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군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다
(
649년
08월
)
은상 등은 군사의 증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의심을 품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은 일시에 분발하여 공격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장군인 달솔(達率)註 016 정중(正仲)註 017과 군사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좌평(佐平)註 018 은상과 달솔 자견(自堅)註 019 등 10명과 병졸 8,980명을 죽이고, 말 10,000필과 갑옷 1,800벌을 획득하였다.註 020 그 밖의 〔획득한〕 각종 기계(器械)註 021들도 이와 비슷하였다.註 022
달솔(達率): 백제 16관등의 하나로 제2품이다. 달솔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24 백제본기제2 고이왕 27년 정월조 참조.
좌평(佐平): 백제 16관등 가운데 최고 관등이다. 좌평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24 백제본기제2 고이왕 27년 정월조 참조.
장군인 달솔 정중(正仲)과 … 획득하였다: 신라군의 전과를 통해 백제군의 규모를 추산해 볼 수 있다.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 9년조에는 은상이 정예병 7,000명을 거느리고 석토성 등 7성을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조에는 신라군이 9,080명을 사살하거나 일부 포로로 잡았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전과를 심하게 과정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문안식, 2003, 24~25쪽), 노획한 전마(戰馬)의 숫자가 1만 필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이문기, 2016, 225쪽).
전투과정과 전투전과에 대한 기록이 백제본기보다 신라본기가 더 자세한 것으로 보아, 신라본기의 내용이 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가 동원한 병력은 정예병 7,000명과 그 외의 추가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시 신라군이 획득한 전마(戰馬)가 1만 필이고, 백제군 전사상자가 9,080명인 점에서 도살성전투에 투입된 백제군은 총 1만 명으로 추산해 볼 수 있다(이상훈, 2012, 301쪽). 이에 대해 백제의 대규모 인적 손실로 인해 당분간 공격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고(정동준, 2006, 128쪽), 나아가 전쟁을 수행했던 지도부의 문책으로 이어져 백제 내부의 정치세력이 변화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었다(장미애, 2012, 248쪽).
〈참고문헌〉
문안식, 2003, 「의자왕 전반기의 신라 공격과 영토확장」, 『경주사학』 23
정동준, 2006, 「7세기 중반 백제의 대외정책」, 『역사와 현실』 61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이상훈, 2012, 『나당전쟁연구』, 주류성
장미애, 2012, 「의자왕대 정치세력의 변화와 대외정책」, 『역사와 현실』 85
전투과정과 전투전과에 대한 기록이 백제본기보다 신라본기가 더 자세한 것으로 보아, 신라본기의 내용이 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가 동원한 병력은 정예병 7,000명과 그 외의 추가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시 신라군이 획득한 전마(戰馬)가 1만 필이고, 백제군 전사상자가 9,080명인 점에서 도살성전투에 투입된 백제군은 총 1만 명으로 추산해 볼 수 있다(이상훈, 2012, 301쪽). 이에 대해 백제의 대규모 인적 손실로 인해 당분간 공격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고(정동준, 2006, 128쪽), 나아가 전쟁을 수행했던 지도부의 문책으로 이어져 백제 내부의 정치세력이 변화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었다(장미애, 2012, 248쪽).
〈참고문헌〉
문안식, 2003, 「의자왕 전반기의 신라 공격과 영토확장」, 『경주사학』 23
정동준, 2006, 「7세기 중반 백제의 대외정책」, 『역사와 현실』 61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이상훈, 2012, 『나당전쟁연구』, 주류성
장미애, 2012, 「의자왕대 정치세력의 변화와 대외정책」, 『역사와 현실』 85
그 밖의 … 이와 비슷하였다: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5년 9월 29일조에는 “我軍撃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稱是”라고 되어 있다. 675년 9월 매소성 일대에서 신라군이 당군을 공격한 후 전마 30,380필을 노획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병장기도 획득하였다. 노획한 말을 통해 그에 상응하는 병장기를 획득한 것으로 보아, 3만여 필의 말은 전마가 아니라 태마(駄馬) 즉 수송용 말일 가능성이 크다(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210쪽). 본문에 따르면 당시 신라군이 말 10,000필을 노획하고 그에 상응하는 병장기를 획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신라군이 노획한 병장기도 수송용 태마에 실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註) 016
달솔(達率): 백제 16관등의 하나로 제2품이다. 달솔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24 백제본기제2 고이왕 27년 정월조 참조.
