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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興 2년(A.D.472; 百濟 蓋鹵王 18)에 百濟王 餘慶이
○ 延興 2년(A.D.472; 百濟 蓋鹵王 18)에 百濟王 餘慶註 077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註 078註 079를 올려 말하기를,
“臣註 080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워註 081 승냥이와 이리들에게 길이 막히니,註 082 비록 대대로 신령하신 교화를 받았으나 藩臣의 예를 받들 길이 없었습니다. 天子의 궁궐註 083을 그려 우러러 보면서 달려가는 마음 끝이 없습니다. 소슬한 바람이 살며시 일어나는데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시절의 변화에 잘 조화하시는지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억누를 길 없습니다. 삼가 私署註 084한 冠軍將軍註 085 駙馬都尉註 086 弗斯侯註 087 長史註 088 餘禮註 089와 龍驤將軍註 090 帶方太守 司馬 張茂註 091 등을 보내어 파도에 배를 던져 망망한 바닷길을 더듬게 하였습니다. 하늘에 운명을 맡기고 만분의 일이나마 조그만 정성을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귀신의 감응이 내리고 황제의 威靈이 크게 감싸주어 폐하의 대궐에 도착하여 신의 뜻이 퍼진다면, 아침에 그 말을 듣고서 저녁에 죽는다 하여도 영원히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註) 077
蓋鹵王을 本文에서 餘慶이라 하였는데『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慶司’로 되어 있다. 中國史書에는 2字로 되어 있는 百濟人名의 경우 앞의 1字만을 취하여 여기에 餘氏姓을 冠하고 있는데, 이러한 例는 聖王의 이름 明禯이 餘明으로 된 것과 같다. 이에 착안한 李基東은 中國史書에 나오는 牟都를 餘都에 比定하여 文周王이라고 結論한 바 있다.( 「百濟王室交代論에 대하여」p.30)
그런데 李道學은 삼국왕실의 계위자손 출생연령 비교 및 고대 혼인연령을 비교함과 동시에『三國史記』 「百濟本紀」의 주된 내용에 대한 異說인『三國史記』割註(毗有王의 계보)와『日本書紀』(文周王의 계보) 및『百濟新撰』(武寧王의 계보)의 文獻을 中心으로 왕계의 타당성을 검증하여, 19代 久爾辛王과 20代 毗有王, 21代 蓋鹵王과 22代 文周王, 24代 東城王과 25代 武寧王과의 혈연관계가 夫子關係가 아닌 兄弟關係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이들의 왕위계승이 傍系에 의한 형제상속이며, 이 중 東城王은 武寧王의 父가 아니라 異母弟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pp.4~27) 李道學이 作成한 百濟王系의 正常的인 再構成圖를 參考로 附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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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千寬宇는 百濟始祖의 兄弟說話 中 朱蒙-溫祚의 扶餘氏, 優台-沸流의 優氏라는 自說의 論證과정에서 餘慶(蓋鹵王)의 卽位에는 큰 變動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로는 첫재, 父王 毗有와의 繼承關係가『三國遺事』·『日本書紀』에는 異例的으로 黙殺되어 있는 점 둘째, 『三國史記』蓋鹵王條에는 그 在位 年間의 첫 部分(2~13年)이 空白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古爾系에서 肖古系로 王系가 固定된 近肖古王條의 첫 部分(3~20年)이 空白으로 되어 있는 점과 對比되는 점 셋째, 蓋鹵는『三國史記』에서는 ‘或云近蓋婁’, 『三國遺事』에서는 ‘一云近蓋鹵’라 하였는데, 蓋鹵에 의하여 追念된 先代가 멀리 4代 蓋婁(肖古系·古爾系가 對立되는 直前의 王)였다는 것은 蓋婁가 비록 肖古系=扶餘氏 소속이기는 하나 肖古系와 古爾系의 對立에서 中立的인 位置에 있었던 것을 짐작케 하며, 그것은 이 때에 古爾系=優氏가 강력한 王位候補者로 등장해 있었을 가능성을 示唆하는 점 등이 있다고 하였다.( 「三韓의 國家形成」p.139)
한편 長壽王의 漢城陷落이『三國史記』慈悲麻立干 17年條에 의하면 蓋鹵王 20년으로 되어 있고, 『日本書紀』 「雄略紀」20年條에 의하면 文周王 2年의 일로 되어 있으나 이는 誤謬임이 분명하다.(李丙燾, 『譯註 三國史記』p.393의 註 3)
그리고 坂元義種은 餘慶에 대한 註에서『日本書紀』雄略天皇 5年條에는 百濟의 ‘加須利君’, 同條 所引『百濟新撰』에는 ‘蓋鹵王’이라고 각각 기록되어 있어 朝·日 兩國史料가 일치한다고 하였다.(『東アジア民族史』p.216)
蓋鹵王과 관련하여 그의 王族中心 支配體制 정비에 대한 방증으로서 金錫亨의 見解를 첨가할 수 있다. 즉, 北九州 福岡縣 船上古墳에서 出土된 銘文大刀는 한반도의 기술자가 製作한 것으로서 本刀의 銘文 中의 ‘治天下𤟱□□□齒大王’에 대해 日人學者들은 反正天皇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데 反해, 이를 百濟의 蓋鹵王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古代朝日關係史』pp.242~243) 이렇게 볼 때 七支刀나 船上大刀가 반영해 주는 역사적 사실은 4C에서 5C에 걸쳐 百濟가 일본의 北九州 지역에 侯國을 설치하고 있었다는 자못 중요한 사실로도 해석될 수 있다.(盧重國, 「三國文化가 日本에 끼친 影響」p.440)
<참조>
『宋書』百濟傳 註 18)

