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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에서 박제상을 불태워 죽이다
제상이 홀로 방 안에서 자다가 늦게 일어났는데, 미사흔으로 하여금 멀리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사람이 묻기를,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늦게 일어났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어제 배를 타 나른하고 피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제상이〕 방에서 나오자, 〔그제서야〕 미사흔이 도망간 것을 알아챘다. 이에 제상을 포박하고 배를 저어 〔미사흔을〕 추격하였다. 때마침 연무가 자욱하여 어두컴컴해짐에 따라 멀리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인들이〕 제상을 왕이 있는 곳에 보내자, 〔왜왕이〕 곧바로 목도(木島)로註 192 유배보냈다가 얼마 안 있어 사람을 시켜 장작불에 불을 질러 〔제상의〕 신체를 태운 후에 그의 목을 베었다.註 193
註) 192
목도(木島):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바로가기
註) 193
〔왜인들이〕 제상을 왕이 있는 곳에 보내자, … 그의 목을 베었다: 본 기록과 달리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 제상의 죽음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이 전한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제상을 옥에 가두고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너희 나라 왕자를 보냈느냐?’고 하자, 〔제상이〕 대답하기를,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지금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게 하려고 한 것뿐이니, 감히 무엇을 그대에게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왜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지금 너는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출 것이지만,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후한 녹(祿)으로 상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으며,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爵祿)은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왜)왕이 노하여 제상의 다리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걷게 하였다지금 갈대 위에 피 흔적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전한다. 〔왜왕이〕 다시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냐?’라고 하자, 〔제상이〕 ‘나는 계림의 신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뜨겁게 달군 쇠 위에 세워 놓고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라고 하니, 〔제상이〕 ‘나는 계림의 신하다.’라고 하였다. 왜왕이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木島)에서 불태워 죽였다.” 한편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攝政) 5년 봄 3월조에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 미사흔)이 신라로 돌아가는 것을 황태후가 허락하였다는 기록 다음에 “그래서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함께 보냈다. 모두 대마(對馬)에 이르러 서해(鉏海)의 수문(水門)에서 묵었다. 그때 신라의 사자(使者)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등은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미질허지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풀을 묶어 허수아비를 만들어 미질허지의 침상에 놓고, 거짓으로 병에 걸린 척하며 습진언에게 고하여, ‘미질허지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간다.’라고 하였다. 습진언은 사람을 보내 병자(病者)를 보게 하였다. 곧 속은 것을 알고, 신라의 사자 3인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이에 신라로 가서 도비진(蹈鞴津)에 진을 치고, 초라성(草羅城; 경남 양산)을 함락시키고 돌아왔다.”고 전한다. 신라에서 국가를 위해 순국(殉國)한 영웅들의 일화를 가무극 또는 연극의 형태로 각색하여 공연하였다. 박제상의 일화를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으로 각색하여 가무극이나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였는데, 아마도 이때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과 같은 스토리가 정립된 것으로 이해된다(전덕재, 2020, 『한국 고대 음악과 고려악』, 학연문화사, 64쪽).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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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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