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衣裳과 服飾은 王만이 5綵로 된 [옷을 입을 수 있으며,]
○ 衣裳과 服飾은 王만이 5綵註 019로 된 [옷을 입을 수 있으며,] 흰 비단으로 만든 冠을 쓰고, 흰 가죽으로 만든 小帶를 [두르는데,] 冠과 帶는 모두 金으로 장식한다. 벼슬이 높은 자는 푸른 비단으로 만든 冠을 쓰고, 그 다음은 붉은 비단 冠을 쓰는데, 새깃 두개를 꽃고, 金과 銀으로 장식한다.註 020 저고리는 통소매이고 바지는 통이 크며, 흰 가죽띠를 두르고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백성들은 褐註 021을 입고 고깔(弁)註 022을 쓰며, 婦人은 머리에 巾幗註 023을 쓴다. 註 024
圍棊와 投壺의 놀이를 좋아하며, 사람마다 蹴鞠註 025에 능하다. 그릇은 籩豆註 026·簠簋註 027·罇俎註 028·罍洗註 029를 쓰니, 자못 箕子의 풍습이 남아 있다.註 030
註) 019
『新唐書』 「東夷列傳」高句麗條에는 ‘五采’로 되어 있다. 五綵는 靑·黃·赤·白·黑의 五色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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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0
『魏書』高句麗傳에는 ‘頭著折風 其形如弁 旁揷烏羽 貴賤有差’라 하였으며, 『周書』高句麗傳에는 ‘其冠曰骨蘇 多以紫羅爲之 雜以金銀爲飾 其有官品者 又揷二鳥羽於其上’이라 하였다. 또『北史』高句麗傳에는 ‘人皆頭著折風 形如弁 士人加揷二鳥羽 貴者 其冠曰蘇骨 多用紫羅爲之 飾以金銀’이라 하였다. 이를 보면 官人들의 冠을 ‘蘇骨’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蘇骨은 高句麗의 고분 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5)
折風
折風은 뒷날까지 일반 고구려인의 대표적인 모자로서 고깔(弁)모양이었다. 士人들은 이에 鳥羽를 꽂아 장식하였는데 鳥羽를 冠에 꽂는 것은 北아시아 諸種族에서 널리 보이는 원시종교로서의 鳥類崇拜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降魔攘鬼의 呪術的인 성격을 지녔다. 새털을 모자에 꽂는 풍속은 新羅와 百濟에도 있었다. 『北史』高麗傳에서 전하는 貴人의 冠이라는 蘇骨을 折風과 同一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兩者를 구분하여 蘇骨을 『三國志』의 ‘幘而無後’한 관모로 보는 說도 있다.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人의 鳥羽挿冠에 대하여」『東國史學』4, 1956.
≪參考文獻≫
『魏書』卷100 「列傳」高句麗條.
『周書』卷49 「異域列傳」高句麗條.
『北史』卷94 「列傳」高句麗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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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1
굵은 베로 만든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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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2
折風으로서『三國志』高句麗傳에는 小加들이 쓴다고 하였다.
<참조>
『三國志』高句麗傳 註 25)
折風
折風은 뒷날까지 일반 고구려인의 대표적인 모자로서 고깔(弁)모양이었다. 士人들은 이에 鳥羽를 꽂아 장식하였는데 鳥羽를 冠에 꽂는 것은 北아시아 諸種族에서 널리 보이는 원시종교로서의 鳥類崇拜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降魔攘鬼의 呪術的인 성격을 지녔다. 새털을 모자에 꽂는 풍속은 新羅와 百濟에도 있었다. 『北史』高麗傳에서 전하는 貴人의 冠이라는 蘇骨을 折風과 同一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兩者를 구분하여 蘇骨을 『三國志』의 ‘幘而無後’한 관모로 보는 說도 있다.
≪參考文獻≫
李龍範, 「高句麗人의 鳥羽挿冠에 대하여」『東國史學』4,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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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3
幗은 蔮이라고도 하며, 곧 婦人들의 머리수건을 뜻한다. 이것은 三室塚 제 1 실 南壁 女人圖·角觝塚 主室 女人圖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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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4
高句麗 婦人의 衣裳에 대해서 『隋書』高句麗傳에는 ‘婦人裙襦加襈’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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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5
공을 발로 차는 유희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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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6
籩은 竹으로 엮어 만든 祭器이며, 豆는 나무로 만든 祭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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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7
簠는 黍稷을 담는 대(竹)로 만든 祭器로, 안이 둥글고 바깥이 네모진 그릇이다. 簋(궤)는 黍稷을 담는 祭器로, 바깥이 둥글고 안이 네모진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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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8
罇은 술그릇이며, 俎는 연회 내지는 祭亨에 쓰는 음식을 담는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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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29
罍는 무늬를 그린 단지 비슷한 오지그릇이며, 洗는 낯·손 등을 씻은 물을 버리는 그릇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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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030
箕子의 遺風云云은 곧 箕子의 東來說 내지는 箕子朝鮮說에 입각한 서술이다.
