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문
5월 중에 고려대왕 조왕(祖王) 공(公) …이註 001 신라 매금(寐錦)註 002과 대대로 형제처럼 상하가 돕고 하늘의 도리를 지키기를(守天)註 003 바라여 동쪽으로 왔다. 매금 기(忌)註 004 태자 공(共)註 005 전부(前部)註 006 대사자(大使者)註 007 다우환노(多于桓奴)註 008 주부(主簿) 귀[덕](貴[德]) … 구(句)[方+▨][왕불금(王不耹)] … 거(去) … 궤영(跪營)註 009에 이르렀다. 대태자(大太子) 공(共)이 [고구려 왕이 있는] 전상(壂上)을 향하여 말하고, 공간(共看), 이때 [신라 매금에게] 태곽추(太霍鄒)註 010를 하사하였다. 교를 내려 동이(東夷) 매금註 011의 의복을 건립하는 곳에서 사용한 음식을 하사하였고,註 012 수공제▨▨노객인▨(隨恭諸▨▨奴客人▨). [또한] 제위(諸位)에 교를 내려 [신라의] 상하(上下)에게 의복을 하사하였다. 동이매금에 교를 내려 [신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 교를 내려 매금 영토 내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지(▨支)를 하사였고, 대왕 국토의 대위(大位)・제위(諸位) 상하에게 고하여 의복을 [갖추고], 아울러 궤영(跪營)에서 교를 받도록 하였다.
1행의 6~7번째 글자는 조왕(祖王)’으로 보는 설과 ‘상왕(相王)’으로 보는 설로 나눠지는데, 전자의 경우 그 해석을 앞의 ‘고려대왕(태왕)’의 선대왕으로 보는 경우가 다수이며(朴眞奭, 2000, 「中原高句麗碑 建立年代 考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24~325쪽 ; 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14쪽) 더 구체적으로 장수왕(고려대왕)이 장수한 왕이기에 ‘조왕’, 곧 할아버지 왕으로 칭해졌다는 해석(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3~26쪽)도 있다. ‘조왕공’으로 해석하여 고구려 태왕 아래의 신하(李成制, 2020, 「〈忠州高句麗碑〉의 건립 목적과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98, 181~182쪽)로 보거나 ‘령(공)’은 이름이며 조왕은 고구려왕의 아래에 있는 하나의 신료 내지 하위 왕으로 보는 견해(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0쪽)등이 제시되었다. 반면 ‘상왕’으로 판독하는 견해들은 뒤의 ‘공(公)’과 함께 ‘고려태왕의 상왕(공)’으로 풀이하여 고구려왕의 왕족 중 하나로 보거나(金昌鎬, 1987,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韓國學報』, 47, 一志社, 346쪽) ‘상왕공’으로서 고구려 태왕 아래의 신료(篠原啓方, 2000, 「「中原高句麗碑」의 釋讀과 內容의 意義」, 『史叢』51), 고구려의 상가(相加)의 변형이나 후신(申瀅植,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한 一考察」, 『史學志』 13, 68쪽), 혹은 중국에서 재상의 신분으로 왕에 봉해지면 상왕(相王), 공으로 봉해지면 상공(相公)으로 칭했기에 그와 대비되는 존재로 비정하기도 하였다(徐永大, 1992, 「中原高句麗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49쪽).
또 ‘고려대왕’과 ‘조왕(상왕)’의 관계에 대해서 이 구절의 두 왕을 고구려의 ‘대왕(大王 혹은 태왕)’과 ‘조왕(祖王)’ 혹은 상왕(相王)’이라는 2명의 인물을 뜻하거나(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 13 ; 申瀅植, 1979, 앞의 논문) 이 대왕을 ‘고려 대왕의 조왕’과 같이 수식어로 보는 견해(朴眞奭, 2000, 앞의 논문, 324~325쪽 ; 南豊鉉, 2000, 「中原高句麗碑의 解讀과 吏讀的 性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71쪽 ; 여호규, 2020, 앞의 논문, 114쪽)로 나눠진다. 곧 전자의 경우 이 구절의 주체는 ‘고려대왕’으로서 비문 작성 시점의 고구려 국왕이 되며, 후자는 그보다 선대 국왕이거나 국왕과 별개의 신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주체를 ‘고려대왕’ 혹은 ‘고려대왕의 조왕’으로 해석할 경우 이들이 실제로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비문의 연대비정에 따라 달라진다. ‘고려대왕’의 경우 광개토왕(廣開土王)설(木村誠, 1997, 304~306쪽), 평원왕(平原王)설(李殿福, 2000, 「중원군의 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 국명의 변천」,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01쪽)이 제시되기도 하였지만, 고려대왕은 문자명왕(文咨明王), 그 ‘조왕’은 할아버지인 장수왕(長壽王)으로 보거나(李丙燾, 1979, 앞의 논문, 24쪽; 田中俊明, 1981, 「高句麗の金石文」,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8, 121쪽 ; 여호규, 2020, 앞의 논문), 뒤의 ‘조왕’은 배제하고 비문의 주체를 ‘고려대왕’을 장수왕으로 비정하거나(鄭雲龍, 2005, 「中原高句麗碑 연구의 몇 가지 問題」,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6) 고려태왕(대왕)이 장수왕이며 조왕은 그 할아버지인 소수림왕(小獸林王)으로 보기도 한다(이도학, 2000, 앞의 논문, 275쪽).
또 ‘고려대왕’과 ‘조왕(상왕)’의 관계에 대해서 이 구절의 두 왕을 고구려의 ‘대왕(大王 혹은 태왕)’과 ‘조왕(祖王)’ 혹은 상왕(相王)’이라는 2명의 인물을 뜻하거나(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 13 ; 申瀅植, 1979, 앞의 논문) 이 대왕을 ‘고려 대왕의 조왕’과 같이 수식어로 보는 견해(朴眞奭, 2000, 앞의 논문, 324~325쪽 ; 南豊鉉, 2000, 「中原高句麗碑의 解讀과 吏讀的 性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71쪽 ; 여호규, 2020, 앞의 논문, 114쪽)로 나눠진다. 곧 전자의 경우 이 구절의 주체는 ‘고려대왕’으로서 비문 작성 시점의 고구려 국왕이 되며, 후자는 그보다 선대 국왕이거나 국왕과 별개의 신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주체를 ‘고려대왕’ 혹은 ‘고려대왕의 조왕’으로 해석할 경우 이들이 실제로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비문의 연대비정에 따라 달라진다. ‘고려대왕’의 경우 광개토왕(廣開土王)설(木村誠, 1997, 304~306쪽), 평원왕(平原王)설(李殿福, 2000, 「중원군의 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 국명의 변천」,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01쪽)이 제시되기도 하였지만, 고려대왕은 문자명왕(文咨明王), 그 ‘조왕’은 할아버지인 장수왕(長壽王)으로 보거나(李丙燾, 1979, 앞의 논문, 24쪽; 田中俊明, 1981, 「高句麗の金石文」,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8, 121쪽 ; 여호규, 2020, 앞의 논문), 뒤의 ‘조왕’은 배제하고 비문의 주체를 ‘고려대왕’을 장수왕으로 비정하거나(鄭雲龍, 2005, 「中原高句麗碑 연구의 몇 가지 問題」,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6) 고려태왕(대왕)이 장수왕이며 조왕은 그 할아버지인 소수림왕(小獸林王)으로 보기도 한다(이도학, 2000, 앞의 논문, 275쪽).
