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군과 석토성 등에서 싸우다
(
648년
08월
)
〔태화(太和)〕 2년(649)註 001 가을 8월에 백제장군 은상(殷相)註 002이 석토성(石吐城)註 003 등 7성을 공격해 오니,註 004 왕이 유신과 죽지(竹旨)註 005·진춘(陳春)註 006·천존(天存)註 007 등 장군에게 명하여 나아가 그들을 막게 하였다. 3군(三軍)註 008을 나누어 다섯 방면으로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서로의 승부가 열흘이 지나도록 나지 않았다. 엎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고, 흐르는 피가 절굿공이를 띄울 정도에 이르렀다.註 009
이년(二年): 원문에는 ‘태화(太和)’가 없으나 앞 권에 태화(太和) 원년(元年) 기사가 나오므로 추가하였다. 이병도는 여기의 ‘2년’을 진덕왕 2년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기록은 3년의 오기(誤記)가 아니면 진덕왕 즉위 익년에 고친 태화(太和) 연호의 2년으로써 한 것이 아닌가 추찰된다고 하였다(이병도, 1997, 625쪽). 진덕왕은 즉위 2년에 태화(太和)로 개원하였다. 즉 태화 2년은 진덕왕 3년이므로 이해의 전쟁 기사는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와 모두 같은 해인 649년(진덕왕 3년; 의자왕 9년)조에 기술되어 있어 본 열전과 일치하고 있다. 이재호본에서는 〔진덕왕〕 2년(648)으로 오역하였고, 북한본과 신호열본에서는 다른 언급이 없이 2년 가을로 번역하였다(정구복 외, 2012, 665쪽).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은상(殷相): 백제의 장군이다.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 8월조에는 백제장군으로 되어 있는데,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 9년조에는 ‘좌장(左將)’으로 나오고 있다. 그의 직명은 백제본기 쪽이 보다 사료적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므로(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665쪽), 좌장(左將)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은상은 진덕왕 3년(649) 8월 좌장(左將)으로서 정병 7,000명을 이끌고 신라의 석토(石吐) 등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고, 도살성(道薩城)에서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패배하였다. 한편 본서 권제42 열전제2의 뒷 기사에는 ‘좌평(佐平)’ 은상 등을 목 베었다고 되어 있다.
석토성(石吐城): 석토성은 일반적으로 충청북도 진천군 문안산성(文案山城)에 비정되고 있다(진천군지편찬위원회, 1974).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도계를 이루는 차령산맥이었는데, 백제군은 차령산맥을 넘어 신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석토성은 충청북도 내에 위치하여야 한다. 석토성으로 비정되는 문안산성은 해발 400m에 위치하고 있고 둘레는 약 700m이며, 정상부를 깎아 만든 내성과 삼태기 식으로 된 외성이 결합된 형태의 토축성이다(민덕식, 1983, 52쪽).
〈참고문헌〉
진천군지편찬위원회, 1974, 『진천군지』
민덕식, 1983, 「高句麗의 道西縣城考」, 『사학연구』 36
〈참고문헌〉
진천군지편찬위원회, 1974, 『진천군지』
민덕식, 1983, 「高句麗의 道西縣城考」, 『사학연구』 36
백제장군 은상(殷相)이 … 공격해 오니: 백제 의자왕은 정변 이후 국왕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세력과 더불어 대립하지는 않았지만 지지하지도 않았던 세력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무왕대부터 추진하던 적극적인 대당외교와 신라와의 전쟁 성과는 국정을 이끌 중요한 명분이었다. 645년 이후 대당외교의 비중이 줄어든 상태에서 신라와의 전쟁은 이전보다 더 큰 비중으로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박서영, 2016, 39쪽). 649년 8월 백제군의 은상이 신라의 석토성 등 7성을 공격한 것은 지난해(648년)에 김유신이 백제 영역 내의 옥성(獄城) 등 12성과 진례성(進禮城) 등 9성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전으로 파악된다(이문기, 2016, 224쪽).
〈참고문헌〉
박서영, 2016, 「백제 의자왕대의 대외정책 -신라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백제연구』 64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참고문헌〉
박서영, 2016, 「백제 의자왕대의 대외정책 -신라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백제연구』 64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죽지(竹旨):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죽만(竹曼)이라고도 한다. 진덕여왕 때에 활동하였던 술종(述宗)이 삭주(朔州) 도독(都督)으로 부임할 때, 죽지령(竹旨嶺)에서 거사(居士)와 만난 뒤 낳았다고 하여 죽지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죽지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7 문무왕 11년 6월조 참조.
진춘(陳春): 신라의 장군으로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조에 전하는 진순(眞純)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진순(陳純)이라고도 하였다. 진춘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 8월조 참조.
천존(天存): 신라 진골 출신의 고관으로 진덕왕~문무왕대에 활약한 인물이다. 천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 8월조 참조.
3군(三軍): 3군 체제는 중군, 좌군, 우군으로 부대를 세 개로 나누어 편성하고 행군하는 것이다. 이러한 3군 체제는 일종의 야전군 편성의 기본이었다(전덕재, 1997, 50쪽). 신라가 어느 시기부터 3군 체제를 운용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7세기를 전후해 당의 행군제도를 수용하면서 3군 체제는 신라군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이상훈, 2018, 130쪽). 이러한 3군은 기본적으로 3개로 나누어진 부대를 의미하지만, 출정한 전체 부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648년 김유신이 상주장군(上州將軍)에 임명되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당시 신라군의 주력군은 상주정(上州停)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이문기, 2016, 224쪽).
