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이 인재 등용·관직 운영·군정 등에 관한 시무책을 올리다
○대사헌(大司憲) 조준(趙浚) 등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경(敬)이라는 한 글자는 제왕이 성군이 되는 기초이고, 공(公)이라는 한 글자는 제왕이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입니다. 청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황천(皇天)의 굽어보심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억조(億兆)의 민(民)이 우러러봄을 두려워하여 한 사람에게 상을 주더라도 상제(上帝)께서 착한 자에게 복을 내려주는 마음에 부합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한 사람에게 벌을 주더라도 상제께서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려주는 감계(鑑戒)에 부합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시어, 여러 사람이 기뻐한 이후에 상을 주고 여러 사람이 버린 이후에 형을 가하시기 바랍니다. 자문 구하기를 부지런히 하여 총명함을 넓히고 학문을 좋아하여 덕업을 높이며, 여러 신하를 접하기를 예로써 하고 모후(母后)를 모시기를 효로써 하십시오. 사악한 자를 제거할 때에는 의심하지 말고 명령을 내리면 반드시 행하십시오. 구중궁궐에 거처할 때에는 민(民)들이 비바람조차 막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하고, 진수성찬[八珍]을 드실 때에는 민(民)들에게 지게미와 겨[糟糠]조차 넉넉하지 않음을 생각하며,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을 때에는 누에치는 부녀자들이 헐벗고 있음을 생각하여 대우(大禹)가 의복을 검소하게 한 것을 본받고, 연향(宴享)에 임하여서는 농부들이 굶주려 죽는 것을 생각하여 수(隋) 문제(文帝)가 한 가지 고기만 먹던 것을 본받으십시오.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악함을 경계하며, 쓰임을 절약하여 민(民)을 사랑하십시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군주가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안색을 엄숙히 하고 조정에 서서 남김없이 말하면서 숨기지 않으며 우뚝하게 뛰어나서 조금도 회피함이 없는 자는 군자입니다. 전하께서는 그를 가까이 하고 그를 믿으시면 요(堯)·순(舜)의 다스림이 앉아서 이루어질 것이고 태조의 업도 계승하여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척은 반드시 승진시키고자 하고 은혜와 원수는 반드시 갚고자 하며, 백성의 고통을 듣고 군주의 과실을 보고서도 입을 다물고 감히 말하지 않으면서 하는 소리가 ‘입은 화가 나오는 문이다’라고 하면서 오직 아첨만을 하여 부귀를 훔치려는 자는 소인입니다. 전하께서 기뻐하여 그를 용납하신다면 걸(桀)과 주(紂)의 멸망을 서서 기다릴 수 있으며 태조의 공업은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자(儒者)로서 경사(經史)에 통하고 마음[心術]이 바른 자를 고르시어 날마다 번갈아 가면서 입직(入直)하게 하여 경사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치의 도를 논의하게 하심으로써 넓고 밝은 학문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또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번갈아 곁에서 모시게 하여 좌사(左史)는 말을, 우사(右史)는 일을 빠지는 것 없이 기록하게 하여 만세에 전하십시오. 또 세자를 위하여 특별히 서연(書筵)을 열어 당대의 대유(大儒)를 사부로 삼고 경사에 밝고 행실을 닦는 선비를 요좌(僚佐)로 삼아,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으면서 경적(經籍)을 강론함으로써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는 학문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부병(府兵)은 8위(八衛)에 의해 통령되고 8위는 군부사(軍簿司)에 통속되어 42개 도부(都府)의 군사가 12만 명이나 되며, 대(隊)에는 정(正)이 있고 오(伍)에는 위(尉)가 있어 상장(上將)에 이르기까지 서로 통속되어 있으니, 이는 금위(禁衛)를 엄하게 하고 외부의 침략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원(元)을 섬긴 이래 평화로운 날이 오래되니 문관은 태평하고 무관은 안일하여 금위에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근시(近侍)와 충용(忠勇)에 모두 호군(護軍) 이하 등의 관원을 두어 금위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고 녹(祿)을 주었으니, 이로부터 조종의 8위의 제도가 모두 공허한 제도가 되어 다만 천록(天祿)을 낭비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달적(亐達赤, 우다치)·속고적(速古赤, 수구르치)·별보(別保) 등 각각의 애마(愛馬)는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아침이나 밤이나 수고로움이 심하였으나 한 말, 한 되의 녹도 먹지 못하였는데, 42도부·5원(五員)·10장(十將)·위(尉)·정(正)의 녹을 먹는 자는 어리고 약한 자제가 아니면 공인이나 상인, 천한 노예입니다. 어떤 자는 녹을 먹고도 그 직책을 비워두고 어떤 자는 나랏일에 부지런하고도 〈녹을〉 먹지 못하니, 어찌 조종께서 충신(忠信)으로 대우하고 녹을 무겁게 주던 뜻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근시를 좌우위(左右衛)에 합치고 사문(司門)은 감문위(監門衛)에 합치고 사순(司楯)은 비순위(備巡衛)에 합치고 충용(忠勇)은 신호위(神虎衛)에 합치신 뒤, 그 나머지 각 애마는 종류별로 여러 위에 합쳐, 그들로 하여금 날마다 돌아가며 입직(入直)하게 하고 그 근면하고 태만함을 평가하여 각각 그 위 내의 호군(護軍) 이하 위·정의 직책에 이르기까지 품계에 따라 녹용(錄用)하고, 그들로 하여금 녹을 먹으면서 그 직책에 부지런하게 한다면, 사람들은 벼슬하기를 즐거워 할 것이고 국록은 덜어질 것이며, 금위는 엄해지고 무비(武備)는 신장될 것입니다.
사막(司幕)은 옛날의 상사(尙舍)이고 지금의 사설(司設)입니다. 사옹(司饔)은 옛날의 상식(尙食)이고 지금의 사선(司膳)입니다. 지금 사설은 그 녹을 먹고도 그 직무를 폐하였는데, 사막은 그 일을 근면히 하고도 녹을 먹지 않으며, 사옹 이하의 관직 역시 그러합니다. 원하건대 사막·사옹 등의 애마는 6국(六局)에 병합함으로써 선왕의 옛 제도를 회복하고 최근의 폐해를 개혁한다면 이름과 실제가 서로 맞아떨어지고 직사도 확립될 것입니다.
