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에 사신을 파견하고 책봉호를 받다
(
577년
)
19년(577)에 왕이 사신을 보내 〔북〕주[周]註 001에 가서 조공하였다. 〔북〕주 고조(周高祖)註 002가 왕에게 벼슬을 내려 개부의동삼사대장군(開府儀同三司大將軍)註 003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髙句麗王)으로 삼았다.註 004
〔북〕주[周] : 중국 북조(北朝) 국가 하나로 원래 국호는 ‘주(周)’였으나 이전의 ‘주’와 구분하기 위해 북주 혹은 후주(後周), 우문주(宇文周) 등으로 부른다. 557~581년까지 6대 226년간 존속하였고, 수도는 장안(長安,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이다. 557년에 서위(西魏) 권신인 우문태(宇文泰)의 세 번째 아들이다. 우문각(宇文覺-효민제(孝閔帝)-)이 당시 실권자였던 우문호(宇文護)의 지원을 받아 서위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건국되었다. 북주는 576년 토욕혼 원정을 마친 후 577년에 북제(北齊)를 멸망시키면서 북조를 통일하기도 하였으나, 581년에 황실의 외척이었던 양견(楊堅)이 외손자인 정제(靜帝)로부터 황위를 빼앗고 수(隋)를 건국함으로써 멸망하였다.
〔북〕주고조(高祖) : 중국 북조(北朝) 북주(北周)의 제3대 황제인 무제(武帝)의 묘호(廟號)이다. 이름은 우문옹(宇文邕)이고 자(字)는 니라돌(禰羅突)로, 서위(西魏)의 실권자였던 우문태(宇文泰)의 네 번째 아들이다. 재위 기간은 560~578년이고, 연호로는 보정(保定, 561~565), 천화(天和, 566~572), 건덕(建德, 572~577), 선정(宣政, 578) 등이 있다. 무제는 북주의 실권자인 우문호(宇文護)에 의해 560년에 즉위하였는데, 572년 우문호를 죽이면서 조정을 장악하였다. 그는 장군부(將軍府) 지휘권을 중외도독제군사부(中外都督諸軍府)로부터 회수하여 장악하였으며 균전호(均田戶)에 소속된 농민을 부병(府兵)으로 모집함으로써 병력원을 확대하여 군사력을 키웠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결국 577년에는 북제를 무너뜨리고 북조를 통일하였다. 한편 그는 574년 불교와 도교를 금하면서 경전과 조상(彫像)을 없애고 승려와 도사를 해산·환속시키는 폐불을 단행하였으며, 나아가 제사법규에 실려 있지 않은 것들을 모두 없앴다. 578년 돌궐 원정 중에 36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능호(陵號)는 효릉(孝陵)이다.
개부의동삼사대장군(開府儀同三司大將軍) : 문산관(文散官) 가운데 하나이다. 개부(開府)는 자신 명의(名義)로 막부(幕府)와 막료(幕僚)를 둘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漢)대에 처음 나타나는데 삼공(三公)이나 대장군(大將軍), 표기장군(驃騎將軍), 위장군(衛將軍) 등 공(公)과 동등한 직급에 있는 장군만이 막부를 설치할 수 있었다. 후한(後漢)대에 이르러 ‘의동삼사(儀同三司)’가 더해졌는데, 이는 삼공(三公)과 똑같은 대우를 받음을 의미한다. 북주시기에는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 개부의동삼사(三司), 상의동삼사(上儀同三司), 의동삼사(儀同三司)로 분화되었는데, 각각 종3품, 정4품, 종4품, 정5품이었다. 575년에는 상개부의동대장군(上開府儀同大將軍), 개부의동대장군(開府儀同大將軍), 상의동대장군(上儀同大將軍), 의동대장군(儀同大將軍)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북〕주 고조가 왕에게 벼슬을 내려 ……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 577년 북주 고조가 평원왕에게 내린 책봉호에 대해 『주서』 권49 열전41 이역상 고려와 『책부원귀』 권963 외신부8 책봉1 건덕 6년(577)조에는 ‘상개부의동대장군(上開府儀同大將軍)·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요동왕(遼東王)’으로 나온다. 그리고 『북사』 권94 열전82 사이상 고구려에는 ‘상개부의동대장군·요동군공(遼東郡公)·요동왕’으로 나온다. 