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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습속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 그들의 습속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國中의 부락마다 남녀가 밤마다 떼지어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유희를 즐긴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경우 한쪽다리는 펴며, 길을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하듯 빨리 간다.註 030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大會가 있으니 이를 ‘東明’註 031이라 한다. 그들의 公式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金과 銀으로 장식한다.
大加·主簿의 머리에 쓰는 것은 [中國의] 幘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小加는 折風註 032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그 나라에는 감옥이 없고,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諸加들이 모여 評議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한다.註 033
그 나라의 습속은 음란하여 남녀가 서로 野合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을 한 뒤에는 곧 죽어서 입고 갈 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데에 椁은 쓰지만 棺은 사용하지 않는다. 厚葬의 풍속이 있어서 금은과 재화를 모두 장례에 소비한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註 034 그 나라의 말은 모두 작아 산에 오르기 편리하다. 나라 사람들은 氣力을 숭상하여 활·화살·칼·창을 잘 쓰고, 갑옷이 있으며 전투에 익숙하여 沃沮·東穢를 모두 복속시켰다.註 035
註) 030
이 부분은 字句에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三國志』高句麗傳의 내용을 전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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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1
高句麗의 部族的 祭天行事로 10月에 행하여졌다. 『梁書』에만 ‘東明’으로 되어 있고, 『後漢書』·『三國志』에는 ‘東盟’으로 되어 있다. 『梁書』의 기록에 의거하여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4)
東盟
『梁書』高句驪傳에는 ‘東明’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東盟’字 이하에 『太平御覽』所引『魏略』에는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의 14字가 더 기록되어 있다. 『翰苑』所引『魏略』도『太平御覽』과 同一한데 ‘有軍事亦各祭天’이라 하여 ‘各’字가 더 있다. 또 『魏略輯本』高句麗條에는 ‘高句驪有軍事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凶 蹄合者吉 夫餘國亦爾’라 되어 있다. 이 기사는 段公路의『北戶錄』에 의한 것이다.
『三國志』 「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 「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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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2
折風은 뒷날까지 일반 고구려인의 대표적인 모자로서 고깔(弁) 모양이었다.
『北史』高句麗傳에서 전하는 貴人의 冠이라는 蘇骨을 折風과 同一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兩者를 구분하여 蘇骨을 『三國志』의 ‘幘而無後’한 관모로 보는 說도 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5)
折風
折風은 뒷날까지 일반 고구려인의 대표적인 모자로서 고깔(弁)모양이었다. 士人들은 이에 鳥羽를 꽂아 장식하였는데 鳥羽를 冠에 꽂는 것은 北아시아 諸種族에서 널리 보이는 원시종교로서의 鳥類崇拜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降魔攘鬼의 呪術的인 성격을 지녔다. 새털을 모자에 꽂는 풍속은 新羅와 百濟에도 있었다. 『北史』高麗傳에서 전하는 貴人의 冠이라는 蘇骨을 折風과 同一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兩者를 구분하여 蘇骨을 『三國志』의 ‘幘而無後’한 관모로 보는 說도 있다.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人의 鳥羽挿冠에 대하여」『東國史學』4, 1956.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高句麗條.
『北史』卷94 「列傳」高句麗條.
李龍範, 「高句麗人의 鳥羽揷冠에 대하여」『東國史學』4,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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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3
이 부분은 『後漢書』 및 『三國志』高句麗傳의 내용을 전재한 것으로서 字句에 다소 차이가 있으며, 특히 그 末尾의 ‘爲奴婢’가 삭제되어 있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高句麗條.
『三國志』卷30 「東夷傳」高句麗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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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4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는 『三國志』 및 『後漢書』高句麗傳에서 전재하였으나 ‘有椁無棺’과 ‘兄死妻嫂’는 『三國志』夫餘傳에서 전재한 듯 하다.
<참조>
1.『三國志』夫餘傳 註 27)
舊夫餘俗 …… 或言當殺
옛 夫餘의 風俗에 水旱이 계속되어 5穀이 제대로 여물지 않을 때에 그 허물을 王에게 돌려 혹은 갈자느니 혹은 죽이자느니 했다는 기사는 초기 농경사회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J.G. Frazer가『黃金의 가지』에 소개할 정도로 유명한 것이다.
麻余가 이러한 옛 夫餘의 風俗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당시 夫餘의 政治體制가 夫子相續에 의한 王位世襲制가 이루어질 정도로 王權이 신장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절대적 王權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李丙燾, 「夫餘考」p.216)
이와 관련하여 그 당시 夫餘王은 公孫度가 夫餘王에게 一族의 딸을 시집보내고 있음에서 夫餘國 支配의 實權을 쥐고 있는 權力的인 王으로서의 일면과, 麻余가 옛 遺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데에서 原始的인 王으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3세기의 夫餘王은 權力的이면서도 原初的이라는 상반된 양면성을 가지면서 貴族聯合制에 의해 共立되는 성격이 최고로 강하였다.(井上秀雄, 「朝鮮の初期國家」pp.78~79)
≪參考文獻≫
李丙燾, 「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1976.
井上秀雄, 「朝鮮の初期國家」『日本文化硏究所硏究報告』第 12集.
2. 『三國志』高句麗傳 註 29)
其俗淫
其俗 이하에 『太平御覽』高句麗條 所引『魏略』에는 ‘淫汚相奔誘 其死葬有槨無棺 停喪百日 好厚葬 積石爲封 列種松栢 兄死亦報嫂俗有氣力 便弓矢刀矛 有鎧 習戰’이라는 구절이 있다. ‘兄死亦報嫂俗’에 대해 『魏略輯本』에선 ‘兄死亦殺嫂’라 하였으나, 『梁書』및『南史』高句麗傳에서는 ‘兄死妻嫂’라 하고 있으니, 이는 ‘殺嫂’가 아니라 ‘報嫂’나 ‘妻嫂’가 옳은 듯 하다.
이러한 娶嫂婚(levirate)의 풍속과 그 밖의 위의 句節에서 보이는 부여와 같은 풍속과 상태에 대해『三國志』高句麗傳에서 기록치 않은 것은 같은 사실을 省略한다는『三國志』撰者의 「東夷傳」記述방침에 따른 것이다.
≪參考文獻≫
『太平御覽』卷783 高句麗條 所引『魏略』
盧泰敦, 「高句麗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一考察」1983.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高句驪 및 夫餘條.
『三國志』卷30 「東夷傳」高句麗 및 夫餘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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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5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三國志』 및 『後漢書』高句麗傳에서 전재하였으나 그중 ‘便弓矢刀矛 有鎧甲’은 『三國志』夫餘傳의 ‘以弓矢刀矛爲兵 家家自有鎧仗’에서 연유한 듯 하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高句麗條.
『三國志』卷30 「東夷傳」高句麗 및 夫餘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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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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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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