신라 국왕의 이칭(異稱)으로 같은 칭호를 「광개토왕릉비」・「울진봉평신라비」・「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매금을 이사금(尼師今)으로 보는 설과 마립간(麻立干)로 보는 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사금설은 주로 「광개토왕릉비」를 근거로 하며 매금이 언급된 경자년(庚子年) 기사 및 건립 연대가 모두 이사금기에 해당하며, 발음상으로도 ‘매금’과 ‘이사금’이 서로 통한다고 점을 근거로 한다(今西龍, 1933, 『新羅史硏究』, 近澤書店 ; 三品彰英, 1962, 『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上, 吉川弘文館, 64~66쪽 ; 木下禮仁, 1984, 『中原 高句麗碑-建立年代를 中心으로-, 『素軒南都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太學社, 85~87쪽). 반면 「충주 고구려비」와 「울진봉평신라비」의 발견 이후에는 마립간설이 보다 많아졌으며(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4~25쪽 ; 김창호, 1988, 「蔚珍 鳳坪 監祭碑의 檢討」, 『가야통신』18, 14~15쪽 ; 최광식, 1989, 「蔚珍鳳坪新羅碑의 釋文과 內容」, 『韓國古代史硏究』2, 96쪽 ;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이는 두 비의 연대가 대부분 눌지마립간 이후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부분의 연구에서 매금을 신라의 국왕으로 보는 반면, 마립간 내지 국왕이 아닌 신라의 갈문왕(葛文王)보다 한 단계 높은 신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南豊鉉, 2000, 「中原高句麗碑의 解讀과 吏讀的 性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또 매금이 마립간 내지 이사금과 같은 신라 고유의 왕호로 보는 것과는 달리, 신라의 자칭이 아니라 고구려에 의해 표기된 타칭이었으며, 이후 이를 사용하여 ‘신라매금’ 내지 ‘동이매금’과 같은 일종의 책봉명을 만들었다는 견해도 있다(김병곤, 2006, 「新羅 王號 ‘寐錦’의 由來와 性格」, 『사학연구』4). 해당 비문에서 지칭하는 매금은 비의 건립 연대 비정에 따라 의견이 상이하며,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혹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로 보는 설이 제시되었다.
‘수천(守天)’의 의미에 대해서는 『장자(莊子)』 달생편(達生篇)의 천수(天守)와 같은 뜻으로 보아 하늘의 도리(天道)를 지킨다는 뜻으로 보는 해석과(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8쪽), 고구려 국왕의 행차를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年代에 대한 檢討」, 『史學志』1, 45쪽), 맹세란 뜻으로 보는 해석(金昌鎬, 1987,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韓國學報』 47, 148쪽) 등이 있다. 또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 하에서 ‘고구려의 국왕을 받들어 고구려에게 협조’한다는 뜻으로 보아 이를 군신관계의 서약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篠原啓方, 2000, 「「中原高句麗碑」의 釋讀과 內容의 意義」, 『史叢』5, 14~17쪽).
해당 구절에서 ‘忌’의 판독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에서 이견이 없지만, 이를 동사 혹은 명사로 보는 여부로 의견이 갈라진다. 기(忌)를 동사로 보는 경우는 발견 당시 다수의 연구자가 취한 설로 “매금이 태자 공을 기(피)하였다”고 해석하거나(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 13) 매금이 태자 등과 함께(共) 궤영에 오는 것을 꺼려했다고 보며 고구려가 신라에 신속의례를 거부했던 현상으로 보았다(李道學, 2000, 「中原高句麗碑의 建立 目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279~280쪽). 반면 ‘기’를 인명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곧 신라 매금의 이름이 된다(김창호, 2000, 「중원고구려비의 건립연대」, 『고구려연구』10, 347쪽; 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0쪽 ; 전덕재, 2019,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본 5세기 중반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 『고구려발해연구』6, 143쪽). ‘기’가 ‘지(祗)’와 발음상 유사하다고 보아 이를 눌지마립간의 이름으로 비정하는 견해(김창호, 2000, 앞의 논문, 317~318쪽)도 있다.
‘태자’ 다음에 이어지는 글자인 ‘공(共)’은 태자의 이름으로 본 견해(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13, 41쪽)가 제시된 이후 다수의 연구에서 이를 취신하고 있다. 나아가 구체적으로 이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문자명왕의 아버지이자 장수왕의 아들로 즉위 전에 사망한 고추가 조다(助多)로 비정하기도 한다(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7~28쪽). 또 여기에서의 태자를 고구려의 태자로 보는 경우가 다수설인 반면, 장수왕대의 태자 책봉 기사가 없다는 점을 근거로 이 태자를 신라의 태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손영종, 2000, 『고구려사의 제문제』, 신서원, 298쪽). 반면 ‘공’이 인명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함께’라는 뜻의 부사로 보는 해석(李道學, 2000, 「中原高句麗碑의 建立 目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273쪽 ; 李鎔賢, 2020, 「忠州 高句麗碑 ‘忌’·‘共’의 재해석」, 『한국사학보』8)도 있다.
고구려의 방위부(方位部) 혹은 방위명부(方位名部)의 하나로 고구려의 국도나 그 주변 지역을 방위별로 구획한 행정구역에서 남쪽의 구역을 지칭한다. 당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조의 주석에 전부는 남부(南部)이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서도 명칭이 나타나는 관노부(灌奴部)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관노부와 같은 소위 고유명부는 반독자적인 단위정치체로 기능한 집단이기 때문에, 행정구역인 방위부와 동일시한 것은 착오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전부, 곧 남부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에서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여 대무신왕대나 그 직후에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와(이종욱, 1982, 「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制度」, 『歷史學報』 94·95, 85~88쪽 ; 조영광, 2016, 「고구려 王都, 王畿의 형성 과정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8, 83~100쪽), 2~3세기 후반 중앙집권력 강화 과정에서 왕도와 중앙에 거주한 귀족 재편 과정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로 대별된다(노태돈, 1975,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 『韓國史論』 2 ;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64~168쪽 ;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103~106쪽;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152쪽;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385쪽).
