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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장군 8인과 김품석 부부의 유해를 교환하다 ( 648년 )
이에 사람을 시켜 백제 장군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우리 군주(軍主) 품석(品釋)과註 172 그의 아내 김씨(金氏)의註 173 유해(遺骸)가 너희 나라 감옥에 묻혀 있고,註 174 지금 너희 비장(裨將)註 175 8명이 나에게 잡혀 엉금엉금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자기가 태어난 굴이 있는 언덕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을 생각하여,註 176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지금 너희가 죽은 두 사람의 유해를 보내 살아 있는 8명과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하였다. 백제 중상(仲常)註 177 또는 충상(忠常)이라고도 쓴다 좌평(佐平)이註 178 왕에게 말하기를, “신라인의 유해를 남겨 두어도 이로울 게 전혀 없으니,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신라인이 신의를 저버리고 우리 〔장군〕 8명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사리에 맞지 않음이 저들에게 있고[曲在彼], 사리에 맞음이 우리에게 있으니[直在我],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품석 부부의 유해를 파내 관에 넣어 보냈다. 유신이 말하기를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고 하여도 무성한 수풀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으며,註 179 티끌 하나가 쌓인다고 하여도 큰 산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고는 8명이 살아 〔백제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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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72
우리 군주(軍主) 품석(品釋):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선덕왕 11년 8월조에 품석이 이찬으로서 대야성도독(大耶城都督)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본서 권제47 열전제7 죽죽조에는 ‘대야성도독김품석(大耶城都督金品釋)’이라 전한다. 그런데 본 기록에 642년 당시 김품석이 ‘군주(軍主)’였다고 전하는 것을 통해 642년 당시 김품석의 정확한 직임이 대야성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본기와 죽죽조의 기록은 중대에 김품석의 직임이 도독이라고 개서(改書)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근래에 문무왕 3년(663)에 당나라에서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에 책봉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신라에서 주의 장관을 군주 대신 도독(都督)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전덕재, 2021, 「신라 중고기 말·중대 초 縣制의 실시와 지방관에 대한 고찰」, 『신라문화』 58). 이 견해에 따르면, 신문왕 5년(685)에 6정체제(停體制)를 새롭게 정비하여 각 군단 사령관을 총관(摠管)이 아니라 장군(將軍)이라고 부른 사실 및 삼국통일전쟁 중에 대규모 정벌을 위해 임시로 주(州) 단위로 행군군단을 편성한 다음, 복수의 인물을 ‘~주총관(州摠管)’ 또는 ‘~주행군총관(州行軍摠管)’이라고 불렀던 관행 등을 고려하여, 주(州)의 장관을 총관이라고도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한동안 주의 장관을 총관 또는 도독이라고 부르다가 원성왕 원년(785)에 주의 장관을 오로지 도독이라 부르는 것으로 규정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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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73
그의 아내 김씨(金氏):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古陁炤娘)을 가리킨다.바로가기
註) 174
우리 군주(軍主) 품석(品釋)과 … 너희 나라 감옥에 묻혀 있고: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7년(660) 7월 13일조에 법민(法敏)이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으면서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서 옥중(獄中)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하였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안에 있구나.”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바로가기
註) 175
비장(裨將): 앞 구절에서는 장군(將軍)이라 표현하였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5년(554) 가을 7월조에 백제 성왕(聖王)을 죽인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삼년산군(三年山郡) 비장(裨將)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본서 권제43 열전제3 김유신(하)조에 672년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유신의 아들 원술(元述)이 비장으로, 본서 권제44 열전제4 사다함조에 562년 대가야를 정복할 때에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참전하였다고 전하며, 본서 권제50 열전제10 견훤조에 견훤이 비장을 역임하였다고 전한다.