공(功)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후(侯)에 봉하지 않는 것이 우리 조정의 법입니다. 김부식(金富軾)은 반란을 제거하고 서도(西都)를 평정하고서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졌습니다. 김방경(金方慶)은 반란을 일으킨 탐라(耽羅)를 정벌하고 동쪽의 왜적의 죄를 묻고서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질 수 있었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재상 가운데 사직을 편안하게 하였거나 먼 변방을 평정한 공신이 아니면 군(君)으로 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환관은 국초부터 경릉(慶陵, 충렬왕) 때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근래에 궁중에서 명을 전하는 직임으로써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반열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조정을 존중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환관의 제수는 경릉의 제도에 따라 조관(朝官)에 임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군기시(軍器寺)와 선공시(繕工寺)는 업무가 많은데도 인원이 적으니 청하건대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낭장(郎將)·별장(別將)을 겸판사(兼判事)·주부(注簿) 등의 관원으로 삼으면 녹이 허비되지 않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업무가 번다한 시(寺)·감(監)도 이를 본받아 겸무로 처리하게 하면 공무에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으로, 국가의 치란(治亂)과 정치의 득실이 이로부터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근래에는 전쟁으로 인하여 학교가 없어져버려서 풀만 무성하여졌습니다. 향원(鄕愿)으로서 유학자[儒名]임을 핑계로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들은 5·6월이 되면 동자들을 모아다가 당송(唐宋) 사람의 절구(絶句)를 읽다가 50일이 되면 파하고서 이를 하과(夏課)라고 일컫는데, 수령(守令)이 된 자도 이를 보고 그러려니 하면서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올바른 선비를 얻어서 국가의 다스림에 도움을 주고자 한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근면하고 명민하며 박학한 자를 교수관(敎授官)으로 삼아 5도에 각 한 명씩을 파견하여 군현(郡縣)을 두루 다니게 하고, 그 마필과 접대는 모두 향교(鄕校)에 위임하여 주관하게 하며, 또 주군(州郡)에 한가로이 살면서 유학을 업으로 삼는 자는 본관(本官)의 교도(敎導)로 삼아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항상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게 하되 사장(詞章)은 읽지 못하게 하며, 교수관은 두루 돌아다니며 교과와 일정을 엄하게 세우고 몸소 어려운 부분을 강론하여 그들이 통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파악하여서 서적(書籍)에 이름을 쓰고 인도하고 권장하여 실제로 쓸 만한 인재가 되도록 하되, 그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성과를 거둔 자는 차례를 따지지 않고 발탁하고, 만약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한 자는 또한 논죄하시기 바랍니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불효(不孝)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가 없는 것이 크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제사를 끊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옛날에는 부모께서 돌아가시면 들판에서 장사를 지내고 나서 우제(虞祭)를 지내어 신을 편안하게 하고 묘(廟)를 만들어 제사를 지냈으니, 이것은 돌아가신 분을 섬기는 것을 살아있는 분을 섬기는 것처럼 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동방의 가묘(家廟)의 법은 오래되어 폐해졌습니다. 지금은 서울로부터 군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이 있는 자는 반드시 신사(神祀)를 세우고 이를 위호(衛護)라고 부르니, 이것이 가묘(家廟)의 유법(遺法)입니다. 아아, 부모의 시체를 지하에 맡겨두고 가묘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부모의 영이 어디에 의지하는지를 알 수 없으니 이는 아들이 된 자의 마음이 그래서가 아니라 다만 관습이 상례가 되고서 아직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일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서 대부(大夫) 이상은 3세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6품 이상은 2세대까지 제사를 지내며, 7품 이하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는 다만 그 부모만을 제사지내게 하고, 정결한 방 한 칸을 택하여 각각 한 감실(龕室)을 만들어 그 신주(神主)를 보관하되 서쪽을 윗자리로 삼고 초하루와 보름에 반드시 제수[奠]를 올리고 나가고 들어올 때 반드시 고하며, 새로 난 음식은 반드시 올리고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며, 기일을 맞이하면 말을 타고 외출하지 못하게 하고 빈객을 대접함에는 상례(喪禮)와 같이 하며, 성묘하는 예는 풍속에 따르도록 허락하되 매년 삼령절(三令節)과 한식(寒食)을 〈기일(期日)로〉 정하여 조상을 추모하는 풍속을 이루게 할 것이며, 어기는 자는 불효죄로 논하시기 바랍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충신(忠信)으로 대우하고 녹을 무겁게 주는 것은 선비를 권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위로는 공(公)·경(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리에 이르기까지 녹을 후하게 주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무릇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데에 뜻을 두지 않고 공무에만 온 마음을 쏟았던 것입니다. 호강한 자들이 겸병한 이래로 조세(租稅)가 날마다 줄어들고 녹질(祿秩)이 해마다 줄어들어 선왕께서 제정하신 녹의 수는 다만 글로만 갖추어져 있을 뿐입니다. 마땅히 유사에 명하여 옛 제도를 참작하여 그 녹질을 풍족하게 한다면 선비들이 항심(恒心)을 가져 염치(廉恥)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경기(京畿) 8현의 요역이 매우 번거로운데, 정관(正官)이 통제하지 않고 관찰사(觀察使)가 다스리지도 않습니다. 또 수령(守令)이 교화를 펼치는 일도 없기 때문에 과렴(科斂)이 균등하지 못하고 부역에 기준이 없어 민(民)들이 의지해 살아가지 못하면서도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각 도의 사례에 따라서 현에 5, 6품의 관원을 두고 개성부(開城府)로 하여금 공적을 살펴 출척을 밝히게 하시기 바랍니다.
근년 이래로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은 그 재주를 따지지 않고 다만 재상의 지위에만 있으면 경솔하게 명하여 파견하니, 지휘통제[節制]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적의 세력은 더욱 커져서 침략하기에 이르러 군현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군주가 장수를 택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적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장수가 군사를 알지 못하면 그 주인을 적에게 내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장수를 택하여 왜구를 제어하는 것이 진실로 오늘의 급한 일입니다. 원하건대 도평의사(都評議使)와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각각 위엄과 덕이 일찍부터 드러난 자를 천거하도록 하여 명하여 장수로 삼아 군정(軍政)을 펼치게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군정이 여러 곳에서 나오면 호령이 엄숙하지 못합니다. 지금 한 도에 절제사(節制使)가 세 명이니 옛 제도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동북면·서북면 외에는 한 도마다 다만 한 명의 절제사만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시기 바랍니다.
군사라는 것은 민(民)의 생명을 맡은 것이고 나라의 큰 정사이니 왕실을 호위하고 화란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우리나라의 5군(軍) 42도부(都府)는 대개 한(漢)의 남북군(南北軍), 당(唐)의 부위병(府衛兵)과 같습니다. 요(遼)·금(金)은 양계(兩界)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는데, 〈요는〉 진제(晉帝)를 세워 이를 자식으로 대우하고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우리에게 화친을 요구하였으나 우리 태조께서 국교를 끊으셨고, 〈금은〉 요와 송(宋)의 세 황제를 포로로 하여 사해(四海)에 위엄을 떨쳤으나 감히 우리를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이른 것은 조종의 군정이 그 율령(律令)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근세에 병제(兵制)가 크게 무너져서 군대를 동원한 30여 년 동안 군정에 통솔이 없고, 전술이 없는 장수로서 교련되지 않은 민(民)을 거느리고 전투를 벌이니 멀리서 바라보고서도 놀라서 궤멸되어 천리에 해골이 널려 있게 되었습니다. 하찮은 왜노(倭奴)가 나라의 병이 되고 있으니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전직 4품 이상의 관원은 삼군(三軍)에 소속시키고 군에서는 장수의 보좌로 두며, 5품 이하는 부위(府衛)에 소속시켜 군부사(軍簿司)에서 통솔하게 하여 위아래가 서로 매이고 체통이 서로 연결되어 군정이 한 곳에서 나오고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 곳에 통일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연후에 군령을 밝게 펼치고 사졸을 훈련시키면 백만의 무리가 몸이 팔을 쓰는 것처럼, 팔이 손가락을 쓰는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이니, 어디를 지킨들 견고하지 않겠으며 어디를 공격한들 취하지 못하겠습니까.
