂浪을 지난날 이해한 바 대로 따라야 하는가 하는 反論도 이미 나온 바 있어 이 問題도 向後의 연구를 기대하여야 할 것 같다. 첫째, 樂浪을 포함하여 漢四郡을 韓半島內에서 求하는 說이 있어 오늘의 平壤 일대를 그 中心地로 파악한 바 있었다. 이것은 文獻的인 연구 뿐만 아니라 漢代의 遺物들이 이 地域에서 상당수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둘째, 鄭寅普등 民族主義史家들이 樂浪을 포함하여 四郡을 遼東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그는 一部 漢代의 遺物들이 뒤에 만든 모조품임을 주장하면서 不信하고 있다.
셋째, 考古學上으로 漢代의 遺物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前漢時代의 遺物·遺蹟보다는 後漢代의 遺物들이 대부분임을 다시 注目할 필요가 있다.
넷째, 『三國史記』 「高句麗本紀」등에 漢四郡의 樂浪과는 別個의 樂浪기사가 나오는 바 이것도 다시 연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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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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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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