고구려의 관등 중 하나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서 고국천왕대 대사자로 임명된 안류(晏留)를 비롯하여 여러 대사자가 등장한다. 3세기 이후에는 미천왕대의 창조리와 같이 국상으로 임명되거나, 서천왕대의 우수(于漱)와 같이 그 딸이 왕후가 되는 등 고구려 내에서 고위 신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 정사류에서는 『주서(周書)』 고구려전에서 고구려의 8번째 관등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태대사자(太大使者), 소사자(小使者)와 함께 『三國志』 동이전 고구려조에 나오는 ‘사자(使者)’ 계통의 관등으로, 형계(兄系) 관등과 함께 고구려 관등제의 주요 계통을 이루고 있었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76쪽). 『삼국지』에서 고구려의 사자는 3세기 이전 단위정치체 수장을 칭한 ‘대가(大加)’의 하위에서 조세 수취 등의 실무를 담당한 지위였으나(김철준,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28쪽), 2~3세기 이후 고구려의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관제의 정비 과정에서 사자 관등을 지닌 신분이 중앙관계조직으로 편입되고, 동시에 사자 신분이 분화를 거쳐 대사자라는 관위가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226~229쪽).
「충주 고구려비」에 등장하는 고구려 대사자의 이름이다. 대부분의 연구에서 ‘다우환노’를 하나의 이름으로 보고 있으나, 이름은 다우(多亏)이며 환노(桓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22년 10월조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5부 중 하나인 환나부(桓那部)를 의미한다고 본 연구도 있다(李鍾旭, 1979, 「高句麗初期의 左右輔와 國相」,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502쪽).
궤영이라는 단어를 지명으로 해석하여 우벌성(于伐城) 근처에 있었던 지역(徐永大, 1992)이나 더 구체적으로 고구려 대왕이 행차하여 머무는 행영으로 본 견해(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13, 45쪽 ; 李成制, 2020, 「〈忠州高句麗碑〉의 건립 목적과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98, 182쪽), 고구려가 남진을 위해 설치한 군영으로 보는 견해(金昌鎬, 1987, 「중원고구려비의 재검토」, 『한국학보』47, 148쪽),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궤배례(跪拜禮)를 행하는 영으로 해석한 견해(李鎔賢, 2020, 「忠州 高句麗碑 ‘忌’·‘共’의 재해석」, 『한국사학보』8, 38쪽) 등이 있다. 그리고 이를 동사로 해석하여 “(매금이) 와서 영에 무릎꿇었다”고 해석하는 견해(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0쪽)가 있다.
태곽추(太霍鄒)의 곽(霍)은 콩잎이라는 의미의 곽(藿)과 통하며, 추(鄒)는 좋은 화살이라는 의미의 추(騶)와 같기 때문에 태곽추란 큰 콩잎 모양의 좋은 화살이라는 의미로 추정하기도 한다(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1쪽). 그 외에도 곽(霍)을 적(翟)으로 판독하여 꿩 또는 그 깃털이라 보며 깃털을 장식한 고구려의 관모(篠原啓方, 2000, 「「中原高句麗碑」의 釋讀과 內容의 意義」, 『史叢』51, 17쪽), ‘대곽(大藿)’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다시마 같은 식료품(손영종, 2000, 『고구려사의 제문제』, 신서원, 31쪽), 곽(霍)을 ‘䨆’로 판독하며 그 의미가 ‘별(鷩)’과 통하며, 곧 예복을 뜻하기 때문에 군왕의 예복으로 보는 견해(李成制, 2020, 「〈忠州高句麗碑〉의 건립 목적과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98, 183쪽) 등이 제시되었다.
여기에서의 동이 매금은 신라의 왕을 지칭하는데, ‘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자신들을 중국과 같은 천하의 중심으로 놓고, 위치에 놓고 신라를 주변의 미개한 국가로 보며(徐永大, 1992, 「中原高句麗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인식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전덕재, 2019,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본 5세기 중반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 『고구려발해연구』65, 145~146쪽). 이는 5세기 고구려가 자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두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증거 중 하나로 여겨진다(노태돈, 1988,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 『한국사론』19). 나아가 이 관념은 중국에서부터 고구려왕에게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이나 ‘영동이교위(領東夷校尉)’와 같은 동이사회를 관장하는 관작을 제수한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도 있다(李基白, 1979, 「中原高句麗碑의 몇가지 문제」, 『史學志』13, 37~38쪽).
이 부분은 판독상 교(敎) 다음의 글자를 ‘식재(食在)’로 보는 데에 이견이 거의 없으나, 그 해석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서 식사를 하는 행위(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17쪽), ‘음식이 있는 곳’으로서 매금을 위해 개최한 연회장소(전덕재, 2019,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본 5세기 중반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 『고구려발해연구』65, 144쪽), 식사와 머물 곳(李鎔賢, 2020, 「忠州 高句麗碑 ‘忌’·‘共’의 재해석」, 『한국사학보』80) 등으로 해석된다.
12월 23일 갑인註 013에 동이 매금의 상하(上下)가 우벌성(于伐城)註 014에 이르렀다. [우벌성에] 온 전부 대사자 다우환노・주부 귀덕에게 교를 내려 … 토경(土境)에서 … 3백 명을 모집하게 하고,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註 015・하부(下部)註 016 발위사자(拔位使者)註 017 보노(補奴)・▨유노부(▨流奴扶)〈亻+▨〉 … ▨개로(蓋盧)註 018와 함께 사람을 모집했다. 신라토내 중인(衆人)이 먼저 움직여 빼앗은 … 중(中)… 〈不+求〉 … 촌사(村舍) … 〈日+▨〉 … 우사(優沙) … 자공(刺功) … 사(射) … 절인자(節人刺) … 〈工+▨〉百〈六+十〉註 019 … 〈亻+▨〉 … 十 … [▼] … 대왕국토(大王國土)… 상유지(上有之).
해당 날짜와 간지는 다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충주 고구려비」의 건비 연대를 비정하는 중요한 단서로 활용되지만, 연대가 아닌 월일만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23일(廿三日)’이 연구자에 따라 ‘25일(廿五日)’로 판독되기도 하여 논란이 많다. 5세기 전후 12월 23일이 갑인인 연대는 449년, 480년, 506년이 있으며, 25일이 갑인인 해는 403년, 470년, 496년이 있다. 이 중 가장 다수의 연구가 취신하는 견해는 ‘12월 23일 갑인’으로 판독하고, 해당 일자를 449년으로 비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해당 연대는 『이십사삭윤표(二十史朔閏表)』 및 『삼정종람(三正縱覽)』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국의 간지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다. 반면 「덕흥리고분묵서명(德興里古墳墨書銘)」의 간지를 근거로 고구려의 고유의 독자적인 역법이 존재했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408년 혹은 423년으로 비정하는 설도 있다(田中俊明, 1981, 「高句麗の金石文」,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8; 木村誠, 1997, 「中原高句麗碑立碑年次の再檢討」, 『朝鮮社會の史的展開と東アジア』(武田幸男 編), 山川出版社). 나아가 앞의 월의 경우 12월로 판독하는 경우가 다수지만, 12월은 잘못 기입된 날짜로 보아 본래는 11월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 손영종, 1985, 「중원고구려비에 대하여」, 『력사과학』 85-2, 과학백과사전출판사)도 있다.
