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낭비성을 침공하다
(
629년
08월
)
51년(629) 8월에 왕이 대장군(大將軍) 용춘(龍春)註 001과 서현(舒玄),註 002 부장군(副將軍)註 003 유신(庾信)註 004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註 005을 침공하였다.註 006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陣)을 펼쳤는데, 군세(軍勢)가 매우 왕성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별로 싸울 마음이 사라졌다. 유신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갖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끌어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라고註 007 하였으니, 내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말에 올라타 검을 빼들고 적진(敵陣)을 향하여 곧바로 나아갔다. 적진에 세 번 들어갔다가 세 번 나왔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의 목을 베거나 깃발을 뽑았다. 군사들이 승기를 타서 북을 치며 진격하여 5천여 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그 성이 이에 항복하였다.註 008
서현(舒玄):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上)조에서는 「김유신비(金庾信碑)」에 김소연(金逍衍)이라고 전한다고 하였고,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는 서운잡간(庶云迊干)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무력(武力)이다. 부인은 진흥왕의 친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본서 김유신(상)조에 따르면, 일찍이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고, 마음에 들어 야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 태수(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혼인을 반대하며 그녀를 별채에 가두었으나, 갑자기 벼락이 쳐서 혼란을 틈타 만명은 창문으로 빠져나가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가서, 진평왕 17년(595)에 유신을 낳았다고 한다.
서현은 만노군 태수를 거쳐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다. 여기서 대량주는 대야주(大耶州: 경남 합천)를 가리킨다. 본래 서현이 진평왕 때에 하주(下州)의 주치(州治)인 대야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의 사령관이자 하주의 행정을 총괄하는 대야성군주(大耶城軍主)에 임명되었는데,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을 지은 김장청(金長淸)이 ‘대량주도독 안무대량주제군사’라고 부회한 것으로 이해된다. 본서 김유신(하)조에서 서현이 양주총관(良州摠管)으로서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그 예봉을 꺾어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전하는데, 양주는 오늘날 경남 양산으로서 삽량주(歃良州)라고도 부른다. 서현이 대량주(대야주) 군주(총관)를 역임한 사실을 양주총관을 역임한 것으로 착각하여 잘못 기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현은 진평왕 51년(629)에 용춘(龍春) 등과 함께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서현이 어느 관등까지 승진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본서 김유신(상)조와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즉위년(661)조에서는 잡찬(迊飡: 소판(蘇判))이라고 전하고,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즉위년(654)조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김유신조에서는 각간(角干; 각찬(角飡))이라고 전하고 있다. 서현의 아들로서 유신 이외에 흠순(欽淳: 흠춘(欽春))이 있었고. 둘째 딸 문희(文姬: 문명부인(文明夫人))는 김춘추와 혼인하여 법민(法敏: 문무왕) 등을 낳았다(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권』, 푸른역사, 266~268쪽).
서현은 만노군 태수를 거쳐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다. 여기서 대량주는 대야주(大耶州: 경남 합천)를 가리킨다. 본래 서현이 진평왕 때에 하주(下州)의 주치(州治)인 대야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의 사령관이자 하주의 행정을 총괄하는 대야성군주(大耶城軍主)에 임명되었는데,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을 지은 김장청(金長淸)이 ‘대량주도독 안무대량주제군사’라고 부회한 것으로 이해된다. 본서 김유신(하)조에서 서현이 양주총관(良州摠管)으로서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그 예봉을 꺾어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전하는데, 양주는 오늘날 경남 양산으로서 삽량주(歃良州)라고도 부른다. 서현이 대량주(대야주) 군주(총관)를 역임한 사실을 양주총관을 역임한 것으로 착각하여 잘못 기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현은 진평왕 51년(629)에 용춘(龍春) 등과 함께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서현이 어느 관등까지 승진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본서 김유신(상)조와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즉위년(661)조에서는 잡찬(迊飡: 소판(蘇判))이라고 전하고,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즉위년(654)조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김유신조에서는 각간(角干; 각찬(角飡))이라고 전하고 있다. 서현의 아들로서 유신 이외에 흠순(欽淳: 흠춘(欽春))이 있었고. 둘째 딸 문희(文姬: 문명부인(文明夫人))는 김춘추와 혼인하여 법민(法敏: 문무왕) 등을 낳았다(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권』, 푸른역사, 266~268쪽).
