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치니, 조선의 相 路人註 036과 相 韓陰註 037과 尼谿相 參 ·將軍 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 단독으로 將卒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하고 [韓]陰·[王]唊 ·路人이 모두 도망하여 漢나라에 항복하였다. 路人은 도중에서 죽었다.
註) 036
朝鮮相 路人, 相 韓陰, 尼谿相 參, 將軍 王唊에 대해서 顔師古는 朝鮮相 路人, 相 韓陰, 尼谿相 參, 將軍 王唊으로 읽어서 모두 4人이라 했다. 그러나 應劭는『漢書音義』에서 尼谿를 별도의 人名으로 보고 尼谿와 相 參을 구분하여 두 사람으로 읽었다. 따라서 應劭는 모두 5人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衛滿朝鮮이 西漢에 敗亡한 뒤, 路人의 아들 最(路人은 그 전에 死亡)는 溫陽侯로, 韓陰은 荻苴侯, 參은 澅淸侯, 王唊은 平州侯에 봉해졌는데, 尼谿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고 諸侯로 봉해졌다는 기록도 없다. 따라서 尼谿相은 官職名으로, 參은 이름으로 보는 것이 옳다.
或說에는 尼谿를 濊의 反切音으로 보아 濊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海東繹史』 「衛滿朝鮮」 元封 2年條) 한편, 『史記』 「侯者年表」에 ‘朝鮮尼谿相’이라는 말이 있음을 예로 들면서 尼谿는 어느 한 곳의 地名이며, 위에 보이는 相이란 관직들은 中國制度의 卿相職을 모방한 것이라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衛氏朝鮮興亡考」 pp. 91∼93)
『漢書』 「朝鮮傳」 應劭註에는 ‘戎狄不知官紀 故皆稱相’이라 한 말이 있다. 이 말은 곧 朝鮮이 中國의 制度를 모방하면서 그 性格을 구분치 않고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朝鮮相이라는 官職名은 다른 곳에도 나타난다.『三國志』 「東夷傳」 韓傳의 裵松之註 所引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雞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眞蕃不相往來
朝鮮相 歷谿卿은 마지막 왕인 右渠가 未破時에 諫하였던 모양이나 들어주지 않자 동쪽 辰國으로 갔다는 것이다. 결국, 朝鮮相은 王 밑에 있었던 가장 最高의 지위였을 것이다. 또한 하나이지 둘은 아니었을 것이며, 末期에 나오는 朝鮮相 路人은 朝鮮相 歷谿卿이 떠난 뒤에 그 자리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중앙의 要職으로서의 朝鮮相과 軍의 최고책임자로서의 王唊의 직책을 감안해 볼 때 相 韓陰과 尼谿相 參도 중앙의 책임있는 위치의 長일 것으로 보인다.
『史記』 「建元以來侯者年表」를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國 名侯 功元 封太 初 已 後
平州 [索隱] 表在梁父以朝鮮將, 漢兵至, 隆, 侯.B.C. 108
三年四月丁卯. 侯唊元年.
如淳曰, 音頰 四年, 侯唊薨, 無後, 國除.
  
萩苴[索隱] 音狄蛆表在勃海.以朝鮮相, 漢兵至圍之, 降, 侯.三年四月, 侯朝鮮相韓陰元年. 
澅淸[索隱]表在齊. 澅, 音獲. 水名, 在齊. 又音乎 卦反. 以朝鮮尼谿相, 使人殺其王右渠, 來降, 侯.三年六月丙辰, 侯朝鮮尼谿相侯㕘元年. 
[索隱] 音機. 表在河東.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四年三月癸未, 侯張䧄歸義元年[索隱]韋昭云, 䧄姑落反. 六年, 侯張䧄使朝鮮謀反.
死, 國除.
  
