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내소군
내소군(來蘇郡)註 135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매성현(買省縣)註 136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37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견주(見州)註 138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2개이다.
중성현(重城縣)註 139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칠중현(七重縣)註 140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41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적성현(積城縣)註 142이다.
파평현(波平註 143縣)註 144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註 145註 146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註 147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
註) 135
내소군(來蘇郡):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소속의 군(郡)으로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고읍동(古邑洞: 종전의 주내면 고읍리)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5쪽; 정구복 외, 1997d, 248쪽). 중성현(重城縣)과 파평현(波乎縣) 등 영현(領縣) 2개를 거느렸다.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매성현(買省縣)을 내소군으로 고쳤다고 한다. 나당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던 ‘매소성(買肖城)’의 글자 형태가 매성현(買省縣)과 유사하며, 본서 열전3 김유신전에 나오는 ‘매소천성(買蘇川城)’ 글자가 ‘내소군(來蘇郡)’과 겹친다는 점을 근거로 매소성 전투 장소를 내소군 치소로 비정되는 양주 대모산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이병도, 1977, 537쪽; 정구복 외, 1997c, 237쪽; 노태돈, 2009, 266쪽; 김병희, 2014, 197~215쪽). 내소군에 대응하는 신라 성곽으로는 양주 대모산성이 있는데, 문서행정과 연관된 ‘□□□현지인(□□□縣之印)’명 청동제 도장이 출토된 바 있다(한림대학교 박물관, 1990·2002; 박성현, 2010, 261쪽). 『고려사』 지리지1 양광도 남경유수관 견주(見州)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견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에 남경유수관 양주(楊州)에 내속(來屬)하였다가 그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양주목조에 따르면 조선 태조 3년(1394)에 옛 양주인 한양부(漢陽府)를 도읍으로 정한 다음, 양주부 관아를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에 옮기고 양주지사(楊州知事)로 강등하였다가 부(府)로 승격하였고, 6년(1396)에는 치소를 견주의 옛터에 옮기고 양주라 불렀으며,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로 고치고, 세조 12년(1466)에 목(牧)으로 승격하여 진(鎭)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연산군이 혁파하였다가 중종이 다시 설치하였고, 고종이 군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한림대학교 박물관, 1990, 『양주 대모산성 발굴보고서』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림대학교 박물관, 2002, 『양주 대모산성』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김병희, 2018, 「나당전쟁의 종료 시점에 대한 재검토 및 매소성 전역의 과정 연구」, 『한국고대사탐구』 30
바로가기
註) 136
매성현(買省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라고 한다. 본서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매성군(買省郡)으로 나오며, ‘마홀(馬忽)’로도 일컬었다고 한다. 본서 신라본기7 문무왕 15년(675) 9월조에는 나당전쟁 최대의 격전지로 매소성(買肖城)이 나오는데, 글자 형태가 매성현(買省縣)과 유사하며, 본서 열전3 김유신전에 나오는 ‘매소천성(買蘇川城)’의 글자가 ‘내소군(來蘇郡)’과 겹친다는 점을 근거로 매소성을 내소군 치소로 비정되는 양주 대모산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이병도, 1977: 2012, 153쪽; 정구복 외, 1997c, 237쪽; 노태돈, 2009, 266쪽; 김병희, 2014, 197~215쪽). 한주의 치소(治所)가 있던 하남 선동[광주 선리]에서 통일신라 시기의 ‘매성(買省)’명 명문기와가 출토된 바 있는데(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20쪽; 전덕재, 2002, 27쪽; 김규동·성재현, 2011, 564~567쪽; 박성현, 2021, 38~40쪽), 경덕왕대의 지명 개정 이후에도 그 이전 지명이 널리 사용된 사실을 보여준다(전덕재, 2021, 117-124쪽).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c,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2,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전덕재, 2021, 『三國史記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전덕재, 2002,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고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명문기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김규동·성재현, 2011, 「선리 명문와 고찰」, 『고고학지』 17