이 지명은 우(于)를 처소격으로 보고 벌성(伐城)으로 판독한 후, 신라 도성인 서라벌(徐羅伐)로 해석하기도 하지만(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5쪽), 우벌성을 하나의 지명으로 보는 해석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비석이 발견된 충주 일대로 보는 설과(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 13, 43~45쪽 ; 金貞培, 1979, 「中原高句麗碑의 몇 가지 문제점」, 『史學志』 13, 88쪽 ; 申瀅植,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한 一考察」, 『史學志』 13, 75~76쪽 ; 朴眞奭, 2000, 「中原高句麗碑 建立年代 考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22쪽),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등장하는 이벌지(伊伐支)와 동일시하며 영주시 순흥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손영종, 1985, 「중원고구려비에 대하여」, 『력사과학』 85-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30쪽 ; 金昌鎬, 1987,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韓國學報』 47, 148~149쪽 ; 篠原啓方, 2000, 「「中原高句麗碑」의 釋讀과 內容의 意義」, 『史叢』51, 26~27쪽 ; 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4쪽 ; 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22쪽 ; 李成制, 2020, 「〈忠州高句麗碑〉의 건립 목적과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98, 186쪽).
신라의 영토 내에 파견된 고구려의 군 지휘관을 뜻하며(李基白, 1979, 「中原高句麗碑의 몇가지 문제」, 『史學志』13, 38쪽) 이 시기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徐永大, 1992, 「中原高句麗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이들 당주의 주둔지는 고구려가 유효한 점령지로 관장하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鄭雲龍, 2005, 「三國關係史에서 본 中原高句麗碑의 意味」, 『고구려의 국제관계』,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총서5, 116쪽).
고구려 방위부(方位部)의 하나이다. 그러나 장회태자(章懷太子)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주석, 『한원(翰苑)』 번이부 주석 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10월조 및 밀우(密友)·유유(紐由)전에서 나오는 유옥구(劉屋句)의 소속 부가 하부라고 나온다.
고구려의 관등 중 하나로 『三國志』 동이전 고구려조에 기록된 ‘사자(使者)’ 계통의 관등이다. 위의 대사자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사자 관등의 분화로 성립된 관등으로 추정된다. 발위사자는 『한원(翰苑)』 의 주석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 따르면 일명 유사(儒奢)라고도 하며 14등급 중 8번째이자 종(從) 5품(品)에 비견되었다. 발위사자는 유사와 음가가 비슷한 글자인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의 욕사(褥奢)와 동일시하거나(徐榮洙, 1987, 『中國正史朝鮮傳-譯註1』, 국사편찬위원회, 607쪽), 『주서』 단계부터 등장하는 소사자(小使者)와 동일시하는 견해(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212~215쪽), 그리고 소사자가 4세기 무렵 다시 분화하여 ‘발위사자’와 ‘상위사자(上位使者)’로 나누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406~407쪽).
해당 구절의 ‘개로(蓋盧)’에 대해서는 백제의 21대 국왕인 개로왕(蓋鹵王)으로 보며, 이를 근거로 개로왕이 신라의 ‘토내당주’와 공모하여 신라 경내에서 모인활동을 벌였다는 견해(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3쪽)가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의 ‘잔주(殘主)’처럼 고구려에서는 백제왕을 비하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칭했는데, 충주비에서 개로왕의 왕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어려운 것으로 지적된다(金貞培, 1979, 「中原高句麗碑의 몇 가지 문제점」, 『史學志』 13, 89쪽 ; 朴眞奭, 2000, 「中原高句麗碑 建立年代 考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18~319쪽). 또 ‘개로’는 앞서 나온 고구려의 관리이자 ‘신라토내당주’의 인명으로 보는 견해(金昌鎬, 1987,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韓國學報』 47, 141 ; 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5쪽; 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23쪽)도 있다.
이 글자들은 1979년 발견 당시 ‘신유년(辛酉年)’으로 판독하여 이를 근거로 건비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5~6세기에 ‘신유’의 간지를 가진 연대는 421년, 481년, 541년에 해당한다. 이 중 신유년을 421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木下禮仁, 1981, 「中原高句麗碑-その建立年代を中心として」,『村上四男博士和歌山大學退官記念朝鮮史論文集』), 신유년 간지를 긍정하는 대부분의 연구들에서는 기원후 481년설을 취한다(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 13 ; 申瀅植,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한 一考察」, 『史學志』 13 ; 金英夏·韓相俊, 1983, 「中原高句麗碑의 建碑 年代」, 『敎育硏究誌』 25 ;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 朴眞奭, 2000, 「中原高句麗碑 建立年代 考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반면 이외의 연구자들은 해당 판독을 부정하며 건비연대의 단서로 활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2000년의 판독회에서는 신유년을 판독할 수 없는 것으로 확정하였으며, 이후 2019년의 판독회에서도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이후에는 이들 글자들이 ‘백(百)’이나 ‘육(六)’ 등의 숫자로 판독되며 앞의 신라토내당주가 모인 활동을 통해 모집한 실제 인원수(264명)를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제시되었다(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26쪽).
신유년註 020에 … 동이 매금의 땅에 … 우(右) … 사(沙) … 사읍(斯邑) … 대(大) 고추가(古鄒加)註 021 공(共)註 022의 군대가 우▨▨에 다다랐다. … 고모루성(古牟婁城)註 023의 수사(守事)註 024 하부(下部) 대형(大兄)註 025 ▨▨.
고구려의 관명으로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왕족인 계루부의 대가(大加)나 본래 국주(國主)였던 소노부(消奴部)의 적통대인(嫡統大人), 그리고 왕실과 혼인한 절노부(絶奴部)의 대인이 고추가를 칭했던 것으로 전한다. 반면 3세기 이후에는 주로 왕실 구성원에게 사여되는 지위로 나타난다. 고추가의 성격에 대해서는 대부족장(김철준,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26~127쪽)이나 특권적 집단의 족장(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왕족을 예우하기 위한 관위(琴京淑, 2004, 『高句麗 前期 政治史 硏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90~91쪽) 등의 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후 집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고추가의 수여 대상은 왕실 구성원으로 한정되었고(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118~120쪽) 계루부 내의 유력 세력을 편제하기 위한 근친 왕족의 봉작으로 그 성격이 변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조영광, 2015, 「고구려 초기 관등의 기원과 성격에 대하여」, 『사학연구』119, 42~46쪽).
이 구절에서 ‘고추가’의 이름인 ‘공’은 앞의 ‘태자 공’과 지위가 다르게 나타나므로 별개의 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5~426쪽) 고구려의 왕족에서 고추가를 칭한 사례가 많다는 점을 들어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많다(金昌鎬, 1987,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韓國學報』 47, 141쪽 ; 朴眞奭, 2000, 「中原高句麗碑 建立年代 考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20쪽 ; 전덕재, 2019,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본 5세기 중반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 『고구려발해연구』65 ; 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12쪽, 131쪽). 동일 인물로 보는 설에서는 문자명왕의 아버지이며 ‘고추대가(古鄒大加)’였던 조다로 추정하기도 한다(김현숙, 2002, 「4-6세기경 소백산맥 이동지역의 영역향방」, 『한국고대사연구』26, 99~100쪽 ; 여호규, 2020, 앞의 논문, 131쪽). 한편 앞의 ‘태자 공’과 동일인물임에도 지위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중간에 조다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호칭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보거나(金英夏·韓相俊, 1983, 「中原高句麗碑의 建碑 年代」, 『敎育硏究誌』 25, 9쪽), 나이에 따라 그 지위가 올라간 결과로 보기도 한다(여호규, 2020, 앞의 논문, 132쪽).