餘毗의 뒤를 이은 王은 蓋鹵王이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蓋鹵王條에는 ‘或云近蓋婁’라고도 한다는 기록에 뒤이어 ‘諱慶司 毗有王之長子’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慶은 蓋鹵王임을 알게 된다. 『日本書紀』 雄略天王 5年條에도 ‘百濟加須利君’이라는 기사가 있고, 同條 所引의 『百濟新撰』에도 蓋鹵王이 보이고 있어 일치된 內容임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5 「百濟本紀」 蓋鹵王條.
『日本書紀』卷14 雄略天皇 5年條.
李基白, 「百濟王位繼承考」『歷史學報』11, 1959.
韓松愚, 「百濟王位에 對한 諸說의 硏究」『高大大學院碩士學位論文』1961.
. 津田左右吉, 「百濟の王室の系譜及び王位の繼承と任那に關する日本書紀の記載」『日本古典の硏究』(下), 1950; 「百濟に關する日本書紀の記載」『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8, 1921.
三品彰英, 「日本書紀日韓關係記事考證」『朝鮮學報』14輯, 1959.
木下禮仁, 「日本書紀にみえる百濟史料の史料價値について」『朝鮮學報』21·22合輯, 1961.
笠井倭人, 「『三國遺事』王曆と日本書紀」『朝鮮學報』24輯, 1962; 「中國史書による百濟王統譜」『日本書紀硏究』8號, 1975.
高林實結樹, 「雄略紀における蓋鹵王位年干支について所感」『日本書紀硏究』6, 1972.
坂元義種, 「譯註中國史書百濟傳」『百濟史の硏究』1979.
≪參考文獻≫
『三國史記』卷3 「新羅本紀」3 慈悲麻立干 17年條.
『日本書紀』卷14 「雄略天皇紀」5年·20年條.
金錫亨, 『古代韓日關係史』1967.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3, 1976.
李丙燾, 『譯註 三國史記』1977.
盧重國, 「三國文化가 日本에 끼친 影響」『韓國史』2, 1978.
李基東, 「百濟王室交代論에 대하여」『百濟硏究』13, 1983.
李道學,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韓國史硏究』45, 1984.
坂元義種外 共著, 『東アジア民族史』1974, 平凡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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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78
中國의 南朝 즉, 宋과 外交關係를 맺고 있던 蓋鹵王 당시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北魏에 使臣을 보낸 것은 高句麗의 南下政策에 압박을 느낀 나머지 궁여지책으로서 취해진 적극적 외교방책이었다. 이에 대해서『魏書』 「孝文帝本紀」延興 2年條에는 ‘百濟國遣使奉表請使伐高麗’라고 간단히 나와 있지만, 당시 宋에 4번이나 使臣을 파견했던 蓋鹵王의 입장으로서는 不得已한 조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蓋鹵王은 異例的으로 北魏에 請兵使를 파견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北魏와의 이른바 朝貢을 끊어버리는데, 여기에서 당시의 朝貢이라 표현되는 使行의 性格이 일반적인 朝貢關係이기 보다는 外交的 交涉關係의 性格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pp.164~165)
당시 백제의<對外去來(來使) 頻度表>를 참조하면 앞으로의 이해가 참고가 될 것 같아 여기에 소개해 본다.