〈참고문헌〉
전덕재, 1997, 「신라 하대 鎭의 설치와 성격」, 『군사』 35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이상훈, 2018, 「삼국통일기 신라군의 행군편성 구조」, 『한국고대사탐구』 30
〈참고문헌〉
전덕재, 1997, 「신라 하대 鎭의 설치와 성격」, 『군사』 35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이상훈, 2018, 「삼국통일기 신라군의 행군편성 구조」, 『한국고대사탐구』 30
註) 001
이년(二年): 원문에는 ‘태화(太和)’가 없으나 앞 권에 태화(太和) 원년(元年) 기사가 나오므로 추가하였다. 이병도는 여기의 ‘2년’을 진덕왕 2년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기록은 3년의 오기(誤記)가 아니면 진덕왕 즉위 익년에 고친 태화(太和) 연호의 2년으로써 한 것이 아닌가 추찰된다고 하였다(이병도, 1997, 625쪽). 진덕왕은 즉위 2년에 태화(太和)로 개원하였다. 즉 태화 2년은 진덕왕 3년이므로 이해의 전쟁 기사는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와 모두 같은 해인 649년(진덕왕 3년; 의자왕 9년)조에 기술되어 있어 본 열전과 일치하고 있다. 이재호본에서는 〔진덕왕〕 2년(648)으로 오역하였고, 북한본과 신호열본에서는 다른 언급이 없이 2년 가을로 번역하였다(정구복 외, 2012, 665쪽).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註) 002
은상(殷相): 백제의 장군이다.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 8월조에는 백제장군으로 되어 있는데,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 9년조에는 ‘좌장(左將)’으로 나오고 있다. 그의 직명은 백제본기 쪽이 보다 사료적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므로(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665쪽), 좌장(左將)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은상은 진덕왕 3년(649) 8월 좌장(左將)으로서 정병 7,000명을 이끌고 신라의 석토(石吐) 등 일곱 성을 쳐서 빼앗았고, 도살성(道薩城)에서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에게 패배하였다. 한편 본서 권제42 열전제2의 뒷 기사에는 ‘좌평(佐平)’ 은상 등을 목 베었다고 되어 있다.
註) 003
석토성(石吐城): 석토성은 일반적으로 충청북도 진천군 문안산성(文案山城)에 비정되고 있다(진천군지편찬위원회, 1974).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은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도계를 이루는 차령산맥이었는데, 백제군은 차령산맥을 넘어 신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석토성은 충청북도 내에 위치하여야 한다. 석토성으로 비정되는 문안산성은 해발 400m에 위치하고 있고 둘레는 약 700m이며, 정상부를 깎아 만든 내성과 삼태기 식으로 된 외성이 결합된 형태의 토축성이다(민덕식, 1983, 52쪽).
〈참고문헌〉
진천군지편찬위원회, 1974, 『진천군지』
민덕식, 1983, 「高句麗의 道西縣城考」, 『사학연구』 36
〈참고문헌〉
진천군지편찬위원회, 1974, 『진천군지』
민덕식, 1983, 「高句麗의 道西縣城考」, 『사학연구』 36
註) 004
백제장군 은상(殷相)이 … 공격해 오니: 백제 의자왕은 정변 이후 국왕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세력과 더불어 대립하지는 않았지만 지지하지도 않았던 세력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무왕대부터 추진하던 적극적인 대당외교와 신라와의 전쟁 성과는 국정을 이끌 중요한 명분이었다. 645년 이후 대당외교의 비중이 줄어든 상태에서 신라와의 전쟁은 이전보다 더 큰 비중으로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박서영, 2016, 39쪽). 649년 8월 백제군의 은상이 신라의 석토성 등 7성을 공격한 것은 지난해(648년)에 김유신이 백제 영역 내의 옥성(獄城) 등 12성과 진례성(進禮城) 등 9성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전으로 파악된다(이문기, 2016, 224쪽).
〈참고문헌〉
박서영, 2016, 「백제 의자왕대의 대외정책 -신라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백제연구』 64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참고문헌〉
박서영, 2016, 「백제 의자왕대의 대외정책 -신라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백제연구』 64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註) 005
죽지(竹旨):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죽만(竹曼)이라고도 한다. 진덕여왕 때에 활동하였던 술종(述宗)이 삭주(朔州) 도독(都督)으로 부임할 때, 죽지령(竹旨嶺)에서 거사(居士)와 만난 뒤 낳았다고 하여 죽지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죽지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7 문무왕 11년 6월조 참조.
註) 006
진춘(陳春): 신라의 장군으로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조에 전하는 진순(眞純)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진순(陳純)이라고도 하였다. 진춘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 8월조 참조.
註) 007
천존(天存): 신라 진골 출신의 고관으로 진덕왕~문무왕대에 활약한 인물이다. 천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 8월조 참조.
註) 008
3군(三軍): 3군 체제는 중군, 좌군, 우군으로 부대를 세 개로 나누어 편성하고 행군하는 것이다. 이러한 3군 체제는 일종의 야전군 편성의 기본이었다(전덕재, 1997, 50쪽). 신라가 어느 시기부터 3군 체제를 운용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7세기를 전후해 당의 행군제도를 수용하면서 3군 체제는 신라군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이상훈, 2018, 130쪽). 이러한 3군은 기본적으로 3개로 나누어진 부대를 의미하지만, 출정한 전체 부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648년 김유신이 상주장군(上州將軍)에 임명되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당시 신라군의 주력군은 상주정(上州停)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이문기, 2016, 224쪽).
〈참고문헌〉
전덕재, 1997, 「신라 하대 鎭의 설치와 성격」, 『군사』 35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이상훈, 2018, 「삼국통일기 신라군의 행군편성 구조」, 『한국고대사탐구』 30
〈참고문헌〉
전덕재, 1997, 「신라 하대 鎭의 설치와 성격」, 『군사』 35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이상훈, 2018, 「삼국통일기 신라군의 행군편성 구조」, 『한국고대사탐구』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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