註) 018
좌평(佐平): 백제 16관등 가운데 최고 관등이다. 좌평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24 백제본기제2 고이왕 27년 정월조 참조.
註) 020
장군인 달솔 정중(正仲)과 … 획득하였다: 신라군의 전과를 통해 백제군의 규모를 추산해 볼 수 있다.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 9년조에는 은상이 정예병 7,000명을 거느리고 석토성 등 7성을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진덕왕 3년조에는 신라군이 9,080명을 사살하거나 일부 포로로 잡았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전과를 심하게 과정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문안식, 2003, 24~25쪽), 노획한 전마(戰馬)의 숫자가 1만 필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이문기, 2016, 225쪽).
전투과정과 전투전과에 대한 기록이 백제본기보다 신라본기가 더 자세한 것으로 보아, 신라본기의 내용이 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가 동원한 병력은 정예병 7,000명과 그 외의 추가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시 신라군이 획득한 전마(戰馬)가 1만 필이고, 백제군 전사상자가 9,080명인 점에서 도살성전투에 투입된 백제군은 총 1만 명으로 추산해 볼 수 있다(이상훈, 2012, 301쪽). 이에 대해 백제의 대규모 인적 손실로 인해 당분간 공격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고(정동준, 2006, 128쪽), 나아가 전쟁을 수행했던 지도부의 문책으로 이어져 백제 내부의 정치세력이 변화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었다(장미애, 2012, 248쪽).
〈참고문헌〉
문안식, 2003, 「의자왕 전반기의 신라 공격과 영토확장」, 『경주사학』 23
정동준, 2006, 「7세기 중반 백제의 대외정책」, 『역사와 현실』 61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이상훈, 2012, 『나당전쟁연구』, 주류성
장미애, 2012, 「의자왕대 정치세력의 변화와 대외정책」, 『역사와 현실』 85
전투과정과 전투전과에 대한 기록이 백제본기보다 신라본기가 더 자세한 것으로 보아, 신라본기의 내용이 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가 동원한 병력은 정예병 7,000명과 그 외의 추가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시 신라군이 획득한 전마(戰馬)가 1만 필이고, 백제군 전사상자가 9,080명인 점에서 도살성전투에 투입된 백제군은 총 1만 명으로 추산해 볼 수 있다(이상훈, 2012, 301쪽). 이에 대해 백제의 대규모 인적 손실로 인해 당분간 공격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고(정동준, 2006, 128쪽), 나아가 전쟁을 수행했던 지도부의 문책으로 이어져 백제 내부의 정치세력이 변화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었다(장미애, 2012, 248쪽).
〈참고문헌〉
문안식, 2003, 「의자왕 전반기의 신라 공격과 영토확장」, 『경주사학』 23
정동준, 2006, 「7세기 중반 백제의 대외정책」, 『역사와 현실』 61
이문기, 2016,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47
이상훈, 2012, 『나당전쟁연구』, 주류성
장미애, 2012, 「의자왕대 정치세력의 변화와 대외정책」, 『역사와 현실』 85
註) 021
註) 022
그 밖의 … 이와 비슷하였다: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5년 9월 29일조에는 “我軍撃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稱是”라고 되어 있다. 675년 9월 매소성 일대에서 신라군이 당군을 공격한 후 전마 30,380필을 노획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병장기도 획득하였다. 노획한 말을 통해 그에 상응하는 병장기를 획득한 것으로 보아, 3만여 필의 말은 전마가 아니라 태마(駄馬) 즉 수송용 말일 가능성이 크다(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210쪽). 본문에 따르면 당시 신라군이 말 10,000필을 노획하고 그에 상응하는 병장기를 획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신라군이 노획한 병장기도 수송용 태마에 실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주제분류
-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