<百濟의 去來(來使) 頻度表>
<百濟의 去來(來使) 頻度表>
百濟王 近肖古王
346 ~ 374
近仇首王
375 ~ 383
枕流 王
384 ~
腆支 王
405 ~ 419
久爾 辛王
420 ~ 426
毗有 王
427 ~ 454
蓋鹵 王
455 ~ 474
文周 王
475 ~ 476
東城 王
479 ~ 500
武寧 王
501 ~ 522
聖王
523 ~ 553
威德 王
554 ~ 597
惠王
598
武王
600 ~ 640


東晋

南濟

317~420
421~478
479~501
502~556
557~580
2



1



1(1)



2(1)




3(1)



5(1)



4






 


4(1)




2



3




4(1)




 




 
6(2)
12(2)
4(1)
5
4(1)

北魏
北齊
北周
386~534
550~577
556~581
581~618



 



 



 



 



 



 
1(1)





 



 



 



 

2
2
3



1



4(1)
1(1)
2
2
8
2 1 1(1) 2(1) 3(1) 5(1) 5(1)  4 2 3 11(1) 1 4(1) 44(7)

≪參考文獻≫
『魏書』卷7上 「高祖孝文帝本紀」7上 延興 2年條.
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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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79
文體의 一種으로 事理를 明白히 하여 君主에 告하는 文으로 옛날에는 임금에게 獻言하는 것을 모두 上書라고 했는데, 漢代에 이르러 奏疏를 넷으로 나누어 그 제3을 表라 했다. 北周時代에는 上書를 모두 表라 하고 皇太子 以下에게는 啓라고 하였다. 論諫: 貢獻·推薦·慶賀·慰安·辭謝·彈刻 等을 모두 表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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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0
稱臣은 곧 ‘天子에 대한 諸侯’라는 입장에서 臣禮를 행하기 위한 표현이지만 註 10)에서와 같이 이 때의 稱臣은 後代 明·淸시대의 朝鮮에서와 같은 완전 종속적인 의미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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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1
『三國史記』 「百濟本紀」蓋鹵王 18年條에는 ‘建’字가 ‘立’字로 되어 있는 바, 이는『三國史記』의 撰者가 高麗 太祖(建)를 避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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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2
여기에서 豺狼(고구려)이 길을 막는다 함은 海路를 지칭하는 것이다. 참고로 古代의 半島를 中心으로 한 航路의 大略을 살펴보면,
① 中國 山東半島(萊州)로부터 渤海를 건너 鴨綠江口와 大洞江口에 이르렀던 것(『史記』 「朝鮮列傳」;『舊唐書』 「東夷列傳」高麗國條)
② 中國 山東半島로부터 黃海를 건너 仁川 近海의 德勿島에 이르러 沿岸 各河口에 通하는 것(『三國史記』義慈王 20年條;『新唐書』 「地理志」覊縻州條)
③ 中國의 明洲(浙江省 鄞縣)로부터 (또는 楊州, 登州로부터) 黃海를 건너 黑山島 近海를 거쳐 半島沿岸의 各河口 내지는 朝鮮海峽으로 日本 (北)九州에까지 通하는 것(『宋史』高麗傳;『入唐求法巡禮行記』;『高麗圖經』 「海道」)
등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金庠基, 「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對하여」p.20) 百濟의 경우 南遷 以前에는 주로 ②번 海路를, 南遷 以後에는 주로 ①번 海路를 이용하여 中國의 南朝와 通交하였다고 한다.(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p.177)
한편 이 時代 以後의 일이지만, 484年 內法佐平 沙若思를 南齊에 使臣으로 보냈는데 西海에서 고구려 수군을 만나 저지되었다는『三國史記』東城王 6年條의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의 記錄과, 478年 倭가 宋에 보낸 國書에서 倭의 使臣이 百濟를 거쳐 船舫을 준비하여 宋에 가려 하였으나 매번 高句麗 水軍에 의해 저지되었음을 호소하는『宋書』倭國條의 ‘道逕百濟 裝治船舫 而句驪無道 圖欲見呑 掠抄邊隷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 或通或不’의 기록은 이 당시의 隔路事實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三國史記』卷26 「百濟本紀」4 東城王條; 卷28 「百濟本紀」6 義慈王條.
