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에 철령위 설치의 중지를 요청하는 표문을 보내다
명(明)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자 하니, 우왕이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보내어 표문으로 청하기를,
“하늘은 넓고 커서 만물을 덮어 키움에 남김이 없으며, 제왕이 일어남에 영토는 반드시 바로잡아지니, 이에 비루한 간청을 다하여 위로 성총을 번거롭게 하고자 합니다. 저희 나라는 먼 땅에 궁벽하게 있어서, 땅이 작고 얼굴에 난 사마귀와 같으니, 땅의 척박하기가 돌밭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물며 동쪽 귀퉁이로부터 북쪽 변방까지 산과 바다를 끼고 있어서 형세가 매우 편벽됩니다. 조종으로부터 전해내려온 데에 구역이 정해져 있으니, 철령(鐵嶺)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文州)·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함주(咸州)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요(遼)의 건통(乾統) 7년(1107)에 동여진(東女眞)이 난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점거하니, 예왕(睿王, 예종)이 요(遼)에 고하고 토벌할 것을 청하여 병사를 보내어 쳐서 회복하고서, 함주에서 공험진 등까지 성을 쌓았습니다. 원(元) 초기 무오(戊午, 1258)년에 이르러 몽골의 산길대왕(散吉大王, 산지대왕)·보지관인(普只官人, 부지르노얀)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정복하던 때에, 본국의 정주(定州)의 반란민인 탁청(卓靑), 용진현(龍津縣) 사람인 조휘(趙暉)가 화주(和州) 이북 지방을 가지고 나아가 항복하였습니다. 금(金)의 요동(遼東) 함주로(咸州路) 부근의 심주(瀋州)에 쌍성현(雙城縣)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본국의 함주 근처 화주의 옛날에 쌓은 작은 성 2개를 모호하게 주청하여 마침내 화주를 가지고 쌍성이라고 모칭하고, 조휘를 쌍성총관(雙城摠管)으로, 탁청을 천호(千戶)로 삼아 인민을 관할하게 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1356) 사이에 원 조정에 아뢰어, 윗 항의 총관과 천호 등의 직을 혁파하고, 화주 이북을 다시 본국에 속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주현의 관원을 제수하여 인민을 관할하게 하였습니다. 반적으로 인하여 침탈당했다가 대방(大邦)에 아뢰어 복귀시킨 것입니다. 지금 성지를 받들어 보니,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에서 개원(開元)에 속하였으나, 관할하는 군민들도 요동(遼東)에 속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철령의 산은 왕경(王京)으로부터 거리가 겨우 300리이며, 공험진을 변방의 경계로 삼은 것은 1, 2년이 아닙니다. 다행히도 〈선왕이〉 밝은 시대를 맞이하여 제후의 법도에 맞추어 직임을 수행하여 그 땅이 이미 〈저희〉 판도에 들어왔습니다. 다시 미천한 제 몸에 이르러, 성은을 입어 특별히 10행의 조서를 내리시어 한결같은 인(仁)으로써 대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시고, 두터운 덕으로 어루만져 주셔서, 몇 개 주의 땅을 하국(下國)의 땅으로 삼아 주십시오. 신은 삼가 더욱 나라를 다시 만들어주신 은혜[再造之恩]에 감읍하며 만수무강을 항상 축원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외교문서
문서식
표(表)
발신국
고려
발신주체
국왕
수신국
명
수신주체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