箕子傳說이 韓國古代史와 관련이 된 것은『漢書』 「地理志」에 箕子가 朝鮮에 八條의 敎를 만들어 敎化하였다는 기록에서부터이다. 이후 이 기록이『三國志』濊傳과 韓傳에 전하면서 소위 箕子朝鮮의 문제는 韓國古代史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이 되어 왔다. 箕子朝鮮의 存在 여부는 현재까지는 否定論이 지배적이다. 崔南善은 ‘지 조선’( 「朝鮮史의 箕子는 支那의 箕子가 아니다」), 鄭寅普는 ‘검조선’(『朝鮮史硏究』pp.77~80), 安在鴻은 ‘크치조선’ ( 「箕子朝鮮考」)이라 하여 中國 箕子의 東來說을 부정하였으며, 李丙燾는 ‘韓氏朝鮮’이라 하여 箕子朝鮮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箕子朝鮮의 正體와 소위 箕子八條敎에 대한 新考察」pp.44~64). 이후 考古學的인 성과를 도입하여 金貞培는 靑銅器文化를 가진 ‘濊貊朝鮮’이라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소위 箕子朝鮮과 考古學上의 問題」pp.180~198).
箕子朝鮮의 肯定論은 千寬宇가 문헌사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전개하고 있는데, 그는 山西省 太谷縣 일대에 있던 箕子族이 河北省의 灤河에 이동하여 정착한 것이 箕子朝鮮이라 하였다. 그 후 箕子族은 이동을 계속하여 遼西·遼東을 거쳐 平壤 지역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韓國의 靑銅器時代의 개시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箕子朝鮮은 檀君朝鮮을 대체한 세력이라고 그 存在를 인정하였다( 「箕子攷」).
이처럼 箕子朝鮮의 문제는 現 學界의 성과로는 그 存在 여부와 사회 성격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箕子朝鮮의 실체는 앞으로 좀 더 깊은 연구가 요구되는 문제인 것이다.
<참조>
『梁書』 「東夷列傳」序 註 3)
朝鮮爲大 得箕子文化 其器物猶有禮樂云
箕子와 朝鮮과의 關係는 前漢初의 『尙書大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箕子의 敎化를 입어 그 文物이 禮樂에 합당하였다고 하는 것은 華夷觀에 의한 기술이다. 『史記』 「朝鮮列傳」에는 箕子와 朝鮮과의 관계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단지 「宋微子世家」에 周 武王이 殷을 멸하고 그를 朝鮮에 封하였다는 ‘武王乃封箕子於朝鮮’의 記事가 傳할 뿐이다. 그러나 『漢書』 「地理志」에 이르러서는 箕子가 八條法禁을 만들어 朝鮮을 敎化하였다고 보다 상세히 記述하고 있다. 이것이 『魏略』을 底本으로 하는 『三國志』歲傳에 와서는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以敎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候[準]僭號稱王’이라 하여 箕子의 系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어 보다 구체성을 띄고 있다. 이와 같이 先秦時代에는 箕子와 朝鮮과의 관계가 언급되지 않다가 秦·漢時代 以後의 기록에서 이것이 점점 구체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사실이라기 보다는 秦漢帝國의 성립이라고 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中國的 華夷觀에 의한 윤색으로 생각된다.
≪參考文獻≫
『史記』卷38 「宋微子世家」8.
『三國志』卷30 「東夷傳」歲條.
徐榮洙, 「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2, 1988.
≪參考文獻≫
『漢書』卷28 「地理志」8下 玄莬·樂浪郡條.
『三國志』卷30 「東夷傳」濊·韓條.
鄭寅普, 『朝鮮史硏究』(上), 1946, 서울신문사.
安在鴻, 「箕子朝鮮考」『朝鮮上古史鑑』1947, 民友社.
崔南善, 「朝鮮史의 箕子는 支那의 箕子가 아니다」『六堂崔南善全集』2, 1973, 玄岩社.
金貞培, 「소위 箕子朝鮮과 考古學上의 問題」『韓國民族文化의 起源』1973, 高麗大學校 出版部.
千寬宇, 「箕子攷」『東方學志』15, 1974.
李丙燾, 「箕子朝鮮의 正體와 所謂 箕子八條敎에 대한 新考察」『韓國古代史硏究』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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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기사명, 자료명. URL (검색날짜)
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http://db.history.go.kr/id/sa_001_0030_0020 (accessed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http://db.history.go.kr/id/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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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주)2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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