『史記』卷115 「朝鮮列傳」
『宋書』卷97 「夷蠻列傳」倭國條.
『舊唐書』卷199上 「夷蠻列傳」高麗條.
『新唐書』卷43下 「地理志」覊縻州條.
『宋史』卷487 「外國列傳」高麗條.
『入唐求法巡禮行記』卷4.
『高麗圖經』卷39 「海道」6.
金庠基, 「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對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1948, 乙酉文化社.
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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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3
구름모양처럼 우뚝 솟은 宮闕 즉, 天子의 궁궐을 비유한 말이다. 다른 例로 天子의 御車를 ‘雲駕’라고 한 例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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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4
사사로이 官職을 준다는 뜻이니, 北魏 朝廷의 任官을 받지 아니한 것을 가리킨다.『南齊書』百濟國傳의 ‘假行寧朔將軍臣姐瑾等四人 …… ’의 ‘假行’도 같은 뜻이며, 또한 ‘行’·‘行職’·‘行署’ 等으로 表記하기로 한다. ‘行’字를 쓴 예로는『宋書』百濟國傳 末尾의 ‘ …… 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 …… ’ 등의 用例를 들 수 있다. 이는 모두 中國王朝에서 正式으로 임명을 받지 아니한 官職을 뜻하며, 百濟의 王은 臣下들에게 假授한 爵號를 正式으로 除授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관례였다.
<참조>
『南齊書』百濟傳 註 2)
假行
百濟王이 對中國과 관련하여 臣下에게 주로 官職을 잠정적으로 주었을 때 行이라는 字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中國의 同意가 있게 되면 비로서 行이라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이러한 例는 이미 『宋書』百濟國傳에서 그 例가 보이거니와 具體的인 事例는 여기 『南齊書』百濟傳에 상당수 실려 있다. 行이라는 記錄 이외에도 行職, 行署, 私署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百濟와 中國과의 관계를 성찰하는데 참고가 되는 점이다.
≪參考文獻≫
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坂元義種, 「古代東亞細亞の國際關係-和親·封册·使節よりみたる-」(上·下), 『ヒストリア』49·50, 1967~1968; 「五世紀の日本と朝鮮-中國南朝の封册と關聯して-」『史林』52卷 5號, 1969; 「三國史記と百濟本紀の史料批判-中國諸王朝との交涉記事を中心に-」『百濟史の硏究』1979, 塙書房.
江畑武, 「四~六世紀の朝鮮三國と日本-中國との册封をめぐっ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谷川道雄, 「東アジア世界形成期の史的構造-册封體制を中心に-」『隋唐帝國と東アジア世界』1979, 唐代史硏究會.
≪參考文獻≫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百濟國條.
『宋書』卷97 「夷蠻列傳」百濟國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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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5
『宋書』 「百官志」征虜將軍條에 보면 冠軍將軍은 第3品官으로서, 冠軍이란 칭호는 楚 懷王이 宋義 卿子冠軍으로 삼은 것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楚懷王以宋義爲卿子冠軍 冠軍之名 自此始也’라는 기록이 있다.
南宋의 將軍官品에 대해서는 坂元義種이『宋書』 「百官志」의 將軍號를 토대로 만든 <表>가 좋은 참조가 된다.(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pp.56~57; 「古代東アジアの國際關係」pp.24~25)

