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첩자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다
(
648년
08월
)
이에 도살성(道薩城)註 010 아래에 주둔하며 말을 쉬게 하고 군사들을 잘 먹여 다시 공격을 꾀하였다.註 011 이때 물새가 동쪽에서 날아와註 012 유신의 군막을 지나가자, 장수와 병사들이 이를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註 013고 여겼다. 유신은 “이는 족히 괴이한 것이 아니다.”註 014라고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 반드시 백제인이 염탐하러 올 것이니, 너희들은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체하고 감히 누구인지 물어보지 말라.”고 말하였다. 또 사람을 시켜 진영 안을 돌아다니며, “진지를 굳게 지키며 움직이지 마라. 내일 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결전할 것이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첩자가 이를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알렸다.註 015
도살성(道薩城):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한주 흑양군조에 “도서현(都西縣)은 본래 도서현(道西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도안현(道安縣)이다.”라고 전하는데, 이에 근거하여 도살성을 현재 충북 증평군 도안면에 해당하는 도서현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민덕식, 1983; 양기석 등, 2001, 34쪽). 이밖에 천안의 옛 지명인 도솔(兜率)과 ‘도살(道薩)’의 음이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도살성을 천안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이병도, 1977, 57쪽) 또는 천안 목천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성주탁, 1990; 2004, 139쪽)도 제기되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설총(薛聰)의 아들을 살중업(薩仲業)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신라에서 ‘살(薩)’과 ‘설(薛)’이 서로 통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웅주조에서 서림군(西林郡)이 본래 백제 설림군(舌林郡)이었다고 전하는 것에서 경덕왕 때에 ‘설(舌)’을 ‘서(西)’로 고쳐 개칭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한편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에 해당하는 하슬라(何瑟羅)를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서(河西)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사례들을 참고하건대, 도살성(道薩城)을 ‘도설성(道薛城)’ 또는 ‘도서성(道西城)’이라고 표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도살성을 증평군 도안면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나름 타당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재 도살성을 구체적으로 증평군 도안면의 추성산성(이성산성)과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의 두타산성 일대로 보는 견해(민덕식, 1983), 증평면 이성산성으로 보는 견해(양기석 등, 2001, 34쪽)로 나뉘고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민덕식, 1983, 「고구려의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성주탁, 1990, 「백제 말기 국경선에 대한 고찰」, 『백제연구』 21
양기석 등, 2001, 『신라서원소경연구』, 서경문화사
성주탁, 2004, 『백제성지연구-속편-』, 서경문화사
『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설총(薛聰)의 아들을 살중업(薩仲業)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신라에서 ‘살(薩)’과 ‘설(薛)’이 서로 통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웅주조에서 서림군(西林郡)이 본래 백제 설림군(舌林郡)이었다고 전하는 것에서 경덕왕 때에 ‘설(舌)’을 ‘서(西)’로 고쳐 개칭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한편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에 해당하는 하슬라(何瑟羅)를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서(河西)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사례들을 참고하건대, 도살성(道薩城)을 ‘도설성(道薛城)’ 또는 ‘도서성(道西城)’이라고 표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도살성을 증평군 도안면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나름 타당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재 도살성을 구체적으로 증평군 도안면의 추성산성(이성산성)과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의 두타산성 일대로 보는 견해(민덕식, 1983), 증평면 이성산성으로 보는 견해(양기석 등, 2001, 34쪽)로 나뉘고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민덕식, 1983, 「고구려의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성주탁, 1990, 「백제 말기 국경선에 대한 고찰」, 『백제연구』 21
양기석 등, 2001, 『신라서원소경연구』, 서경문화사
성주탁, 2004, 『백제성지연구-속편-』, 서경문화사
이에 도살성(道薩城) … 공격을 꾀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649년 백제와 신라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이 도살성의 중요성과 관련해 550년(진흥왕 11) 전투기록이 주목된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1년조에는 이해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점령하였고,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고 되어 있다. 이어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다투어 피로한 틈을 타 신라가 두 성을 모두 함락시키고 성을 증축하고 군사 1,000명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고 전한다. 도살성의 군사적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새가 동쪽에서 날아와: 내륙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므로 물새는 강에 사는 새였을 것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백제군이, 동쪽에는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에 살던 물새가 놀라서 신라군 진영으로 날아온 것은 누군가 강을 건너 침투해 오는 정황임을 알 수 있다. 동쪽으로 강을 건너와 강변에 숨어있다가 해가 진 후 신라군 진영으로 잠입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정황을 김유신은 역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이상훈, 2015, 35~36쪽). 한편 이와 관련하여 ‘물새’를 비둘기 같은 새로 보고, 김유신이 고대 통신 수단의 하나인 동물을 활용하였을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한다(김영수, 2007, 255쪽).