김병희, 2018, 「나당전쟁의 종료 시점에 대한 재검토 및 매소성 전역의 과정 연구」, 『한국고대사탐구』 30
박성현, 2021, 「신라 통일기 한주(漢州)의 물자 이동과 조운(漕運)-하남 선동 출토 명문 기와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21
바로가기
註) 137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바로가기
註) 138
견주(見州): 신라 내소군(來蘇郡: 현 경기도 양주시 고읍동)의 고려 인종 때 이름. 위의 내소군에 대한 주석 참조.바로가기
註) 139
중성현(重城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내소군(來蘇郡) 소속의 현(縣)으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積城面)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5쪽; 정구복 외, 1997d, 249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칠중현(七重縣)을 중성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칠중성을 ‘난은별(難隱別)’로 일컬었다고 하는데, ‘난은(難隱)’은 ‘7’을 뜻하는 순우리말 ‘나나’에 해당하며, ‘별(別)’은 ‘중(重)’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중세국어 ‘ᄇᆞᆯ’에 해당한다(도수희, 2005, 502·512쪽). 칠중성은 파주 적성면 중성산의 칠중성으로 비정되는데, 이곳에서 ‘칠(七)’자가 새겨진 통일신라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2001; 박성현, 2008, 107쪽), 본서 제사지에 따르면 통일신라기에 칠중성의 감악산은 소사(小祀)의 제장(祭場)이었다고 한다. 본서에는 ‘칠중성(七重城)’ 관련 기사가 다수 확인된다. 백제본기1 온조왕 18년조에 따르면 백제가 칠중하(七重河)에서 말갈을 격퇴하였다고 하는데, 칠중하는 칠중성(七重城: 파주 적성) 맞은편의 연천군 미산면-장남면 구간에서 일곱 차례나 곡류(曲流)하며 흐르는 임진강을 지칭한다. 칠중성은 ‘칠중하’라는 하천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인 것이다. 칠중성은 7세기 중반에 신라 북방의 요충지로 고구려나 당과의 격전지였다. 638년(선덕여왕 7, 영류왕 21) 10월에 고구려가 신라 북방의 요충지인 칠중성을 공격하자, 다음 달에 신라 장군 알천(閼川)이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 660년 10월에는 신라 장수 필부(匹夫)가 칠중성을 공격한 고구려군을 물리치다가 전사하였다. 662년(문무왕 2) 1월에는 김유신이 고구려 평양성 부근에 주둔한 당군에게 군량을 제공하려고 칠중하(七重河)를 건넜는데, “고구려 경역으로 들어갔다”고 묘사하였다. 당시 칠중성 맞은편의 임진강이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이었던 것이다(장창은, 2016, 73쪽; 이정빈, 2019, 60~61쪽). 671년에 문무왕이 당의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는 “667년 10월에 신라가 고구려 칠중성을 쳐서 길을 뚫어 당군의 평양 도착을 기다렸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667년 10월경에는 고구려가 칠중성을 영유한 것이다. 이처럼 칠중성은 신라와 고구려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진 요충지였다. 나당전쟁기에는 당군이 서북한 일대를 석권한 다음, 675년 2월에 호로하(瓠濾河: 임진강)를 건너 칠중성을 격파하였지만, 점령하지는 못하였다. 이해 9월에 당군은 매소성(買肖城)에서 신라군에게 대패한 다음, 임진강 하류 방면으로 퇴각하면서 칠중성을 포위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고려사』 지리지1 왕경 개경부 적성현(積城縣)조에 따르면 고려 초에 ‘적성’으로 이름을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문종(文宗) 16년(1062)에 개성부로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감악(紺嶽)에 사당을 지어 봄·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주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적성현조에 따르면 조선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두었다. 고종이 마전(麻田: 연천군 미산면)에 속하게 하였다가 다시 분리하여 군으로 삼았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2001, 『파주 칠중성 지표조사보고서』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박성현, 2008, 「신라 성지 출토 문자자료의 현황과 분류」, 『목간과문자』 2
장창은, 2016, 「660∼662년 고구려와 신라당의 전쟁」, 『新羅史學報』 38
이정빈, 2019, 「임진강·한탄강 유역의 고구려 지명과 그 의미 - 경기도 연천 지역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134
바로가기
註) 140
