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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갑이 백제의 사정을 고하다
이보다 앞서 조미갑(租未𡊠)註 042 급찬을 부산현령(夫山縣令)註 043으로 임명하였는데, 백제에 잡혀가 좌평 임자(任子)註 044의 가노(家奴)가 되었다. 〔조미갑이 임자를〕 모시고 섬기기를 근면하고 조신하게 하였으며, 지금까지 태만한 적이 없어서 임자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의심하지 않았고 그 출입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註 045 〔조미갑이〕 이에 도망쳐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고하였다.註 046
註) 042
조미갑(租未𡊠): 이곳에 처음 나오는 인명으로 조미갑 혹은 조미압으로 불린다. 중종임신간본과 주자본의 『삼국사기』에는 ‘坤’으로 되어 있다. 이 글자는 자전에 없는 글자이나 음은 정문연본에서 ‘갑’으로 추정하였다. 북한본과 신호열본에서는 ‘압(押)’으로, 이재호 본에는 ‘곤(坤)’으로 번역하였다. 자형으로 보면 곤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고유명사이므로 그대로 판독하고 음은 ‘갑’으로 읽고 있다(정구복 외, 2012, 668쪽). 997년 요(遼)의 승려 행균(行均)이 지은 한자자전인 『용감수경(龍龕手鏡)』을 남송대에 다시 새긴 『용감수감(龍龕手鑑)』에는 ‘坤’의 음은 ‘甲’이며 흙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되어 있다. 이를 따른다면 조미갑으로 읽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이민수, 2019, 381쪽).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이민수, 2019, 「백제 멸망기 당의 신라 침공 계획」, 『한국고대사탐구』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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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43
부산현령(夫山縣令): 부산현을 이병도는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鎭海) 부근으로 추정한 바 있는데(이병도, 1977, 625쪽),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음운상으로 고구려의 부산현(釜山縣)과 같은 곳으로 보아,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정구복 외, 2012, 668쪽). 현재로서는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 어렵다. 다만 백제가 신라 동남해안 깊숙이 위치한 진해까지 침투해 현령을 납치해 갔다고 보기에는 부자연스럽다. 이에 백제와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견제하던 평택시 진위면으로 보는 견해에 무게가 실린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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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44
임자(任子): 본 기록에 김유신이 임자가 백제의 일을 오로지 한다고 들었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를 통해 좌평 임자가 의자왕대에 백제의 집정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임자는 조미갑을 통해 김유신과 내통하였는데, 김유신이 조미갑을 좌평 임자의 집에 침투시켜 첩보전과 심리전을 전개하였다고 이해한다(김영수, 1993). 종래에 임자를 의자왕의 비인 은고(恩古)와 가까운 인척으로 이해하고, 이를 근거로 의자왕대에 임자를 중심으로 하는 외척세력이 국정을 농단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전덕재, 2018, 31쪽).
〈참고문헌〉
김영수, 1993, 「고대 첩자고」, 『군사』 27
전덕재, 2018, 『이슈와 쟁점으로 읽는 한국고대사』, 역사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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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45
출입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조미갑이 좌평 임자를 찾아가 스스로 가노(家奴)가 되었기 때문에, 임자는 주인이고 조미갑은 노비(종)라 할 수 있다. 고대 노예의 경우 주인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복종이 강요되었고, 물론 거주 및 이동의 자유도 제한되었다. 결국 주인의 변덕에 따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양동휴, 2000, 「고전 고대 노예제의 기원과 성격」, 『경제논집』 39-3·4, 405쪽). 이러한 맥락에서 조미갑이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임자가 상당히 조미갑을 배려했음을 알 수 있다.바로가기
註) 046
이보다 앞서 … 고하였다: 신라의 첩자 조미갑과 백제 좌평 임자에 관련된 내용은 오직 김유신열전에서만 전하고 있다. 김유신열전에 따르면, 조미갑이 백제의 포로가 된 시점은 도비천 전투 이전 즉 655년 9월 이전이라 한다. 또 655년 9월 이전과 근접한 시기에 백제가 신라를 침공한 시기는 655년 초로 여겨진다.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태종무열왕 2년조에는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33성을 탈취하였다고 전한다. 655년 9월 이전에 조미갑이 포로가 되었다는 내용은 655년 초에 신라가 패전한 사실에서 방증할 수 있다. 따라서 김유신열전에 전하는 신라 조미갑과 백제 임자의 일화는 신뢰할 만한 얘기라 판단된다(이민수, 2019, 「백제 멸망기 당의 신라 침공 계획」, 『한국고대사탐구』 33, 382쪽).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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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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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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