근세에는 간신이 정치를 문란하게 하여 재능이 장수가 될 만하지 못한 자가 중방(重房)에 늘어서 있고, 수많은 전투에서 수고해온 자는 겨우 첨설(添設)에 제수되어 있으니, 상벌에 규정이 없어 군사들이 해이해지고 이르는 곳에서 공적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견고한 적을 깨뜨리고 함락시킨 공이나, 적장의 목을 베고 적기(敵旗)를 빼앗은 용맹함이나 수많은 전투에서 수고한 공적이 있는 자로서 공이 크면 상호군(上護軍)으로, 그 다음으로는 호군(護軍)·중랑장(中郞將)으로부터 별장(別將)·산원(散員)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짜 관직[眞差]을 주어 적을 격파한 공을 기리게 하시면 사람들이 모두 윗사람을 친근히 여기게 되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또 근일에 의병을 일으켜 난을 진압할 때에 군에 종사한 자에게도 역시 관직과 상을 더해주어 후세 사람들을 권장하시기 바랍니다.
국가에서 관찰사를 뽑고 수령을 가려 임명하여 5도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였는데, 오직 동북면·서북면만은 아직도 옛 관습을 따르면서 왕의 교화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 여러 도의 예에 의거하여 관찰사를 두어 군현을 순행하게 하여 군민의 관원을 출척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근래에 역호(驛戶)가 피폐해져서 모든 포마(鋪馬)·전체(傳遞)·지로(知路)·지로(指路)의 역(役)을 주군에서 대신 맡고 있으니 그 괴로움 때문에 〈백성들이〉 유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본업을 회복하게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역호를 구휼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라에서 비록 정역별감(程驛別監)을 두어 여러 역을 안정시키게 하였으나 한 사람이 혼자서는 다스릴 수 없어서, 매 역마다 사속(私屬)을 두어 이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도당(都堂)에서 파견한 것이 아니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업신여겨 안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매 역마다 5, 6품의 역승(驛丞) 한 사람을 두고 그를 천거하는 법은 수령의 예와 같이 하며 또한 반인(半印)을 주어 파견하고, 그 가운데 역호를 풍족하게 하고 역마[馹騎]를 번성하게 한 자가 있으면 관찰사가 도당에 보고하여 수령이 결원된 곳에 보충하고, 또 경관(京官)에 제수하여 포상하는 뜻을 보이며, 먼 변방의 역승은 관찰사로 하여금 천거하여 보충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상평창(常平倉)과 의창(義倉)의 법은 흉년을 구제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경수창(耿壽昌)이 의창에 대해 아뢴 것과 장손평(長孫平)이 사창(社倉)에 대해 건의한 것은 그 법이 대개 주관(周官)·위인(委人)의 직책에서 나온 것이니, 나라를 가진 자가 마땅히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작년 한여름에 군사를 일으키고 거기에 왜구가 더하여져서 씨뿌리고 밭가는 데에 시기가 어그러지고 수확에 때를 놓쳤습니다. 금년에 또한 홍수를 입어 동남쪽의 주군이 텅 비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으니, 흉년을 구제하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에서 이미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이르는 곳마다 모두 축적이 있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 군현에 모두 상평창을 두고, 풍년에 거두었다가 흉년에 나누어주는 법은 모두 근일에 도평의사에서 아뢴 바에 따라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듣건대 양광도(楊廣道)는 이미 상평창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마땅히 각 도에 명하여 이에 따라 시행하게 하시고, 수령 가운데 법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처벌하시기 바랍니다.
먹는 것은 민(民)의 하늘이고 곡식은 소의 힘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에는 소 잡는 것을 금지하는 도감[禁殺都監]을 두었으니 농사를 중히 여기고 민생을 두텁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달단(韃靼)의 수척(水尺)은 소를 도살하는 것으로 농사를 대신하니 서북면이 더욱 심하여 주군의 각 참(站)에서 모두 소를 잡아서 빈객을 먹여도 금지하는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금살도감 및 주군의 수령으로 하여금 금지령을 펼쳐 시행하게 하며, 〈법을 어긴 자를〉 붙잡아서 관에 고하는 자가 있으면 그자의 가산을 상으로 주고, 범한 자는 살인죄로 논하시기 바랍니다.
주군은 삭선(朔膳)과 사객(使客)에 대한 접대 등의 일로 비록 한창 농사철이라고 하여도 농민을 모아서 가시밭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한 달 동안이나 사냥을 하니, 농사가 시기를 놓쳐 민(民)의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닭이나 돼지와 같은 가축이라면 우리 안에서 잡을 수 있어 민(民)을 어렵게 하지 않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경기(京畿)에 닭과 돼지의 사육장 두 곳을 만들고 한 곳은 전구서(典廏署)에서 주관하여 종묘(宗廟)의 제사 용도로 바치게 하고, 한 곳은 사재시(司宰寺)에서 주관하여 궁중의 주방과 손님접대의 수요에 공급하게 하며, 주군과 각 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기르게 하여 씀씀이를 아끼고 잘 기르며, 새끼나 알을 잡지 않는다면 여러 해 지나지 않아서 공상(供上)·제사·빈객의 쓰임에 충당되고 우리 민(民)들의 먹거리로도 넉넉하게 될 것이며 사냥하느라 농사를 망칠 걱정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옹시(司饔寺)에서 매년 각 도에 사람을 보내 궁중에서 쓸 자기(瓷器)의 제조를 감독하는데 1년에 한 번씩 하지만 공무를 빙자하여 사익을 도모하여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니, 한 도에서 실어가는 것이 소 80, 90마리분에 이릅니다. 지나가는 곳은 떠들썩하지만 서울[京都]에 이르러서 보면, 바치는 것은 백분의 일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사로이 차지하니 폐해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새의 깃[羽], 소의 힘줄[筋], 화살대[箭竹] 등〈을 구해오기 위한〉 파견이 있어서 민(民)을 소란하게 하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 각 사(司)의 애마에서 외방에 파견하는 것을 일절 금지하시고, 무릇 이와 관련된 일은 모두 도당에 아뢰게 하여 도당에서 관찰사에 명을 내리고, 관찰사가 소재지의 주현에 배정하여 공문에 따라 직접 상납하게 한다면 민(民)들에게 편안해질 것입니다.