칠중현(七重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중성현(重城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지명이라고 하는데, 본서 지리4 고구려조에서는 ‘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일컬었다고 한다. ‘난은(難隱)’은 ‘7’을 뜻하는 순우리말 ‘나나’에 해당하며, ‘별(別)’은 ‘중(重)’에 상응하는 고유어로 중세국어 ‘ᄇᆞᆯ’에 해당한다(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502·512쪽). 본서 백제본기1 온조왕 18년조에 따르면 백제가 칠중하(七重河)에서 말갈을 격퇴하였다고 하는데, 칠중하는 칠중성(七重城: 파주 적성) 맞은편의 연천군 미산면-장남면 구간에서 일곱 차례나 곡류(曲流)하며 흐르는 임진강을 지칭한다. 칠중성은 ‘칠중하’라는 하천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칠중성은 7세기 중반에 신라 북방의 요충지로 고구려나 당과의 격전지로 자주 나온다. 위의 ‘중성현’ 항목 참조.바로가기
註) 141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바로가기
註) 142
적성현(積城縣): 신라 중성현(重城縣: 현 경기도 파주시 적석면)의 고려 인종 때 이름. 위의 중성현에 대한 주석 참조.바로가기
註) 143
본서 정덕본(正德本)에서는 ‘乎’로 나오지만, 주자본(鑄字本)에 근거하여 ‘平’으로 교감한다(이강래 교감, 1998, 『원본 삼국사기』, 한길사, 379쪽).바로가기
註) 144
파평현(波平縣): 통일신라 시기 한주(漢州) 내소군(來蘇郡) 소속의 현(縣)으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坡平面) 일대로 비정된다(이병도, 1977: 2012, 585쪽; 정구복 외, 1997d, 250쪽).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을 파평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본서에는 이 기사 외에는 ‘파평현’이라는 지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파평현에 대응하는 성곽으로는 파주시의 파평산성이 있다(한양대학교 박물관, 1999, 319~320쪽; 박성현, 2010, 261쪽). 『고려사』 지리지1 왕경 개성부 파평현(波平縣)조에 따르면 고려 현종(顯宗) 9년(1018)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문종(文宗) 16년(1062)에 개성부로 내속(來屬)하였고, 예종(睿宗) 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1 경기 파주목조에 따르면 조선 본조 태조 7년(1398)에 서원(瑞原)과 파평을 합쳐서 원평군(原平郡)을 만들었고, 태종 15년(1415)에 1천호가 넘어 도호부로 승격하였고, 세조 6년에 왕비의 고장이라 하여 목으로 승격하고 ‘파주’로 이름을 고쳤다. 옛 파평현은 파주 동북 30리 거리에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정구복 외, 1997d,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양대학교 박물관, 1999, 『파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산』
박성현, 2010, 『신라의 거점성 축조와 지방제도의 정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이병도 역주, 2012, 『국역 삼국사기』(두계이병도전집 11), 한국학술정보
바로가기
註) 145
본서 정덕본에는 ‘吏’로 나오지만, 『고려사(高麗史)』에 근거하여 ‘史’로 교감한다(정구복 외, 1997a, 347쪽; 이강래 교감, 1998, 379쪽).
〈참고문헌〉
정구복 외, 1997a, 『역주 삼국사기』 1 교감 원문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강래 교감, 1998, 『원본 삼국사기』, 한길사
바로가기
註) 146
파해평사현(波害平史縣):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파평현(波平縣)으로 고치기 이전의 고구려 시기 지명인데, 본서 권37 지리4 고구려조에는 ‘액봉(頟蓬)’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파해평사의 ‘파해(波害)’는 바위(巖, 石)을 뜻하고(도수희, 2005, 500~501쪽), ‘평사(平史)’는 지평(砥平)의 이칭인 지현(砥峴)의 ‘현(峴)’에 상응한다고 보아 고구려 광개토왕이 392년 7월에 함락시켰다는 백제의 석현성(石峴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여호규, 2012, 181~182쪽). 392년에 광개토왕이 함락한 백제의 석현성이나 675년 당군이 매소성에서 신라군에게 패배한 다음 공격한 석현성이 모두 임진강 하류의 파주시 파평면 일대로 비정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도수희, 2005, 『백제어 어휘 연구』, 제이엔씨
여호규, 2012, 「4세기 후반-5세기 초엽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 변천」, 『역사와 현실』 84
바로가기
註) 147
경덕왕(景德王): 신라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42~765년이다. 본서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 참조.바로가기
주제분류
  • 정치>행정>군현>군
  • 정치>행정>군현>현
디지털역사자료 인용방법
닫기
1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2안
저자, 기사명, 자료명.(사이트명, URL, ID,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오류신고
닫기
사이트 하단의 ‘오류신고 확인’ 메뉴를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오류유형: 오자·탈자, 링크 오류, 이미지 오류, 기타)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자료명
삼국사기
자료위치
자료상세화면
캡차 이미지
자료 선택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