석문전투에서 의복(義福)과 춘장(春長), 효천(曉川), 의문(義文) 등을 상장군(上將軍) 또는 장군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를 통해 원술이 장군 아래의 부장(副將)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 8년(648)조에 백제 장군 의직(義直)이 신라 서쪽 변방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습격한 다음, 다음달에 옥문곡(玉門谷)으로 나아갔다가 신라군에게 패배하였다고 전한다. 옥문곡전투에서 사로잡힌 백제 비장 8명은 바로 의직 휘하의 부장(副將)들로 추정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을 비장(裨將)이라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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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76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 머리를 돌린다는 말을 생각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들의 본성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편에 “태공(太公)이 〔제(齊)나라의〕 영구(營丘)에 봉해진 이래 5대에 이르기까지 살았으나 모두 주(周)나라에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음악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즐기고, 예는 그 근본을 잊지 않는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여우는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태어난〕 언덕에 바르게 돌리는데, 〔이것이〕 바로 어진 것이다.’고 하였다[大公封於營丘 比及五世 皆反葬於周. 君子曰 樂樂其所自生 禮不忘其本. 古之人有言曰 狐死正丘首 仁也].”라고 전한다.
한편 진(晉)나라의 곽의공(郭義恭)이 찬술한 『광지(廣志)』에 “여우는 죽을 때에 (자기가 태어난) 산에 머리를 돌리고, 표범은 죽을 때에 (자기가 태어난) 산에 머리를 돌리는데,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狐死首山 豹死首山 不忘本也].”라고 전한다. 김장청(金長淸)이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을 찬술하면서 『예기』와 『광지』 등에 전하는 내용을 참조하여 ‘我以狐豹首丘山之意’라고 서술하였고, 본서의 찬자가 김유신열전을 찬술하면서 이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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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77
중상(仲常): 충상(忠常)이라고도 쓴다. 백제 의자왕(義慈王) 때 좌평(佐平)의 한 사람이다. 진덕왕(眞德王) 2년(648)에 신라 김유신이 백제 장군 8명과 대야성(大耶城) 군주(軍主)인 김품석(金品釋) 부부의 유해를 교환하자고 제의하자 이를 받아들이도록 의자왕에게 건의하였다. 의자왕 20년(660)에는 황산벌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사로잡혀서 일길찬(一吉湌) 관등을 받고 신라의 총관(摠管)이 되었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8년(661) 2월에는 아찬(阿湌)으로서 백제부흥운동군을 물리치기 위해 사비성(泗沘城)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 상주총관(上州摠管)이 되었다.바로가기
註) 178
좌평(佐平): 백제 16관등 가운데 최고 관등이다. 『주서(周書)』 권49 백제전에 “백제의 벼슬에는 16품이 있는데, 좌평 5명은 1품, 달솔 30명은 2품이다.”라고 전하므로, 좌평은 원래 관등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후에 좌평은 국가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 귀족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면서 상좌평(上佐平), 중좌평(中佐平), 하좌평(下佐平)으로 분화되었고, 이 가운데 상좌평이 의장으로서 좌평회의를 주재하였다. 그리고 7세기 이후에 좌평은 관직으로 전환되어 6좌평이 임명되었다고 본다(김기섭, 2000, 249~259쪽), 구체적으로 무왕대에 6좌평이 설치되었다는 견해(정동준, 2013, 274~283쪽; 양기석, 2018, 274~279쪽)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한편 좌평이라는 이름은 『주례(周禮)』에 나오는 6관 가운데 가장 높은 정무관(政務官)인 하관(夏官) 사마(司馬)의 임무였던 “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린다[以佐王 平邦國].”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이기동, 1996, 164~165쪽). 좌평은 자주색 옷을 입고 은꽃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
〈참고문헌〉
이기동, 1996, 『백제사연구』, 일조각
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정동준, 2013, 『동아시아 속의 백제 정치제도』, 일지사
양기석, 2018, 『백제 정치사의 전개과정』, 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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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79
잎사귀 하나가 … 해를 끼치지 않으며: 원문은 ‘一葉落 茂林無所損’이다. 본서 권제45 열전제5 박제상조에 “마치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아무런 손해될 것이 없다[若九牛之落一毛 無所損也].”라고 전하는 것과 동일한 뜻으로 이해된다.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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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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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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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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