<南宋의 將軍官品表>
<南宋의 將軍官品表>
第 一 品 第 二 品 第 三 品 第 四 品




大 將 軍



驃騎 將軍
車騎 將軍
衛 將軍
諸大 將軍




四征 將軍
四鎭 將軍

四安 將軍
四平 將軍
征虜 將軍
冠軍 將軍
輔國 將軍
龍驤 將軍
寧朔 將軍
五威 將軍
五武 將軍





≪參考文獻≫
『宋書』卷39 「百官志」29上 征虜將軍條.
李基東, 「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對하여」『歷史學報』62, 1974.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古代東アジアの國際關係」『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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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6
『宋書』 「百官志」奉朝請條에 보면
奉朝請 無員 亦不爲官 漢東京罷省三公·外威·宗室·諸侯 多奉朝請 奉朝請者 奉朝會請召而已 晋武帝亦以宗室外威爲奉車·駙馬·騎都尉 而奉朝請焉 元帝爲晋王 以參軍爲奉車都尉 掾·屬爲駙馬都尉 行參軍 舍人爲騎都尉 皆奉朝請 後省奉車·騎都尉·唯留駙馬都尉·奉朝請 永初已來 以奉朝請選雜 其尙主者唯拜駙馬都尉 三都尉並漢武帝置 孝建初 奉朝請省 駙馬都尉·三都尉秩比二千石
이라 되어 있고, 또『周書』末尾에 보면 駙馬都尉는 第6品官이라 되어 있는데 坂元義種은 弗斯侯가 百濟王의 女壻인 듯 하다고 하였다.(『東アジア民族史』p.235)
≪參考文獻≫
『宋書』卷40 「百官志」30下 奉朝請條.
坂元義種, 『東アジア民族史』卷1,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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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7
弗斯侯는 蓋鹵王代보다는 後代의 일지만 東城王이 永明 8年(東城王 12年, 490)에 南齊에 國書를 보내 臣下들에게 王·侯·將軍 등의 爵號 除授를 청했을 때 그 國書 중 ‘ …… 廣武將軍餘固 忠効時務 光宣國政 今假行建威將軍·弗斯侯 …… (『南齊書』百濟國傳)’라 한 데서도 보인다.
『南齊書』의 ‘面中王’·‘八中侯’·‘弗斯侯’ 등 王侯名은 大王인 百濟王이 그 밑에 ‘王’·‘侯’를 거느린 것을 의미하며,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pp.1~14) 이러한 ‘弗斯’·‘面中’ 등 地名의 王·侯는 바로 ‘二十二檐魯’의 一部가 아닐까 하는 推定도 있다.(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試論」pp.206~207)
弗斯·面中 等의 地名 位置比定은 末松保和에서 부터 試圖되어, (『任那興亡史』pp.20~60) 坂元義種도 本文에 대한 譯註에서 末松保和의 견해를 수용하는 등(『東アジア民族史』p.221)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최근 暫定的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견해를 내놓은 千寬宇는 그 위치比定에서 ‘弗斯’는 ‘伐首只一唐津’일 것이라 하였고, (앞의 논문, p.206) 末松保和·坂元義種은 ‘比斯伐-全州’ 혹은 ‘夫沙-昇州樂安’일 것이라 하였다.(末松保和, 앞의 책, p.241; 坂元義種, 앞의 논문, p.221)
本文의 譯文에서 ‘弗斯侯와 長史’라 하였는데 이 뜻은 ‘弗斯의 侯이면서 동시에 (中央官職으로서는 幕府의 幕僚인) 長史’ 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百濟國條.
千寬宇,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東洋學』9, 1979.
末松保和, 『任那興亡史』1960.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東アジアの民族史』卷1,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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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8