유신(庾信):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무력(武力)이고 아버지는 서현(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친동생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그의 여동생 문희(文姬: 문명부인(文明夫人))가 김춘추(태종무열왕)와 혼인하여 법민(法敏: 문무왕) 등을 낳았다. 595년에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고, 15세에 화랑이 되었다. 장성하여 김춘추와 합심하여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 1일에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김유신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41~권제43 열전제1~제3 김유신조가 참조된다.
낭비성(娘臂城): 종래에 낭비성을 청주 부근에 위치한 성으로 비정하거나(李元根),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위치한 칠중성(七重城)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金侖禹). 그러나 낭비성을 청주 부근에 위치한 성으로 볼 때, 629년 당시 고구려가 청주 부근까지 진출하여 영역으로 편제하였다고 이해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칠중성을 혹은 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부른다고 전하는 사실을 주목하여, 난은별과 낭비는 음운상으로 서로 유사하다고 보고, 낭비성을 칠중성으로 비정하였는데, 음운학적으로 분석하여 칠중성으로 비정한 견해 역시 그리 설득력을 지녔다고 보기 어렵다.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 한산주조에 비성군(臂城郡)을 또는 마홀(馬忽)이라고 불렀다고 전하는데, 오늘날 포천시 군내면으로 비정되는 견성군(堅城郡)의 고구려 때 이름이 마홀군(馬忽郡)이었다. 현재 비성군을 마홀군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낭비성을 포천시 군내면 청성산에 위치한 반월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널리 수용되고 있다(徐榮一; 박종서).
〈참고문헌〉
李元根, 1976, 「百濟 娘臂城考」, 『史學志』 10
金侖禹, 1987, 「娘臂城과 娘子谷城考; 娘臂城의 位置를 中心으로」, 『史學志』 21
徐榮一, 1995, 「高句麗 娘臂城考」, 『史學志』 28
박종서, 2010, 「고구려 娘臂城 위치에 대한 검토」, 『국학연구』 17
〈참고문헌〉
李元根, 1976, 「百濟 娘臂城考」, 『史學志』 10
金侖禹, 1987, 「娘臂城과 娘子谷城考; 娘臂城의 位置를 中心으로」, 『史學志』 21
徐榮一, 1995, 「高句麗 娘臂城考」, 『史學志』 28
박종서, 2010, 「고구려 娘臂城 위치에 대한 검토」, 『국학연구』 17
註) 002
서현(舒玄):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上)조에서는 「김유신비(金庾信碑)」에 김소연(金逍衍)이라고 전한다고 하였고,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가락국기조에는 서운잡간(庶云迊干)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무력(武力)이다. 부인은 진흥왕의 친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본서 김유신(상)조에 따르면, 일찍이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고, 마음에 들어 야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 태수(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혼인을 반대하며 그녀를 별채에 가두었으나, 갑자기 벼락이 쳐서 혼란을 틈타 만명은 창문으로 빠져나가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가서, 진평왕 17년(595)에 유신을 낳았다고 한다.
서현은 만노군 태수를 거쳐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다. 여기서 대량주는 대야주(大耶州: 경남 합천)를 가리킨다. 본래 서현이 진평왕 때에 하주(下州)의 주치(州治)인 대야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의 사령관이자 하주의 행정을 총괄하는 대야성군주(大耶城軍主)에 임명되었는데,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을 지은 김장청(金長淸)이 ‘대량주도독 안무대량주제군사’라고 부회한 것으로 이해된다. 본서 김유신(하)조에서 서현이 양주총관(良州摠管)으로서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그 예봉을 꺾어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전하는데, 양주는 오늘날 경남 양산으로서 삽량주(歃良州)라고도 부른다. 서현이 대량주(대야주) 군주(총관)를 역임한 사실을 양주총관을 역임한 것으로 착각하여 잘못 기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현은 진평왕 51년(629)에 용춘(龍春) 등과 함께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서현이 어느 관등까지 승진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본서 김유신(상)조와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즉위년(661)조에서는 잡찬(迊飡: 소판(蘇判))이라고 전하고,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즉위년(654)조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김유신조에서는 각간(角干; 각찬(角飡))이라고 전하고 있다. 서현의 아들로서 유신 이외에 흠순(欽淳: 흠춘(欽春))이 있었고. 둘째 딸 문희(文姬: 문명부인(文明夫人))는 김춘추와 혼인하여 법민(法敏: 문무왕) 등을 낳았다(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권』, 푸른역사, 266~268쪽).