이를 통해 본서 찬자가 평원왕의 책봉호 가운데 ‘요동왕’을 ‘고구려왕’으로 수정하여 기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북조는 고구려왕에게 ‘고구려왕’이라는 책봉호를 제수하였는데, 이때 북주가 ‘요동왕’을 제수한 것은 고구려왕을 내제후(內諸侯), 그리고 고구려를 중국 내지로 취급하려고 했던 의도로 볼 수 있다(여호규, 2006, 40쪽). 북주가 평원왕에 제수한 책봉호는 훈관과 작호 중심으로, 지절호(持節號)나 도독제군사호(都督諸軍事號), 영호군관(領護軍官) 등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훈관과 작호 중심의 책봉호 구성은 4세기 이래 각국의 현실적 지배력을 상호 인정하던 조공·책봉의 성격이 변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인데, 북주가 이념상으로는 각국을 직접 지배대상으로 삼고(김종완, 633쪽)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 질서를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여호규, 2002, 17-18쪽; 2006, 40쪽).
〈참고문헌〉
김진한, 2020,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여호규, 2002, 「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대수관계(對隋關係)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46
김종완, 2004, 「高句麗의 朝貢과 册封의 性格」, 『고구려발해연구』18
여호규, 2006, 「책봉호 수수(授受)를 통해 본 수·당의 동방정책과 삼국의 대응」, 『역사와 현실』 61
〈참고문헌〉
김진한, 2020,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여호규, 2002, 「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대수관계(對隋關係)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46
김종완, 2004, 「高句麗의 朝貢과 册封의 性格」, 『고구려발해연구』18
여호규, 2006, 「책봉호 수수(授受)를 통해 본 수·당의 동방정책과 삼국의 대응」, 『역사와 현실』 61
註) 001
〔북〕주[周] : 중국 북조(北朝) 국가 하나로 원래 국호는 ‘주(周)’였으나 이전의 ‘주’와 구분하기 위해 북주 혹은 후주(後周), 우문주(宇文周) 등으로 부른다. 557~581년까지 6대 226년간 존속하였고, 수도는 장안(長安,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이다. 557년에 서위(西魏) 권신인 우문태(宇文泰)의 세 번째 아들이다. 우문각(宇文覺-효민제(孝閔帝)-)이 당시 실권자였던 우문호(宇文護)의 지원을 받아 서위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건국되었다. 북주는 576년 토욕혼 원정을 마친 후 577년에 북제(北齊)를 멸망시키면서 북조를 통일하기도 하였으나, 581년에 황실의 외척이었던 양견(楊堅)이 외손자인 정제(靜帝)로부터 황위를 빼앗고 수(隋)를 건국함으로써 멸망하였다.
註) 002
〔북〕주고조(高祖) : 중국 북조(北朝) 북주(北周)의 제3대 황제인 무제(武帝)의 묘호(廟號)이다. 이름은 우문옹(宇文邕)이고 자(字)는 니라돌(禰羅突)로, 서위(西魏)의 실권자였던 우문태(宇文泰)의 네 번째 아들이다. 재위 기간은 560~578년이고, 연호로는 보정(保定, 561~565), 천화(天和, 566~572), 건덕(建德, 572~577), 선정(宣政, 578) 등이 있다. 무제는 북주의 실권자인 우문호(宇文護)에 의해 560년에 즉위하였는데, 572년 우문호를 죽이면서 조정을 장악하였다. 그는 장군부(將軍府) 지휘권을 중외도독제군사부(中外都督諸軍府)로부터 회수하여 장악하였으며 균전호(均田戶)에 소속된 농민을 부병(府兵)으로 모집함으로써 병력원을 확대하여 군사력을 키웠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결국 577년에는 북제를 무너뜨리고 북조를 통일하였다. 한편 그는 574년 불교와 도교를 금하면서 경전과 조상(彫像)을 없애고 승려와 도사를 해산·환속시키는 폐불을 단행하였으며, 나아가 제사법규에 실려 있지 않은 것들을 모두 없앴다. 578년 돌궐 원정 중에 36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능호(陵號)는 효릉(孝陵)이다.