坂元義種, 『南齊書』 「百官志」에 보면 ‘凡公督府置佐 長史·可馬各一人 諮議參軍二人’이라 되어 있으므로, 長史는 三公府·都督府·將軍府 等의 屬僚였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百濟의 外交使節團의 長官職으로 추측되며, 百濟王의 外交使節 중 上層部는 長史·可馬·參軍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고,(『東アジア民族史』pp.214~235) 徐榮洙 역시 三國의 去使에 대해 論하면서 高句麗 長壽王이 晋에 長史 高翼을 보내고 또 그 職이 百濟의 경우에도 빈번히 나오는 것으로 보아, 魏晋時代 이후의 中國에서와 같이 대체로 王公府의 屬官으로 外交使臣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하고, 이어서 百濟의 경우 長史를 제외하고서는 一品인 佐平, 五品인 扞率 등 高位職이 通交使臣으로 파견되었고, 특히 沙·燕氏 등 百濟의 八大姓 貴族이 通交使臣으로 파견된 것으로 보아 당시 使臣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pp.174~175)
한편 最近의 한 硏究에서 中國의 正史 東夷傳에 자주 나오는 ‘長史’·‘可馬’·‘參軍’ 등의 官職에 대하여 이는 中國의 南北朝時代에 周邊國家와의 관계를 成立·維持시켰던 幕府體制의 幕僚였으며, 이들을 통하여 高句麗·百濟·新羅도 결국 中國의 幕府體制에 동참한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金翰奎, 「南北朝時代의 中國的 世界秩序와 古代韓國의 幕府制」)
<참조>
『宋書』百濟傳 註 6)
長史
이에 관한 百濟側의 뚜렷한 文獻記錄은 보이지 않으나 百濟가 中國에 使節團을 보낼때 종종 長史라는 名稱이 나오고 있다. 中國의 『南齊書』 「百官志」에 長史·司馬 등의 이름이 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百濟의 長史는 外交使節團의 책임자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中國의 歷代 諸國의 長史職에 관한 것을 보면 秦·漢代에는 丞相 및 太尉(大司馬)에 屬官(秘書長)으로서 이 官職이 있었다. 또 별도로 秦代의 地方官으로서 郡守의 屬官(幕僚長)인 이 官職이 있었고, 漢代에는 邊郡에만 郡丞(郡次長)으로서 이 官職이 있었다.
歷朝別로 본다면 다음과 같다.
[隋] 京兆, 河南兩府의 少尹(次官)의 地位.
都護府의 長官인 都護의 屬官.
[唐] 都護府의 長官인 都督의 屬官.
都護府의 長官인 都護의 屬官.
州(郡)의 長官인 刺史의 屬官.
[宋]州長官인 知州事의 屬官.
또 별도로 魏·晋이래 王府 및 公主府의 別當으로서 이 官職이 있었다. 단, 元代는 內史로 稱했다.
이와 같은 外交使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長史’라는 官職의 存在는 高句麗關係 史料에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册府元龜』 「外臣部」의 ‘義熙九年 高麗國王 高璉(一作高連)遣長史高翼奉表 獻赭白馬 以璉爲高麗王樂浪郡公’과 같은 기사가 그 例이다.
≪參考文獻≫
『册府元龜』卷963 「外臣部」封册條.
全海宗, 『韓中關係史硏究』1970, 一潮閣.
徐榮洙, 「三國과 南北朝交涉의 性格」『東洋學』11, 1981.
徐永大, 「高句麗平壤遷都의 動機-王權 및 中央集權的 支配體制의 强化過程과 關聯하여-」『韓國文化』2,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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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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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89
註 18)에서 밝혔듯이 坂元義種은 百濟王의 女壻인 듯 하다고 하였는데 百濟의 王姓이 餘氏(扶餘氏)라는 점에서 餘禮는 王族임에 틀림없다. 한편 이 외에 王族으로서 餘氏의 官爵 要請에 관한 기사는『宋書』百濟國傳에 蓋鹵王(4年, 458)이 宋에 表를 보내어 賜除를 요청한 11名 中에 行冠軍將軍 右賢王 餘紀, 行征虜將軍 左賢王 餘昆, 行征虜將軍 餘暈 , 行輔國將軍 餘都와 餘乂, 行龍驤將軍 餘爵, 行寧朔將軍 餘流, 行建武將軍 餘婁 등 8名이 있으며, 東城王(12年, 490) 때의 사실이지만『南齊書』百濟國傳의 南齊에 보낸 表文에서 賜除를 요청한 4名 中에 建威將軍 八中侯 餘古, 建威將軍 餘歷, 廣武將軍 餘固 등 3名이 있다. 이 중 특히 餘紀와 餘昆이 각기 右賢王·左賢王의 王號를 칭하고 있는 데서 이 당시 王族中心의 專制化 노력 및 百濟王의 지위가 ‘王·侯’들의 위에 군림하는 이른바 ‘大王’으로 格上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pp.68~71)
