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으니, 그 이름을 ‘桴京’註 079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 부여와 같지 않으며, 길을 걸을 적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
京은 地面의 濕氣를 피하기 위하여 높게 만든 양식창고를 말한다. 日本의 正倉阮과 같은 소위 校倉(アゼクラ)式 건물을 연상케 하며 南韓지역에서 출토된 家形土器의 모습과 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오늘날에도 이러한 양식의 창고가 남한의 농촌에서 발견된 例가 있다. 『北史』百濟傳에 기록된 百濟의 官制중에 內掠部와 外掠部가 보이는데, (『翰苑』에서는 ‘掠’을 ‘椋’으로 표기하였다.)『三國史記』 「職官志」에는 ‘內꜎部·外꜎部’로 기록되어 있다. 日本古典에서도 椋은 ‘くら’라 訓하는 倉庫의 뜻이었다. 즉 椋과 ꜎은 모두 四起가 높은 창고인 京과 같은 의미인데, ‘서울·京’의 뜻과 혼동됨을 피하기 위해 本偏과 广偏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신라에서도 고구려와 같은 양식의 창고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桴’字는 고구려 토속어의 音을 새긴 것인지 뜻을 새긴 것인지 분명치 않다.
≪參考文獻≫
李弘稙, 「日本書紀所載高句麗關係記事考」『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申榮勳, 「順興邑內京二例」『考古美術』111, 1971.
稻葉群山, 「百濟の椋及び椋部」『釋椋』1960.
≪參考文獻≫
李弘稙, 「日本書紀所載高句麗關係記事考」『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申榮勳, 「順興邑內京二例」『考古美術』111, 1971.
稻葉群山, 「百濟の椋及び椋部」『釋椋』1960.
10월에 지내는 祭天行事는 國中大會로 이름하여 ‘東盟’註 080이라 한다. 그들의 公式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金과 銀으로 장식한다. 大加와 注簿는 머리에 幘을 쓰는데, [中國의] 幘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小加는 折風註 081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梁書』高句驪傳에는 ‘東明’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東盟’字 이하에 『太平御覽』所引『魏略』에는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의 14字가 더 기록되어 있다. 『翰苑』所引『魏略』도『太平御覽』과 同一한데 ‘有軍事亦各祭天’이라 하여 ‘各’字가 더 있다. 또 『魏略輯本』高句麗條에는 ‘高句驪有軍事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凶 蹄合者吉 夫餘國亦爾’라 되어 있다. 이 기사는 段公路의『北戶錄』에 의한 것이다.
『三國志』 「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 「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三國志』 「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 「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折風은 뒷날까지 일반 고구려인의 대표적인 모자로서 고깔(弁)모양이었다. 士人들은 이에 鳥羽를 꽂아 장식하였는데 鳥羽를 冠에 꽂는 것은 北아시아 諸種族에서 널리 보이는 원시종교로서의 鳥類崇拜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降魔攘鬼의 呪術的인 성격을 지녔다. 새털을 모자에 꽂는 풍속은 新羅와 百濟에도 있었다. 『北史』高麗傳에서 전하는 貴人의 冠이라는 蘇骨을 折風과 同一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兩者를 구분하여 蘇骨을 『三國志』의 ‘幘而無後’한 관모로 보는 說도 있다.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人의 鳥羽挿冠에 대하여」『東國史學』4, 1956.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人의 鳥羽挿冠에 대하여」『東國史學』4, 1956.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隧穴이라 부른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隧神註 082을 맞이하여 나라의 동쪽 [江]위에 모시고 가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隧神을 神의 좌석에 모신다.
隧神의 성격에 대해선 이를 檀君神話에 나타나는 穴神 즉, 熊女神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熊女와 河伯女는 同名의 異寫인데, 國土神·生産神으로서의 隧穴神을 맞이하여 國東水上에서 제사하는 것은 東明神話에서 河伯女가 淸河의 態心淵에서 解慕漱와 결합하였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韓國史』pp.250~251)이 隧神은 穀神으로 여겨지며 이에 대한 제사는 수확 때의 穀神儀禮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始祖 朱蒙의 母인 河伯女 柳花는 농업을 주관하는 地母神으로 섬겨졌으니, 이 隧神과의 연관성을 설정해 볼 수 있겠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諸加들이 모여서 評議하여 사형에 처하고 妻子는 몰수하여 奴婢로 삼는다.