「광개토왕릉비」 영락(永樂) 6년조와 수묘인 차출지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위치는 남한강 상류 일대로 보거나(이도학, 2006,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 연구』, 서경문화사, 377쪽), 북한강 상류 지역(서영일, 2006, 「고구려의 백제공격로고찰」, 『사학지』 38, 54~56쪽), 충남 덕산(酒井改藏, 1955 「好太王碑面の地名に就いて」 『朝鮮學報』8, 59쪽), 충북 음성의 고산성(손영종, 1985, 「중원고구려비에 대하여」, 『력사과학』 85-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31쪽) 등으로 추정된다.
3세기 말부터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구려의 집권 체제가 강화되며 3세기 말 이후 등장한 형계 관등의 중심축이다. 대형은 태대형(太大兄),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하며 멸망기까지 고구려 관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형은 『주서』에는 13관등 중 3위, 『수서』는 12관등 중 2위, 『신당서』는 전체 12관등 중 6위, 『한원』은 전체 14관등 중 7위로 기록하고 있어 처음 등장하는 시기에는 최고위 관등 중 하나로 기능하다가 후기에는 고위 관등과 중, 하위 관등의 고리가 되는 성격의 관등으로 자리매김을 확인할 수 있다.
전(前)…부(部)
순(巡)
註) 001
1행의 6~7번째 글자는 조왕(祖王)’으로 보는 설과 ‘상왕(相王)’으로 보는 설로 나눠지는데, 전자의 경우 그 해석을 앞의 ‘고려대왕(태왕)’의 선대왕으로 보는 경우가 다수이며(朴眞奭, 2000, 「中原高句麗碑 建立年代 考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24~325쪽 ; 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14쪽) 더 구체적으로 장수왕(고려대왕)이 장수한 왕이기에 ‘조왕’, 곧 할아버지 왕으로 칭해졌다는 해석(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3~26쪽)도 있다. ‘조왕공’으로 해석하여 고구려 태왕 아래의 신하(李成制, 2020, 「〈忠州高句麗碑〉의 건립 목적과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98, 181~182쪽)로 보거나 ‘령(공)’은 이름이며 조왕은 고구려왕의 아래에 있는 하나의 신료 내지 하위 왕으로 보는 견해(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0쪽)등이 제시되었다. 반면 ‘상왕’으로 판독하는 견해들은 뒤의 ‘공(公)’과 함께 ‘고려태왕의 상왕(공)’으로 풀이하여 고구려왕의 왕족 중 하나로 보거나(金昌鎬, 1987,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韓國學報』, 47, 一志社, 346쪽) ‘상왕공’으로서 고구려 태왕 아래의 신료(篠原啓方, 2000, 「「中原高句麗碑」의 釋讀과 內容의 意義」, 『史叢』51), 고구려의 상가(相加)의 변형이나 후신(申瀅植,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한 一考察」, 『史學志』 13, 68쪽), 혹은 중국에서 재상의 신분으로 왕에 봉해지면 상왕(相王), 공으로 봉해지면 상공(相公)으로 칭했기에 그와 대비되는 존재로 비정하기도 하였다(徐永大, 1992, 「中原高句麗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49쪽).
또 ‘고려대왕’과 ‘조왕(상왕)’의 관계에 대해서 이 구절의 두 왕을 고구려의 ‘대왕(大王 혹은 태왕)’과 ‘조왕(祖王)’ 혹은 상왕(相王)’이라는 2명의 인물을 뜻하거나(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 13 ; 申瀅植, 1979, 앞의 논문) 이 대왕을 ‘고려 대왕의 조왕’과 같이 수식어로 보는 견해(朴眞奭, 2000, 앞의 논문, 324~325쪽 ; 南豊鉉, 2000, 「中原高句麗碑의 解讀과 吏讀的 性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71쪽 ; 여호규, 2020, 앞의 논문, 114쪽)로 나눠진다. 곧 전자의 경우 이 구절의 주체는 ‘고려대왕’으로서 비문 작성 시점의 고구려 국왕이 되며, 후자는 그보다 선대 국왕이거나 국왕과 별개의 신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주체를 ‘고려대왕’ 혹은 ‘고려대왕의 조왕’으로 해석할 경우 이들이 실제로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비문의 연대비정에 따라 달라진다. ‘고려대왕’의 경우 광개토왕(廣開土王)설(木村誠, 1997, 304~306쪽), 평원왕(平原王)설(李殿福, 2000, 「중원군의 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 국명의 변천」,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01쪽)이 제시되기도 하였지만, 고려대왕은 문자명왕(文咨明王), 그 ‘조왕’은 할아버지인 장수왕(長壽王)으로 보거나(李丙燾, 1979, 앞의 논문, 24쪽; 田中俊明, 1981, 「高句麗の金石文」,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8, 121쪽 ; 여호규, 2020, 앞의 논문), 뒤의 ‘조왕’은 배제하고 비문의 주체를 ‘고려대왕’을 장수왕으로 비정하거나(鄭雲龍, 2005, 「中原高句麗碑 연구의 몇 가지 問題」,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6) 고려태왕(대왕)이 장수왕이며 조왕은 그 할아버지인 소수림왕(小獸林王)으로 보기도 한다(이도학, 2000, 앞의 논문, 275쪽).
또 ‘고려대왕’과 ‘조왕(상왕)’의 관계에 대해서 이 구절의 두 왕을 고구려의 ‘대왕(大王 혹은 태왕)’과 ‘조왕(祖王)’ 혹은 상왕(相王)’이라는 2명의 인물을 뜻하거나(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 13 ; 申瀅植, 1979, 앞의 논문) 이 대왕을 ‘고려 대왕의 조왕’과 같이 수식어로 보는 견해(朴眞奭, 2000, 앞의 논문, 324~325쪽 ; 南豊鉉, 2000, 「中原高句麗碑의 解讀과 吏讀的 性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71쪽 ; 여호규, 2020, 앞의 논문, 114쪽)로 나눠진다. 곧 전자의 경우 이 구절의 주체는 ‘고려대왕’으로서 비문 작성 시점의 고구려 국왕이 되며, 후자는 그보다 선대 국왕이거나 국왕과 별개의 신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주체를 ‘고려대왕’ 혹은 ‘고려대왕의 조왕’으로 해석할 경우 이들이 실제로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비문의 연대비정에 따라 달라진다. ‘고려대왕’의 경우 광개토왕(廣開土王)설(木村誠, 1997, 304~306쪽), 평원왕(平原王)설(李殿福, 2000, 「중원군의 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 국명의 변천」,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01쪽)이 제시되기도 하였지만, 고려대왕은 문자명왕(文咨明王), 그 ‘조왕’은 할아버지인 장수왕(長壽王)으로 보거나(李丙燾, 1979, 앞의 논문, 24쪽; 田中俊明, 1981, 「高句麗の金石文」,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8, 121쪽 ; 여호규, 2020, 앞의 논문), 뒤의 ‘조왕’은 배제하고 비문의 주체를 ‘고려대왕’을 장수왕으로 비정하거나(鄭雲龍, 2005, 「中原高句麗碑 연구의 몇 가지 問題」,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논문집』6) 고려태왕(대왕)이 장수왕이며 조왕은 그 할아버지인 소수림왕(小獸林王)으로 보기도 한다(이도학, 2000, 앞의 논문, 275쪽).