즉, 그는 이 王·侯의 號를 百濟王室의 적극적인 地方支配 방식의 一環으로 보고, 또 倭王이 南朝로부터 爵號 요청에 대한 承認을 받게 되자, 百濟는 倭에 대항하기 위한 一策으로서 새롭게 세력권 내에 들어온 全南地域에 대한 지배권을 南朝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爵號賜除를 요청했다고 본 것이다.(앞의 논문, pp.100~102)
이에 대하여 盧重國은 毗有王代 以後로부터 中國式 爵號 내지 官名이 등장한 이래 王·侯 등의 爵號가 儀禮的이요 形式的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爵號를 받을 수 있을 정도라면 受爵者의 현실적인 세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점에서 百濟王 이외에 王·侯 등의 칭호를 갖는 세력이 다수 나타난다는 것은 그만큼 王權의 對貴族統制力이 弱化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것은 百濟의 王權이 蓋鹵王 이후 東城王代까지 심히 동요된 시기였다는 점과도 대응되고, 특히 지방지배의 적극적인 방식으로서 王侯制를 採用했다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pp.67~68) 그는 더 나아가 海上交易의 주도권은 ‘王族’ 등 중앙귀족의 수중에 있었겠지만 그들의 인정이나 보호하에 地方의 유력자들도 對外交易에 종사하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爵號의 수여에는 對外交易에 있어서의 旣得權의 인정이라는 의미까지 포함될 수 있으므로 地方勢力成長의 한 증좌로도 볼 수 있다고 하였다.(앞의 논문, pp.112~113)
이 方面에 대한 國內硏究는 극히 미진한 실정으로 日本의 末松保和·坂元義種에 의해 주도되어 온 느낌이다. 最近에 王·侯·太守制를 專論한 論文이 나왔다.(梁起錫, 「五世紀 百濟의 ‘王’·‘侯’·‘太守制’에 대하여」)
≪參考文獻≫
『宋書』卷97 「夷蠻列傳」百濟國條.
『南齊書』卷58 「東南夷列傳」百濟國條.
盧重國, 「百濟王室의 南遷과 支配勢力의 變遷」『韓國史論』4, 1978.
梁起錫, 「五世紀 百濟의 王·侯·太守制에 대하여」『史學硏究』38, 1984.
坂元義種, 「五世紀の百濟大王とその王·侯」『朝鮮史硏究會論文集』4,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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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0
龍驤將軍 역시 第3品에 해당된다.
『魏書』百濟傳 註 17)의 將軍官品에 대한 <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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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91
『南齊書』百濟國傳에는 本文의 帶方太守 이외에 樂浪太守·朝鮮太守 등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實職이 아니라 爵號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千寬宇, 「灤河 下流의 朝鮮」p.41) 百濟의 遼西·華北進出論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를 華西地方의 朝鮮·樂浪·帶方일 것이라고 하였다.(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p.10) 그리고 長茂를 中國人일 것이라고 한 견해가 있다.(李基白, 「百濟王位繼承考」p.39)
≪參考文獻≫
李基白 「百濟王位繼承考」『歷史學報』11, 1959.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白山學報』11, 1971.
千寬宇, 「灤河 下流의 朝鮮」『史叢』21·22合輯,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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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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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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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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