군사들이 왜노와 싸워서 획득한 말과 무기 및 모든 민(民)들이 적을 죽이고 획득한 물건을 그곳의 군관(軍官)과 민관(民官)이 경내에 문서를 두루 돌려 마치 도적을 국문하듯이 하고 모두 서울[京都]로 수송하여 무거운 상을 바라니, 윗사람을 속이고 민(民)에게 독이 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군사는 해이해지고 적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지니 매우 나쁜 계책입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여러 도의 장수 가운데 적을 깨뜨린 자는 적의 머리를 바칠 뿐으로 하고, 군사들과 민(民)들이 획득한 왜구의 물건은 추국하게 하지 못하게 하여 법전에 실어둔다면 사람들은 그 이익을 즐거워하여 전투에 용감하게 임할 것입니다. 어기는 자는 청렴하지 못한 죄로 논하시기 바랍니다.
재상(宰相)은 임금에 버금가는 사람으로서 하늘이 준 지위[天位]를 함께 누리고 하늘의 일[天工]을 대신하는 자니 그 존귀함이 비할 데가 없습니다. 불행히 죄가 있으면 그를 폐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를 물리치는 것이 가능하며, 그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 또한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급 관리로 하여금 포박해서 매달고 칼을 씌우며 머리를 베어 내걸고 시체를 던져두면서 장사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심한 일입니다. 한(漢) 문제(文帝) 때에 가의(賈誼)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대부(大夫) 이상에게는 형(刑)이 미치지 않는 법이라고 하니, 황제가 깊이 받아들여, 이로부터 대신(大臣)에게 죄가 있으면 모두 사형은 내렸으나 모욕은 주지 않았고 예로써 대우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대부들이 남의 과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김으로써 한 황실 400년의 예속(禮俗)을 이루었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양부(兩府)의 대신에게 비록 사죄(死罪)가 있더라도 대역부도(大逆不道)한 것 이외에는 문제의 고사를 본받아 드러내놓고 처형하는 벌을 가하지는 말아서 국가에서 대신을 중하게 여기는 성대한 은전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벌은 후사(後嗣)에 미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죄는 〈죄인의〉 처자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순(舜)은 곤(鯀)을 처형하였지만 우(禹)를 재상으로 삼았고, 무왕(武王)은 주(紂)를 처형하였지만 무경(武庚)을 봉하였으니, 곧 천지가 만물을 살리는 마음입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하고 다른 사람의 일족을 멸하는 데에 오히려 그 후사가 남아있을까 두려워하니 매우 어질지 못한 것입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무릇 죄가 있는 자는 삼대(三代)의 훌륭한 왕들의 제도를 본받아 처자를 연좌시키지 않음으로써 성대한 조정의 어진 정치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모든 옥사와 모든 금하는 것을 문왕(文王)이 감히 이에 아는 체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周)가 다스림을 이룩하였던 것입니다. 진평(陳平)이 전곡(錢穀)의 수효를 알지 못하자, 군자가 이르기를 ‘재상의 체통을 아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다른 관청의 직무를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제도에 도당에서 백관[百揆]를 총재하고 호령을 반포하며, 헌사(憲司)에서 백관을 감찰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전법도관(典法都官)이 곡직을 판별하고 옥송을 결정하는 것이 그 직무입니다. 근래에는 요행을 바라고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임금을 기망하고 도당을 우롱하여 송사의 문서가 많이 쌓이고 문서를 행이(行移)하는 사이에 머뭇거리고 구차하여 그 번잡함을 이길 수 없으니, 관직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눈 본뜻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소송을 하는 자로 하여금 각각 담당 아문[攸司]에 소송하게 하고, 대궐과 도당으로 직접 올리는 것은 일절 금지하여 군주늘 높이고 도당을 엄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공사(公私)의 이자를 불리는 것은 본전이 하나면 이자도 하나에 지나지 않아야 하는데, 요사이 재산을 불리는 무리들이 오직 이익만 바라보아서 본전 하나의 이자가 혹은 열 배에 이르기까지 하니, 돈을 빌린 무리들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끝내 갚지 못하므로, 나라에서 이미 금령(禁令)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 공판도감(供辦都監)의 보미(寶米)로 이자를 불리는 데에 한정이 없어서 빌린 사람으로 하여금 집을 잃고 생업을 잃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에서 민(民)을 구휼하는 뜻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본전 하나에 이자 하나로 하고 그 이상 취하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삼사(三司)와 육부(六部)의 관원은 때로는 친히 소속의 각 관사에 이르러 그 보고받은 바를 문서와 대조하여 살피고 회계를 점고하여 해이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만약 법을 받들어 시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헌사로 하여금 규찰하여 다스리게 하여, 큰 죄는 강등하여 다른 데 서용(敍用)하거나 제명하여 서용하지 않기도 하여 죄에 따라서 논하고, 작은 죄는 순군에 문서를 내려보내어 태(笞)나 장(杖)을 치고 본직으로 돌려보내시기 바랍니다.
무릇 서울과 지방의 크고 작은 관리가 임명장[除目]이 이미 내려간 지 여러 날이 되어도 곧바로 관직에 부임하지 않아 공무를 지체시키기에 이르러, 그 문서와 전곡(錢穀)은 모두 간사한 아전들이 숨겨버리게 되니 이는 폐단 가운데서도 큰 것이고 신하가 성심으로 군주를 섬기는 도에 어긋난 것입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대성(臺省)과 정조(政曹)를 제외하고 경관(京官)의 크고 작은 관원과 서리는 비목(批目)이 내려진 후, 경관은 3일을 기한으로, 외관은 10일을 기한으로 하여 궐에 나와 사은하고 곧바로 부임길에 오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권지행사(權知行事)라고 칭하며 신구(新舊)의 관리가 서로 마주 대하여 문서와 전곡에 대해 명확히 문건[契券]을 작성하여 손수 서로 교부함으로써 고과(考課)의 증빙으로 삼고, 그 연후에 정식으로 취임하게 하십시오. 만약 법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엄하게 처벌하십시오.
