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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평양성에서 전사하여 고국의 들판에 장사지내다 ( 371년 10월 23일 )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병사 30,000명을 거느리고 평양성(平壤城)註 001을 공격해 왔다. 왕이 군대를 출정시켜 백제군을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게 되어 이 달 23일에 세상을 떠났다.註 002 고국(故國)의 들註 003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蓋鹵王)註 004이 위(魏)에 표(表)를 보내어 말하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라고 하였는데 지나친 말이다.註 005
註) 001
평양성(平壤城) : 북한학계에서는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 남평양성으로 상정한 다음 재령강 상류의 장수산성과 신원 도시유적 일대로 비정하지만(손영종, 176-183쪽), 제반 자료를 종합하면 지금의 평양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閔德植; 車勇杰; 임기환 2007; 김지희, 18-19쪽; 권순홍, 69-74쪽). 이 평양성의 후보지로는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 대동강 북안의 청암리토성이나 대성산성 등을 들 수 있지만, 특정 성곽으로 비정할 만한 논거가 확보된 상태는 아니다.
〈참고문헌〉
손영종, 1990,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閔德植, 1989, 「故國原王代 平壤城의 位置에 관한 試考」, 『용암 차문섭교수 화갑기념 사학논총』, 신서원
車勇杰, 1993, 「高句麗 前期의 都城」, 『국사관논총』 48
임기환, 2007, 「고구려 평양 도성의 정치적 성격」, 『韓國史硏究』 137
김지희, 2016, 「高句麗 故國原王의 平壤 移居와 南進」, 『韓國史論』 62
권순홍, 2018, 「고구려 도성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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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2
백제왕이 …… 세상을 떠났다 : 같은 기사가 본서 권24 백제본기2 근초고왕 26년 9월조에도 보인다. 백제본기의 기사 내용이 훨씬 상세하다는 점에서 백제측 사료를 원전으로 볼 수도 있지만(이강래, 87-91쪽; 전덕재, 250-252쪽), 고국원왕의 사망일이 명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측 사료가 원전일 가능성도 높다(임기환, 41-42쪽; 정호섭, 40-41쪽).
〈참고문헌〉
이강래, 1996, 『三國史記典據論』, 민족사
전덕재, 2018, 『삼국사기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임기환, 2006, 「고구려본기 전거 자료의 계통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42
정호섭, 201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4-5세기의 기록에 대한 검토」, 『신라문화』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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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3
고국의 들(故國之原) : 고국원왕의 장지이다. ‘국(國)’자는 ‘나라’나 ‘도성’을 뜻하는데, 여기에서는 ‘도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국(故國)’은 ‘옛 도읍’이라는 뜻으로 본서의 고구려본기에서는 평양 천도 이후 그 이전 도성이었던 국내성 지역을 일컫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고국지원’이나 고국원왕은 평양 천도 이후에 사용된 표현이며, 국내성 시기에 고국원왕의 왕호는 국강상왕(國岡上王)이나 국원왕(國原王), 장지는 ‘국강상’이나 ‘국원’이었다(鄭早苗, 96쪽; 이병도 1977: 2012, 292쪽; 高寬敏, 115~119쪽; 임기환, 34~39쪽). ‘국강(國岡)’은 ‘도성의 언덕’이라는 뜻인데, 태왕의 초월적 위상을 나타내기 위해 언덕이라는 우월한 입지에 왕릉을 조영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여호규, 461-480쪽). 고국원왕릉은 우산하992호분, 우산하3319호분, 천추총, 태왕릉 등으로 비정되는데, 우산하992호분으로 비정하는 연구자가 가장 많다(정호섭, 73-74쪽 〈표9〉 참조). 한편 북한학계에서는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성을 재령강 상류의 신원 도시유적 일대로 비정한 다음 안악3호분을 고국원왕릉으로 비정하지만(채희국, 110쪽; 손영종, 288-292쪽), 그의 무덤이 도성인 국내성에 있었던 것은 거의 명확하다. 본서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 ‘고국원’이 기재된 것으로 보아 본서 찬자도 고국곡의 정확한 의미나 구체적인 위치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盧泰敦,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이병도, 2012, 『(두계이병도전집 11) 국역 삼국사기』, 한국학술정보
채희국, 1985, 『고구려력사연구』,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손영종, 1990,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高寬敏, 1996, 『“三国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
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
여호규, 2010, 「高句麗의 太王號 제정과 國岡型 왕릉입지의 성립」, 『역사문화연구』 35
정호섭, 2011, 『고구려 고분의 조영과 제의』, 서경문화사
鄭早苗, 1979, 「高句麗王系小考」, 『旗田巍博士古稀朝鮮歷史論集』 (上), 龍溪書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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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04
개로왕(蓋鹵王) : 백제의 제21대 왕으로 고구려의 침공 위협을 느끼자 북위에 외교문서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외교문서의 이용은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백제전에 실렸는데, 본서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18년조에도 전재되어 있다. 개로왕에 대해서는 본서 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즉위년조 참조바로가기
註) 005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 지나친 말이다 : 본서의 찬자가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백제전의 기사를 보고 논평한 내용이다. 실제 『위서』 백제전에 실린 북위에 보낸 백제 개로왕의 외교문서에는 “효참쇠수(梟斬釗首)”라는 구절이 나온다. 본서의 찬자가 고국원왕의 전사와 관련한 국내측 전승과 『위서』 백제전을 비교한 다음, 백제 개로왕의 주장이 과장되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백제 개로왕의 주장은 고구려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함께 종전의 승리를 과장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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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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