涅陽[索隱]表在齊.
志屬南陽.
以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其子侯.四年三月壬寅, 康侯子最元年.B.C. 103
太初二年, 侯最死. 無後, 國除.
≪參考文獻≫
『史記』卷20 「建元以來侯者年表」 8.
『漢書』卷95 「朝鮮傳」 應劭 註.
『漢書音義』
『三國志』卷30 「東夷傳」 韓條 所引 裵松之註.
安鼎福, 『東史綱目』附卷下 「考異」 尼谿相參.
李丙燾, 「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崔夢龍, 「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 -衛滿朝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金貞培, 「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1986.
리지린, 『고조선연구』1964.
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바로가기
註) 037
相 韓陰은 相 앞에 아무런 명칭이 없다. 이는 기록할 때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朝鮮相 路人, 尼谿相 參 등과 함께 中央의 중요직책의 長이었을 것이다.
<참조>
『史記』 「朝鮮列傳」 註 36)
朝鮮相 路人
朝鮮相 路人, 相 韓陰, 尼谿相 參, 將軍 王唊에 대해서 顔師古는 朝鮮相 路人, 相 韓陰, 尼谿相 參, 將軍 王唊으로 읽어서 모두 4人이라 했다. 그러나 應劭는『漢書音義』에서 尼谿를 별도의 人名으로 보고 尼谿와 相 參을 구분하여 두 사람으로 읽었다. 따라서 應劭는 모두 5人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衛滿朝鮮이 西漢에 敗亡한 뒤, 路人의 아들 最(路人은 그 전에 死亡)는 溫陽侯로, 韓陰은 荻苴侯, 參은 澅淸侯, 王唊은 平州侯에 봉해졌는데, 尼谿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고 諸侯로 봉해졌다는 기록도 없다. 따라서 尼谿相은 官職名으로, 參은 이름으로 보는 것이 옳다.
或說에는 尼谿를 濊의 反切音으로 보아 濊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海東繹史』 「衛滿朝鮮」 元封 2年條) 한편, 『史記』 「侯者年表」에 ‘朝鮮尼谿相’이라는 말이 있음을 예로 들면서 尼谿는 어느 한 곳의 地名이며, 위에 보이는 相이란 관직들은 中國制度의 卿相職을 모방한 것이라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衛氏朝鮮興亡考」 pp. 91∼93)
『漢書』 「朝鮮傳」 應劭註에는 ‘戎狄不知官紀 故皆稱相’이라 한 말이 있다. 이 말은 곧 朝鮮이 中國의 制度를 모방하면서 그 性格을 구분치 않고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朝鮮相이라는 官職名은 다른 곳에도 나타난다.『三國志』 「東夷傳」 韓傳의 裵松之註 所引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雞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眞蕃不相往來
朝鮮相 歷谿卿은 마지막 왕인 右渠가 未破時에 諫하였던 모양이나 들어주지 않자 동쪽辰國으로 갔다는 것이다. 결국, 朝鮮相은 王 밑에 있었던 가장 最高의 지위였을 것이다. 또한 하나이지 둘은 아니었을 것이며, 末期에 나오는 朝鮮相 路人은 朝鮮相 歷谿卿이 떠난 뒤에 그 자리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중앙의 要職으로서의 朝鮮相과 軍의 최고책임자로서의 王唊의 직책을 감안해 볼 때 相 韓陰과 尼谿相 參도 중앙의 책임있는 위치의 長일 것으로 보인다.
『史記』 「建元以來侯者年表」를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國 名侯 功元 封太 初 已 後
平州[索隱] 表在梁父以朝鮮將, 漢兵至, 隆, 侯.B.C. 108
三年四月丁卯. 侯唊元年.
如淳曰, 音頰 四年, 侯唊薨, 無後, 國除.
  
萩苴[索隱] 音狄蛆表在勃海.以朝鮮相, 漢兵至圍之, 降, 侯.三年四月, 侯朝鮮相韓陰元年. 
澅淸[索隱]表在齊. 澅, 音獲. 水名, 在齊. 又音乎 卦反. 以朝鮮尼谿相, 使人殺其王右渠, 來降, 侯.三年六月丙辰, 侯朝鮮尼谿相侯㕘元年. 
[索隱] 音機. 表在河東.以朝鮮王子, 漢兵圍朝鮮, 降, 侯.四年三月癸未, 侯張䧄歸義元年[索隱]韋昭云, 䧄姑落反. 六年, 侯張䧄使朝鮮謀反.
死, 國除.
  
涅陽[索隱]表在齊.
志屬南陽.
以朝鮮相路人, 漢兵至, 首先降. 道死, 其子侯.四年三月壬寅, 康侯子最元年.B.C. 103
太初二年, 侯最死. 無後, 國除.
≪參考文獻≫
『史記』卷20 「建元以來侯者年表」 8.
『漢書』卷95 「朝鮮傳」 應劭 註.
『漢書音義』
『三國志』卷30 「東夷傳」 韓條 所引 裵松之註.
安鼎福, 『東史綱目』附卷下 「考異」 尼谿相參.
李丙燾, 「衛氏朝鮮興亡考」『韓國古代史硏究』1976.
崔夢龍, 「韓國古代國家形成에 대한 一考察 -衛滿朝鮮의 例-」『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1983.
金貞培, 「衛滿朝鮮의 國家的 性格」『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1986.
리지린, 『고조선연구』1964.
三上次男, 『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1966.
바로가기
주제분류
  •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디지털역사자료 인용방법
닫기
1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오류신고
닫기
사이트 하단의 ‘오류신고 확인’ 메뉴를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오류유형: 오자·탈자, 링크 오류, 이미지 오류, 기타)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자료명
중국정사조선전
자료위치
자료상세화면
캡차 이미지
자료 선택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