근년 이래로 기강이 해이해져서 향리(鄕吏)인 자가 혹은 군공이 있다고 하여 관직을 부당하게 받기도 하고, 혹은 잡과(雜科)를 빙자하여 본래의 직역을 회피하고자 꾀하기도 하며, 혹은 권세가에 기대어 관질(官秩)을 분에 넘게 올리기도 하는 자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주군이 텅 비게 되고 8도가 피폐해졌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비록 3정(丁)에 1자(子)로써 3, 4대(代) 향역(鄕役)을 면제받았더라도 확실한 문서[文契]가 없는 자, 군공으로 향역을 면제받았더라도 특별히 뛰어난 공로를 세워 공패(功牌)를 받은 일이 없는 자, 잡과라고 하더라도 성균관의 전교(典校)·전법(典法)·전의(典醫) 출신이 아닌 자, 첨설직의 봉익(奉翊)과 실직[眞差]의 3품 이하는 강제로 본래의 역에 따라 주군을 채우게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후로는 향리에게는 명경과(明經科)나 잡과 출신이라도 향역을 면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일정한 법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경(敬)이라는 한 글자는 제왕이 성군이 되는 기초이고, 공(公)이라는 한 글자는 제왕이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입니다. 청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는 황천(皇天)의 굽어보심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억조(億兆)의 민(民)이 우러러봄을 두려워하여 한 사람에게 상을 주더라도 상제(上帝)께서 착한 자에게 복을 내려주는 마음에 부합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한 사람에게 벌을 주더라도 상제께서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려주는 감계(鑑戒)에 부합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시어, 여러 사람이 기뻐한 이후에 상을 주고 여러 사람이 버린 이후에 형을 가하시기 바랍니다. 자문 구하기를 부지런히 하여 총명함을 넓히고 학문을 좋아하여 덕업을 높이며, 여러 신하를 접하기를 예로써 하고 모후(母后)를 모시기를 효로써 하십시오. 사악한 자를 제거할 때에는 의심하지 말고 명령을 내리면 반드시 행하십시오. 구중궁궐에 거처할 때에는 민(民)들이 비바람조차 막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하고, 진수성찬[八珍]을 드실 때에는 민(民)들에게 지게미와 겨[糟糠]조차 넉넉하지 않음을 생각하며,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을 때에는 누에치는 부녀자들이 헐벗고 있음을 생각하여 대우(大禹)가 의복을 검소하게 한 것을 본받고, 연향(宴享)에 임하여서는 농부들이 굶주려 죽는 것을 생각하여 수(隋) 문제(文帝)가 한 가지 고기만 먹던 것을 본받으십시오.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악함을 경계하며, 쓰임을 절약하여 민(民)을 사랑하십시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군주가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안색을 엄숙히 하고 조정에 서서 남김없이 말하면서 숨기지 않으며 우뚝하게 뛰어나서 조금도 회피함이 없는 자는 군자입니다. 전하께서는 그를 가까이 하고 그를 믿으시면 요(堯)·순(舜)의 다스림이 앉아서 이루어질 것이고 태조의 업도 계승하여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척은 반드시 승진시키고자 하고 은혜와 원수는 반드시 갚고자 하며, 백성의 고통을 듣고 군주의 과실을 보고서도 입을 다물고 감히 말하지 않으면서 하는 소리가 ‘입은 화가 나오는 문이다’라고 하면서 오직 아첨만을 하여 부귀를 훔치려는 자는 소인입니다. 전하께서 기뻐하여 그를 용납하신다면 걸(桀)과 주(紂)의 멸망을 서서 기다릴 수 있으며 태조의 공업은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자(儒者)로서 경사(經史)에 통하고 마음[心術]이 바른 자를 고르시어 날마다 번갈아 가면서 입직(入直)하게 하여 경사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치의 도를 논의하게 하심으로써 넓고 밝은 학문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또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번갈아 곁에서 모시게 하여 좌사(左史)는 말을, 우사(右史)는 일을 빠지는 것 없이 기록하게 하여 만세에 전하십시오. 또 세자를 위하여 특별히 서연(書筵)을 열어 당대의 대유(大儒)를 사부로 삼고 경사에 밝고 행실을 닦는 선비를 요좌(僚佐)로 삼아,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으면서 경적(經籍)을 강론함으로써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는 학문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부병(府兵)은 8위(八衛)에 의해 통령되고 8위는 군부사(軍簿司)에 통속되어 42개 도부(都府)의 군사가 12만 명이나 되며, 대(隊)에는 정(正)이 있고 오(伍)에는 위(尉)가 있어 상장(上將)에 이르기까지 서로 통속되어 있으니, 이는 금위(禁衛)를 엄하게 하고 외부의 침략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원(元)을 섬긴 이래 평화로운 날이 오래되니 문관은 태평하고 무관은 안일하여 금위에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근시(近侍)와 충용(忠勇)에 모두 호군(護軍) 이하 등의 관원을 두어 금위의 임무를 대신하게 하고 녹(祿)을 주었으니, 이로부터 조종의 8위의 제도가 모두 공허한 제도가 되어 다만 천록(天祿)을 낭비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달적(亐達赤, 우다치)·속고적(速古赤, 수구르치)·별보(別保) 등 각각의 애마(愛馬)는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아침이나 밤이나 수고로움이 심하였으나 한 말, 한 되의 녹도 먹지 못하였는데, 42도부·5원(五員)·10장(十將)·위(尉)·정(正)의 녹을 먹는 자는 어리고 약한 자제가 아니면 공인이나 상인, 천한 노예입니다. 어떤 자는 녹을 먹고도 그 직책을 비워두고 어떤 자는 나랏일에 부지런하고도 〈녹을〉 먹지 못하니, 어찌 조종께서 충신(忠信)으로 대우하고 녹을 무겁게 주던 뜻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근시를 좌우위(左右衛)에 합치고 사문(司門)은 감문위(監門衛)에 합치고 사순(司楯)은 비순위(備巡衛)에 합치고 충용(忠勇)은 신호위(神虎衛)에 합치신 뒤, 그 나머지 각 애마는 종류별로 여러 위에 합쳐, 그들로 하여금 날마다 돌아가며 입직(入直)하게 하고 그 근면하고 태만함을 평가하여 각각 그 위 내의 호군(護軍) 이하 위·정의 직책에 이르기까지 품계에 따라 녹용(錄用)하고, 그들로 하여금 녹을 먹으면서 그 직책에 부지런하게 한다면, 사람들은 벼슬하기를 즐거워 할 것이고 국록은 덜어질 것이며, 금위는 엄해지고 무비(武備)는 신장될 것입니다.
사막(司幕)은 옛날의 상사(尙舍)이고 지금의 사설(司設)입니다. 사옹(司饔)은 옛날의 상식(尙食)이고 지금의 사선(司膳)입니다. 지금 사설은 그 녹을 먹고도 그 직무를 폐하였는데, 사막은 그 일을 근면히 하고도 녹을 먹지 않으며, 사옹 이하의 관직 역시 그러합니다. 원하건대 사막·사옹 등의 애마는 6국(六局)에 병합함으로써 선왕의 옛 제도를 회복하고 최근의 폐해를 개혁한다면 이름과 실제가 서로 맞아떨어지고 직사도 확립될 것입니다.