〈참고문헌〉
김영수, 「고대 첩자연구 시론」, 『백산학보』 77
이상훈,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푸른역사, 2015
〈참고문헌〉
김영수, 「고대 첩자연구 시론」, 『백산학보』 77
이상훈,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푸른역사, 2015
상서롭지 못하다: 중국 한나라 이래로 사면(赦免) 조서에는 반포의 원인, 내용, 은사(恩赦)가 기재되어 있는데(우성민, 2005, 33쪽), 사면의 종류 중의 하나로 서(瑞)가 포함되어 있다(임대희, 1990, 109쪽). 그만큼 상서로운 상징 자체가 갖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봉황 등과 같은 길조를 보았을 때 상서롭다고 표현하는데, 당시 병사들이 물새를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참고문헌〉
임대희, 1990, 「은사실시를 통하여 본 당대정치」, 『대구사학』 40
우성민, 2005, 「당대 赦文의 변화에 관하여 -공문서상 표현된 지위변화를 중심으로-」, 『중국사연구』 38
〈참고문헌〉
임대희, 1990, 「은사실시를 통하여 본 당대정치」, 『대구사학』 40
우성민, 2005, 「당대 赦文의 변화에 관하여 -공문서상 표현된 지위변화를 중심으로-」, 『중국사연구』 38
“이는 족히 괴이한 것이 아니다.”: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조에는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김유신의 일화가 전한다.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자, 비담은 군사들에게 여자 임금이 패할 징조라고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반면 이를 듣고 신라 국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자, 김유신은 “길하고 흉한 것은 일정한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라고 답한 후 국왕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여 연에 실어 날려 보내고서, “어젯밤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내게 했다. 유언비어나 길흉 상징에 대한 김유신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유신은 불안하고 초조한 병사들을 안심시키고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장수였던 것이다.
註) 010
도살성(道薩城):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한주 흑양군조에 “도서현(都西縣)은 본래 도서현(道西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도안현(道安縣)이다.”라고 전하는데, 이에 근거하여 도살성을 현재 충북 증평군 도안면에 해당하는 도서현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민덕식, 1983; 양기석 등, 2001, 34쪽). 이밖에 천안의 옛 지명인 도솔(兜率)과 ‘도살(道薩)’의 음이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도살성을 천안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이병도, 1977, 57쪽) 또는 천안 목천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성주탁, 1990; 2004, 139쪽)도 제기되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설총(薛聰)의 아들을 살중업(薩仲業)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신라에서 ‘살(薩)’과 ‘설(薛)’이 서로 통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웅주조에서 서림군(西林郡)이 본래 백제 설림군(舌林郡)이었다고 전하는 것에서 경덕왕 때에 ‘설(舌)’을 ‘서(西)’로 고쳐 개칭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한편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에 해당하는 하슬라(何瑟羅)를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서(河西)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사례들을 참고하건대, 도살성(道薩城)을 ‘도설성(道薛城)’ 또는 ‘도서성(道西城)’이라고 표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도살성을 증평군 도안면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나름 타당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재 도살성을 구체적으로 증평군 도안면의 추성산성(이성산성)과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의 두타산성 일대로 보는 견해(민덕식, 1983), 증평면 이성산성으로 보는 견해(양기석 등, 2001, 34쪽)로 나뉘고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민덕식, 1983, 「고구려의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성주탁, 1990, 「백제 말기 국경선에 대한 고찰」, 『백제연구』 21
양기석 등, 2001, 『신라서원소경연구』, 서경문화사
성주탁, 2004, 『백제성지연구-속편-』, 서경문화사