註) 003
개부의동삼사대장군(開府儀同三司大將軍) : 문산관(文散官) 가운데 하나이다. 개부(開府)는 자신 명의(名義)로 막부(幕府)와 막료(幕僚)를 둘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漢)대에 처음 나타나는데 삼공(三公)이나 대장군(大將軍), 표기장군(驃騎將軍), 위장군(衛將軍) 등 공(公)과 동등한 직급에 있는 장군만이 막부를 설치할 수 있었다. 후한(後漢)대에 이르러 ‘의동삼사(儀同三司)’가 더해졌는데, 이는 삼공(三公)과 똑같은 대우를 받음을 의미한다. 북주시기에는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 개부의동삼사(三司), 상의동삼사(上儀同三司), 의동삼사(儀同三司)로 분화되었는데, 각각 종3품, 정4품, 종4품, 정5품이었다. 575년에는 상개부의동대장군(上開府儀同大將軍), 개부의동대장군(開府儀同大將軍), 상의동대장군(上儀同大將軍), 의동대장군(儀同大將軍)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註) 004
〔북〕주 고조가 왕에게 벼슬을 내려 ……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 577년 북주 고조가 평원왕에게 내린 책봉호에 대해 『주서』 권49 열전41 이역상 고려와 『책부원귀』 권963 외신부8 책봉1 건덕 6년(577)조에는 ‘상개부의동대장군(上開府儀同大將軍)·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요동왕(遼東王)’으로 나온다. 그리고 『북사』 권94 열전82 사이상 고구려에는 ‘상개부의동대장군·요동군공(遼東郡公)·요동왕’으로 나온다. 이를 통해 본서 찬자가 평원왕의 책봉호 가운데 ‘요동왕’을 ‘고구려왕’으로 수정하여 기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북조는 고구려왕에게 ‘고구려왕’이라는 책봉호를 제수하였는데, 이때 북주가 ‘요동왕’을 제수한 것은 고구려왕을 내제후(內諸侯), 그리고 고구려를 중국 내지로 취급하려고 했던 의도로 볼 수 있다(여호규, 2006, 40쪽). 북주가 평원왕에 제수한 책봉호는 훈관과 작호 중심으로, 지절호(持節號)나 도독제군사호(都督諸軍事號), 영호군관(領護軍官) 등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훈관과 작호 중심의 책봉호 구성은 4세기 이래 각국의 현실적 지배력을 상호 인정하던 조공·책봉의 성격이 변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인데, 북주가 이념상으로는 각국을 직접 지배대상으로 삼고(김종완, 633쪽)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 질서를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여호규, 2002, 17-18쪽; 2006, 40쪽).
〈참고문헌〉
김진한, 2020,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여호규, 2002, 「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대수관계(對隋關係)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46
김종완, 2004, 「高句麗의 朝貢과 册封의 性格」, 『고구려발해연구』18
여호규, 2006, 「책봉호 수수(授受)를 통해 본 수·당의 동방정책과 삼국의 대응」, 『역사와 현실』 61
〈참고문헌〉
김진한, 2020,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여호규, 2002, 「6세기말~7세기초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대수관계(對隋關係)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46
김종완, 2004, 「高句麗의 朝貢과 册封의 性格」, 『고구려발해연구』18
여호규, 2006, 「책봉호 수수(授受)를 통해 본 수·당의 동방정책과 삼국의 대응」, 『역사와 현실』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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