공(功)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후(侯)에 봉하지 않는 것이 우리 조정의 법입니다. 김부식(金富軾)은 반란을 제거하고 서도(西都)를 평정하고서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졌습니다. 김방경(金方慶)은 반란을 일으킨 탐라(耽羅)를 정벌하고 동쪽의 왜적의 죄를 묻고서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질 수 있었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재상 가운데 사직을 편안하게 하였거나 먼 변방을 평정한 공신이 아니면 군(君)으로 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환관은 국초부터 경릉(慶陵, 충렬왕) 때에 이르기까지 관직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근래에 궁중에서 명을 전하는 직임으로써 도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반열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조정을 존중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환관의 제수는 경릉의 제도에 따라 조관(朝官)에 임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군기시(軍器寺)와 선공시(繕工寺)는 업무가 많은데도 인원이 적으니 청하건대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낭장(郎將)·별장(別將)을 겸판사(兼判事)·주부(注簿) 등의 관원으로 삼으면 녹이 허비되지 않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업무가 번다한 시(寺)·감(監)도 이를 본받아 겸무로 처리하게 하면 공무에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으로, 국가의 치란(治亂)과 정치의 득실이 이로부터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근래에는 전쟁으로 인하여 학교가 없어져버려서 풀만 무성하여졌습니다. 향원(鄕愿)으로서 유학자[儒名]임을 핑계로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들은 5·6월이 되면 동자들을 모아다가 당송(唐宋) 사람의 절구(絶句)를 읽다가 50일이 되면 파하고서 이를 하과(夏課)라고 일컫는데, 수령(守令)이 된 자도 이를 보고 그러려니 하면서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올바른 선비를 얻어서 국가의 다스림에 도움을 주고자 한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근면하고 명민하며 박학한 자를 교수관(敎授官)으로 삼아 5도에 각 한 명씩을 파견하여 군현(郡縣)을 두루 다니게 하고, 그 마필과 접대는 모두 향교(鄕校)에 위임하여 주관하게 하며, 또 주군(州郡)에 한가로이 살면서 유학을 업으로 삼는 자는 본관(本官)의 교도(敎導)로 삼아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항상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게 하되 사장(詞章)은 읽지 못하게 하며, 교수관은 두루 돌아다니며 교과와 일정을 엄하게 세우고 몸소 어려운 부분을 강론하여 그들이 통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파악하여서 서적(書籍)에 이름을 쓰고 인도하고 권장하여 실제로 쓸 만한 인재가 되도록 하되, 그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성과를 거둔 자는 차례를 따지지 않고 발탁하고, 만약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한 자는 또한 논죄하시기 바랍니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불효(不孝)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가 없는 것이 크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제사를 끊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옛날에는 부모께서 돌아가시면 들판에서 장사를 지내고 나서 우제(虞祭)를 지내어 신을 편안하게 하고 묘(廟)를 만들어 제사를 지냈으니, 이것은 돌아가신 분을 섬기는 것을 살아있는 분을 섬기는 것처럼 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동방의 가묘(家廟)의 법은 오래되어 폐해졌습니다. 지금은 서울로부터 군현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이 있는 자는 반드시 신사(神祀)를 세우고 이를 위호(衛護)라고 부르니, 이것이 가묘(家廟)의 유법(遺法)입니다. 아아, 부모의 시체를 지하에 맡겨두고 가묘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부모의 영이 어디에 의지하는지를 알 수 없으니 이는 아들이 된 자의 마음이 그래서가 아니라 다만 관습이 상례가 되고서 아직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일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서 대부(大夫) 이상은 3세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6품 이상은 2세대까지 제사를 지내며, 7품 이하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는 다만 그 부모만을 제사지내게 하고, 정결한 방 한 칸을 택하여 각각 한 감실(龕室)을 만들어 그 신주(神主)를 보관하되 서쪽을 윗자리로 삼고 초하루와 보름에 반드시 제수[奠]를 올리고 나가고 들어올 때 반드시 고하며, 새로 난 음식은 반드시 올리고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며, 기일을 맞이하면 말을 타고 외출하지 못하게 하고 빈객을 대접함에는 상례(喪禮)와 같이 하며, 성묘하는 예는 풍속에 따르도록 허락하되 매년 삼령절(三令節)과 한식(寒食)을 〈기일(期日)로〉 정하여 조상을 추모하는 풍속을 이루게 할 것이며, 어기는 자는 불효죄로 논하시기 바랍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충신(忠信)으로 대우하고 녹을 무겁게 주는 것은 선비를 권면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위로는 공(公)·경(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리에 이르기까지 녹을 후하게 주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무릇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들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데에 뜻을 두지 않고 공무에만 온 마음을 쏟았던 것입니다. 호강한 자들이 겸병한 이래로 조세(租稅)가 날마다 줄어들고 녹질(祿秩)이 해마다 줄어들어 선왕께서 제정하신 녹의 수는 다만 글로만 갖추어져 있을 뿐입니다. 마땅히 유사에 명하여 옛 제도를 참작하여 그 녹질을 풍족하게 한다면 선비들이 항심(恒心)을 가져 염치(廉恥)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경기(京畿) 8현의 요역이 매우 번거로운데, 정관(正官)이 통제하지 않고 관찰사(觀察使)가 다스리지도 않습니다. 또 수령(守令)이 교화를 펼치는 일도 없기 때문에 과렴(科斂)이 균등하지 못하고 부역에 기준이 없어 민(民)들이 의지해 살아가지 못하면서도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각 도의 사례에 따라서 현에 5, 6품의 관원을 두고 개성부(開城府)로 하여금 공적을 살펴 출척을 밝히게 하시기 바랍니다.
근년 이래로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은 그 재주를 따지지 않고 다만 재상의 지위에만 있으면 경솔하게 명하여 파견하니, 지휘통제[節制]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적의 세력은 더욱 커져서 침략하기에 이르러 군현이 텅 비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군주가 장수를 택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적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장수가 군사를 알지 못하면 그 주인을 적에게 내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장수를 택하여 왜구를 제어하는 것이 진실로 오늘의 급한 일입니다. 원하건대 도평의사(都評議使)와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각각 위엄과 덕이 일찍부터 드러난 자를 천거하도록 하여 명하여 장수로 삼아 군정(軍政)을 펼치게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군정이 여러 곳에서 나오면 호령이 엄숙하지 못합니다. 지금 한 도에 절제사(節制使)가 세 명이니 옛 제도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동북면·서북면 외에는 한 도마다 다만 한 명의 절제사만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하시기 바랍니다.
군사라는 것은 민(民)의 생명을 맡은 것이고 나라의 큰 정사이니 왕실을 호위하고 화란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우리나라의 5군(軍) 42도부(都府)는 대개 한(漢)의 남북군(南北軍), 당(唐)의 부위병(府衛兵)과 같습니다. 요(遼)·금(金)은 양계(兩界)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는데, 〈요는〉 진제(晉帝)를 세워 이를 자식으로 대우하고 천하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우리에게 화친을 요구하였으나 우리 태조께서 국교를 끊으셨고, 〈금은〉 요와 송(宋)의 세 황제를 포로로 하여 사해(四海)에 위엄을 떨쳤으나 감히 우리를 엿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이른 것은 조종의 군정이 그 율령(律令)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근세에 병제(兵制)가 크게 무너져서 군대를 동원한 30여 년 동안 군정에 통솔이 없고, 전술이 없는 장수로서 교련되지 않은 민(民)을 거느리고 전투를 벌이니 멀리서 바라보고서도 놀라서 궤멸되어 천리에 해골이 널려 있게 되었습니다. 하찮은 왜노(倭奴)가 나라의 병이 되고 있으니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전직 4품 이상의 관원은 삼군(三軍)에 소속시키고 군에서는 장수의 보좌로 두며, 5품 이하는 부위(府衛)에 소속시켜 군부사(軍簿司)에서 통솔하게 하여 위아래가 서로 매이고 체통이 서로 연결되어 군정이 한 곳에서 나오고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 곳에 통일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연후에 군령을 밝게 펼치고 사졸을 훈련시키면 백만의 무리가 몸이 팔을 쓰는 것처럼, 팔이 손가락을 쓰는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이니, 어디를 지킨들 견고하지 않겠으며 어디를 공격한들 취하지 못하겠습니까.
