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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征伐
겨울 10월 己亥 초하루 辛丑 和珥津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곧 큰 바람이 순조롭게 불고 배는 물결을 따라 갔으므로 노젓는 데 힘들이지 않고 바로 신라에 도착하였다. 이 때 배를 실은 물결이 멀리 나라 가운데까지 미쳤으니 곧 하늘과 땅의 신들이 모두 도왔음을 알겠다. 신라왕은 이에 두려워 떨며 몸둘 바를 모른 채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신라의 건국 이래 일찍이 바닷물이 나라에 넘친 일을 듣지 못했다. 만약 天運이 다했다면 나라가 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가 바다에 가득차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났다. 북과 나팔소리가 나니 산천이 모두 떨었다. 신라왕이 멀리서 바라보고 심상치 않은 군대가 장차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것으로 여겨 두려워하며 싸울 뜻을 잃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神國이 있는데 日本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왕이 있어 天皇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神兵일 것이니 어찌 병사를 일으켜 막을 수 있겠는가”라 하고 곧 흰 기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고註 001 圖籍註 002을 봉인하여 왕의 배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인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로는 하늘과 땅과 같이 길이 엎드려 飼部註 003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틈없이 봄 가을로 말의 털을 씻는 빗과 말채찍註 004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가 먼 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調를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쪽의 해가 다시 서쪽에서 떠오르지 않는다면, 또한 阿利那禮河 註 005가 오히려 거꾸로 흐르고, 냇돌이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봄 가을의 조공을 거르고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않거나 게을리하면 하늘과 땅의 신이 함께 토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은 “신라왕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황후는 “처음에 금은의 나라를 주겠다고 한 신의 가르침을 받들고 3軍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이미 財國을 얻었고 또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했으니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항복의 결박을 풀고 飼部로 삼았다. 드디어 그 나라안에 들어가 보물 창고를 봉하고 圖籍文書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워 후세의 증거로 삼았다. 그래서 그 창은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 있다. 이에 신라왕 波沙寐錦 註 006은 微叱己知波珍干岐 註 007를 볼모로 하여 金銀·彩色綾羅·縑絹을 배 80척에 싣고 官軍을 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신라왕은 항상 80척의 調를 日本國에 바쳤는데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 때 高麗와 百濟의 두 나라 국왕註 008이 신라가 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軍勢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軍營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약하여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蕃國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內官家屯倉註 009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三韓이다. 황후가 신라로부터 돌아왔다.
註) 001
흰 끈을 목에 건다는 표현은 곧 自殺하고 싶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항복을 뜻하는 것이다.바로가기
註) 002
토지의 도면과 인민의 호적으로, 이를 封印하여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권의 상실을 의미한다.바로가기
註) 003
말을 기르고 훈련시키며 馬具와 말먹이 등을 관장하는 부서인데, 飼部가 되겠다는 표현은 항복하여 비천한 일을 하겠다는 뜻으로 곧 신라가 일본의 복속국이 되겠다는 의미이다.바로가기
註) 004
말의 털을 빗는 솔과 말채찍은 말을 기르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 이를 바치겠다는 것은 곧 비천한 일을 自任하는 것이다.바로가기
註) 005
경주의 閼川 또는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백제 도성하의 阿利水로 보기도 하는데 막연히 강을 일컫는 보통명사로 보기도 한다.바로가기
註) 006
波沙는 『三國史記』의 신라 5대 婆沙尼師今과 이름이 같지만 동일인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寐錦은 「광개토왕비」「智證大師碑」 등에도 보이는데 尼師今과 같은 왕호의 일종이다.바로가기
註) 007
微叱己知는 신라 제15대 奈勿王의 아들인 未斯欣(또는 美海)을 일컫는 것이라 생각되며, 波珍干岐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4위인 波珍湌이다. 5년 3월조에는 微叱許智伐旱이라고 보이며 欽明天皇 21년 9월조에는 신라 使人으로 彌至己知奈末이 보이는데 同名異人이라 생각된다.바로가기
註) 008
고려는 물론 高句麗를 가리키는 것이며 『日本書紀』에 고구려의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神功皇后 攝政前紀 仲哀天皇 9년의 이른바 신라 征討 기사의 맨끝인 이 부분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으며, 事實을 기재한 것은 雄略紀 20년(478)의 고구려의 백제 공격기사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 보고 있다. 백제의 이름도 이 곳에서 처음 보이는데 이어서 神功皇后 攝政 46년에 斯麻宿禰의 傔人이 백제에 도착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 46년조의 기사를 『日本書紀』의 紀年을 120년 뒤로 내려서 丙寅年(366)의 일이라고 한다면 일본과 백제의 최초의 교섭기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바로가기
註) 009
屯倉을 'みやけ'라 하는데, 'みやけ'는 御宅 즉 屋舍·倉庫에 대한 敬稱이다. 『日本書紀』에서 말하는 屯倉은 국가제도로서의 'みやけ'를 일컫는 것으로 大化 前代에는 朝廷 직할의 농업경영지 또는 直轄領이라고 할 수 있다. 官家는 屯倉과는 별개의 것으로 欽明紀 등에 보이는 用例는 모두 백제나 任那諸國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군사기지라기보다는 일본 朝廷에 대한 貢納國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바로가기
국가명
  • 신라(新羅)
  • 고구려(高句麗)
  • 백제(百濟)
주제분류
  •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디지털역사자료 인용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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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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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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