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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國註 114이 있으며, 그 북쪽은 樂浪註 115, 남쪽은 倭와 接하여 있다.註 116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濊貊과 接하여 있다. 弁辰은 辰韓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倭와 接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註 117 伯濟註 118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萬餘戶, 작은 나라는 數千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辰國註 119이다. 마한이 [韓族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아 目支國註 120에 도읍하여 전체 三韓 지역의 王으로 군림하는데,註 121 [三韓의] 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註) 114
『三國志』의 「東夷傳」韓條에는 ‘凡五十餘國’이라고 기술되어 있다.『翰苑』三韓條 所引『魏略』에서도 ‘五十四國’으로 表現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國名을 비교하여 보면 잘못된 것이 있어 같은 數만은 아니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韓條.
『翰苑』三韓條 所引『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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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藤虎次郞, 「卑彌呼考」『藝文』2編 1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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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5
『三國志』韓傳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後漢書』編者가 써넣은 것 같다. 즉, 『三國志』韓傳에는 帶方郡에 접한다고 되어 있는데, 後漢王朝가 帶方郡을 설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樂浪郡으로 고친 듯 하다.
≪參考文獻≫
井上秀雄 他 譯註, 『東アジア民族史』1, 1974, 平凡社, 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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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6
『三國志』弁辰傳에 ‘弁辰의 瀆盧國은 倭와 境界를 접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倭를 弁辰의 南쪽으로 비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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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7
이 數는 馬韓·辰韓·弁辰의 國名을 계산한 것이다. 그러나 國名을 연구하게 될 때는 다소의 변동이 있을 수 있다.『三國志』 「東夷傳」韓條에서는 이러한 國數의 기록이 없다.『翰苑』三韓條 所引『魏略』에서도 ‘七十八國’이라고 표기하였다.
≪參考文獻≫
『三國志』卷30 「東夷傳」韓條.
『翰苑』三韓條 所引 「魏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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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8
『三國志』에는 단순히 伯濟國으로 나오지만『後漢書』에서는 ‘凡七十八國 伯濟是其一國焉’이라고 伯濟를 代表的인 하나의 國名으로 들고 있다. 三國 가운데 하나인 百濟가 이러한 伯濟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確言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伯濟가 百濟로 發展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參考文獻≫
金元龍, 「三國時代 開始에 關한 一考察」『東西文化』7, 1967.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下)-三韓攷 第3部-」『韓國學報』3, 1976, 一志社; 「目支國考」『韓國史硏究』24, 1979.
李賢惠, 「馬韓小國의 形成에 대하여」『歷史學報』92,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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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19
『後漢書』에는 모두 三韓의 옛땅이 辰國으로 表現되어 있어『三國志』의 記事와 큰 대조를 보인다.『三國志』에서는 辰韓의 前身으로 辰國이 나타난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6)
古之辰國也
『史記』 「朝鮮列傳」에는 ‘眞番旁辰國(혹은 衆國)’이라고 하여 辰國이 보이지만, 版本에 따라, 그리고 學者들의 의견에 따라 辰國, 衆國說로 갈라지고 있다. 또 하나의 辰國기사로는 『三國志』 「東夷傳」韓條 所引의 『魏略』에 ‘初 古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 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 二千餘戶’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衛滿朝鮮 당시에 辰國이 南쪽에 存在하였음은 틀림이 없다.
辰國을 기술하고 있는 『三國志』 「東夷傳」韓條의 기록과 『後漢書』 「東夷列傳」에 수록된 辰國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三國志』에서는 辰韓의 古之辰國으로 파악되는 반면에, 『後漢書』에서는 三韓이전의 全地域을 다스린 存在로 辰國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古代의 政治發展 段階로 보아도 辰韓의 古之辰國으로 보는 『三國志』의 기술이 올바른 견해라고 생각된다.