근세에는 간신이 정치를 문란하게 하여 재능이 장수가 될 만하지 못한 자가 중방(重房)에 늘어서 있고, 수많은 전투에서 수고해온 자는 겨우 첨설(添設)에 제수되어 있으니, 상벌에 규정이 없어 군사들이 해이해지고 이르는 곳에서 공적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견고한 적을 깨뜨리고 함락시킨 공이나, 적장의 목을 베고 적기(敵旗)를 빼앗은 용맹함이나 수많은 전투에서 수고한 공적이 있는 자로서 공이 크면 상호군(上護軍)으로, 그 다음으로는 호군(護軍)·중랑장(中郞將)으로부터 별장(別將)·산원(散員)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짜 관직[眞差]을 주어 적을 격파한 공을 기리게 하시면 사람들이 모두 윗사람을 친근히 여기게 되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또 근일에 의병을 일으켜 난을 진압할 때에 군에 종사한 자에게도 역시 관직과 상을 더해주어 후세 사람들을 권장하시기 바랍니다.
국가에서 관찰사를 뽑고 수령을 가려 임명하여 5도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였는데, 오직 동북면·서북면만은 아직도 옛 관습을 따르면서 왕의 교화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 여러 도의 예에 의거하여 관찰사를 두어 군현을 순행하게 하여 군민의 관원을 출척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근래에 역호(驛戶)가 피폐해져서 모든 포마(鋪馬)·전체(傳遞)·지로(知路)·지로(指路)의 역(役)을 주군에서 대신 맡고 있으니 그 괴로움 때문에 〈백성들이〉 유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본업을 회복하게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역호를 구휼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라에서 비록 정역별감(程驛別監)을 두어 여러 역을 안정시키게 하였으나 한 사람이 혼자서는 다스릴 수 없어서, 매 역마다 사속(私屬)을 두어 이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도당(都堂)에서 파견한 것이 아니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업신여겨 안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매 역마다 5, 6품의 역승(驛丞) 한 사람을 두고 그를 천거하는 법은 수령의 예와 같이 하며 또한 반인(半印)을 주어 파견하고, 그 가운데 역호를 풍족하게 하고 역마[馹騎]를 번성하게 한 자가 있으면 관찰사가 도당에 보고하여 수령이 결원된 곳에 보충하고, 또 경관(京官)에 제수하여 포상하는 뜻을 보이며, 먼 변방의 역승은 관찰사로 하여금 천거하여 보충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상평창(常平倉)과 의창(義倉)의 법은 흉년을 구제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경수창(耿壽昌)이 의창에 대해 아뢴 것과 장손평(長孫平)이 사창(社倉)에 대해 건의한 것은 그 법이 대개 주관(周官)·위인(委人)의 직책에서 나온 것이니, 나라를 가진 자가 마땅히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작년 한여름에 군사를 일으키고 거기에 왜구가 더하여져서 씨뿌리고 밭가는 데에 시기가 어그러지고 수확에 때를 놓쳤습니다. 금년에 또한 홍수를 입어 동남쪽의 주군이 텅 비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으니, 흉년을 구제하는 계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에서 이미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이르는 곳마다 모두 축적이 있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 군현에 모두 상평창을 두고, 풍년에 거두었다가 흉년에 나누어주는 법은 모두 근일에 도평의사에서 아뢴 바에 따라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듣건대 양광도(楊廣道)는 이미 상평창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마땅히 각 도에 명하여 이에 따라 시행하게 하시고, 수령 가운데 법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처벌하시기 바랍니다.
먹는 것은 민(民)의 하늘이고 곡식은 소의 힘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에는 소 잡는 것을 금지하는 도감[禁殺都監]을 두었으니 농사를 중히 여기고 민생을 두텁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달단(韃靼)의 수척(水尺)은 소를 도살하는 것으로 농사를 대신하니 서북면이 더욱 심하여 주군의 각 참(站)에서 모두 소를 잡아서 빈객을 먹여도 금지하는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금살도감 및 주군의 수령으로 하여금 금지령을 펼쳐 시행하게 하며, 〈법을 어긴 자를〉 붙잡아서 관에 고하는 자가 있으면 그자의 가산을 상으로 주고, 범한 자는 살인죄로 논하시기 바랍니다.
주군은 삭선(朔膳)과 사객(使客)에 대한 접대 등의 일로 비록 한창 농사철이라고 하여도 농민을 모아서 가시밭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한 달 동안이나 사냥을 하니, 농사가 시기를 놓쳐 민(民)의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닭이나 돼지와 같은 가축이라면 우리 안에서 잡을 수 있어 민(民)을 어렵게 하지 않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경기(京畿)에 닭과 돼지의 사육장 두 곳을 만들고 한 곳은 전구서(典廏署)에서 주관하여 종묘(宗廟)의 제사 용도로 바치게 하고, 한 곳은 사재시(司宰寺)에서 주관하여 궁중의 주방과 손님접대의 수요에 공급하게 하며, 주군과 각 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기르게 하여 씀씀이를 아끼고 잘 기르며, 새끼나 알을 잡지 않는다면 여러 해 지나지 않아서 공상(供上)·제사·빈객의 쓰임에 충당되고 우리 민(民)들의 먹거리로도 넉넉하게 될 것이며 사냥하느라 농사를 망칠 걱정도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옹시(司饔寺)에서 매년 각 도에 사람을 보내 궁중에서 쓸 자기(瓷器)의 제조를 감독하는데 1년에 한 번씩 하지만 공무를 빙자하여 사익을 도모하여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니, 한 도에서 실어가는 것이 소 80, 90마리분에 이릅니다. 지나가는 곳은 떠들썩하지만 서울[京都]에 이르러서 보면, 바치는 것은 백분의 일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사로이 차지하니 폐해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새의 깃[羽], 소의 힘줄[筋], 화살대[箭竹] 등〈을 구해오기 위한〉 파견이 있어서 민(民)을 소란하게 하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 각 사(司)의 애마에서 외방에 파견하는 것을 일절 금지하시고, 무릇 이와 관련된 일은 모두 도당에 아뢰게 하여 도당에서 관찰사에 명을 내리고, 관찰사가 소재지의 주현에 배정하여 공문에 따라 직접 상납하게 한다면 민(民)들에게 편안해질 것입니다.