註) 002
신라 국왕의 이칭(異稱)으로 같은 칭호를 「광개토왕릉비」・「울진봉평신라비」・「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매금을 이사금(尼師今)으로 보는 설과 마립간(麻立干)로 보는 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사금설은 주로 「광개토왕릉비」를 근거로 하며 매금이 언급된 경자년(庚子年) 기사 및 건립 연대가 모두 이사금기에 해당하며, 발음상으로도 ‘매금’과 ‘이사금’이 서로 통한다고 점을 근거로 한다(今西龍, 1933, 『新羅史硏究』, 近澤書店 ; 三品彰英, 1962, 『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上, 吉川弘文館, 64~66쪽 ; 木下禮仁, 1984, 『中原 高句麗碑-建立年代를 中心으로-, 『素軒南都泳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太學社, 85~87쪽). 반면 「충주 고구려비」와 「울진봉평신라비」의 발견 이후에는 마립간설이 보다 많아졌으며(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4~25쪽 ; 김창호, 1988, 「蔚珍 鳳坪 監祭碑의 檢討」, 『가야통신』18, 14~15쪽 ; 최광식, 1989, 「蔚珍鳳坪新羅碑의 釋文과 內容」, 『韓國古代史硏究』2, 96쪽 ;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이는 두 비의 연대가 대부분 눌지마립간 이후로 비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부분의 연구에서 매금을 신라의 국왕으로 보는 반면, 마립간 내지 국왕이 아닌 신라의 갈문왕(葛文王)보다 한 단계 높은 신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南豊鉉, 2000, 「中原高句麗碑의 解讀과 吏讀的 性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또 매금이 마립간 내지 이사금과 같은 신라 고유의 왕호로 보는 것과는 달리, 신라의 자칭이 아니라 고구려에 의해 표기된 타칭이었으며, 이후 이를 사용하여 ‘신라매금’ 내지 ‘동이매금’과 같은 일종의 책봉명을 만들었다는 견해도 있다(김병곤, 2006, 「新羅 王號 ‘寐錦’의 由來와 性格」, 『사학연구』4). 해당 비문에서 지칭하는 매금은 비의 건립 연대 비정에 따라 의견이 상이하며,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혹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로 보는 설이 제시되었다.
註) 003
‘수천(守天)’의 의미에 대해서는 『장자(莊子)』 달생편(達生篇)의 천수(天守)와 같은 뜻으로 보아 하늘의 도리(天道)를 지킨다는 뜻으로 보는 해석과(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8쪽), 고구려 국왕의 행차를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年代에 대한 檢討」, 『史學志』1, 45쪽), 맹세란 뜻으로 보는 해석(金昌鎬, 1987,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韓國學報』 47, 148쪽) 등이 있다. 또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 하에서 ‘고구려의 국왕을 받들어 고구려에게 협조’한다는 뜻으로 보아 이를 군신관계의 서약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篠原啓方, 2000, 「「中原高句麗碑」의 釋讀과 內容의 意義」, 『史叢』5, 14~17쪽).
註) 004
해당 구절에서 ‘忌’의 판독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에서 이견이 없지만, 이를 동사 혹은 명사로 보는 여부로 의견이 갈라진다. 기(忌)를 동사로 보는 경우는 발견 당시 다수의 연구자가 취한 설로 “매금이 태자 공을 기(피)하였다”고 해석하거나(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 13) 매금이 태자 등과 함께(共) 궤영에 오는 것을 꺼려했다고 보며 고구려가 신라에 신속의례를 거부했던 현상으로 보았다(李道學, 2000, 「中原高句麗碑의 建立 目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279~280쪽). 반면 ‘기’를 인명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곧 신라 매금의 이름이 된다(김창호, 2000, 「중원고구려비의 건립연대」, 『고구려연구』10, 347쪽; 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0쪽 ; 전덕재, 2019,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본 5세기 중반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 『고구려발해연구』6, 143쪽). ‘기’가 ‘지(祗)’와 발음상 유사하다고 보아 이를 눌지마립간의 이름으로 비정하는 견해(김창호, 2000, 앞의 논문, 317~318쪽)도 있다.
註) 005
‘태자’ 다음에 이어지는 글자인 ‘공(共)’은 태자의 이름으로 본 견해(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13, 41쪽)가 제시된 이후 다수의 연구에서 이를 취신하고 있다. 나아가 구체적으로 이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문자명왕의 아버지이자 장수왕의 아들로 즉위 전에 사망한 고추가 조다(助多)로 비정하기도 한다(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7~28쪽). 또 여기에서의 태자를 고구려의 태자로 보는 경우가 다수설인 반면, 장수왕대의 태자 책봉 기사가 없다는 점을 근거로 이 태자를 신라의 태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손영종, 2000, 『고구려사의 제문제』, 신서원, 298쪽). 반면 ‘공’이 인명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함께’라는 뜻의 부사로 보는 해석(李道學, 2000, 「中原高句麗碑의 建立 目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273쪽 ; 李鎔賢, 2020, 「忠州 高句麗碑 ‘忌’·‘共’의 재해석」, 『한국사학보』8)도 있다.
註) 006
고구려의 방위부(方位部) 혹은 방위명부(方位名部)의 하나로 고구려의 국도나 그 주변 지역을 방위별로 구획한 행정구역에서 남쪽의 구역을 지칭한다. 당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조의 주석에 전부는 남부(南部)이며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에서도 명칭이 나타나는 관노부(灌奴部)에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관노부와 같은 소위 고유명부는 반독자적인 단위정치체로 기능한 집단이기 때문에, 행정구역인 방위부와 동일시한 것은 착오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전부, 곧 남부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에서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여 대무신왕대나 그 직후에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와(이종욱, 1982, 「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制度」, 『歷史學報』 94·95, 85~88쪽 ; 조영광, 2016, 「고구려 王都, 王畿의 형성 과정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8, 83~100쪽), 2~3세기 후반 중앙집권력 강화 과정에서 왕도와 중앙에 거주한 귀족 재편 과정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로 대별된다(노태돈, 1975, 「三國時代의 ‘部’에 關한 硏究」, 『韓國史論』 2 ;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64~168쪽 ;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103~106쪽; 김현숙, 2005,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사람들, 152쪽; 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385쪽).