『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설총(薛聰)의 아들을 살중업(薩仲業)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신라에서 ‘살(薩)’과 ‘설(薛)’이 서로 통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본서 권제36 잡지제5 지리3 웅주조에서 서림군(西林郡)이 본래 백제 설림군(舌林郡)이었다고 전하는 것에서 경덕왕 때에 ‘설(舌)’을 ‘서(西)’로 고쳐 개칭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한편 오늘날 강원도 강릉시에 해당하는 하슬라(何瑟羅)를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서(河西)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사례들을 참고하건대, 도살성(道薩城)을 ‘도설성(道薛城)’ 또는 ‘도서성(道西城)’이라고 표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도살성을 증평군 도안면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나름 타당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재 도살성을 구체적으로 증평군 도안면의 추성산성(이성산성)과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의 두타산성 일대로 보는 견해(민덕식, 1983), 증평면 이성산성으로 보는 견해(양기석 등, 2001, 34쪽)로 나뉘고 있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민덕식, 1983, 「고구려의 도서현성고」, 『사학연구』 36
성주탁, 1990, 「백제 말기 국경선에 대한 고찰」, 『백제연구』 21
양기석 등, 2001, 『신라서원소경연구』, 서경문화사
성주탁, 2004, 『백제성지연구-속편-』, 서경문화사
註) 011
이에 도살성(道薩城) … 공격을 꾀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649년 백제와 신라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이 도살성의 중요성과 관련해 550년(진흥왕 11) 전투기록이 주목된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흥왕 11년조에는 이해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점령하였고,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고 되어 있다. 이어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다투어 피로한 틈을 타 신라가 두 성을 모두 함락시키고 성을 증축하고 군사 1,000명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고 전한다. 도살성의 군사적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註) 012
물새가 동쪽에서 날아와: 내륙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므로 물새는 강에 사는 새였을 것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백제군이, 동쪽에는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에 살던 물새가 놀라서 신라군 진영으로 날아온 것은 누군가 강을 건너 침투해 오는 정황임을 알 수 있다. 동쪽으로 강을 건너와 강변에 숨어있다가 해가 진 후 신라군 진영으로 잠입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정황을 김유신은 역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이상훈, 2015, 35~36쪽). 한편 이와 관련하여 ‘물새’를 비둘기 같은 새로 보고, 김유신이 고대 통신 수단의 하나인 동물을 활용하였을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한다(김영수, 2007, 255쪽).
〈참고문헌〉
김영수, 「고대 첩자연구 시론」, 『백산학보』 77
이상훈,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푸른역사, 2015
〈참고문헌〉
김영수, 「고대 첩자연구 시론」, 『백산학보』 77
이상훈,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푸른역사, 2015
註) 013
상서롭지 못하다: 중국 한나라 이래로 사면(赦免) 조서에는 반포의 원인, 내용, 은사(恩赦)가 기재되어 있는데(우성민, 2005, 33쪽), 사면의 종류 중의 하나로 서(瑞)가 포함되어 있다(임대희, 1990, 109쪽). 그만큼 상서로운 상징 자체가 갖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봉황 등과 같은 길조를 보았을 때 상서롭다고 표현하는데, 당시 병사들이 물새를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참고문헌〉
임대희, 1990, 「은사실시를 통하여 본 당대정치」, 『대구사학』 40
우성민, 2005, 「당대 赦文의 변화에 관하여 -공문서상 표현된 지위변화를 중심으로-」, 『중국사연구』 38
〈참고문헌〉
임대희, 1990, 「은사실시를 통하여 본 당대정치」, 『대구사학』 40
우성민, 2005, 「당대 赦文의 변화에 관하여 -공문서상 표현된 지위변화를 중심으로-」, 『중국사연구』 38
註) 014
“이는 족히 괴이한 것이 아니다.”: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조에는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김유신의 일화가 전한다.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자, 비담은 군사들에게 여자 임금이 패할 징조라고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반면 이를 듣고 신라 국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자, 김유신은 “길하고 흉한 것은 일정한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라고 답한 후 국왕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여 연에 실어 날려 보내고서, “어젯밤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내게 했다. 유언비어나 길흉 상징에 대한 김유신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유신은 불안하고 초조한 병사들을 안심시키고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장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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