군사들이 왜노와 싸워서 획득한 말과 무기 및 모든 민(民)들이 적을 죽이고 획득한 물건을 그곳의 군관(軍官)과 민관(民官)이 경내에 문서를 두루 돌려 마치 도적을 국문하듯이 하고 모두 서울[京都]로 수송하여 무거운 상을 바라니, 윗사람을 속이고 민(民)에게 독이 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군사는 해이해지고 적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지니 매우 나쁜 계책입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여러 도의 장수 가운데 적을 깨뜨린 자는 적의 머리를 바칠 뿐으로 하고, 군사들과 민(民)들이 획득한 왜구의 물건은 추국하게 하지 못하게 하여 법전에 실어둔다면 사람들은 그 이익을 즐거워하여 전투에 용감하게 임할 것입니다. 어기는 자는 청렴하지 못한 죄로 논하시기 바랍니다.
재상(宰相)은 임금에 버금가는 사람으로서 하늘이 준 지위[天位]를 함께 누리고 하늘의 일[天工]을 대신하는 자니 그 존귀함이 비할 데가 없습니다. 불행히 죄가 있으면 그를 폐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를 물리치는 것이 가능하며, 그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 또한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급 관리로 하여금 포박해서 매달고 칼을 씌우며 머리를 베어 내걸고 시체를 던져두면서 장사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심한 일입니다. 한(漢) 문제(文帝) 때에 가의(賈誼)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대부(大夫) 이상에게는 형(刑)이 미치지 않는 법이라고 하니, 황제가 깊이 받아들여, 이로부터 대신(大臣)에게 죄가 있으면 모두 사형은 내렸으나 모욕은 주지 않았고 예로써 대우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대부들이 남의 과실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김으로써 한 황실 400년의 예속(禮俗)을 이루었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양부(兩府)의 대신에게 비록 사죄(死罪)가 있더라도 대역부도(大逆不道)한 것 이외에는 문제의 고사를 본받아 드러내놓고 처형하는 벌을 가하지는 말아서 국가에서 대신을 중하게 여기는 성대한 은전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벌은 후사(後嗣)에 미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죄는 〈죄인의〉 처자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순(舜)은 곤(鯀)을 처형하였지만 우(禹)를 재상으로 삼았고, 무왕(武王)은 주(紂)를 처형하였지만 무경(武庚)을 봉하였으니, 곧 천지가 만물을 살리는 마음입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하고 다른 사람의 일족을 멸하는 데에 오히려 그 후사가 남아있을까 두려워하니 매우 어질지 못한 것입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무릇 죄가 있는 자는 삼대(三代)의 훌륭한 왕들의 제도를 본받아 처자를 연좌시키지 않음으로써 성대한 조정의 어진 정치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모든 옥사와 모든 금하는 것을 문왕(文王)이 감히 이에 아는 체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周)가 다스림을 이룩하였던 것입니다. 진평(陳平)이 전곡(錢穀)의 수효를 알지 못하자, 군자가 이르기를 ‘재상의 체통을 아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다른 관청의 직무를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제도에 도당에서 백관[百揆]를 총재하고 호령을 반포하며, 헌사(憲司)에서 백관을 감찰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전법도관(典法都官)이 곡직을 판별하고 옥송을 결정하는 것이 그 직무입니다. 근래에는 요행을 바라고 이익을 탐하는 무리들이 임금을 기망하고 도당을 우롱하여 송사의 문서가 많이 쌓이고 문서를 행이(行移)하는 사이에 머뭇거리고 구차하여 그 번잡함을 이길 수 없으니, 관직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눈 본뜻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소송을 하는 자로 하여금 각각 담당 아문[攸司]에 소송하게 하고, 대궐과 도당으로 직접 올리는 것은 일절 금지하여 군주늘 높이고 도당을 엄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공사(公私)의 이자를 불리는 것은 본전이 하나면 이자도 하나에 지나지 않아야 하는데, 요사이 재산을 불리는 무리들이 오직 이익만 바라보아서 본전 하나의 이자가 혹은 열 배에 이르기까지 하니, 돈을 빌린 무리들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팔아도 끝내 갚지 못하므로, 나라에서 이미 금령(禁令)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 공판도감(供辦都監)의 보미(寶米)로 이자를 불리는 데에 한정이 없어서 빌린 사람으로 하여금 집을 잃고 생업을 잃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에서 민(民)을 구휼하는 뜻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본전 하나에 이자 하나로 하고 그 이상 취하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삼사(三司)와 육부(六部)의 관원은 때로는 친히 소속의 각 관사에 이르러 그 보고받은 바를 문서와 대조하여 살피고 회계를 점고하여 해이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만약 법을 받들어 시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헌사로 하여금 규찰하여 다스리게 하여, 큰 죄는 강등하여 다른 데 서용(敍用)하거나 제명하여 서용하지 않기도 하여 죄에 따라서 논하고, 작은 죄는 순군에 문서를 내려보내어 태(笞)나 장(杖)을 치고 본직으로 돌려보내시기 바랍니다.
무릇 서울과 지방의 크고 작은 관리가 임명장[除目]이 이미 내려간 지 여러 날이 되어도 곧바로 관직에 부임하지 않아 공무를 지체시키기에 이르러, 그 문서와 전곡(錢穀)은 모두 간사한 아전들이 숨겨버리게 되니 이는 폐단 가운데서도 큰 것이고 신하가 성심으로 군주를 섬기는 도에 어긋난 것입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대성(臺省)과 정조(政曹)를 제외하고 경관(京官)의 크고 작은 관원과 서리는 비목(批目)이 내려진 후, 경관은 3일을 기한으로, 외관은 10일을 기한으로 하여 궐에 나와 사은하고 곧바로 부임길에 오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권지행사(權知行事)라고 칭하며 신구(新舊)의 관리가 서로 마주 대하여 문서와 전곡에 대해 명확히 문건[契券]을 작성하여 손수 서로 교부함으로써 고과(考課)의 증빙으로 삼고, 그 연후에 정식으로 취임하게 하십시오. 만약 법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엄하게 처벌하십시오.
근년 이래로 기강이 해이해져서 향리(鄕吏)인 자가 혹은 군공이 있다고 하여 관직을 부당하게 받기도 하고, 혹은 잡과(雜科)를 빙자하여 본래의 직역을 회피하고자 꾀하기도 하며, 혹은 권세가에 기대어 관질(官秩)을 분에 넘게 올리기도 하는 자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니 주군이 텅 비게 되고 8도가 피폐해졌습니다.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비록 3정(丁)에 1자(子)로써 3, 4대(代) 향역(鄕役)을 면제받았더라도 확실한 문서[文契]가 없는 자, 군공으로 향역을 면제받았더라도 특별히 뛰어난 공로를 세워 공패(功牌)를 받은 일이 없는 자, 잡과라고 하더라도 성균관의 전교(典校)·전법(典法)·전의(典醫) 출신이 아닌 자, 첨설직의 봉익(奉翊)과 실직[眞差]의 3품 이하는 강제로 본래의 역에 따라 주군을 채우게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후로는 향리에게는 명경과(明經科)나 잡과 출신이라도 향역을 면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일정한 법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