註) 079
京은 地面의 濕氣를 피하기 위하여 높게 만든 양식창고를 말한다. 日本의 正倉阮과 같은 소위 校倉(アゼクラ)式 건물을 연상케 하며 南韓지역에서 출토된 家形土器의 모습과 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오늘날에도 이러한 양식의 창고가 남한의 농촌에서 발견된 例가 있다. 『北史』百濟傳에 기록된 百濟의 官制중에 內掠部와 外掠部가 보이는데, (『翰苑』에서는 ‘掠’을 ‘椋’으로 표기하였다.)『三國史記』 「職官志」에는 ‘內꜎部·外꜎部’로 기록되어 있다. 日本古典에서도 椋은 ‘くら’라 訓하는 倉庫의 뜻이었다. 즉 椋과 ꜎은 모두 四起가 높은 창고인 京과 같은 의미인데, ‘서울·京’의 뜻과 혼동됨을 피하기 위해 本偏과 广偏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신라에서도 고구려와 같은 양식의 창고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桴’字는 고구려 토속어의 音을 새긴 것인지 뜻을 새긴 것인지 분명치 않다.
≪參考文獻≫
李弘稙, 「日本書紀所載高句麗關係記事考」『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申榮勳, 「順興邑內京二例」『考古美術』111, 1971.
稻葉群山, 「百濟の椋及び椋部」『釋椋』1960.

≪參考文獻≫
李弘稙, 「日本書紀所載高句麗關係記事考」『韓國古代史의 硏究』1971.
申榮勳, 「順興邑內京二例」『考古美術』111, 1971.
稻葉群山, 「百濟の椋及び椋部」『釋椋』1960.
註) 080
『梁書』高句驪傳에는 ‘東明’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東盟祭의 명칭을 夫餘族의 神話上의 始祖인 東明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東盟’字 이하에 『太平御覽』所引『魏略』에는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의 14字가 더 기록되어 있다. 『翰苑』所引『魏略』도『太平御覽』과 同一한데 ‘有軍事亦各祭天’이라 하여 ‘各’字가 더 있다. 또 『魏略輯本』高句麗條에는 ‘高句驪有軍事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凶 蹄合者吉 夫餘國亦爾’라 되어 있다. 이 기사는 段公路의『北戶錄』에 의한 것이다.
『三國志』 「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 「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三國志』 「東夷傳」에 이에 관한 기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夫餘傳에 軍事가 있을 때 祭天하고 牛蹄로 占을 치는 사실을 摘記하였기 때문에 같은 사실을 「東夷傳」내에서 중복하여 서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하다. 그래서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고 하여 포괄적으로 기술하였던 바이다. 東盟祭에 관한『三國志』의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이란 기술은『後漢書』나『魏略』등과 字句 표현에 약간 차이가 있다.
≪參考文獻≫
全海宗, 『東夷傳의 文獻的 硏究』1980.
註) 081
折風은 뒷날까지 일반 고구려인의 대표적인 모자로서 고깔(弁)모양이었다. 士人들은 이에 鳥羽를 꽂아 장식하였는데 鳥羽를 冠에 꽂는 것은 北아시아 諸種族에서 널리 보이는 원시종교로서의 鳥類崇拜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降魔攘鬼의 呪術的인 성격을 지녔다. 새털을 모자에 꽂는 풍속은 新羅와 百濟에도 있었다. 『北史』高麗傳에서 전하는 貴人의 冠이라는 蘇骨을 折風과 同一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兩者를 구분하여 蘇骨을 『三國志』의 ‘幘而無後’한 관모로 보는 說도 있다.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人의 鳥羽挿冠에 대하여」『東國史學』4, 1956.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人의 鳥羽挿冠에 대하여」『東國史學』4, 1956.
註) 082
隧神의 성격에 대해선 이를 檀君神話에 나타나는 穴神 즉, 熊女神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熊女와 河伯女는 同名의 異寫인데, 國土神·生産神으로서의 隧穴神을 맞이하여 國東水上에서 제사하는 것은 東明神話에서 河伯女가 淸河의 態心淵에서 解慕漱와 결합하였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李丙燾, 『韓國史』pp.250~251)이 隧神은 穀神으로 여겨지며 이에 대한 제사는 수확 때의 穀神儀禮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始祖 朱蒙의 母인 河伯女 柳花는 농업을 주관하는 地母神으로 섬겨졌으니, 이 隧神과의 연관성을 설정해 볼 수 있겠다.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參考文獻≫
李丙燾, 『韓國史』(古代篇) 1959.
金哲埈,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韓國古代社會硏究』1975.
三品彰英, 『古代祭政と穀靈信仰』1973.
주제분류
- 문화>풍속·놀이>풍속
- 사회>의례>제사>천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