註) 007
고구려의 관등 중 하나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서 고국천왕대 대사자로 임명된 안류(晏留)를 비롯하여 여러 대사자가 등장한다. 3세기 이후에는 미천왕대의 창조리와 같이 국상으로 임명되거나, 서천왕대의 우수(于漱)와 같이 그 딸이 왕후가 되는 등 고구려 내에서 고위 신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 정사류에서는 『주서(周書)』 고구려전에서 고구려의 8번째 관등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태대사자(太大使者), 소사자(小使者)와 함께 『三國志』 동이전 고구려조에 나오는 ‘사자(使者)’ 계통의 관등으로, 형계(兄系) 관등과 함께 고구려 관등제의 주요 계통을 이루고 있었다(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476쪽). 『삼국지』에서 고구려의 사자는 3세기 이전 단위정치체 수장을 칭한 ‘대가(大加)’의 하위에서 조세 수취 등의 실무를 담당한 지위였으나(김철준,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28쪽), 2~3세기 이후 고구려의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관제의 정비 과정에서 사자 관등을 지닌 신분이 중앙관계조직으로 편입되고, 동시에 사자 신분이 분화를 거쳐 대사자라는 관위가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226~229쪽).
註) 008
「충주 고구려비」에 등장하는 고구려 대사자의 이름이다. 대부분의 연구에서 ‘다우환노’를 하나의 이름으로 보고 있으나, 이름은 다우(多亏)이며 환노(桓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22년 10월조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5부 중 하나인 환나부(桓那部)를 의미한다고 본 연구도 있다(李鍾旭, 1979, 「高句麗初期의 左右輔와 國相」,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502쪽).
註) 009
궤영이라는 단어를 지명으로 해석하여 우벌성(于伐城) 근처에 있었던 지역(徐永大, 1992)이나 더 구체적으로 고구려 대왕이 행차하여 머무는 행영으로 본 견해(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13, 45쪽 ; 李成制, 2020, 「〈忠州高句麗碑〉의 건립 목적과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98, 182쪽), 고구려가 남진을 위해 설치한 군영으로 보는 견해(金昌鎬, 1987, 「중원고구려비의 재검토」, 『한국학보』47, 148쪽),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궤배례(跪拜禮)를 행하는 영으로 해석한 견해(李鎔賢, 2020, 「忠州 高句麗碑 ‘忌’·‘共’의 재해석」, 『한국사학보』8, 38쪽) 등이 있다. 그리고 이를 동사로 해석하여 “(매금이) 와서 영에 무릎꿇었다”고 해석하는 견해(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0쪽)가 있다.
註) 010
태곽추(太霍鄒)의 곽(霍)은 콩잎이라는 의미의 곽(藿)과 통하며, 추(鄒)는 좋은 화살이라는 의미의 추(騶)와 같기 때문에 태곽추란 큰 콩잎 모양의 좋은 화살이라는 의미로 추정하기도 한다(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1쪽). 그 외에도 곽(霍)을 적(翟)으로 판독하여 꿩 또는 그 깃털이라 보며 깃털을 장식한 고구려의 관모(篠原啓方, 2000, 「「中原高句麗碑」의 釋讀과 內容의 意義」, 『史叢』51, 17쪽), ‘대곽(大藿)’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다시마 같은 식료품(손영종, 2000, 『고구려사의 제문제』, 신서원, 31쪽), 곽(霍)을 ‘䨆’로 판독하며 그 의미가 ‘별(鷩)’과 통하며, 곧 예복을 뜻하기 때문에 군왕의 예복으로 보는 견해(李成制, 2020, 「〈忠州高句麗碑〉의 건립 목적과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98, 183쪽) 등이 제시되었다.
註) 011
여기에서의 동이 매금은 신라의 왕을 지칭하는데, ‘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자신들을 중국과 같은 천하의 중심으로 놓고, 위치에 놓고 신라를 주변의 미개한 국가로 보며(徐永大, 1992, 「中原高句麗碑」, 『譯註 韓國古代金石文』1,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인식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전덕재, 2019,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본 5세기 중반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 『고구려발해연구』65, 145~146쪽). 이는 5세기 고구려가 자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두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증거 중 하나로 여겨진다(노태돈, 1988,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 『한국사론』19). 나아가 이 관념은 중국에서부터 고구려왕에게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이나 ‘영동이교위(領東夷校尉)’와 같은 동이사회를 관장하는 관작을 제수한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도 있다(李基白, 1979, 「中原高句麗碑의 몇가지 문제」, 『史學志』13, 37~38쪽).
註) 012
註) 013
해당 날짜와 간지는 다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충주 고구려비」의 건비 연대를 비정하는 중요한 단서로 활용되지만, 연대가 아닌 월일만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23일(廿三日)’이 연구자에 따라 ‘25일(廿五日)’로 판독되기도 하여 논란이 많다. 5세기 전후 12월 23일이 갑인인 연대는 449년, 480년, 506년이 있으며, 25일이 갑인인 해는 403년, 470년, 496년이 있다. 이 중 가장 다수의 연구가 취신하는 견해는 ‘12월 23일 갑인’으로 판독하고, 해당 일자를 449년으로 비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해당 연대는 『이십사삭윤표(二十史朔閏表)』 및 『삼정종람(三正縱覽)』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국의 간지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다. 반면 「덕흥리고분묵서명(德興里古墳墨書銘)」의 간지를 근거로 고구려의 고유의 독자적인 역법이 존재했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408년 혹은 423년으로 비정하는 설도 있다(田中俊明, 1981, 「高句麗の金石文」,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8; 木村誠, 1997, 「中原高句麗碑立碑年次の再檢討」, 『朝鮮社會の史的展開と東アジア』(武田幸男 編), 山川出版社). 나아가 앞의 월의 경우 12월로 판독하는 경우가 다수지만, 12월은 잘못 기입된 날짜로 보아 본래는 11월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 손영종, 1985, 「중원고구려비에 대하여」, 『력사과학』 85-2, 과학백과사전출판사)도 있다.
註) 014
이 지명은 우(于)를 처소격으로 보고 벌성(伐城)으로 판독한 후, 신라 도성인 서라벌(徐羅伐)로 해석하기도 하지만(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5쪽), 우벌성을 하나의 지명으로 보는 해석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비석이 발견된 충주 일대로 보는 설과(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 13, 43~45쪽 ; 金貞培, 1979, 「中原高句麗碑의 몇 가지 문제점」, 『史學志』 13, 88쪽 ; 申瀅植,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한 一考察」, 『史學志』 13, 75~76쪽 ; 朴眞奭, 2000, 「中原高句麗碑 建立年代 考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22쪽),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등장하는 이벌지(伊伐支)와 동일시하며 영주시 순흥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손영종, 1985, 「중원고구려비에 대하여」, 『력사과학』 85-2, 과학백과사전출판사, 30쪽 ; 金昌鎬, 1987,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韓國學報』 47, 148~149쪽 ; 篠原啓方, 2000, 「「中原高句麗碑」의 釋讀과 內容의 意義」, 『史叢』51, 26~27쪽 ; 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4쪽 ; 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22쪽 ; 李成制, 2020, 「〈忠州高句麗碑〉의 건립 목적과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98, 186쪽).