서현은 만노군 태수를 거쳐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다. 여기서 대량주는 대야주(大耶州: 경남 합천)를 가리킨다. 본래 서현이 진평왕 때에 하주(下州)의 주치(州治)인 대야에 주둔한 정군단(停軍團)의 사령관이자 하주의 행정을 총괄하는 대야성군주(大耶城軍主)에 임명되었는데,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을 지은 김장청(金長淸)이 ‘대량주도독 안무대량주제군사’라고 부회한 것으로 이해된다. 본서 김유신(하)조에서 서현이 양주총관(良州摠管)으로서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그 예봉을 꺾어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전하는데, 양주는 오늘날 경남 양산으로서 삽량주(歃良州)라고도 부른다. 서현이 대량주(대야주) 군주(총관)를 역임한 사실을 양주총관을 역임한 것으로 착각하여 잘못 기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서현은 진평왕 51년(629)에 용춘(龍春) 등과 함께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서현이 어느 관등까지 승진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본서 김유신(상)조와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즉위년(661)조에서는 잡찬(迊飡: 소판(蘇判))이라고 전하고,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즉위년(654)조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김유신조에서는 각간(角干; 각찬(角飡))이라고 전하고 있다. 서현의 아들로서 유신 이외에 흠순(欽淳: 흠춘(欽春))이 있었고. 둘째 딸 문희(文姬: 문명부인(文明夫人))는 김춘추와 혼인하여 법민(法敏: 문무왕) 등을 낳았다(김태식, 2002,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1권』, 푸른역사, 266~268쪽).
註) 004
유신(庾信): 금관국(金官國)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무력(武力)이고 아버지는 서현(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친동생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그의 여동생 문희(文姬: 문명부인(文明夫人))가 김춘추(태종무열왕)와 혼인하여 법민(法敏: 문무왕) 등을 낳았다. 595년에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고, 15세에 화랑이 되었다. 장성하여 김춘추와 합심하여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 1일에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김유신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41~권제43 열전제1~제3 김유신조가 참조된다.
註) 005
낭비성(娘臂城): 종래에 낭비성을 청주 부근에 위치한 성으로 비정하거나(李元根),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위치한 칠중성(七重城)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金侖禹). 그러나 낭비성을 청주 부근에 위치한 성으로 볼 때, 629년 당시 고구려가 청주 부근까지 진출하여 영역으로 편제하였다고 이해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칠중성을 혹은 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부른다고 전하는 사실을 주목하여, 난은별과 낭비는 음운상으로 서로 유사하다고 보고, 낭비성을 칠중성으로 비정하였는데, 음운학적으로 분석하여 칠중성으로 비정한 견해 역시 그리 설득력을 지녔다고 보기 어렵다. 본서 권제37 잡지제6 지리4 고구려 한산주조에 비성군(臂城郡)을 또는 마홀(馬忽)이라고 불렀다고 전하는데, 오늘날 포천시 군내면으로 비정되는 견성군(堅城郡)의 고구려 때 이름이 마홀군(馬忽郡)이었다. 현재 비성군을 마홀군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낭비성을 포천시 군내면 청성산에 위치한 반월산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널리 수용되고 있다(徐榮一; 박종서).
〈참고문헌〉
李元根, 1976, 「百濟 娘臂城考」, 『史學志』 10
金侖禹, 1987, 「娘臂城과 娘子谷城考; 娘臂城의 位置를 中心으로」, 『史學志』 21
徐榮一, 1995, 「高句麗 娘臂城考」, 『史學志』 28
박종서, 2010, 「고구려 娘臂城 위치에 대한 검토」, 『국학연구』 17
〈참고문헌〉
李元根, 1976, 「百濟 娘臂城考」, 『史學志』 10
金侖禹, 1987, 「娘臂城과 娘子谷城考; 娘臂城의 位置를 中心으로」, 『史學志』 21
徐榮一, 1995, 「高句麗 娘臂城考」, 『史學志』 28
박종서, 2010, 「고구려 娘臂城 위치에 대한 검토」, 『국학연구』 17
註)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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