한가지 공통적인 사실은 辰國은 과거적인 存在라는 점이다. 이것은 辰王이 존재한 당시에는 이미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실체이기 때문에 辰國과 辰王은 쉽게 결부될 수 없는 사실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辰國의 領域을 一部에서 생각하듯이 韓半島 남부 전체로 인식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北의 衛滿朝鮮과 南의 辰國만이 있는 듯이 이해하거나 그렇게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다. 辰國은 어디까지나 여러 國가운데 하나이며 著名한 실체일 뿐이다. 지난 날 어떤 學者는 辰國의 存在를 의심하거나 심지어 假名인듯이 간주하였지만,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參考文獻≫
『史記』卷115 「朝鮮列傳」
『後漢書』卷85 「東夷列傳」三韓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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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山正雄, 「辰國臆斷」『朝鮮學報』81輯,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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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0
馬韓의 五十餘國 가운데서 著名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辰王이 目支國에 都邑을 정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三國志』에서는 ‘辰王治月支國’이라고 다소 의미가 다르게 쓰여 있다. 目支國의 位置에 대해서는 여러 說이 있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8)
月支國
『三國志』 「東夷傳」에서는 ‘月支國’으로 되어 있으나, 『翰苑』에 引用된 『魏略』이나 『後漢書』등에는 ‘目支國’으로 明記되어 있다. 따라서 ‘月’은 ‘目’의 誤字임이 分明하다. ‘辰王治目支國’이라고 하는 기술에서 불 수 있듯이 目支國은 馬韓諸國 가운데서 한때 강한 위치에 있었던 社會인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目支國의 位置에 대해서 확실한 地名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茶山(『疆域考』 「三韓總考」)이라 韓鎭書(『海東繹史』 「地理考」) 등은 準王의 南奔과 관련이 있다고 傳해지는 釜山에다 관심을 두고 있고, 李丙燾는 稷山 地方에다 比定하며,( 「三韓問題의 硏究」pp.242~248) 千寬宇는 仁川을 지목하고 있다.( 「目支國考」pp. 13~16) 이 位置比定은 文獻만으로 고찰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考古學의 성과를 십분 활용해야 問題해결에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參考文獻≫
『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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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寬宇, 「目支國考」『韓國史硏究』24,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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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21
三韓 全地域의 王으로 辰王을 보는 이 내용은『三國志』韓傳에 보이는 辰王과는 규모와 권한에서 상당한 차이가 난다. 남쪽에 거대한 규모의 나라가 있었다고 믿는 학자들은 이 記事를 항상 引用하고 있다.
<참조>
『三國志』韓傳 註 9)
辰王
辰王은 目支國을 統治하는 지도자로 그 범위가 限定되어 있다. 辰王의 稱號를 言語學的으로 해명하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臣智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 같으나 역시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三國志』 「東夷傳」에서의 辰王의 權限범위와 『後漢書』 「東夷列傳」에서의 辰王의 相對的인 해석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를 연구하는 學者의 立場에 따라 辰王의 性格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三國志』의 史料를 따르게 될 경우 目支國을 다스리며 주위를 제어하는 정도의 統治者로 辰王이 해석되지만, 『後漢書』를 引用할 경우 狀況은 아주 다르게 된다. 『後漢書』 「東夷列傳」에서는 辰王이 三韓 全體를 다스리는 王으로 나타나므로, 결국은 三韓社會의 政治問題를 넓게 논의하게 될 때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後漢書』의 辰王은 韓國史의 歷史發展 段階에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存在가 된다. 辰王은 『三國志』의 記事대로 目支國을 다스린 지배자이며, 馬韓社會에서 강한 위치에 있었던 社會로 파악하면 순조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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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卷85 「東夷列傳」韓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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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寬宇, 「韓國史에서 본 騎馬民族說」『讀書生活』11·12月號,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上·下)」『韓國學報』2·3合輯,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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井上秀雄, 「史記·漢書の東夷王者觀」『朝鮮學報』103輯,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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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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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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