註) 015
註) 016
고구려 방위부(方位部)의 하나이다. 그러나 장회태자(章懷太子)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주석, 『한원(翰苑)』 번이부 주석 등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10월조 및 밀우(密友)·유유(紐由)전에서 나오는 유옥구(劉屋句)의 소속 부가 하부라고 나온다. 
註) 017
고구려의 관등 중 하나로 『三國志』 동이전 고구려조에 기록된 ‘사자(使者)’ 계통의 관등이다. 위의 대사자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사자 관등의 분화로 성립된 관등으로 추정된다. 발위사자는 『한원(翰苑)』 의 주석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에 따르면 일명 유사(儒奢)라고도 하며 14등급 중 8번째이자 종(從) 5품(品)에 비견되었다. 발위사자는 유사와 음가가 비슷한 글자인 『주서(周書)』와 『수서(隋書)』의 욕사(褥奢)와 동일시하거나(徐榮洙, 1987, 『中國正史朝鮮傳-譯註1』, 국사편찬위원회, 607쪽), 『주서』 단계부터 등장하는 소사자(小使者)와 동일시하는 견해(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212~215쪽), 그리고 소사자가 4세기 무렵 다시 분화하여 ‘발위사자’와 ‘상위사자(上位使者)’로 나누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406~407쪽).
註) 018
해당 구절의 ‘개로(蓋盧)’에 대해서는 백제의 21대 국왕인 개로왕(蓋鹵王)으로 보며, 이를 근거로 개로왕이 신라의 ‘토내당주’와 공모하여 신라 경내에서 모인활동을 벌였다는 견해(李丙燾,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23쪽)가 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의 ‘잔주(殘主)’처럼 고구려에서는 백제왕을 비하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칭했는데, 충주비에서 개로왕의 왕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어려운 것으로 지적된다(金貞培, 1979, 「中原高句麗碑의 몇 가지 문제점」, 『史學志』 13, 89쪽 ; 朴眞奭, 2000, 「中原高句麗碑 建立年代 考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18~319쪽). 또 ‘개로’는 앞서 나온 고구려의 관리이자 ‘신라토내당주’의 인명으로 보는 견해(金昌鎬, 1987,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韓國學報』 47, 141 ; 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5쪽; 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23쪽)도 있다.
註) 019
이 글자들은 1979년 발견 당시 ‘신유년(辛酉年)’으로 판독하여 이를 근거로 건비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5~6세기에 ‘신유’의 간지를 가진 연대는 421년, 481년, 541년에 해당한다. 이 중 신유년을 421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木下禮仁, 1981, 「中原高句麗碑-その建立年代を中心として」,『村上四男博士和歌山大學退官記念朝鮮史論文集』), 신유년 간지를 긍정하는 대부분의 연구들에서는 기원후 481년설을 취한다(邊太燮, 1979, 「中原高句麗碑의 內容과 연대에 대한 검토」, 『史學志』 13 ; 申瀅植, 1979, 「中原高句麗碑에 대한 一考察」, 『史學志』 13 ; 金英夏·韓相俊, 1983, 「中原高句麗碑의 建碑 年代」, 『敎育硏究誌』 25 ;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 朴眞奭, 2000, 「中原高句麗碑 建立年代 考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반면 이외의 연구자들은 해당 판독을 부정하며 건비연대의 단서로 활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2000년의 판독회에서는 신유년을 판독할 수 없는 것으로 확정하였으며, 이후 2019년의 판독회에서도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이후에는 이들 글자들이 ‘백(百)’이나 ‘육(六)’ 등의 숫자로 판독되며 앞의 신라토내당주가 모인 활동을 통해 모집한 실제 인원수(264명)를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제시되었다(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26쪽).
註) 020
註) 021
고구려의 관명으로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왕족인 계루부의 대가(大加)나 본래 국주(國主)였던 소노부(消奴部)의 적통대인(嫡統大人), 그리고 왕실과 혼인한 절노부(絶奴部)의 대인이 고추가를 칭했던 것으로 전한다. 반면 3세기 이후에는 주로 왕실 구성원에게 사여되는 지위로 나타난다. 고추가의 성격에 대해서는 대부족장(김철준,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26~127쪽)이나 특권적 집단의 족장(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왕족을 예우하기 위한 관위(琴京淑, 2004, 『高句麗 前期 政治史 硏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90~91쪽) 등의 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후 집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고추가의 수여 대상은 왕실 구성원으로 한정되었고(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118~120쪽) 계루부 내의 유력 세력을 편제하기 위한 근친 왕족의 봉작으로 그 성격이 변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조영광, 2015, 「고구려 초기 관등의 기원과 성격에 대하여」, 『사학연구』119, 42~46쪽).
註) 022
이 구절에서 ‘고추가’의 이름인 ‘공’은 앞의 ‘태자 공’과 지위가 다르게 나타나므로 별개의 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林起煥, 2000,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본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425~426쪽) 고구려의 왕족에서 고추가를 칭한 사례가 많다는 점을 들어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많다(金昌鎬, 1987, 「中原高句麗碑의 재검토」, 『韓國學報』 47, 141쪽 ; 朴眞奭, 2000, 「中原高句麗碑 建立年代 考証」, 『中原高句麗碑 硏究』, 학연문화사, 320쪽 ; 전덕재, 2019,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본 5세기 중반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 『고구려발해연구』65 ; 여호규, 2020, 「충주고구려비의 단락구성과 건립시기」, 『한국고대사연구』 98, 112쪽, 131쪽). 동일 인물로 보는 설에서는 문자명왕의 아버지이며 ‘고추대가(古鄒大加)’였던 조다로 추정하기도 한다(김현숙, 2002, 「4-6세기경 소백산맥 이동지역의 영역향방」, 『한국고대사연구』26, 99~100쪽 ; 여호규, 2020, 앞의 논문, 131쪽). 한편 앞의 ‘태자 공’과 동일인물임에도 지위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중간에 조다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호칭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보거나(金英夏·韓相俊, 1983, 「中原高句麗碑의 建碑 年代」, 『敎育硏究誌』 25, 9쪽), 나이에 따라 그 지위가 올라간 결과로 보기도 한다(여호규, 2020, 앞의 논문, 132쪽).
註) 023
註) 024
註) 025
3세기 말부터 고구려 관등의 하나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구려의 집권 체제가 강화되며 3세기 말 이후 등장한 형계 관등의 중심축이다. 대형은 태대형(太大兄),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등으로 다양하게 분화하며 멸망기까지 고구려 관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형은 『주서』에는 13관등 중 3위, 『수서』는 12관등 중 2위, 『신당서』는 전체 12관등 중 6위, 『한원』은 전체 14관등 중 7위로 기록하고 있어 처음 등장하는 시기에는 최고위 관등 중 하나로 기능하다가 후기에는 고위 관등과 중, 하위 관등의 고리가 되는 성격의 관등으로 자리매김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